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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Persepolis)의 조로아스터교 유적 (이란)

타종교신전/조로아스터교(배화교)

by baesungsoo 2013. 4. 1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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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 블로그 > 그냥 이웃)

 

이란 남서부 팔스지방에 있는 아케메네스왕조의 수도였다. 그리스어로 '페르시아의 도시'를 의미한다. 페르시아인들은 '파르사(Parsa)'라고 부른다. 파르사는 파르스에서 유래했는데, 파르스 지방 또는 파르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파르스에서 시작되어, 파르사는 제국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수도로 사용되었다.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왕궁으로,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518년에 건설을 시작하였다. 그 위업은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 이어졌고, 손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기원전 460년경)에 거의 완성되었다. 인공의 테라스 위에 조영된 왕궁은 세 방향을 벽돌 성벽이 둘러싸고, 북쪽과 동쪽은 구릉을 등지고 있다. 테라스 전체는 약 460×280m이고 높이는 12m였다고 한다. 북서쪽의 거대한 테라스를 계단처럼 오르면 ‘크세르크세스의 문(만국의 문)’이 나온다. 이 문이 유일한 성문이며, 날개와 사람의 머리를 지닌 황소의 상이 입구의 양쪽을 지키고 있다. 문을 들어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장대한 ‘아파타나’에 압도되고, 조금 직진하면 미완성의 문을 지나 화려한 ‘백주의 방’으로 빨려 들게 된다. 아파타나의 안쪽에는 중앙 궁전을 비롯하여 역대의 왕들이 살던 궁전이나 하렘(왕의 거실)이 줄지어 서 있으며, 왕궁의 가장 안쪽에는 엄중하게 경호된 보물 창고가 놓여 있다.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신년제 등의 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하며, 동시대의 행정 수도인 수사와는 다른 역할이 있었다.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인공의 테라스, 햇볕에 말린 벽돌을 쌓은 벽, 두 마리의 황소가 서로 등을 맞댄 기둥 머리 등 아시리아의 전통적인 궁전 건축 양식에, 포르티코와 플루트(세로 홈)가 나 있는 기둥 등 그리스의 새로운 건축 양식이 훌륭하게 융합하여 아케메네스 특유의 양식이 표현되어 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8∼7세기 무렵(신아시리아 시대)에 고대 오리엔트를 지배하였던 제국이다. 또한 그리스풍의 육감적인 부조가 호화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 페르시아 정복 때 소실되었다(BC 330).  또한 기록보존소에서 출토한 점토판(粘土板) 문서 약 2만 장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경제가 밝혀졌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페르세 폴리스는 엄청난 규모와 함께 섬세함 면에서도 조각품들의 곱슬머리 머리털까지 표현할 정도로 섬세하다. 고대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제국)는 성경에 고레스 왕에서부터 등장을 하여 다리오,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 왕까지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바로 이 왕들이 실제로 통치했던 흔적들이 바로 페르세폴리스이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는 3개의 궁전이 있었다. 겨울에는 날씨가 따뜻한 아와즈(Ahwaz)에 있는 수산성에서 다스리고, 여름에는 지대가 놓아 여름에도 항상 날씨가 서늘한 하마단(Hamasan, 성경에는 에스라 6:2절에 악메다 궁으로 소개되고 있다.)에서 다스렸다. 그리고 페르세 폴리스는 때로는 여름을 지내는 궁으로 쓰기도 했지만 주로 신년 행사용 궁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해마다 신년이 시작되면 여기서 그 유명한 노루즈(Noruz) 축제가 벌어지는데 이 때 전 세계의 피정복 국가 사절단들이 선물을 운반해 와서 페르시아의 대왕께 바치는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왕의 보좌가 있는 아파다나(APADANA)로 오르는 계단의 경사면에는 각국의사절단들의 모습이 부조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그 사절단들의 복장과 특산물들이 그 당시 최고로 고급 돌이었던 흑석에 생생하게 표현되었는데 앞에 세워놓은 안내문에 보면 그들이 누구며 어디서 온 사절단들이며 무슨 예물을 가져왔는지가 새겨져 있다. 심지어 아프리카의 리비아와 에티오피아부터 메소포타미아를 걸쳐서 인도까지 정말 엄청난 넓은 지역의 수십개 국가를 다스렸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이다. 안타깝게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주전 330년경에 와서 이 세계적 건축물에 불을 질러 지금은 그 웅장했던 원형을 볼 수는 없지만 아직도 13개 정도의 기둘이 우뚝 솟아 있어서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궁전은 다리오 왕이 건축을 시작해서 역대 페르시아의 왕들이 계속 지어 나갔으며 완공까지는 15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 왕궁을 보고야 이 엄청난 건축사업을 시작했던 고대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오의 위대성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아케메네스(Achaemenians)의 수도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출처- http://withjuhyang.com/bbs/view.php?id=news&page)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6세기중반경에서 7세기까지 이란 즉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B.C. 549?-331) 왕조, 파르티아 제국(B.C. 2C-A.D.224), 사산 왕조(224-642)의 국가종교였다. 약 100여년간 전성기에 있던 이란지역왕조의 국가종교였기 때문에, 당시 가장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종교 중 하나였다. 이란의 페르시아족은 인도인들과 같이 아리아인의 한 갈래로서, 매우 종교적인 민족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현재 이란은 신정일치의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다. 한편 조로아스터교는 이란이 이슬람왕국에 의해 패망하자, 이슬람에 의해 박해받게 된다. 그러나 조로아스터신자들의 신앙은 매우 강한 것이었다. 그들은 지속적인 탄압가운데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비록 소수신앙공동체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이후 팔라비 왕조가 박해를 완화시킬 때까지 약 1000여년간 그들의 신앙을 지켜나간다. 이란사람들은 이슬람에 대해 이교도라는 의미에서 조로아스터신자들을 '자르두슈티(Zardushti)' 또는 '가브르(gabr)'라고 불렀고, 신자들 자신은 스스로를 '마즈다의 숭배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섬기는 주신인 아후라마즈다를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10세기경 이들 신자 중 일부는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 인도북서부로 이동했다.  인도에 가면 '파르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바로 조로아스터신자들이다. 그들은 936년경에 인도에 정착, 인도현지의 힌두교인들과 평화롭게 공존했다. 1297년과 1465년 사이 이슬람의 침입으로 공포에 떨긴 했지만, 17세기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게 되면서, 상업도시인 뭄바이로 이동해 19세기경에는 엄청난 부와 힘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했다. 현재 인도의 파르시공동체는 약 10만명에 이르러, 세계 최대의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또한 영국과 교역하게되면서 파르시들은 외국의 여러나라로 이주할 기회를 갖게 되어, 이들 지역에 조로아스터교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래서 현재 마즈다의 숭배자들은 인도와 이란 뿐 아니라 파키스탄, 영국, 미국, 캐나다 등지에 퍼져있다. 다만 조로아스터교인들은 이교도와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출처- http://withjuhyang.com/bbs/view.php?id=news&page)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출처- http://withjuhyang.com/bbs/view.php?id=news&page)

 

페르세폴리스 유적 입구에는 거대한 인면유익(人面有翊:사람의 얼굴에 날개를 가진) 황소상이 2쌍 조각되어 있는데, 하나는 동쪽을, 다른 하나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 문을 통하여 궁전으로 들어갔고, 세상의 많은 나라들이 이 문을 통하여 출입하였기에 열국의 문으로 이름지어졌다.

 

The western door of the Gateway of All Lands의 조각상    (출처-http://withjuhyang.com/bbs/view.php?id=news&page)

 

이란 페르세폴리스 "아르타크세르크세스2세 무덤"        

 

아후라 마즈다

 

아후라는 ‘주(主)’를 의미하는 칭호이고 마즈다가 원래의 신 이름인데, 지혜의 신을 이야기하며, 조로아스트교의 주신이다. 세계의 창조자로서 빛과 어둠을 만들어 때를 정하고, 질서의 아버지로서 태양과 별의 길을 만들었으며, 선의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나중에 조로아스터의 신 개념이 무너지고, 아리만은 이에 대립하는 악의 세계의 창조자가 되는데, 이 신은 결국 아리만을 타파하고 전세계를 정화하여 새로운 세계를 확립한다고 역설하였다.

 

부조(reconstruction of the Treasury relief)

 

페르세폴리스에 가면 곳곳에 페르시아에 보물을 가져온 세계 각국의 사진들의 부조를 볼 수 있다. 왕은 세계 각국에서 가져온 보물을 보물의 방이라 불리는 곳에서 받았다. 각국에서 보물을 가져오는 나라들을 보면 엘람, 아르메니안, 이오니아, 리디아, 갑바도기아,메데,파르티아,사가르티안,바빌론인,시리아인,아라비안,테라키안,인디아.... 당시의 대 제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속국들임을 볼 수 있다. 각 나라들의 사신들의 복장을 보면 나라들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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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 박물관에 있는 채색된 부조

 

페르세 폴리스에 있는 부조

 

설형문자

 

이란 페르세폴리스 "유물관에 있는 설형문자"로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한자(漢字)와 마찬가지로 회화문자(그림문자)에서 생긴 문자이다. 점토 위에 갈대나 금속으로 만든 펜으로 새겨 썼기 때문에 문자의 선이 쐐기 모양으로 되어 설형문자라고 하며 쐐기문자라고도 한다. 설형문자를 발명한 것은 수메르인(人)이며, 수메르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문자는 우루크의 에안나 신역(神域)의 제4층(우루크 후기)에서 발견된 회화문자였다. 발견된 문자의 수도 많은데, 현재 알려진 문자의 수는 약 1,000자에 달한다. 그 다음의 제므데드 나스르기(期)에서는 회화문자에서 설형문자로 발전하는 과도기의 형태를 보여 주며, 동시에 표음화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초기 왕조시대에 이르면 설형문자는 일반화되고, 표의 ·표음문자가 병용되었다. 바빌로니아 남부를 통일한 셈계의 아카드인들은 설형문자를 채용하여 아카드어(語)를 표기하였다. 그로부터 표음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커지고, 표의문자의 수는 줄어들었다. 아카드어는 제국 멸망 후에도 국제어로서 오리엔트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 때문에 설형문자는 바빌로니아인이나 아시리아인 등 셈계의 여러 민족들뿐만 아니라, 비(非)셈계의 후르리인 ·히타이트인 ·페르시아인들도 사용하였다(마리문서 ·아마르나문서). 이들 중에서 페르시아의 설형문자는 자획(字畵)이 간략해지고, 자수도 37자로 정리되었다. 시리아의 라스 샤므라에서 발견된 우가리트 왕국의 설형문자는 자수도 30자에 불과하고, 완전히 알파벳화하였다. 설형문자는 BC 1세기경까지 사용되었으나 그리스문자나 아람문자의 보급으로 점차 잊혀지게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중근동 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고대 유적에 남아 있는 설형문자의 각명(刻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9세기 전반, 독일의 그로테펜트와 베히스툰의 3국어 병용비문(倂用碑文)을 단서로 한 영국 롤린슨의 연구로 먼저 페르시아어가 해독되고, 계속하여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수메르어의 해독에도 성공하였다. 설형문자의 연구는 유적의 고고학적 조사와 병행되어 진행되었다. 각지의 박물관이나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점토판 문서들이 정리 ·해독(解讀) ·출판되고 있다. 문서 내용은 경제관계를 중심으로 정치 ·종교 ·문학 ·외교 ·천문학 ·수학 ·연대기 등 각 방면에 미치고 있다. 또한 함무라비법전을 비롯한 설형문자법의 연구도 추진되고 있다. (내용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왕의 궁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벽명에 세겨진 "황소를 잡은 사자의 부조"

 

다리우스 1세 궁전 (기원전 6∼5세기)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대기단의 높이를 맞추어서 다리우스 1세 궁전은 지상에서 18m인 곳에 있어서 밑의 마르브· 다슈 평야(사진의 왼쪽)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궁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측벽에는 왕의 향연에 바치는 동물, 술이 담긴 가죽부대, 식기와 잔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부조되어 있다. 소를 덮치는 사자의 주제는 계단측벽의 삼각형에 사용되었다. 그 우측이 크세르크세스 1세의 비문이다

 

궁전 복원 추정도

 

 다리우스왕 개인궁전

 

다리우스왕 개인궁전

 

다리우스왕 개인궁전

 

왕궁 비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왕궁 비

 

다리우스왕이시여,,왕중의 왕이며  온세상의 왕이시며  이 왕궁을 지으신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아카에메니드(고대페르샤왕조) 대왕이시여!!

 

왕궁 비

 

다리우스왕 개인궁전

 

아파타나(Apatana)궁전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아파다나 궁전은 다리우스 1세 때 짓기 시작해 아들 대에 완공했다.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장이나 노루즈(신년) 때 제사장으로 쓰였다. 레바논 삼나무로 지은 천장을 받치던 높이 20m의 72개 기둥 가운데 남은 13개만 봐도 웅장했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넓은 공간을 석조 기둥으로 떠받치는 공법은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한다. 그래서인지 기둥 초석에 수련(睡蓮)으로 보이는 이집트 연꽃무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출입문은 동서남북에 하나씩 있는데, 북쪽과 동쪽에 독특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조공자 행렬도와 사자가 목우를 습격하는 동물투쟁도가 생생하게 돋을새김되어 있다. 23개국 조공자(사신)들의 옷차림이나 헌상물은 각양각색이다. 아르메니아는 말, 레바논은 금가락지, 바빌로니아는 소, 인도는 향수병, 에티오피아는 상아를 헌상했다. 이렇듯 각국 문명은 앞다투어 여기로 모여들고 있다.

 

아파다나 궁전으로 오르는 111개의 돌계단

 

입구 계단으로 오르는 벽엔 돋을새김으로 그려진 전세계국가들의 조공행렬이 새겨져있다. 그 어제와의 만남은 입구 왼쪽에서 111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데서 시작한다. 통상 돌 한 덩어리로 한 계단씩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한 덩어리를 쪼아 다섯 계단으로 만든 것이다. 계단 높이는 말을 타고도 불편함 없이 오르도록 10㎝ 정도로 했다. 계단에 올라서면 4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 (다르바제 멜라)이 나타난다. 지금은 높이 10m 가량의 원주 몇 대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파다나입구로 오르는 두개의 계단중 동쪽계단인데 계단으로 오르는 벽에는 전세계에서 조공을 받치러 온 사람들의 조각이 새겨져있다

 

111개의 돌계단 부조

 

111개의 돌계단 부조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111개의 돌계단 부조 

 

111개의 돌계단 부조 

 

111개의 돌계단 부조 

 

아파다나. 알현실 부조  

 

111개의 돌계단 조공행렬 부조

 

북쪽 계단에 새겨진 부조들.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교사절들이 왕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고.. 그리고 계속되는 공물의 행렬.. 세계 최초 통일대제국 페르시아의 위용을 보여준다 

 

111개의 돌계단 조공행렬 부조

 

부조, 조공 사신들

 

부조, 조공 사신들

 

부조, 조공 사신들

 

다리우스왕에게 신년 인사온 사신들         (출처-http://tong.nate.com/travel )

 


왕실 근위병들

 


조공행렬

 


조공행렬

 

악마와 왕의 투쟁상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서쪽에 있는, 왕이 단검으로 짐승을 찌르는 ‘악마와 왕의 투쟁상’은 왕이 악을 제압한다는 것을 뜻한다. 남쪽 ‘옥좌의 왕상’은 28개 속주 신민들이 옥좌를 받든 모습인데, 왕 머리 위에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태양’이 그려져 신과 왕, 신민 간의 상하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 별전으로는 ‘겨울궁전’이란 뜻을 지닌 다리우스 1세의 대리석 궁전 타차라(일명 ‘거울의 집’)와 ‘거주를 위한 궁전’이란 뜻으로 합성궁(合成宮)이라고도 하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 하디쉬가 있다. 그 남쪽에는하렘(왕비의 거실)이 있다.

 

사자와 목우 투쟁도

 

다리우스 1세가 지은 아파다나 궁전 출입문에 새겨져 있다. 동서미술에  흔하게 등장하는 도상으로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 도상과 연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궁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페르세폴리스의 별전으로는 ‘겨울궁전’이란 뜻을 지닌 다리우스 1세의 대리석 궁전 타차라(일명 ‘거울의 집’)와 ‘거주를 위한 궁전’이란 뜻으로 합성궁(合成宮)이라고도 하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 하디쉬가 있다. 그 남쪽에는 하렘(왕비의 거실)이 있다. 놀라운 것은 동남쪽 보물창고다. 알렉산더가 당나귀 1만 마리와 낙타 5천 마리를 끌어 창고 보물들을 엑바타나(오늘날 함단)로 실어갔다고 하니,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그밖에도 부속 박물관에는 당대 문명들의 교류상을 보여주는 각종 도자기와 장식품, 항아리, 동전, 타다 남은 천조각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보물궁

 

백주의 방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페르세폴리스의 주두 부분


이란 테헤란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페르세폴리스 기둥. 페르세폴리스는 페르시아어로 '타흐트 잠쉬드'로서 '타흐트'는 '왕좌'라는 뜻이고, '잠쉬드'는 페르시아의 한 전설적 영웅의 이름이다. 이 고도는 아케메네스조 다리우스 대왕이 기원전 520년경에 건설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로스 동정군에게 소진될 때까지 약 200년간 아케메네스조의 수도였다가 그후 약 2천여 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다. - '씰크로드학' 中에서 , 기원전 520~500년경. 페르시아 건축은 기원전 6세기 중반에 있었던 이오니아 문명전파 때 그리스 건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542년부터 이오니아의 왕들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실에 공물을 바쳤다. 이때 페르시아 왕실의 요청으로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함께 파견되어 터키 지방의 발달한 문명을 전파했다. 건축은 이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페르시아를 대표하는 아케메네스 궁(페르세폴리스)은 이런 내용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당시 근동지역의 강자였던 페르시아의 왕실은 이 궁궐을 짓기 위해 인근 여러 나라에서 최고의 것들을 모았다. 목재는 레바논에서 바빌론과 이오니아 지방을 거쳐 이곳까지 운반되었다. 석재는 페르시아 북쪽의 엘람지역에 있는 아피타루스에서 조달되었다. 건축 설계와 시공 및 장식을 이오니아인들이 맡았다.

 

페르세폴리스 만국의 문과 라마수


페르세폴리스궁전을 들어가기 위해 처음 거쳐야 하는 문이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은 페르세폴리스를 대표하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 사람 얼굴과 짐승의 몸을 한 인면수신상이 문 양쪽을 지키고 서 있다. 알렉산더왕에 의해 파괴되었다.

 

만국의 문 라마수

 

만국의 문

 

라마수                          (출처- 블로그 > 너에게로 가는 길)

 

이란 테헤란에 있는 국립고고학 박물관에서 찍은 라마수, 라마수는 얼굴은 사람. 새의 날개. 소의 다리를 가지고 있는 인두유익우체상이다. 석회석. 고대에 이 왕궁을 찾아온 사람들은 라마수(Lamasu)를 보면, 그것이 처음엔 서 있다가 다음에는 마치 걸어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라마수는 왕을 지키는 호위병처럼 눈을 부릅뜨고는 방문객을 지켜보다가 뒤를 쫓아다닐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다리우스1세

 


다리우스1세

 


다리우스1세 조각

 


다리우스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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