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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루터, 독일 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성지순례/종교개혁지(루터,칼뱅 등)

by baesungsoo 2018. 3. 2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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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비텐베르그 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비텐베르그 성교회


15171031일(루터 34세) 독일의 사제이자 신학자였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당시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 등 문제점을 지적한 '95개조 명제'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붙였다. 교황청은 진노했고 신성로마제국은 물론 유럽 전역으로 '사건'은 번져갔다.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오는 2017년이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는다. 이 특별한 해를 기념하기 위해 종교개혁 관련 지역들은 20089월부터 '10년 준비 사업'에 착수했다. 종교개혁의 전주곡은 루터보다 100여 년 앞서 체코 출신의 얀 후스(1369~1415)가 먼저 울렸다. 그는 면죄부 판매 중단을 주장하다 콘스탄츠공의회 의결로 1415년 화형당했다. 관광지로 유명한 체코 프라하 광장 한 가운데에 있는 동상이 바로 후스다. 처형 당시 후스는 자신의 이름이 체코어로 '거위'를 뜻하는 것에 빗대 "지금 당신들은 거위 한 마리를 태워 죽이지만 백 년 뒤 백조가 나타나리라"는 예언 같은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 100년이 지난 1517년에 '백조'처럼 루터가 나타났다. 독일 작센주() 라이프치히에서 차로 1시간 반 달리면 '루터의 도시(Lutherstadt)' 비텐베르크에 닿는다. 인구 2만명의 소도시지만 루터가 '95개조 명제'를 붙였던 시내 중심부 비텐베르크 성교회를 방문하는 순례객은 연간 20만 명 이상이다. 1524년 카톨릭 성당에서 루터교 교회로 전환됐고 당시 루터의 논제는 동판문에 각인돼 영구히 남아 있다. 문 상부에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그림은 보통 그림과 달리 눈을 뜬 채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형상이다. 교회의 각성과 개혁의 바람을 은유한다. 성교회의 안내자로 평생을 바친 베르나르트 그룰(75) 씨는 "비텐베르크 교회는 종교개혁의 시작과 전개과정을 보여주며 신앙과 믿음, 개혁을 낳은 '정신적 문화재'"라며 "이를 통해 오늘날 교회들은 내면적인 변화와 신앙을 향한 개선 등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성교회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루터의 참나무'가 있다. 루터가 1520년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파문장을 불태운 후 참나무를 심었던 현장이다. 근처에 루터가 살던 집은 루터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성직자의 독신 수도를 반대한 루터는 수녀였던 카트리나 폰 보라와 결혼해 이곳에 살았다. 박물관에서는 작센 주의 궁정화가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루터의 초상과 제단화, 당시 판매됐던 면죄부, 종교개혁 확산에 쓰인 판화 등의 자료를 볼 수 있다. 파문장을 불태운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와 라이프치히 등지에서 신학논쟁을 벌이며 신앙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름없는 젊은 사제의 외침은 처음에 그다지 반향이 없었으나 점차 확산되면서 결국 1521년 독일 서부 보름스에서 제국회의가 열렸다. 보름스대성당에 불려온 루터는 성당 뒤편의 제국회의장에서 황제 카를5세와 선제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라는 강요를 받는다. 루터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Ich stehe hier, helfe mir, Gott!)"라는 말로 신념을 지켰다. 비장했던 당시 상황을 작은 석판이 증언하고 있다. 목숨까지 위태로진 루터는 그를 지지하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도움으로 구출됐고 루터는 신분을 숨긴 채 보름스에서 270km 떨어진 아이제나흐에서 숨어지냈다. 루터가 이 지역 외곽 바르텐부르크 성에서 헬라어로 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덕분에 성경은 성직자의 전유물에서 평신도들에게까지 보급됐고 종교개혁의 정신은 빠르게 확산됐다. 그가 집필하던 책상과 작은 방은 지금까지 보존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성경 번역을 끝내고 1522년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평생 종교개혁 정신을 전파하다 고향인 아이스레벤에서 생을 마쳤다. 루터의 생가와 그가 서거한 집, 마지막 설교를 한 안드레아교회 등은 관광명소가 됐다. (글 출처- http://economy.hankooki.com/lpage/entv/201103/e2011031018180194220.htm)


비텐베르그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sophptheologian/Pg4O/) 


 비텐베르그 성채교회정문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19)


15171031일 루터가 5개조 논제를 붙였던 성채교회 정문, 성당의 현관문은 전통적으로 칠판으로 되어 있어, 대학에서 일반인에게 전하는 사항을 적는데 사용되었다. 신학 교수 루터는 15171031일 면죄부의 판매에 항의한, 95개조의 유명한 반박문을 이 곳에 공표하였다. 그 때 루터 나이 34세였다


95개조 동판 정문


95개조 동판 정문


95개조 동판 정문

95개조 동판 정문


95개조


비텐베르그 성교회 안쪽입구

  

비텐베르그 성교회 안쪽입구


비텐베르그 성교회 안쪽


비텐베르그 성교회 안쪽입구















교회내부



루터의 묘


루터의 묘


루터의 묘


루터의 묘


멜랑히톤의 묘


멜랑히톤의 묘


멜랑히톤의 묘


마틴 루터


95개조


루터의 처 까타리나 폰 보라




루터와 멜랑히톤


루터와 멜랑히톤


<비텐베르그 광장>


 비텐베르그 성마리아교회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19)


비텐베르크 광장 건너편에 루터가 개혁 설교를 했던 성마리아교회









마틴루터


비텐베르크의 마르크트 광장으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맨 앞)과 필리프 멜랑히톤 (안쪽)의 기념비가 서 있어, 엘베 강가의 이 도시에서 일찍이 세계사가 기록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비텐베르그 대학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19)


 비텐베르그 루터가 1520년 교황의 파문장을 찢은 오크나무 정원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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