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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조지 존스(George Heber Jones, 조원시)

성지순례/선교사

by baesungsoo 2026. 2. 14.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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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조원시 목사 (존스, 1867. -1919.5)

 

아펜젤러 목사를 이은 내리교회 초창기의 뛰어난 지도자가 바로 제2대 조원시 (존스) 목사이다. 그는 뉴욕 주에서 1867년에 태어나 아메리칸 대학교를 졸업하고 YMCA 간사로 활동하다가, 1888 5월에 약관 20세의 나이로 선교사로 내한하여 약 5년간 배재학당 수학 교사로서 사역을 시작하였고, 아펜젤러 선교사를 지근에서 도왔다. 그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준 탁사 최병헌에게 복음을 전하여 훗날 정동제일교회 담임 목사로 육성하였다. 1892년에는 로스 와일러와 함께 최초 한국어 찬송가인 <찬미가>를 편찬하여 감리회에서 사용토록 하였다. 최병헌 목사는 1902년 아펜젤러가 갑자기 순교함에 따라 당시 전도사였는데, 이듬해 목사 안수 받고 제2대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감리회의 태두가 되어 한국 감리회의 형성과 성장을 이끌었다. 존스 선교사는 1892년부터 인천지역 복음화 사역을 맡으면서 1893년 인천으로 거주지를 옮겨 생활하였다. 1892년부터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아펜젤러가 선교의 터를 닦았다면 제2대 담임목사인 조원시 목사는 그 터 위에 전도와 교육 전반에 걸쳐 괄목할만한 업적을 쌓은 내리의 아버지라 할만한 분이다. 그는 1892년에 한국 최초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개설했고 강화, 연안, 해주, 남양 지방에 전도를 시작했다. 그의 전도활동으로 1893년 강화도와 교동교회가 설립되었고, 인천에 만수 교회(1895), 부평 굴재교회(1898), 부천 하리교회(1899), 부평읍 교회(1900), 문학 교회(1901), 화도 교회(1907) 등 44개 교회가 설립되었다. 1894년에는 한국인 자력으로 교회당을 건축 봉헌했으며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조직하여 이동신학교를 개설했고 1901년 성탄절에는 내동 현 위치에 십자가형 벽돌 예배당을지었다. 1897년에는 미국 감리회 본부에서 엡윗청년회를 한국에 보급하는 결정이 내려지자 존스 선교사는 본 회의 총무로 활동하였다. 먼저 제물포 교회에 엡윗청년회를 조직하여 출발시키고 상동교회, 정동제일교회 등에도 설립하였다. 그 후 그는 감리 연합회 총무로 감리회 청년운동을 이끌었다. 엡윗청년회는 1889년 미국 감리회에서 창설되었고, 교육, 봉사 및 사회 개혁 활동을 전개하는 청년 조직이다. 엡윗(Epworth)의 의미는 웨슬리의 고향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감리회에서 존스, 노블, 페인 및 노병선 등 한국인 사역자가 함께 조직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을사조약 반대 운동을 벌이다가 1906년 일본에 의해 해체되었다. 존스 선교사는 글솜씨가 뛰어나서 문서 선교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892년부터 1898년까지 6년간 올린저가 창간한 <The Korea Repository>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00년에는 한국어 최초 월간지인 <신학월보>를 창간하여 9년간 운영하였다. 신학월보에는 목사 후보생과 평신도들을 신학적으로 훈련하는 내용이 실렸는데 존스와 최병헌 목사가 주관하였다. 1901년 헐버트가 창간한 <The Korea Review>의 주필을 겸직하였다.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The Rise of church in Korea(한국교회 형성사)>는 한국 초기 선교역사 및 선교사의 활동을 기록되어 한국 개신교 역사의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작성되었고 1919년 그의 사망으로 인해 유니언 신학교에서 소장되어 있었는데, 어느 한국인 교수가 이 책을 발굴하여 2013년에 출판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교육 사업도 활발히 전개하여 1892년 인천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배재학당에서 일하던 강재형 부부를 인천으로 영입하여 함께 설립하였다. 1892년 내한했던 W. A. 노블(William Arthur Noble, 1866-1945) 선교사는, “존스 선교사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깊은 동정심을 가졌던 학자적인 본능과 습성을 가진 이였다(If one sentence were to describe Dr Jones as a missionary it would be this, he had the instincts and habits of a scholar with a profound understanding and deep sympathy for men)”고 평가했다. 그는 언더우드, 게일, 트롤럽, 헐버트 등과 더불어 한국학 연구에 기여했던 선교사였다고 할 수 있다. 1892년 인천으로 부임한 여선교사 마거릿 벵겔 선교사가 여성교육을 담당하면서 영화 여학교도 시작되었다. 최초 여성 박사 김활란, 이화여대 학장 김에마, 유아교육 개척자 서은숙 등 유명 인사가 이 학교를 통해 배출되었다. 마거릿 벵겔 선교사(1871~1962)는 1890년 내한하여 음악 전공 선교사로 파견되어 이화학당에서 성악과 오르간을 가르치다가 인천으로 파송되어 존스와 함께 사역하였다. 1892년에는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FMS) 마가렛 벵겔(Margaret Bengel, 1869-1962)과 혼인했다.  존스 선교사는 1900년부터 지방에는 한국인 사역자가 부족한 현실을 보고 성경 공부 중심의 신학회를 운영하였다. 그는 1903년부터 3년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서 중단되었다가, 1906년 돌아와서 중단된 문서 사역과 교육 사업을 재개하였다. 기존 신학회가 성경학원으로 확대하고 1907년에는 협성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협성신학교는 남감리회와 북감리회가 연합하여 설립되었으며 존스가 초대 학장이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8년 감리회 통합 조직인 한국 감리교 연회가 조직되었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취업 이민이 시작되면서 존스는 이민 사업을 장려하였다. 그가 담임하던 내리교회 성도들에게 권장하여 50여 명이 이민하였고, 그들이 미국 이민 1세대가 된 것이다. 그는 이민자를 위하여 신학교를 졸업한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 파견하여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였다. 당시 설립된 하와이 그레이스 연합교회에 이승만 대통령이 출석하기도 했다.  그는 21세에 한국에 와서 21년간 헌신하다 1909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부모 봉양과 자녀 교육을 위한 결단이었다. 그는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뉴욕주 선교회 총무로 일하면서 한국 선교를 직간접으로 도왔고,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면서 책을 집필하였다. 이때 집필한 책이 <한국교회 형성사>이다. 그는 1919년 미국에서 5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뉴저지에 안장되었다. 인천 내리교회에는 그의 선교 활동을 기념하여 흉상이 제작되어 있다.

(출처- 20. 조지 존스, 인천 복음의 선구자 : 네이버 블로그)

조원시 선교사 가족사진 (부인 벵겔 선교사, 딸)

(출처- 20. 조지 존스, 인천 복음의 선구자 : 네이버 블로그)

 

 

조원시 목사의 노년기 모습

 

김찬희 박사가 입수, 지난 718일 인천내리교회에서 열린 '내리교회 창립 12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공개 했다.

 

조원시 목사 (출처-내리교회)

 

그는 왕성한 선교 활동과 문서 활동을 벌이다가 52세 짧은 나이로 1919년 5월 플로리다에서 소천한다. 존스 선교사는 이른 나이에 한국의 남부 선교 여행을 다니며 1891년 코리아 미션 필드 11월호에 자세히 그 매일의 여정을 소개한다. 그는 매일 남부 순행기록을 남기며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 방문한 곳, 지역의 특별한 모습 등을 청년 선교사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그는 원래 남부 선교 여행을 올링거 선교사와 하려 했지만 안 되었고, 또 후에 아펜젤러 선교사와 압록강 지역까지 함께 여행하려 했지만 행정적인 문제로 할 수 없었다. 조선 후기 통리기무아문에서 외국인에게 발급하던 일종의 여행 허가증인 호조 발급 문제로 지연되어서 갈 수 없었다. 압록강 지역을 포기하고 그는 1889년 8월 서울-양평-지평-원주-충주-문경-상주-안동-대구-청도-부산까지 이어지는 여행을 한다. 이는 첫 번째 아펜젤러와 함께 하는 선교 여정이었다. 존스가 기록에 남긴 약품들과 책 목록은 우리에게 재미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그는 칵커의 그리스도론과 그리스 철학, 프리센의 초기 기독교 시대의 순교자와 옹호자 등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보도한다. 1889년 8월 16일 흰색 몽골 말과 회색 야생마를 타고 두 사람이 동대문을 떠나면서 이처럼 표현한다. “산뜻한 아침 공기는 나에게는 모든 것이 장밋빛이었고, 무한한 자유로움에 충만했으며, 내가 인식한 것은 나의 일상의 경험이었고, 내가 나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이 나라가 나에게 맡겨진 것처럼 느꼈다. 그날 아침 우리는 아름다운 푸른 산들과 어디에나 잘 자라고 있는 논밭을 지나 40리(12마일)를 지났다. 한곳을 지나며 우리는 연못에서 기르는 셀러리(celery)로 먹을 수 있는 연(蓮)을 기르는 것을 보았다. 조선 사람들은 절인 음식을 좋아한다. 나 역시 좋아하는데 많은 한국 음식 중에 내가 즐기는 음식이 바로 절인 음식이다.”(한국 미션필드) 존스는 동구릉을 들렀고 더운 8월에 강물에서 목욕을 즐기며 원주방향으로 길을 간다. 사람들은 서양 선교사들이 먹고 자는 모습을 보고자 몰려들었다. 존스와 아펜젤러가 아쉬워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전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외국인들이 유아를 납치해 약을 만든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포교 금지령이 내려있었다. 한국인들은 남자는 노는 모습이며 여성은 노예처럼 일하였다. 남녀 사람들의 모습은 지저분함이 일상이고 유일하게도 죽음과 산신령만이 그들의 유일한 종교였다. 문경새재를 넘는 이야기와 비로 인해 40리를 나아가는 모습, 치악산과 원주, 청주와 충주의 모습을 그리며 300년 전에 일본에 침략 받은 큰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1889년 8월 20일 화요일, 원주 목사와 강원 관찰사를 만나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한국 문화와 풍습을 엿볼 수 있다. 한국 사람은 15-18세이면 남자가 결혼하는데 22세의 조원시는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목사가 놀란다. 선교사를 보고 선생인 척 하는 아이를 보고 놀라는 모습이며 환영하는 맛있는 환영주는 고급 전통주이었을 것 같다. 접견실과 감영접견실, 커다란 석조 법정 등을 소개한다. 그리고 조원시 선교사는 관찰사의 모습을 소개한다. “사실 관찰사는 아펜젤러와 나에게 그렇게 호감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키도 작았고 목소리도 작았으며 얼룩진 얼굴과 침침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반적인 한국 양반들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모자에 있는 작은 금속 수탉이 그의 관직을 나타냈다. 그는 우리에게 국적과 나이, 그리고 첫 번째 대통령에 대해 물었다.”(미션 필드). 존스 선교사는 이처럼 한국 여행기를 통해 이후에 선교하러 들어오는 선교사에게 길잡이가 되었고, 한국 선교의 빛을 전하는 이들에게 선교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은 존스 선교사와 같은 선구자에 의해 서서히 복음의 문은 열리고 있었다.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조지 존스와 그가 쓴 <한국교회 형성사> 

한국 성서번역위원회. 앞줄 왼쪽부터 레이놀즈, 언더우드, 게일, 존스. ⓒ서울역사아카이브

1893년 제물포에서 가르친 신학반 신학생들, 가운데 조원시, 그의 책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조원시 목사 필사본 찬미가(1892년)-사진출처: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 기독교의 첫 찬송가(讚頌歌)는 감리교에서 1892년 발행 된 “찬미가”로 조원시(趙元時.George H. Jones.1867-1919)와 로드와일러(Louise C. Rothweiler.1853-1921) 선교사가 편집한 필사본(筆寫本) 찬송가이다. 이 “찬미가”는 “미감리회년환회” 발행으로 순 한글로 악보 없이 당지(唐紙) 39매(枚)에 30곡으로 수록된 찬송가이며, 초기 선교 착수 때부터 교회와 학교, 병원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에서 불러진 찬송이었다. 두 번째 찬송가는 장로교의 언더우드(H.G. Underwood)의 “찬양가”로 1893년에 발행 되었다. 한국에 온 초기선교사들은 열정적으로 찬송 부르기를 즐거워하였다. 또한 이들은 새롭고 낮 설은 한국문화에 접할 때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을 북돋는 길은 찬송하는 것이었다. 찬송과 기도와 성경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써, 복음 선교는 기도와 함께 찬송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당당뉴스(https://www.dangdangnews.com)

찬미가, 1897년 존스(G.H.Jones) 외 공역, 미 감리교회 최초의 찬송가

조원시 선교사와 로드와일러 선교사  (출처 : 당당뉴스(https://www.dangdangnews.com)

1900년에 창간한 신학월보, 노란색 밑줄 부분을 보면 편집인이 조지 존스(George Heber Jones)로 나온다.

 

존스는 평신도를 위한 사경회와 성경 중심의 신학 발전을 힘쓰며 신학월보를 다시 발간하고 신학 교육에 힘썼으며 1907년 연합 감리교회의 신학교 협성신학당의 초대 학장이 된다. 존스는 문서 선교 활동을 많이 하며 최초의 <찬미가> 찬송가를 편찬하고 올린저 선교사가 창간했다가 휴간된 <더 코리안 레포지토리>를 다시 창간 주필이 되어 1892-1898년까지 편집하며 기고한다. 이외에 저서로서 <미이미 교회문답>1889, <감리교회 한국 선교> 1910, <한국의 교육: 기독교회를 위한 우수한 기회> 1910년 등 여러 권의 책을 썼고, 독특하고 창의적인 저서인, <한국의 교회 부흥>이라는 책을 남겼다. 특히 존스는 하와이 사탕수수 재배자 협회와 연관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 사업에 후원하였다. 인천 내리교회 교인들이 하와이 이민을 많이 갔고 홍승하 전도사가 존스의 당부에 따라 이민 온 기독교인에게 신앙 지도하였다. 21세에 한국에 젊은 나이에 선교에 자원하여 헌신한 존스는, 20년간 선교를 하다가 1909년 부모를 섬기고 자녀를 뒷바라지한다. 그는 선교회 총무로 활동하다가 1919년 5월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젊은 나이 52세에 소천한다. 다시 그 이름을 기억하고 선교사의 행적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며 다시 그 땅끝에 선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아펜젤러와 조원시 목사(우)

제2대 조원시 목사  

제2대 조원시 목사  

제2대 조원시 목사  

 1913년에 건축된 영화여학교  

여성전용 예배당 (출처- http://cafe.daum.net/coreasan1)

 

1895년 웨슬리교회(현 내리교회)에서 세웠던 여성전용 예배당이다. 남녀가 유별하였던 시대적 상황속에서 칸막이를 치고 예배를 드렸던 것과는 달리 여성들만 사용하는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여인들은 빨래를 빨아서 받은 돈을 헌금하였고 남자들은 예배당건축에 직접 나섰다고 한다. 

존스 목사의 부인인 벵겔선교사로 인천 영화여학교 설립자이다.  

존스 목사의 부인인 벵겔선교사 82세때 모습  

존스 선교사 (조원시 선교사) 가족, 1895년 출생한 장녀 캐서린과 부부 

강세실리아() 벵겔 부인(중앙) 이백헬렌 전도부인()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

 

<내리감리교회>

내리교회 연혁 (1885.7- 1964.2. )

 

1885.7.29   아펜젤라 선교사에 의해 내리교회 시작 - "한국의 어머니교회 출범"

1890      한국 최초의 교회당 건축 "노병일씨 6간 회당 건축"

1891.8.  제물포웨슬리 기념교회 건축

1892.3.12   영화학교 설립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설립"

1892  제2대 조원시 목사 부임 (존스, 1892-1903)

1893   한국 최초의 여선교회 조직 "보호여회: 존슨부인과 백헬렌 전도부인"

1894   한국 최초의 자비교회당 건축 "여자 예배당 6간을 26원으로 건축"

1895   한국 최초의 자비 개척교회 설립 "담방리 교회(현 만수교회) 10원으로 개척"

1897   내리 엡웟청년회 조직 "한국 최초의 기독청년회 조직"

1899.12.12   한국 최초의 신학회 조직 개강 "감리교신학대학 전신"

1901.5.4   본 교회 초대교인 김기범목사 안수 받음 "한국 최초의 목사안수"

1901.11.1   한국 최초의 지방회 조직 "한국 서지방"

1901.12.25   내리교회 예배당 신축봉헌 "십자가형 교회"

1902.3   본 교회에서 한국 최초의 남북 감리교회 합동신학회 개최

1902.11   한국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 제1호선에 내리교인 50명이 이민감

1902.12.22   한국 최초의 해외선교사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로 파송

1903  제3대 김기범 목사 (1903-1905)

1903.11.3   한국 최초의 해외 개척교회 설립 "현 호놀루루 미연합감리교회"

1904   연회에서 한국 감리교회중 최우수 교회로 표창받음

1906. 6.13   엡웟청년회 해산당함

1907   제4대 김기범 목사 (1907 -1910)

1907.10   한국최초 예배당 남녀 칸막이 철폐

1908.4   엡웟청년회 독자부활조직

1919   여자청년회 조직

1923   소년회 조직

1925   내리 조선 소년 척후대 조직

1954.12   한국 최초의 메시아 전곡 발표

1958.12.22   교회당 완공봉헌"건평 323 2"

1961.4   내리유치원 설립

1964.2.26 교회당 완전전소 

내리교회

교회 내부  

머릿돌  

머릿돌  

100주년 기념교회

창립 122주년 맞는 인천내리교회 (사진, 글 출처- 내리교회 홈페이지, http://www.naeri.org/)

 

120년전 구한말 쇄국과 개국이 대립하며 국가의 진로가 불투명한 시절. 45일 제물포항에는 일단의 미국 선교사들이 발을 디뎠다.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일행이 바로 그들이다. 공식적인 개신교의 첫 선교사로 이 땅을 찾은 이들로 인해 향후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발전상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태동은 시작됐다. 또한 이날은 인천 내리교회(담임목사·김흥규)가 창립된 날이다. 올해로 꼭 120주년을 맞는 내리교회는 한국 교회의 모교회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의 첫 설교로 시작된 인천의 기독교는 바로 그대로 한국 교회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5 45, 인천에서는 내리교회의 창립과 최초의 선교사 도래를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열린다. 인천을 필두로 전국의 개신교회가 모두 참여, 기독교의 참 뜻을 기리고 한국교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대성회가 펼쳐진다. 인천기독교총연합회 주관으로 한국기독교 총연합회와 기독교 교회협의회 등 교파를 초월해 모든 기독교인들이 참여, 오전 10시 서울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에 안장된 아펜젤러 묘소를 찾아 120주년 기념비 제막식을 갖는다. 이어 오후에는 한국 선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감사 예배 및 1200만 성도 대각성 부흥성회를 개최한다. 인천 월미도 선교100주년 기념탑에서의 경배와 찬양을 마친 뒤 신도들은 내리교회까지 도보로 행진, 내리교회 본당에서 대규모 부흥성회 발대식을 가질 예정이다. ‘한국교회 1200만 성도 대각성 부흥성회 발대식을 기점으로 전국을 순회한 뒤 서울에서 부흥성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한국 교회의 모교회로서 창립 120주년을 맞은 인천 내리교회. 120년전 인천을 찾은 아펜젤러 부부와 당시 한국 기독교의 주춧돌을 놓았던 내리교회 및 신도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조태현기자/ 종이신문정보/20050405일자 1 12면 게재)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내리교회 (1885년) 

1901년 교회 종 기념석

내리 역사 전시관 (제1대 아펜젤러 목사, 제2대 조원시 목사, 제3대 김기범 목사 

1901년 신축 봉헌된  십자가형의 교회당

아펜젤러(좌), 김기범(중앙) 조원시 (우)

 

왼쪽 분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감리교를 전파한 초대 목사 아펜젤러(Henry Gehard Appenzeller, 1858~1902)이고, 오른쪽 분은 1892년에 한국 최초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개설한 제2대 목사인 조원시(George Heber Jones, 존스, 1892~1903)이다. 가운데 분은 한국 감리교회는 물론 한국 개신교 전체를 통틀어서 최초로 목사로 내리교회의 첫 한국인 담임목사가 된 제3대 김기범(1869~1920) 목사이다.
(출처 : 인천투데이(https://www.incheontoday.com)

초대 아펜젤러 목사

제2대 조원시 목사 

제3대 김기범 목사

 

<강화중앙교회 설립 공헌>

강화의 예루살렘교회 강화중앙교회 (출처- http://cafe.daum.net/coreasan1)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항에 첫 발을 내 디딘 후 만 7년째 되는 1892년 가을, 제물포구역 책임자로 있던 존스(G. H. Jones, 趙元時) 선교사가 강화선교를 위해 강화읍 갑곶나루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강화남문을 통하여 강화성(江華城)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려던 계획이 강화유수의 완강한 거절로 입성하지 못하고 갑곶나루에서 며칠간 선교활동을 하다가 인천으로 되돌아갔다. 다음해 1893년에 인천에서 술장사를 하면서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다니던 강화 서사면 시루미 (현 양사면 교산리 송산마을)출신 이승환이 고향에 돌아와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강화복음 전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에 힘입어 존스는 제물포 교인 이명숙(李明淑)을 강화 전도인으로 파송하여 이승환 댁을 거점으로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강화의 첫 감리교 신앙공동체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교항마을의 초시 김상임(金商壬)과 그의 가족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교항교회가 설립되었고, 3년 후인 1896년에 이웃 면 송해면 상도리 홍의마을의 한학자 박능일(朴能一)이 자기 집에서 서당학생 20여명과 종순일, 권신일과 함께 홍의교회를 설립하여 강화의 두 번째 교회가 탄생되었다. 1900 9 1,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 박성일․허 진일․ 김봉일 등에 의해 강화읍 천교하(川橋下, 강화읍 신문리)의 여섯 칸 반짜리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서 강화중앙교회가 설립되었다. 다음해 4월 존스 선교사의 협조로 기와집 25,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교회를 현 위치로 옮겼다. 이때 소요된 상당한 금액은 존스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매리에타(Marietta)에 살고 있던 교인, 찰스 오토(Charless Otto)가 보내 준 기금으로 충당되었다. 이로서 8년 전 존스가 강화성에 입성하려던 꿈을 강화토착인들에 의해 이루게 되었다. 이 교회는 설립 8개월 만에 강화에서 가장 넓고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강화 선교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후 한옥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들이 늘어나자 1914년에 다시 교인들의 정성어린 헌금과 미국 선교회의 도움으로 서양식 모양의 새 교회를 건축하였다. 이 교회당은 여러 차례 개축하며 사용하여 오다가 2000년에 헐고 1,800명이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규모의 크고 아름다운 선교100주년 기념성전을 건축봉헌하였다. 강화중앙교회는 1세기 동안 강화지역 복음화의 그루터기의 역할을 하여 왔다. 1904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 교회를 직접 개척하거나 설립되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에 힘입어서 강화지역에는 2005년 현재 119개의 감리교회와 감리교인 20,671명으로 전체 개신교회 177개의 67.2%와 개신교 교인 24,553명의 84.2%를 찾지 할 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명실공이 강화의 예루살렘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강화중앙교회는 교육선교를 위해 1901 4월에 신교육 기관인 교회부설로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하였으며, 1902년에 또 여학교인 합일여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민중교육을 시작하였다. 이후 두 학교는 하나의 학교로 통합되었는데, 오늘의 합일초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이 학교는 일제치하에 저항하는 민족운동과 한국 개화의 산실이 되어 왔다. 강화중앙교회는 복음, 민족, 교회가 함께 어우러지며 발전하는 민족과 지역을 구원한 구심점이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이동휘(李東輝)권사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의 보창학교, 유경근 속장(독립운동가)의 교회지도자와 강화중앙교회가 함께 추진한 민족교육운동은 민중계몽과 독립사상으로 이어졌다. 1907년 한국군 해산과 관련되어 발생한 의병운동 때 일제 만행으로 빚어진 김동수 권사 삼형제의 순국사건, 1919 31만세운동 때 김광국 목사, 김유의 전도부인을 비롯한 교인들이 앞장선 만세시위, 조구원, 조봉암(초대 농림부장관) 등 교회청년들이 목숨 걸고 투쟁한 독립운동 등 일제 치하에서 갖은 탄압과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력을 발휘하였다. 이는 이 교회가 선교초기부터 교인들이 실천적 신앙을 바탕으로 지역복음화를 주도하였고, 민족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중앙교회는 한국전쟁 때에도 전화의 폐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방주역할을 하였다. 바다건너 북한에서 피난민들의 안식처였으며, 전후 피폐한 농촌을 회복시키기 위해 복민의숙(福民儀宿, 후에 복음학원 강화실업고등기술학교로 발전됨)이란 기독교 농민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였고, 기독병원을 설립하여 질병으로 고통 받는 교인들을 치료하며 불신자에게는 전도의 방편으로 삼기도하였다. 지난 1세기 동안 강화역사의 중심에서 지역의 복음화, 민족운동과 사회개혁을 주도해 온 강화중앙교회는 선교2세기를 맞으면서 선조들이 쌓은 믿음의 토대를 바탕으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새롭게 탈바꿈 하고 있다. 1994년 이민구 목사님이 28대 담임자로 부임하면서 성령충만 만민선교, 만사형통하는 교회라는 표어를 걸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정신으로 21세기 선교비젼을 실현하기 위해 온힘을 쏟고 있으며, 2,000여 성도가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강화중앙교회는 20여개의 국내 미자립교회 및 단체에 선교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해외선교에도 관심을 두어 영국에 지교회 킹스턴중앙교회를 두고 있다. 필리핀, 몽골, 중국 등의 한인교회와 해외선교사를 돕고 있다. 학원선교를 위해 강화읍에 소재하고 있는 덕신고등학교를 감리교 소속학교로 지정하고 기독교신앙 담당교사를 파송하는 한편 학교운영비로 매년 4,000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이 밖에도 지역선교를 위해 결식자 점심급식사업, 경로위안잔치, 환경미화원 위로연, 연간 2,000만원 상당의 장학금 지급, 침술선교봉사활동, 웨슬리 사회봉사단 활동, 불우이웃돕기 행사 등 사회를 향한 다양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민구 담임목사는 이 교회가 지난 1세기 동안 강화 선교의 중심역할을 하며 수많은 감리교회 지도자를 배출한 교회답게 선교 2세기를 맞는 현재에 있어서도 기독교인 수가 37.7%를 점유하고 있는 강화지역을 완전한 성시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고 있다. 또한 100여 년 전 서양선교사들이 우리교회에 도움을 주었던 것과 같이 복음의 빚진 교회로서 해외선교와 북한선교 활동을 강화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글 이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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