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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라스 고고유적 (Archaeological Site of Mystras, GREECE)

성지순례/그리스

by baesungsoo 2014. 1. 1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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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디미트리오스 대성당    (이하 사진, 글 출처-http://cafe.naver.com/eurostation/924)

 

1270년경에 만들어진 부주교관 미트로폴리스의 성디미트리오스 대성당은 여러 차례 손질되었지만, 프레스코화가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성디미트리오스 대성당 천장 프레스코화

 

17~18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로 전능한 주 예수 주위에는 8명의 사도가 그려져 있다

 

 

 

성 테오도리 성당      (이하 사진, 글 출처-http://cafe.naver.com/eurostation/924)

 

20세기 초까지 브론토히온 수도원의 주요 건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세속의 성당이 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1290~95년에 건설되었다

 

 

아펜디코 성당

 

그리스 십자형 평면 위에 3개의 신랑과 미스트라 특유의 양식인 둥근 지붕을 가진  성당으로 1310년경 완성되었다. 이 성당은 브론토히온 수도원의 주성당 역할을 했다


 

페리블레프토스 수도원 성당    (이하 사진, 글 출처-http://cafe.naver.com/eurostation/924)

 

미스트라 동쪽의 가파른 경사진 곳을 깎아 만든 페리블레프토스 수도원 성당의 기원은 프랑크족 시대인 1350년경에 완성되었다

 

 

 

페리블레프토스 수도원 성당 내부

 

현관 복도에는 비잔틴 미술을 장식하는 팔라이올로구스 왕조 시대의 훌륭한 벽화가 남아 있다

 

 

 

미스트라스

 

 'Morea의 경이(驚異)'라는 말로 1249년 아케이에의 왕자인 월리엄이 요새 주위에 원형 경기장으로 건설한 도시이다. 비잔틴, 터키, 베네치아에 의해 차례로 정복된 이 도시는 1832년 이래 버려진 채 아름다운 경관만이 숨을 쉬고 있다.  타이게토스 산맥의 산 속에는 프랑크족의 산성 카스트로 유적이 솟아 있고, 에브로타스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있는 미스트라의 위쪽 도시에는 데스포테트 궁전과 고관의 주거지가 남아 있다 

198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미스트라 아래쪽 도시     (이하 사진, 글 출처-http://cafe.naver.com/eurostation/924)

 

건물 대부분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된 채 나무로 뒤덮여 있다. 13세기경에 세워진 성당을 비롯해 몇몇 건물은 지금 복원이 진행 중이다

 

 

 

미스트라의 중세 도시

 

타이게토스 산맥의 산 속에는 프랑크족이 건설한 산성 카스트로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산기슭에 만들어진 중세 도시 미스트라의 유적은 이중으로 성벽을 둘러싼 궁전을 중심으로 한 위쪽 도시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아래쪽 도시로 구분되어 있다. 미스트라는 14~15세기에 형성된 비잔틴 제국의 중심 가운데 하나로, 콘스탄티노플에 대항할 수 있는 지위를 갖고 있었다. 미스트라의 아카데미아는 르네상스에 큰 자극을 주어, 유럽 정신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욱이 이 중세 도시는 그리스인에게는 신생 그리스 정신의 발상지로 인정받고 있다.


미스트라의 탄생

 

“산으로 둘러싸인 깊은 계곡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살지 않은 채 버림받았다. 타이게토스의 산봉우리가 뒤쪽에 솟아 있고, 에로타스 강이 시냇물이 되어 흐르는 곳이다.(중략) 북쪽 나라에서 침입한 두려움을 모르는 종족이 그 깊은 계곡에 정착하고 난공불락의 성을 건설해 그 곳을 근거지로 주위의 땅과 백성을 지배하고 있다.” 괴테는 [파우스트] 제2부 제3막에서 미스트라의 정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스의 산성, 그것은 고대 도시 스파르타 서쪽 5km의 산 속에 잠들어 있는 미스트라를 말한다. 미스트라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비잔틴 도시의 유적이다. 1204년에 일어난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프랑크족 기사들은 성지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중 비잔틴 제국의 내분을 틈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일으켰다. 그리스인이 구축한 헬레니즘 세계의 지배권을 장악한 프랑크족은 세력 유지를 위해 여러 곳에 군사 요새를 건설했다. 특히 그리스 본토로 진출한 프랑크족은 많은 성채를 건설했다. 1206년에 건설된 프랑크족의 도시 카르마타에서 1218년에 태어난 기욤 드 빌아르두안은 1248년 성왕 루이 9세의 제7차 십자군 원정 때, 그리스 모레아 지방의 기사 400명을 모아 참가했다. 수도를 빼앗긴 비잔틴 제국의 유명무실한 망명 정권은 유력자의 도움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으려고 했는데, 특히 니케아의 국왕 미카일 8세의 군대가 가장 유력했다. 십자군애 참가한 기욤 드 빌아르두안은 1259년에 미카일 군대의 포로가 되어, 마케도니아 지방의 페라고니아에 유폐되었다. 2년 후인 1261년에 미카일 8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고 비잔틴 제국 최후의 팔라이올로구스 왕조를 세우자, 유폐되어 있던 기욤은 자유를 얻은 대신 프랑크족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세운 요새 3개를 미카일 8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그 요새 가운데 하나가 막 완성된 산성 카스트로였다. 이 산성을 넘겨줌으로써 그리스의 모레아와 라코니아 지방에서 일어난 비잔틴 부흥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후기 비잔틴 제국의 융성

 

난공불락 산성의 보호를 받은 미스트라 시는 1289년에 비잔틴 제국 군총독부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1349년에 펠로폰네소스 반도 대부분의 영토를 장악해 많은 데스포테트(영주)를 지배할 수 있는 비잔틴 황제의 데스포타로 승격되었다. 데스포타는 분방령(分邦領)의 수도로 이 때부터 미스트라는 번영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것은 미스트라가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초대 황제의 아들인 마누엘 칸타쿠제노스의 통치를 받던 시대에 해당한다. 미스트라는 발전을 계속해 비잔틴 제국의 가장 강력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미스트라의 데스포테트 지위는 황제와 가까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지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막강한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미스트라의 통치자들은 14~15세기에 미스트라를 문화적으로도 그리스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드넓은 영지와 공략 불가능한 항만 도시 모넴바시아와의 교역으로 쌓은 부의 증가는 미스트라에 엄청난 번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부를 배경으로 미스트라의 정치인들은 당시 이름 높은 건축가나 예술가를 이 도시로 불러올 수 있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절벽 아래쪽 지역에는 거대한 궁전, 훌륭한 성당과 공공 건물, 그리고 호화로운 설비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주거지가 수없이 들어섰다. 특히 상류 귀족들이 살던 위쪽 도시의 고지대에는 화려한 저택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미스트라 데스포테트의 지배 지역은 수도인 콘스틴티노플의 문화와 맞먹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미스트라의 번영은 오스만투르크의 침략으로 비잔틴 제국이 붕괴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미스트라는 비잔틴 세계 최후의 광채였다.


헬레니즘인

 

미스트라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신플라톤 학파가 있다. 특히 비잔틴인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는 플라톤을 고대 그리스식으로 발음해 플레톤이라고 지칭해 르네상스 시대의 플라톤이라고 불리었으며, 미스트라에 아카데미아를 세웠다. 플레톤은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플라톤 철학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것으로 추측된다. 미스트라는 당시 가장 진보적인 정신을 가진 문화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되고, 유럽의 르네상스에 고대 그리스의 사상을 전해주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플레톤은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황제 마누엘 2세에게 다음과 같은 각서를 썼다. “우리는 헬레니즘(고대 그리스)인이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언어와 문화로, 그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철학자 플레톤은 400년 후인 근대에 현실로 나타난 신생 그리스 탄생의 예언자가 되었고, 그리스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일깨워 주는 기반을 닦았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지 7년이 지난 1460년, 미스트라도 오스만투르크의 손에 넘어가 비잔틴 제국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 후 역사는 미스트라에 ‘보복’을 가한다. 중세 미스트라를 건설할 때, 고대 스파르타 유적의 석재를 건축 재료로 이용했는데, 19세기에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강의 후원으로 1832년 그리스의 초대왕이 된 독일의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의 아들 오토 1세는 고대 그리스에 매료되어 고대 도시 스파르타를 재건하라고 명령해, 미스트라의 건조물을 건축 재료로 사용한 것이다. 사람들은 아래쪽 평지에 건설된 스파르타 시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로부터 100년 후, 미스트라에 남아 있던 극소수의 주민들도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어쩔 수 없이 이주하게 되어 사람이 살지 않게 된 미스트라 시는 나라의 기념물로 지정되어 그리스 고고학 협회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지금의 미스트라는 적막과 숲이 지재하고 있다. 일찍이 건물을 짓기 힘든 지형에 건축가들이 건설한 건물은 서서히 관목 숲에 묻히고 있다. 해발 624m의 경사진 곳에 만들어진 미스트라 시가 지역은 이중으로 쌓은 성벽으로 위쪽 도시와 아래쪽 도시로 나누어져 있다. 아래쪽 도시에는 소박한 주거지 흔적과 성디미트리오스 대성당이 있는 부주교관 미트로폴리스, 프랑크족 시대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페리블레프토스 수도원, 성테오도리 성당과 아펜디코 성당이 있는 브론티히온 수도원, 그리고 지금도 수녀가 기도를 올리고 있는 판다나사 수도원 등이 있다. 부주교관 미트로폴리스의 성디미트리오스 대성당 일부는 현재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14세기에 개축된 페리블레프토스 수도원의 성당은 둥근 지붕 5개가 덮인 그리스 십자형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관 복도가 꽤 넓으며 내부를 장식한 벽화는 크레타파가 제작한 것으로, 신비스러운 정열로 가득하다. 판다나사 수도원의 성당은 비잔틴 양식과 고딕 양식이 융합되어 있다. 언뜻 비잔틴 양식으로 보이는 이 성당의 동쪽 정면에는 고딕 양식의 장식이 보이며, 종루도 고딕 양식이다. 15세기 초에 세워진 성당에 장식되어 있는 프레스코화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남아 있는 벽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꼽히며, 비잔틴 세계 사람들이 바라보던 그리스도교 세계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위쪽 도시에는 데스포테트의 궁전과 부속 성당인 하기아 소피아 성당, 그리고 비잔틴 제국 고관들의 전형적인 저택이 늘어서 있다. 궁전은 13~14세기에 걸쳐 건설되었는데, 파괴된 아치 모양의 큰 창에서 고딕 양식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우익관이 있다. 또한 15세기에 팔라이올로구스 일가가 건설한 3층 건물인 좌익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좌익관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아서 벽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엄격하고 장식성이 없으며 기능적인 넓은 석조 건물로 주위 경관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고관들의 저택 중에는 궁전보다 보존 상태가 좋아서 지금 복원 중이거나 이미 재건된 건물도 있다. 이 저택들은 비잔틴 시대의 세속 건축 양식이나 주거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되고 있다. 위쪽 도시 높은 쪽의 출입구에서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올라가면, 라틴 제국 시대에 프랑크족이 건설한 산성 카스트로 일부가 솟아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둥근 탑에 올라가면 한쪽에는 타이게토스 산맥의 황량한 경사면이, 또 한쪽에는 미스트라의 폐허, 에브로타스 평원의 장엄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비잔틴의 폼페이

지금 미스트라는 ‘비잔틴의 폼페이’라고 불리는데, 그리스인들은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이 곳이 폼페이와 비교되는 것을 싫어한다. 화산 폭발로 묻혀버린 이탈리아의 폐허 폼페이와 미스트라와는 큰 차이가 있다. 폼페이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이며, 미스트라는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인적이 드문 깊은 산 속에 있다. 미스트라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없는 곳이다. 그 덕분에 비잔틴 시대의 유적은 델포이나 올림피아, 에피다우로스 등의 유적이 관광철에 입는 배기가스의 피해를 면하고 있다. 이 곳은 지금도 검은 옷을 입은 판다나사 수도원의 수녀들이 겸허한 기도를 올리는 신앙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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