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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Masada)

성지순례/이스라엘

by baesungsoo 2016. 5. 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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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마사다 מצדה는 그 히브리어의 어근 자체가 요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새라는 어근에 걸맞게 마사다는 사해바다 서쪽의 유대광야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난공불락의 성채입니다. 사해 바다를 기준으로 마사다를 거슬러 올라가려며 약 400m나 되는 절벽같은 길을 올라가야하고, 그나마 좀 괜찮다 싶은 서쪽의 90m는 절벽인지라 사람이 오르는 것 조차가 불가능한 곳이기 때문이지요사람들이 이곳에 언제부터 살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 이곳에 군사적인 목적으로 요새가 만들어 진것은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 요나단 마카비 (142B CE) 시대와 알렉산더 얀네우스 (103-76 BCE) 시대였습니다. 남쪽으로는 이두메 사람들, 그리고 동쪽으로는 나바테 사람들의 침략으로부터 방어를 하기 위한 목적의 요새였지요. 하지만, 이 요새가 정말 요새답게 무장을 하고, 오늘날 이스라엘 관광객들이 보는 건물들이 축조된 것은 헤롯대왕 (37-4BCE) 시대였습니다.

 

마사다 입구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마사다 발굴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요세푸스가 쓴 마사다 이야기는 다른 역사 기록에는 없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서기 73년에 마사다에 있지 않았으며,더구나 유태인을 배반하고 로마에 붙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질 날은 끝내 오고야 말았다.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E 로빈슨과 E 스미스가 우연히 이 장엄한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을 보고 망원경으로 살폈다. 그 뒤로 이스라엘 정부가 발굴에 나서기까지 125년간 많은 탐험가들이 마사다의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냈다. 아랍 사람들이 아스 사바(저주받은 땅)라고 부르던 기묘한 바위산이 점차 역사 기록 속의 마사다로 바뀌어 가자 이스라엘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1963년 마침내 유태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이 요세푸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유적을 발굴하는 일을 떠맡았다. 1917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야딘은 이스라엘 독립운동에 참여해 군 참모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부총리에까지 올랐다. 1952년 군을 떠난 야딘은 히브리대학 고고학 교수로 일하면서 1955년부터 유태 광야와 사해 근처에서 여러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딘은 1963년 10월∼1964년 5월,1964년 11월∼1965년 4월 두 차례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거의 틀림이 없음을 샅샅이 밝혀냈다. 그는 먼저 짤막한 신문 광고를 내 발굴을 도울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워낙 외진 데다 날씨가 고약한 곳이어서,스스로 나선 사람이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복 여비를 자기가 내고,두 주일간 한 천막에서 열 사람이 지내며 음식도 좋지 않다는 조건이었지만,스물여덟 나라에서 신청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원자 5,000여명은 한 번에 두 주일씩 스물세번에 걸쳐 번갈아 일했다. 가드나(이스라엘 청소년 전투부대) 학생들과 키부츠(집단 농장)에서 온 지원자까지 합쳐 날마다 평균 300명이 발굴을 도왔다. 야딘은 그 옛날 로마 제10군단장 실바의 캠프와 맞닿는 곳에 발굴본부를 차렸는데,내내 혹독한 날씨에 시달렸다. 아마도 세계 고고학 발굴 역사에 마사다에서처럼 어려운 발굴은 없었으리라. 남풍은 시속 100㎞로 불어 천막을 갈가리 찢었고,느닷없이 쏟아지는 장대같은 소나기는 눈 깜박할 사이에 골짜기를 채웠다. 말라붙었던 개울이 강으로 바뀌고,캠프와 캠프 사이로 흙탕물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보급 물자를 헬리콥터가 날라다 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야딘은 헤로데 왕이 만든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는 기록을 믿게 되었다. 옛사람들은 바위산 꼭대기에서도 빗물을 잘 저장해 물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야딘이 제일 먼저 발굴한 곳은 마사다 북쪽 끄트머리 벼랑에 지어진 3층 건물이었다. 요새라기보다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왕궁이었다. 헤로데 왕은 사해의 해면으로부터 340m나 되는 높은 곳,로마 시대의 수려하고 전통적인 공중 목욕탕을 본뜬 독탕에서 찬물과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물을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럽게 지냈다. 헤로데의 궁전을 발굴하느라고 자원봉사자들은 밧줄로 몸을 묶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일했다. 헤로데가 그처럼 위험한 곳에 궁전을 지은 까닭은,경치 좋고 방어하기 좋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햇빛 드는 시간이 짧아 서늘하고 바람막이가 잘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야딘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유골 세 구를 찾아냈다.하나는 젊은이의 것이었는데,그 옆에는 갑옷에 달았던 은비늘 수백 개와 화살들이 흩어져 있었다.또 하나는 금방 손질한 듯이 땋은 까만 머리카락이 붙은 젊은 여자의 유골,나머지 하나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3층 왕궁 옆 커다란 창고 건물을 복원하는 데는 이스라엘군 공병대가 뜯어서 올린 뒤 조립해 준 기중기를 썼다.창고 뒤로는 아파트와 비잔틴 수도사들이 지은 회당이 있고,헤로데의 별장인 서궁(西宮)과 큰 수영장이 있었다.그밖에 작은 궁 세채가 더 있었다.왕은 마사다를 빙 둘러 성벽을 쌓고,군데군데 탑 38개를 세웠다.탑 안과 성벽에 붙여 지은 방이 110개.유태인들은 이 방들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다.대·중·소 크기의 목욕탕이 나란히 발굴되자 야딘은 이것이 유태교에서 침례 의식을 할 때 사용하는 미크베가 아닐까 생각했다.밖에서 대형 욕탕으로 통하는 수로가 지붕들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욕탕으로 끌어들이는 데 쓰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유태 율법에 따르면 미크베는 하늘에서 떨어져 곧바로 흘러든 ‘순수한’ 빗물로 채워야 한다.물통 따위로 길어온 물은 안 된다.율법학자들이 마사다의 욕탕을 제2 성전시대 미크베라고 고증하자 온 이스라엘이 떠들썩했다.그 동안 제2의 성전시대(기원전 520∼516년·스룹바벨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한 때) 때 미크베는 하나도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장 뜻깊은 유물이 나왔다.성벽의 한 방에서 파편더미를 2m 넘게 치우자 옷,이불,바구니 따위와 함께 두루마리 구약성서가 나왔다.자원봉사자들이 달려와 양피지 한 조각을 내밀었을 때 야딘은 그것이 시편 81∼85편인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적외선 사진을 통해 판독해 보니 서기 40년 이전에 쓰여진 것이었다.내용은 몇몇 작은 변화 외에는 오늘날 쓰이는 성서와 똑같았다.마사다에서 나온 두루마리 구약성서는 모두 14개였다.시편,레위기,에스겔서,신명기 부분들과 유태 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적은 희년서(喜年書),그리고 외경(外經;구약 성경에 들어 있지 않은 책 14권.카톨릭에서는 이를 구약성경과 같은 무게로 다루지만 신교에서는 ‘성경은 아니지만 읽어도 무방한 책’으로 인식한다)인 ‘벤 시라의 지혜서’.‘벤 시라의 지혜서’는 탈무드에 널리 인용되며 율법학자에게 성서와 마찬가지로 권위 있게 취급된다.원본이 자취를 감추고 희랍어 번역이 ‘외경’에 수록되었는데,마사다에서 히브리어 원본이 나온 것이다 1963년 이래 Y.야딘의 지도로 헤브루대학·예루살렘 발굴협회 등이 협력하여 산마루에 있는 헤롯왕의 부성(浮城)·행정청사(行政廳舍)·욕장·저수지 등과 더불어 귀중한 파피루스 문서의 단편(斷片)도 발굴하였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유적 전시실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유적 전시실

 

유적 전시실

 

유적 전시실 

 

헤롯의 궁전

 

이런 요새에 헤롯은 두개의 궁전을 세웁니다. 하나는 마사다의 서쪽에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궁전입니다. 아름다운 모자이크 바닥과 넓은 마당, 그리고 가까운 곳에는 헤롯 왕가 전용의 정결욕조 (또는 헤롯을 위한 전용 수영장) 를 구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헤롯의 궁전의 백미는 마사다의 북쪽 절벽 끝자락에 건설한 삼층 궁전입니다뜨거운 광야의 태양과 후텁지근한 바람이 부는 유대 광야의 남단에 자리잡은 마사다에서 지낸다는 것이 왕인 헤롯에게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헤롯은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그늘을 만들어 주고, 남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마사다의 북쪽 끝자락 절벽에 궁전을 지었는데, 매우 호화롭게 삼층으로 건설했습니다삼층으로 지어진 궁전의 맨 위는 헤롯의 사무공간, 또는 생활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간 층의 원형 건물은 헤롯이 즐기기 위한 위락의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맨 아래 궁전은 아름다운 프레스코로 장식되었던 헤롯 전용 공간으로 헤롯 만을 위한 사우나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유대 지역에서는 얼마나 물을 마음 껏 사용할 수 있는가가 곧, 그 사람의 지위를 말해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현재의 마사다는 1962년 이스라엘의 암벽 등반가들에 의해서 발견이 되었어요. 마사다 북쪽의 헤롯의 중간 궁전 쪽으로 올라간 암벽등반가들이 고고학 유적지가 있는 것을 보고 정부에 신고를 하면서 1963년부터 마사다 발굴이 시작이 되었는데, 현재 (2014) 에 이르기까지 약 50년이 넘는 기간동안 마사다는 줄곳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었습니다. 현재 발굴과 복원이 된 마사다의 건물만으로도 헤롯 시대의 마사다가 얼마나 웅장하고도 위엄있는 곳이었는가를 상상할 수 있는데요, 마사다의 웅장한 규모의 건축물을 보면서, 도대체 이 건물들을 세우기 위한 돌들을 어디에서 가져왔는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사다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사해(死海)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유태광야 동쪽 끝에 우뚝 솟은 바위산. 하스몬가(家)의 지배자에 의하여 축조되고 BC 35년에 유다의 헤롯왕이 개축하였다. 사방을 깎아지른 벼랑으로 둘러치고 뻗쳐오르던 바위산은 해발 434m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船) 같은 모양을 한 바위산 꼭대기는 평균 너비 120m에 길이 620m,둘레 1,300m다. 마사다에 얽힌 사건을 역사책 ‘유태전쟁’에 자세히 기록한 요세푸스는 서기 66년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태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나중에 조국에 등을 돌리고 로마군에 넘어갔지만,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싸움을 후세에 전했다.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이었다. 그 뒤 유태왕 헤로데가 기원전 35년 여기에 성벽을 두르고 무기와 식량을 저장했다. 그는 로마에 기대어 유태를 통치했는데 유태인들은 호시탐탐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았다.게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까지 유태 왕국을 자기에게 달라고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졸라대는 것을 알게 된 헤로데는 로마가 자기를 배신할까 봐 두려워 천혜의 요새인 마사다를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헤로데가 죽은 뒤 마사다에는 로마군이 머물렀으나,유태전쟁이 일어나자 반란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서기 70년 로마군은 유태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불태웠다. 모든 유태인이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그 중 한 무리가 마사다로 도망쳐 로마군에 항거했다. 그들은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젤롯파(열심당;유태교의 한 갈래) 신도들이었다. 마사다에는 헤로데가 가져다 놓은 옥수수와 콩,대추야자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고,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다. 과일은 신선했고,잘 익어 있었다. 그것들은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헤로데가 만든 물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으며,무기도 1만명 정도가 그보다 훨씬 많은 공격군을 상대해 지구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창고에 그득했다. 사막과 다름없는 광야를 건너오기에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성 안에는 식량과 무기가 넉넉했으므로 마사다야말로 젤롯파 유태교인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요새였다. 마사다에 모여든 유태인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1,000명이 채 안되었다.로마제국의 눈에는 한줌에 지나지 않았지만,그들은 마사다를 게릴라 기지로 삼아 끊임없이 로마군을 괴롭혔다.그대로 두었다가는 꺼져 가는 반란의 불길이 또다시 타오를 것 같았다.이미 2년 전에 유태왕국을 무너뜨리고 ‘유태 정복 기념 동전’까지 만들어 쓰던 로마제국으로서는 마사다의 유태인이 큰 골칫거리였다.

 

헤롯과 마사다   (글 출처-http://biblia.co.il/%ed%97%a4%eb%a1%af%ea%b3%bc-%eb%a7%88%ec%82%ac%eb%8b%a4/)

 

헤롯은 유대아 땅의 왕으로 기원전 37년부터 4년까지 통치하였습니다. 헤롯 대왕은 살아 생전 건축한 많은 요새들과 수로, 극장들과 공공 건물 등으로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지요. 헤롯의 아버지는 안티파터 (Antipater) 라 불리는 에돔 사람입니다. 에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아랍인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 당시 에돔 지역은 이스라엘의 사해 남부로부터 에일랏까지 이르는 이스라엘의 남부 지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안티파터는 하스모니아 왕조의 통치 아래에서 귀족 세력으로 영향력을 끼치던 가문이었습니다. 안티파터는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던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로마의 카이사르 (Caesar) 와 폼페이 (Pompey) 사이의 갈등 속에서 카이사르의 편을 들어서 승승장구를 하게 되거든요. 카이사르가 폼페이와 전쟁을 할 때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포위되어 오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안티파터가 직접 군대를 끌고가 카이사르가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어요. 그래서 기원전 47년에 카이사르는 안티파터를 유대아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을 합니다. 안티파터는 유대아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된 후, 불과 4년뒤에 암살 당하지만,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 (Antonius) 는 안티파터의 아들들인 파사엘과 헤롯을 각각 분봉왕 (Tetrarchy) 으로 예루살렘과 갈릴리 지역을 통치하게 합니다 (기원전 41). 곧 유대인들이 헤롯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요. 폼페이에 의해서 무너진 유대인들의 왕조인 하스모니아 왕국의 마지막 후계자인 안티고누스 (Antigonus) 가 유대인들, 그리고 파르티아 사람들과 연합하여 40년에 헤롯을 반대하는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헤롯은 재빨리 로마로 갑니다. 자신의 통치권에 대한 재확인과 로마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원로원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게 되지요. 갈릴리 뿐 아니라, 온 유대아를 다스리는 왕으로 임명을 받아서 돌아오게 되거든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헤롯을 왕으로 임명한 것은 안토니우스였지만,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원로원과 한 몸이었던 옥타비아누스는 점점 악화되는 안토니우스와의 관계에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헤롯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원했습니다. 헤롯이 다스리는 갈릴리 지역 뿐 아니라, 유대아를 포함한 지역은 안토니우스가 다스리는 이집트와 동유럽의 땅을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했거든요. 여기를 막아 버리면 혹, 전쟁이 나게 되더라도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기에 헤롯의 도움이 필요했던 거지요. 결국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헤롯이 갈릴리, 사마리아, 이두메아, 유대아 지역을 다스리는 의 왕이 된 것입니다. 로마가 왕으로 승인하기는 하였지만, 유대아 땅에서의 내부 투쟁이 곧바로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3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안티고누스를 따르는 유대인 세력을 진압하면서, 37년부터 실질적인 무소불위의 왕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헤롯의 근심 걱정이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어요. 옥타비아누스와 손잡고 왕이 되었으나, 로마의 거대한 제국의 영토 분할에 따르면, 헤롯은 안토니우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야했기 때문입니다. 헤롯과 옥타비우스, 그들 만의 밀약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습니다. 이것이 들켜 버리게 되면,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헤롯을 치러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아 땅에 진입하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헤롯은 만약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군대가 공격할 경우 자기의 통치 지역 남쪽에서 이들을 막을 요새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선택된 곳이 마사다입니다. 이두메 지역과 유대아 지역의 경계에 있는 마사다는 이미 40년에 벌어진 반 헤롯 전쟁 때에 헤롯이 가족들을 피신시켜 그 안정성이 검증된 장소 였습니다. 사해 바다로부터 400미터의 절벽과 급한 경사길 위에 솟아있는 단독 봉우리의 마사다는 그야 말로 천혜의 요새였거든요. 그래서 헤롯이 왕이된 37년부터 마사다가 증축되고 보강됩니다. 31년에야 더이상의 공사 없이 중단이 되었는데요.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면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도 죽었고 더 이상 헤롯을 위협하는 세력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헤롯대왕   (출처-https://biblia.co.il/%eb%a7%88%ec%82%ac%eb%8b%a4/)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헤롯은 74 BCE에 이두메 (에돔) 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두메 지역은 독립적인 왕국이 아니라, 유대 지방에 편입된 한개의 지방이었기 때문에 헤롯이 비록 이두메의 귀족 가문 출신이기는 하였지만, 유대 지방에서는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헤롯의 나이 갓 25세 때에 갈릴리 지역의 행정 장관으로 임명이 되었으니 말입니다어떤 사람들은 헤롯이 순수한 이방인이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헤롯의 어머니가 하스모니안 왕조의 공주로 유대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정황으로 보았을 때에 헤롯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순수한 유대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확실합니다유대 땅에서 165 BCE 이래로 지속되던 하스모니안 왕가가 기울어져 갈 무렵인 63 BCE 부터 37 BCE 사이에는 하스모니안 왕가는 유명무실해지고 로마가 적극적으로 유대 땅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폼페이 장군이 바로 이 통치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헤롯은 꾸준히 자신의 정치력을 키워 나갑니다. 그리고 37 BCE 에는 로마의 속주인 유대 (Judea) 지방을 다스리는 왕으로 지명이 되었습니다.

유대 지방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유대인이 아닌 것에 대해서 매우 큰 부담감을 가졌던 헤롯과 그 일가는 모두가 유대교로 개종을 합니다. 정치적인 선택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책들을 펼쳐 나갑니다. 성전을 증축하고, 유대교를 권장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마련해 나아가지요.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 지 는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헤롯의 머리 속에서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하여 피난을 갈 피신처를 물색하지요. 그의 눈에는 마사다가 최적지였습니다. 이미 천혜의 요새로 갖출 수 있는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는 데에다가 이두메 지역과 매우 근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자신의 동조자들을 규합하기도 그보다 좋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사다를 자신의 만약을 대비한 피난처로 삼습니다뿐만 아니라, 이 마사다는 외적으로부터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헤롯에게는 아주 중요했습니다. 헤롯에게 치명적인 외적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였습니다. 이미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의 사랑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그 사랑 때문에 안토니는 훗날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되는 옥타비아누스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헤롯은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서게 되는데, 그랬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해야만 했습니다마사다는 37 BCE 부터 31 BCE 사이에 7년에 걸쳐서 건설되었습니다. 마사다는 남북으로의 길이는 약 550m이고, 동서로의 폭은 약 270m가 되는 다이아몬드형의 절벽위의 도시입니다. 이 절벽의 주위로 약 1.3km가 되는 4m 높이의 성벽이 쌓여 있었으니,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이 요새를 점령하려는 군사들의 사기를 꺾어 놓기에는 충분한 요새이지요. 게다가 이 요새로 올라가는 뱀 길” (Snake Path) 은 이 요새에 접근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헤롯의 가계도    (출처-http://biblia.co.il/%ed%97%a4%eb%a1%af%ea%b3%bc-%eb%a7%88%ec%82%ac%eb%8b%a4/)


헤롯의 아들들이 다스리던 지역     (출처-https://biblia.co.il/%eb%a7%88%ec%82%ac%eb%8b%a4/)




마사다  (출처-http://biblia.co.il/%eb%a7%9b%ec%82%ac%eb%8b%a4-%ec%a7%80%eb%8f%84/)

 

마사다               (출처- http://blog.daum.net/imkkorea/13378713)    

 

마사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마사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마사다                   (출처- http://blog.daum.net/imkkorea/13378723

 

케블카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케블카        (출처- http://blog.daum.net/imkkorea/13378713)

 

마사다, 앞쪽 봉우리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마사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마사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마사다의 최후 항전과 이스라엘의 멸망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병사들이 이곳저곳을 수색하자 두 여자가 숨어 있던 도랑에서 나왔다. 여자들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실바는 두 여자와 아이들 다섯을 모두 살려 주었다. 로마군은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렀다. 500년 가량 지나 비잔틴 수도사들이 한동안 살았지만,이슬람 교도들이 유태를 정복하자 그들도 떠나갔다.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1900년 간이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도는 사이에,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상징하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마사다가 점령당한 후 AD 135년 하드리아누스 로마황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어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민족은 1945년 5월 14일 나라를 건국할 때 까지 세계의 떠돌이 민족이 되었었다.

 

마사다                     (출처- http://blog.daum.net/imkkorea/13378719

 

로마 군대가 쏘아올린 20-25 kg 의 돌 폭탄들              (출처- http://blog.daum.net/imkkorea/13378719

 

다음 단계로 로마군은 망루같이 생긴 공성탑(攻城塔)을 만들어 비탈 위로 올렸다.공성탑 높이는 마사다 성벽보다 조금 높았다.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 궁수들이 활을 쏘아 엄호하는 사이에 다른 병사들이 투석기(投石機)를 끌어올렸다.세계를 정복한 로마군의 투석기는 무서웠다.사거리가 400m나 되는 투석기가 20∼25㎏짜리 돌들을 날려보내자 성벽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유태인들은 무너진 성벽 자리에 서둘러 또 다른 벽을 쌓았다.그들은 나무기둥을 두 겹으로 박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돌이 날아와도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그러자 실바는 박격포에서 벌컨포와 미사일 공격으로 바꾸었다.불화살이 유성처럼 날아가 박히고 횃불이 던져졌다.남풍(南風)마저 가세하자 나무 벽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4월15일이 기울었다. 실바는 일단 진지로 물러났다. 그는 날이 밝으면 공성탑에서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로마 정규군 9,000명과 유태 반란군 수백 명의 대결. 마사다는 로마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 병정들은 유태인이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밤을 새워 물샐 틈 없이 지켰다. 밤 사이에 유태인 전원이 자결한 것을 실바가 알 리 없었다. 날이 밝자 로마군은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성벽에 나무다리를 걸쳐놓았다. 로마군 선봉이 함성을 지르며 구름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했다.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성은 무섭도록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불탄 건물과 960명의 장렬한 주검이 로마군을 맞았다. 그들은 뜻밖에 벌어진 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가 저들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에 실망하고,경탄하도록 만듭시다’라고 열변을 토한 벤 야이르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 장렬한 죽음 앞에서 로마군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마사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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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아래로 로마 군단이 쌓아올린 토담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결국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이 정예 군단으로 꼽히는 제10군단에 마사다를 함락하라고 엄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서기 72년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이 제10군단과 보조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로 진군해 왔다.군세는 병사 9,000명과 노역에 부릴 유태인 전쟁 포로 6,000명.실바는 마사다를 빙 둘러 벽을 쌓고 곳곳에 망루를 세웠다.그러나 반란군보다 그들을 포위한 로마군의 사정이 더 열악했다.로마군은 먼 데서 물을 길어 왔고 보급품도 유태광야 너머에서 날라왔다. 포위 작전이 소용없다고 깨달은 실바는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공격하기로 했다.마사다 서쪽 벼랑에는 희고 넓은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실바는 그 바위에까지 흙과 돌을 다져 비탈을 쌓도록 했다.비탈 꼭대기는 마사다 성벽보다 20m쯤 낮았다.이 엄청난 흙산 쌓기 공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 포로들이 해냈다.마사다 쪽에서는 활을 쏘아 이 공사를 막으려 했지만 좁은 전선(戰線),즉 성벽의 한 지점에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마사다와 대항쟁

 

대항쟁 시대의 마사다의 역사는 그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 남았던 두명의 여인과 5명의 아이들을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마사다는 대항쟁이 시작이되던 66년에 열심당 중에서도 매우 과격한 분파였던 시카리 Sicarii 에 의해서 점령됩니다. 시카리 Sicarii 라는 말은 라틴어 Sicarius 의 복수형인데, 그 의미가 단검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옷 주머니에 늘 단검을 지니고 다니면서 언제라도 싸울 준비, 급습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이 시카리의 지도자는 엘르아잘 벤 야이르 אליעזר בן יאיר Eleazar ben Yair 였습니다. 이 시카리들은 같은 유대인 항쟁 그룹 안에서도 사사건건 부딛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포위 당했던 때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시카리들은 유대인 그룹들 안에 서로 의견들이 갈라지면서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예루살렘에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멸망하기 바로 직전에 시카리들과 그 가족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여서 이미 그곳에 66년부터 주둔해 있던 시카리들과 합류하게 됩니다티투스를 이어서 로마군을 이끈 실바 Silva 가 유대인 반란군의 마지막 무리들이 모여있는 마사다로 72년에 진군을 해 옵니다. 15,000명의 로마군들이 고작 960명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만큼 마사다가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상징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고, 그만큼의 병력이 있어야 점령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로마군들은 먼저 마사다에 있는 시카리들을 고사(枯死) 시키기 위해서 마사다를 둘러싸는 포위 성벽을 쌓습니다. 수천 톤의 돌들이 필요했겠지요. 하지만, 이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것으로 안 로마군들은 직접 마사다안으로 진입하기 위한 군사적인 용도의 비탈길을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비탈길의 위치는 비록 깎아지르는 절벽이기는 하지만, 가장 적은 공사기간이 소요될 서쪽 절벽을 선택합니다그리고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을 노예로 삼아 3개월에 걸친 대공사를 시작합니다. 마사다 안에 있었던 시카리들은 이 공사를 그저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물론 적극적은 공격으로 공사 자체를 방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공사에 동원된 노예들이 모두 자신들의 형제들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제대로된 공격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그 공사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로마군단 진영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마사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마사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헤롯궁전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BC37년 헤롯은 유사시 사용할 목적으로 천연의 요새인 이곳에 궁전을 건축하였다.  궁전에는 왕궁, 목욕장, 곡물창고, 파수대, 군영 등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 동안에는 한번도 사용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요새는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인 열혈당원들의 마지막 투쟁지로 사용 되었다. 로마의 10군단은 천연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하다 결국 인공 토담을 쌓은 후 점령할 수 있었다. 최후까지 항전하다 죽은 유대인은 967명이었다.

 

헤롯궁전                    (출처-http://blog.daum.net/imkkorea/13378723

 

마사다                   (출처- http://blog.naver.com/wed1204/130147462123

 


헤롯궁전 

 

헤롯궁전 바닥 모자이크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헤롯궁전 바닥 모자이크

 

헤롯 궁전의 목욕탕 유적, 헤롯은 마사다를 휴양지로 사용하면서 많은 유락 시설을 만들었는데 로마시대 사우나도 그 중 하나이다.       

 

헤롯 궁전의 목욕탕 유적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헤롯 궁전의 목욕탕 유적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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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왕 사우나        (출처-https://biblia.co.il/%eb%a7%88%ec%82%ac%eb%8b%a4/)


마사다의 사우나

 

로마의 멸망의 원인을 사우나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로마의 문화가 들어가 있는 곳곳에는 로마식 사우나들이 즐비하게 많았습니다. 흔히들 로마의 사우나를 기억하면서 동성애를 떠올리는데요, 로마의 사우나 문화에 동성애라는 부분이 일부분은 될 수 있겠으나, 사우나를 출입했던 모든 로마 사람들이 동성애를 즐겼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로마의 사우나에서는 오늘날의 본연의 목적인 몸에 땀을 빼고 목욕을 하는 일 이외에도, 고위직들이 정치를 평가하고, 학자들이 철학을 토론하고, 사우나의 마당에서는 체육을 즐기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 로마의 사우나는 사우나를 이용할 수준의 사람들 (아무래도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겠지요.) 의 친목과 교제의 장소로 널리 사용되었던 장소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문화가 전해진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로마식 사우나가 발견되는 것입니다마사다에서도 당연히 사우나 시설이 있었습니다. 마사다에서는 두개의 사우나 시설이 발굴되었는데, 하나는 고위 귀족들을 위한 사우나였고, 다른 하나는 헤롯 전용 사우나 공간이었습니다. 물도 구하기 힘든 유대광의 한 복판에서 그것도 흥청망청 물을 써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물을 마사다 옆구리의 물저장소에서 길어 올렸던 하인이나 노예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헤롯이 만든 식량창고들      (출처-https://biblia.co.il/%eb%a7%88%ec%82%ac%eb%8b%a4/)


마사다의 창고

 

헤롯은 만약에 자신이 대피할 경우와 자신의 가족들과 자기를 보호할 군사들이 먹고 입을 충분한 양의 물자들과 무기들을 마사다의 창고에 쌓아 놓았습니다. 마사다의 북쪽을 발굴하면서 사우나 시설과 헤롯의 궁전, 그리고 로마군의 작전 기지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길쭉 길쭉한 창고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창고들에는 주로, 포도주, 올리브 기름, 그리고 곡식을 담은 항아리들이 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창고들은 마사다의 북쪽 뿐 아니라, 헤롯의 서쪽 궁전 주변에도 이런 창고들이 발견되었어요. 마사다 요새의 이곳 저곳에 전반적으로 넓게 분포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비록 넉넉하지는 못했을 지라도, 마사다에서 최후의 항전을 펼치던 960여명의 사람들이 4년여 먹고 살기에는 충분할 정도였으니, 마사다에 저장되어 있었던 생필품과 무기, 그리고 밀가루와 같은 음식재료들의 양이 얼마나 대단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물 저장동굴            (출처-https://biblia.co.il/%eb%a7%88%ec%82%ac%eb%8b%a4/)


마사다의 물 공급

 

마사다가 아무리 철옹성같은 요새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안에서 마실 물이 없다면 진정한 요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무기가 있다고한들 그 안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가요? 로마 군인들도 바로 그 점을 간파했습니다. 마사다 요새를 올라가기는 힘들지만, 그 많은 인원이 그 위에서 얼마나 버틸까하며 마사다를 포위하고 사람들을 고사시키는 작전을 감행한 것이지요아직까지도 실바 장군의 로마 제 10군단이 만들어 놓은 마사다 주변의 로마군 진지와 마사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필품이나 군수 물자를 외부에서 옮겨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마사다를 360도 둘러싼 로마군의 포위 담이 고스란히 광야에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보면서 감탄할 만한 로마군들의 위엄 앞에서 2,000 여년 전의 유대인들은 또 얼마나 위축되었겠습니까만, 결과적으로 로마군의 작전은 실패였습니다. 이미 말했다시피, 마사다에는 충분한 물자가 이미 넉넉히 준비된 데에다가 헤롯은 마사다에 엄청난 양의 물 저장고들을 만들어 놓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기 때문입니다. 유대 광야는 대부분 석회입니다. 게다가 유대광야는 그냥 넓직한 평지도 아니라, 경사가 급한 구릉들이 오밀조밀하게 서로 맞대어 이어진 건조한 땅입니다. 그러다보니, 비가 오면 비가 땅에 흡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경사면을 따라서 빠른 속도로 흘러 내립니다. 땅이 물을 머금을 새도 없이 말이지요. 석회의 땅이니 땅 속 어디에선가는 동굴이 생기고, 기다린 동굴 어디에선가는 우리나라의 석회 동굴들처럼 시냇물도 흐르고, 동굴 안에서 강이 흐르고 할 수도 있겠지만, 드러난 지표에서는 물을 찾기도, 구하기도 매우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광야에서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물을 모으는데요, 경사면에 물이 흘러 내릴 수 없도록 돌을 살짝 쌓습니다. 그리고는 물의 방향을 이미 파 놓은 물 저장고 (Water Cistern) 쪽으로 흐리게 하는 것이지요그래서 광야 한가운데 만들어 놓은 물 저장고에 물들이 가득 차게 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헤롯도 유대 광야에서 물을 저장하는 그 방식 그대로를 마사다에 차용합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빗물들을 마사다 쪽으로 물길을 틀어 마사다의 절벽으로 향하게 하지요. 그리고 마사다의 절벽 곳곳에 물 저장고들을 파 놓고서는 그 안으로 빗물들이 흘러들어가게 합니다. 이렇게 자연방식으로 매년 우기 때마다 마사다에 저장되는 물의 양이 4만톤입니다. 그러니, 마사다에서 물이 없어 항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빗물 수로, 물 저장동굴로 흘러 들어간다.    (출처-https://biblia.co.il/%eb%a7%88%ec%82%ac%eb%8b%a4/)


비둘기 집, 식량, 연료 등      (출처-https://biblia.co.il/%eb%a7%88%ec%82%ac%eb%8b%a4/)


밀가루와 물이 있다고 빵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빵을 구을 화덕에 불을 지필 연료가 있어야하니 말입니다. 마사다는 비도 많이 오지 않는 광야의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물도 없었을 뿐 더러, 연료로 사용할 나무도 없었습니다. 연료는 단지 빵을 만드는데에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헤롯의 호화로운 로마식 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사다 요새 가운데 만들어 놓은 사우나 시설인데, 냉탕, 온탕, 찜질방(caldarium)으로 구성된 사우나의 물을 데우거나, 찜질방의 열기를 올리는데에도 땔감이 필요했거든요. 이런 사우나 시설이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마사다 북쪽에 고위 관료들과 귀족들을 위한 커다란 사우나 시설을 두었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절벽의 궁전에는 헤롯 전용 사우나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마사다의 창고에 땔감을 쌓아둔 흔적은 보이질 않습니다. 대신에 마사다의 곳곳에는 비둘기 집이 있습니다. 비둘기 집은 로마 시대 이후로 흔히 발견되는 고고학 유적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지역과 상황에 따라서 그 용도는 다양했습니다. 비둘기는 고기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하고, 비둘기의 배설물은 땅을 기름지게 하는 퇴비로 사용되기도 하지요. 이스라엘에서는 종교제의의 용도로 사용될 비둘기들을 사육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고, 충분하지는 않지만, 비둘기의 배설물은 연료로 사용되었습니다. 동물들의 배설물을 연료로 사용하는 것은 오래된 연료 공급방식이기도합니다. 현재에도 베두인들은 나귀의 배설물들을 모아서 연료로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채석장           (출처-https://biblia.co.il/%eb%a7%88%ec%82%ac%eb%8b%a4/)


마사다의 곳곳에는 이러한 의문점들을 해결해 주는 채석장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땅 자체가 돌 땅이다가 보니까, 굳이 어디에서 돌을 옮겨올 필요가 없이, 마사다의 절벽 위의 땅에서 돌을 떴다는 것입니다고대에는 건물을 축조하기 위해서 돌을 뜨는 작업, 그리고 그 돌을 운반하는 작업에 아주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일일이 사람의 손을 돌에 기본적인 틈새를 만들고, 그 틈새에 쐐기 모양의 나무를 끼워넣어서 망치로 쐐기를 쳐서 돌을 떠내는 방식으로 건물을 만드는 돌들을 쪼개고, 거친 돌들을 잘 다듬에서 건물을 짜임새있게 만드는 것이 고대의 채석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수의 석공들과 돌을 떠내는 일을 담당할 노예 또는 부역 일꾼들이 필요했는데, 강력한 전제 군주였던 헤롯에게 이런 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건물을 세우기 위한 좋은 돌이 있는 장소가 필요했지만, 마사다는 그런 걱정조차 필요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사다 자체가 유다광야의 일부였기 때문에 충분한 석회를 함유하고 있는 데에다가, 사해 바다 옆에 있는 유대광야의 절벽인지라 기본적으로 그 땅은 백운석 (Dolomite)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양질의 건축용 돌들이기 때문이지요. 마사다를 올라서서 처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마사다의 채석장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함몰된 땅의 일부분처럼 보이지만, 2,000전에는 돌을 뜨는 사람들과 돌을 쪼는 사람들로 붐볐을 겁니다.


채석장           (출처-https://biblia.co.il/%eb%a7%88%ec%82%ac%eb%8b%a4/)


마사다와 회당     (출처-https://biblia.co.il/%eb%a7%88%ec%82%ac%eb%8b%a4/)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주거지 어느 곳에나,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반드시 있는 곳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회당입니다. 회당은 때로는 마을 회관과 같은 기능으로, 때로는 성경공부를 하는 곳으로, 그리고 때로는 기도하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법정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마사다라는 곳의 특성상 이곳의 회당의 주된 기능은 기도를 하거나, 마을 회관과 같은 기능이 훨씬 더 강했을 거예요로마군에 대항하여 싸우던 그 긴 전쟁이 끝나기 전 마지막 날 밤이었습니다. 시카리의 지도자였던 엘르아살이 모든 가장(家長)들을 이 곳 회당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유명한 연설을 하게 되지요형제들이여,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진리되시고 정의로우신 인류의 주인이신 오직 한분 하나님의 종으로만 살아가겠노라고, 그리고 절대로 로마인들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로마군은 총공격을 해 올 겁니다. 형제들이여, 우리의 아내가 능욕을 당하기 전에, 우리 자식들이 노예가 되기 전에 죽음으로 자유를 선택합시다우리는 로마인들을 대항하여서 들고 일어선 첫번째의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지금 그들과 대항하여 싸우는 마지막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예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힘이 있을 때에 용감하게 자유인으로 죽읍시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법에 자살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엘르아살은 항아리를 깨뜨리고 깨뜨린 항아리의 파편에 가장들의 이름을 씁니다. 그리고 제비 뽑기를 해서 순서대로 자기 가족들을 모두 죽인 후에 다시 회당으로 돌아오는 거지요. 마지막 가장들만 남았을 때에, 열명을 선택해서 다른 이들을 죽이고, 나머지는 서로 죽여주기로 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만이 스스로 죽어야했으니, 사실 그 한 사람이 960명의 모든 짐을 다 짊어졌다고 해야할 것같아요예로부터 전쟁에서 내가 남긴 물건은 적군의 보급품이 되는 법이지요. 그래서 물은 쏟아 버리고, 먹을 것들은 태워버리고, 화살은 꺾어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엘르아살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먹을 것을 그대로 두라고 한 것이지요. 먹을 것이 없어서 싸울 것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을 로마 군인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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