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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르네상스)

기독교성화,십자가,성막/명화모음

by baesungsoo 2005. 6. 2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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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바티칸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벽화

 


노아의 만취, 1509

 


노아의 번제, 1512

 


사울의 회심

 


베드로의 책형

 


천지창조, 시스티나 좌측

 


아담의 창조, 1512

 


이브의 창조, 1512

 


이브의 유혹

 


대홍수, 1508-9

 


모세상, 바티칸

 


다비드

 


스가랴 선지자

 


에스겔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

 


이사야 선지자

 


요나 선지자

 


성가족과 세례요한, 1504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otti)

 

1475년에 태어나 1566년까지 90세를 살았다. 그의 긴 생애동안 미술의 양식도 여러 번 바뀌었는데 변화의 주인공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15세기 르네상스로부터 시작하여 전성기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을 이룩했고 바로크적 경향을 열어놨다. 미켈란젤로는 끊임없는 양식의 창조자였던 것이다. 그의 집안은 귀족의 혈통이라고는 하나 부와 권력을 풍요롭게 누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부친은 미켈란젤로에게 문법공부를 시키려 했으나 아이는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부친은 귀족 출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다고 자주 꾸지람을 했다. 하지만 타고난 ‘끼’는 어쩔 수 없는 법.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13세 되던 해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잘 나가던 화가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아들을 맡겼다. 공식적인 그림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1년만에 그곳을 나왔다.그곳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대가들의 공방에는 제자들의 교육용 혹은 시범용으로 쓰이던 스케치 샘플들이 있었다. 그림을 배우던 미켈란젤로가 하루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스케치 중의 한 점을 빼낸 후 자신이 그린 스케치로 바꿔치기를 했다. 그러나 이를 스승이 알아채지 못하자 그는 이같은 선생 밑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공방을 나왔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당돌함과 ‘끼’가 넘쳤던 것 같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의 눈에 띈 때였을 것이다. 로렌초는 재능있는 소년 미켈란젤로를 알아보고 자신의 집에서 아들처럼 돌보았다. 미켈란젤로는 거기서 메디치가를 드나들던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과 한 식탁에서 식사하면서 대화하고 토론하는 생활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와 같은 당시에 유행하던 철학을 접하면서 그의 지적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이때가 1590년쯤이니 그의 나이 겨우 15세 때의 일이다.  그때부터 미켈란젤로는 작업을 시작해 조각·회화·건축·시·문학 분야에서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죽기 며칠 전까지 ‘피에타’를 대리석에 조각했었다고 하니 평생 쉼없이 작업한 셈이다. 그의 작품 수는 사실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4년동안 누워서 그림을 그리는 바람에 몸이 만신창이가 된 바티칸의 시스티나성당 천장화나 60세가 넘어서 주문을 받고 5년 이상 작업에 매달렸던 전대미문의 규모를 가진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에서 보듯이 그의 작품은 제작기간이 수년이나 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는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일을 철저한 고독속에서 해냈다. 조수의 힘을 빌리는 것이 당연시됐던 시대에도 모든 것을 혼자서 해냈고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는 외부인의 출입도 철저히 금했다. 미켈란젤로의 재능과 명성은 이미 당대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찬양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인간의 것이 아닌 신의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당시의 교황들을 비롯한 각국의 군주와 귀족들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한 점이라도 소장하기 위해 조바심을 냈다. 미켈란젤로의 이름과 연관을 짓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영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술가라는 직업이 미천한 장인계급에 속했으나 그가 그것을 뒤집어놓은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티나성당에 있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를 거부하자 주문자였던 교황 바오로 3세는 “이것은 나의 30년 된 숙원이다. 교황이 된 오늘도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겠느냐”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문필가였던 아레티노라는 사람은 미켈란젤로의 스케치 한 장을 얻기 위해 1년이나 편지를 쓰고 공을 들였지만 이를 얻지 못하자 후에 ‘최후의 심판’을 공격하는 선봉장이 되기도 했다. 이같은 폭발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오로지 작품 제작에만 열중할 뿐 세속적 영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에 아름답지 않고 의미가 없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최후의 심판’을 예로 들어보면 이 작품 역시 도상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당시의 개념을 뛰어넘어 새로운 형태와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 속에는 신성해야 할 성인들이 발가벗은 채 등장하고 천사들은 날개도 없이 못 생긴 얼굴을 하고 있는 등 기존의 개념을 완전히 벗어난 형태로 선보이고 있다. 게다가 가톨릭의 교리는 물론 프로테스탄트 사상까지 내포하고 있으니 한 인간의 폭넓은 사상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은 작품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에도 기인하지만 그가 평생 잃지 않았던 자유분방한 사고와 작품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에도 기인한다. 미켈란젤로는 진정한 권력은 실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작가로서의 고집과 주관을 기라성 같은 후원자들 앞에서도 당당히 주장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그의 작품에 토를 달거나 그의 기분을 언짢게 한 자는 상대가 누구였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대상 중 한명이 비아지오 체세나라는 추기경인데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그리는 작업 현장을 방문한 추기경이 벌거벗은 인물들에 대해 한마디하자 그를 지옥의 사신 미노스로 그려놓음으로써 영원히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그 즉시로 “교황이 날 찾으면 내가 없다고 하라”고 전하며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내려왔고 교황이 다시 그를 부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는 일화는 권력 앞에서 당당했던 그의 용기와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보여준다. 그는 늘 새로운 경향을 실험하고 기존의 것을 파괴하며 작품세계를 개척해나갔던 것이다. 물질과 권력,그 모든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오로지 작품 제작에만 몰입했던 미켈란젤로, 그는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춘 유일한 인간이었다.


고종희 <한양여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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