1883,5,16. 최초로 세워진 초가 교회 모습
소래교회
원래 소래교회는 1883년 5월 16일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솔래(松川理)에 세워진 초가집 예배당으로서 순수한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세워진 최초의 교회요, 한국의 뿌리가 되는 교회이다. 이후 1895년에 8칸 기와집 예배당으로 건축 되었으며, 1896년에는 다시 8칸을 증축하여 총6칸 32평이 되었다. 이 교회가 세워진 송천리의 명칭은 순 토박이말로 '솔샘'이었다. ‘솔샘’은 ‘솔내’로 변했고, 다시 그것이 '소래'가 되었는데, 마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황해로 들어간다.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의 작은 마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1883년 5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기록되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이 땅에 들어오기 2년 전의 일이었다. 소래교회는 한국 개신교의 초기 역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가 1887년 초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을 때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소래교회 신자들이었다.
소래교회 최초의 담임목사는 카나다 자비량 선교사 윌리엄 존 맥켄지 선교사였다. 맥켄지 선교사는 1894년 10월 10일 당시 한국인들에 의해 최초로 세워진 소래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를 맡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조선 사람들과 똑같이 조선의 의복과 음식과 온돌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너무 열성적으로 전도함으로 열병으로 인해 몸이 점차 더 불편해지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듣고 서울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고기와 치즈와 서양음식을 보내주었지만 그는 거기에 손을 대면 다시는 조선인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 그것을 마을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다가 몸 상태가 점점 심해져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혼미해졌다. 그는 주일 아침 곁에 앉아 있는 서경조에게 요 12:24 “한 알의 밀알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를 낭독케 한 후, 자신의 의복과 돈 172달러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유언하고 조선 선교 불과 1년 6개월만인, 1895년 6월 23일 34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기서부터 캐나다의 조선 선교가 시작되었다.
장로교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 주축이 된 것은 서상륜을 비롯한 소래교회 출신들이었다. 언더우드 등 서양선교사들이 잇달아 이곳을 방문했고 한국에 새로 오는 선교사들은 으레 소래교회에서 한국의 전통과 선교 방법을 익혔다. 일제시대 소래교회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강한 서북지방에서 규모는 작지만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교회였다. 해방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교회 신자들이 대거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문을 닫은 것을 지난 1988년 총신대 구내에 복원했다. 북한 땅에 있던 약 3200개의 교회 중에서 유독 소래교회만 남한에 복원된 것은 이것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첫 번째 개신교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총신대 양지캠퍼스의 소래교회는 1895년 처음 세워지고 이듬해 증축된 두 번째 예배당의 모습이다.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초대교회 믿음의 선배들의 자주적 신앙 전통의 계승과 한국 기독교의 문화유산으로서 역사의 산교육 현장이 되며, 북한 교회의 수복과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 처소가 되게 하기 위하여 1988년 9월 30일 다시 증축되어 보존하고 있다.
1844년 소래교회, 맥켄지 선교사 집
소래교회, 맥켄지 선교사
맥켄지 선교사 (카나다 최초의 자비량 선교사)
윌리암 존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
윌리엄 존 맥켄지는 1861년 7월 15일 케이프 브레튼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계로 캐나다에 이주한 매우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는 핼리팩스 달하우지 대학을 1888년에 졸업한 후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완전히 의탁하기로 결심하며, 파인힐 신학교(현 AST)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1. 맥켄지 선교사는 캐나다 국적의 최초의 선교사로 자원하여 섬겼다
그는 한국에 오기전 먼저 북극 래브라도 섬에 단기선교사로 자원하여 혹독한 추위와 가난 질병 등의 위협 가운데 얼어붙은 에스키모인 들에게 열정적으로 18개월간 복음을 전했는데 이것이 맥켄지가 조선선교를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그는 1891년(30세)신학교를 졸업한 후 트루로 스튜워크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담임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어떤 문서를 통해 미지의 땅 조선을 알게 되었고 강력한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캐나다 장로교단의 파송을 받기 원하였지만 당시 캐나다장로교단은 다른 동남아지역 선교에 전념 중이어서 조선까지 선교할 여력이 없었다. 교단은 맥켄지에게 미국장로교단의 선교사로 신청해보라고 권했지만, 그는 단호히 “나는 캐나다인이요. 어디를 가든 캐나다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결심했다. 캐나다의 여러 성도들의 물질적 동참으로 1년 생활비를 모으게 되어 1893년 10월 트루로 버라카교회에서 파송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미지의 땅 조선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후원자들이 생기게 되었고 그들의 후원을 받고 조선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2. 맥켄지 선교사는 철저히 조선인으로 살았다
캐나다 횡단 기차를 타고 밴쿠버로 가, 거기서 일본행 배를 타고 요코하마에 도착 후 다시 부산행 배에 몸을 싣고 2달 만에 1893년 12월 12일 부산항에 도착하게 되었고, 서울로 가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만나게 되었다. 특별히 평양에서 장로교선교사 마펫을 만나는데, 한국인과 똑같이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에 맥켄지는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러다가 1894년 10월 10일 당시 한국인들에 의해 최초로 세워진 소래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를 맡게 되니다. 거기서 그는 조선 사람들과 똑같이 조선의 의복과 음식과 온돌에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열성적으로 전도함으로 열병으로 인해 몸이 점차 더 불편해지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듣고 서울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고기와 치즈와 서양음식을 보내주었지만 그는 거기에 손을 대면 다시는 조선인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 그것을 마을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다가 몸 상태가 점점 심해져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혼미해졌다. 그는 주일 아침 곁에 앉아 있는 서경조에게 요 12:24 “한 알의 밀알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를 낭독케 한 후, 자신의 의복과 돈 172달러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유언하고 조선 선교 불과 1년 6개월만인, 1895년 6월 23일 34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기서부터 캐나다의 조선 선교가 시작되었다. 맥켄지가 죽자 서경조는 “맥켄지같은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편지를 언더우드 선교사를 통해 캐나다 장로교단에 전달했고, 이 편지를 받아본 캐나다 장로교 총회는 심각한 논의 끝에 1897년 그리어슨(핼리팩스), 푸트(켄트빌), 맥레(케이프 브레튼)를 공식적으로 조선에 파송하게 됩니다(역사엔 이들이 최초선교사로 등재). 그 후 184명의 캐나다 선교사들이 계속적으로 파송되어 주로 조선 동북부 지역인, 원산, 성진, 함흥 간도 등지에 수십 개의 교회와 학교, 수천 명에게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중 토론토 의대 출신 하디 선교사와 맥켄지의 약혼녀였던 맥컬리는 원산 부흥운동에 이어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한국교회 부흥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에서 사역 중인 메켄지가 1895년 5월 1일 John W. Mont에게 보낸 편지출 처: 캐나다연합교회(UCC) 동부 지역 홈페이지 “William J. MacKenzie” 아카이브 (http://ucceast.ca/wp-content/uploads/2012/11/Letter.jpg)
1895년 10월 3일 캐나다장로교총회 회의록에 언급된 윌리엄 매켄지의 소천 소식. 출 처: 캐나다연합교회(UCC) 동부 지역 홈페이지 “William J. MacKenzie” 아카이브 (http://ucceast.ca/wp-content/uploads/2012/11/Obituary.jpg)
맥켄지 선교사 묘지
최초의 소래교회 (김학수 화백 그림, 100주년 기념관)
1895 두번째 세워진 8칸 기와지붕 교회
1895년 와가교회
와가 소래교회
소래교회 아동부
1895 두번째 세워진 기와지붕 교회
1895년 와가교회,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사진
두번째 예배당 모습
<1895년 두번째 소래교회 복원- 양지 총신대 소래교회>
총신대 복원 소래교회 입구
소래교회 설립약사
1895년 두번째 8칸 기와집 예배당으로 건축한 소래교회 복원교회
예배당 내부 강대상 편
강대상
예배당 출입문 쪽
소래교회 정원
최봉석(최권능)목사 순교기념비
방치되었다 다시 세운 순교기념비
서상륜과 이수정 기념비
한국 기독교 선구자 서상륜 기념비
소래교회를 만든 주역은 평안도 의주 출신의 서상륜·서경조 형제였다. 의주 사람으로 인삼 장사를 위해 만주를 오가던 서상륜(1848∼1926)은 장사에 실패하고 형 상윤이 장티푸스에 걸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을 때,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 목사와 매킨타이어가 구조의 손길을 폈고, 정성을 다한 간호를 받아 병석에서 일어나자 아우 경조와 함께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1879년 형제가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로스 목사의 성경 조선어 번역을 도와서 일을 했고 출판이 끝나기까지 로스 목사와 함께 지냈다. 1882년 10월 한글 성경 등 개신교 책자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오던 그는 불심검문에 걸려 투옥됐고, 간신히 탈옥한 뒤 가족과 함께 친척이 살던 장연으로 이주하여 1883년 개신교회를 그의 고향 황해도 장연군 솔내에 설립했다. 그리고 서경조는 한국에서 최초로 안수를 받은 장로교 7인 목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소래교회는 서씨 형제의 열성적인 전도로 활기를 더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전체 58세대 중 50세대가 교회에 나올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형이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긴 후 소래교회를 이끈 이는 동생 서경조(1852∼1938)였다. 그는 1901년 문을 연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편입해서 1907년 한국인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명이 됐다.
예수셩교젼셔, 1887년,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J.Ross), 매켄타이어(J.Macintyre) 공역
예수셩교젼셔,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J.Ross), 매켄타이어(J.Macintyre) 공역
1887년 만주 봉천(奉天)에서 출판된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이다. 번역 주관자가 로스(J.Ross)였기 때문에 일명 '로스역성경'(Ross Version)이라 한다. 이 번역작업에 참여한 한국인 개종자들은 초기 기독교 신앙공동체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 성서는 중국어 음역표기에서 벗어나 서구식에 가깝게 정리되어 용어사적인 공로가 크다. 절 표시가 되어 있으나, 대두법 표기는 없어졌으며, 신의 명칭은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짙은 평안도 사투리가 많은 특징이 있다. 이 신약전서는 국내에서 신약전서가 발간되는 1900년까지 한국교회에서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예수성교전서, 1887년 만주에서 출판된 최초의 한글판 신약전서(복제본)
한국 기독교 선구자 이수정 기념비
기념비 사진
기념비에 새겨진 사진 (출처-
http://cafe.daum.net/kchistory)
1883년 이수정이 일본 기독교도 친목대회에 참석한 후 찍은 기념 사진이다. 아래줄 가운데 한복을 입은 이가 이수정 선생이다.
마가전복음서언해, 1885년 이수정 역
일본에 가서 농학을 공부하려 했던 이수정은 1883년 토쿄 노월정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미국성서협회(ABS)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루미스(Henry Loomis) 일본지회 총무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토를 단 한문성서 5종 즉 현토한한신약성서와 한글번역성서인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번역하였다.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는 국한문 혼용 성서로 한문 옆에 한글을 병기하고 있으며 고유명사를 가능한한 그리스어 원문성경의 발음대로 표기하려한 노력이 역력하다. 이 성서는 1885년 2월에 요코하마에서 6,000부가 인쇄되어 출판되었고,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처음 한국에 가져오게 되었다
종탑
소래교회 종탑
총신대 주기철 목사 기념성전
총신대 주기철 목사 기념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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