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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독일 보름스 대성당(Dom zu Worms), 종교개혁기념공원

성지순례/종교개혁지(루터,칼뱅 등)

by baesungsoo 2018. 3. 2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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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스 베드로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독일어: Wormser Dom)은 독일 서남부 도시 보름스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성당이다. 한때 대성당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마인츠 교구에 속해 있다. 보름스 대성당은 네 개의 둥근 탑과 두 개의 큰 돔 그리고 끝에 성가대석이 설치된 바실리카 양식의 형태를 갖고 있다. 내부는 붉은색 사암으로 지어졌다. 1110년에 축성된 옛 성당 건물의 잔재는 1층 평면 부분과 서쪽 탑의 저층부만 남아있다. 그 외 나머지 부분은 대부분 1181년에 완공된 것들이다. 그러나 서쪽의 성가대석 부분과 아치 부분은 13세기에 시공된 것이며, 14세기에 남쪽 정문이 추가되었고 중앙 돔이 재건되었다. 보름스 대성당은 길이가 110미터, 넓이가 27미터인데, 수랑(십자형 성당의 좌우 날개 부분) 부분까지 포함시키면 36미터이다. 회중석 부분의 높이는 26미터이고, 돔 아래부분의 높이는 40미터이다.

(출처-https://ko.wikipedia.org/wiki/)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정원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









보름스 대성당  내부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09)


성당내부           (출처- http://blog.naver.com/bellzerg/20153363063)

 

보름스 대성당               (출처- http://yesi.kr/bbs/board.php?bo_table=park_gallery&wr_id=179) 

 

소 제대                  (출처- http://blog.naver.com/jrs3943/110106275470)   

 

보름스 대성당 내부

 

성당내부           (출처- http://blog.naver.com/bellzerg/20153363063)

 

성당내부           (출처- http://blog.naver.com/bellzerg/20153363063)

 

성당내부           (출처- http://blog.naver.com/bellzerg/20153363063)

 

성당내부           (출처- http://blog.naver.com/bellzerg/20153363063)

 

성당내부           (출처- http://blog.naver.com/bellzerg/20153363063) 

 

성당내부           (출처- http://blog.naver.com/bellzerg/20153363063)

 

유리화, 크를 5세와 루터           (출처- http://www.cyworld.com/los_cielos/4478645)   

 

루터            (출처- http://www.cyworld.com/los_cielos/4478645

 

성당내부           (출처- http://blog.naver.com/bellzerg/20153363063)


<마틴루터가 재판 받던 자리>


보름스 국회

 

보름스 국회

 

루터 정죄문서 

 

촬스5세 국왕

 

 트렌트 종교회의


마틴 루터가 재판받은 자리 터 기념비


마틴 루터의 체포와 투옥 


15171031"모든 성인의 날" 전날 밤에 루터는 면제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 논제를 성 교회 정문에 내걸었다. 이것을 부친 날이 제성절 이었다제성절은 카톨릭 신자들이 성자칭호를 받고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하며 신유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예를 들면 관절염 환자는 성 야고보에게, 열병이면 비투스에게, 암을 고치기 위해서는 페레그린에게, 심장은 성요한에게, 피부병은 성 로치에게...그들의 이름으로 비는 미신적 행위를 하는 날이 제성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날을 잡아서 정문에 부착하게 되었다논제는 라틴어로 쓰여졌지만 곧바로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 전역에 퍼져나갔다. 루터는 마인즈의 대주교에게도 이 논제의 사본을 보냈고, 대주교도 그 사본 하나를 레오 10세에게 보냈다. 그러나 교황청은 루터의 95개 논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황청에서는 한 미친 수도승의 입을 막으라는 명령 하나로 모든 일이 진정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상황은 교황청의 의도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추기경이자 도미니크 수도회 원장인 카예탄이 멀리 독일에 나타나 루터에게 말하기를 "나는 뉘우친다"(revoco)라는 말 한마디만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루터가 단호히 거부했을 때 교황청은 1520615"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란 교서로 루터를 또 다시 위협하였다. 이 교서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 오 주여 일어나서 당신의 입장을 밝히소서. 야생의 산돼지가 당신의 포도나무를 침범했나이다 . 모든 성자들과 우주적 교회여! 일어나소서. 당신들의 성경해석이 침해받았나이다. 이 교서 접수후 60일 이내에 루터는 교황청에 출두하여 자신의 모든 잘못을 모든 인정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루터는 불태워 버렸다. 교황청은 1521I3"로마 교황이 하는 일은 옳다" (Decet Romannum Pontificem)란 교서로 루터를 파문했다. 1521417 루터는 보름즈(Worms)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앞에 서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게 되었다. 새로 황제가 된 찰스 5(그는 스페인의 국왕이기도 함)는 교황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신앙적으로는 독실한 카톨릭이었다. 황제를 위시하여 선제후, 영주, 주교, 대도시의 대표자들과 질문을 받게 되었다. 하나는 그가 쓴 책의 저작권을 인정할 것인가였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중에 지금이라도 뉘우칠 부분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자기 앞에 놓여진 책들을 보고 "이 책들은 모두 다 내 것이고 나는 이것 외에도 쓴 책이 더 있습니다"고 용기를 내어 단호하게 말했으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응답했다. 루터는 간신히 하루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루터에게는 자신의 저술 중 자신의 생을 위태롭게 하는 내용을 번복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다음날 루터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황제 폐이브 여러 높으신 분들이 간단한 답을 요구하시니 번잡한 이유없이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납득되지 않는 한 저는 교황이나 종교회의들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모순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또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내가 서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황제는 1521526일 교황과 마찬가지로 루터를 파문했다. 마틴 루터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정원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말 것이며, 그를 숨기지 말고, 은밀하게 공공연하게 말로나 행위로써 그에게 도움을 베풀거나 추종하거나 지지하거나 혹은 원조하지 말 것이다. 그를 잡을 수있는 곳에서는, 그를 붙잡아 제어하고 생포하여 단단히 결박한 다음 우리에게 압송해야 한다. 이때 작센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납치극을 벌여 루터를 그의 영지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채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이 성채에서 가명을 쓰고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변장을 한 채 10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이 기간은 루터에게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신약 성경 전체를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성공했고 곧 이어 구약 번역도 시작되었다. 경이롭게도 12년이나 걸려 15349월 최초의 완역본인 비텐베르그 성경이 출판되었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 설교· 저작· 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루터는 1525613일 카타리나 폰 보라 수녀와 결혼하게 됐다. 수도원의 해체로 말미암아 수녀들이 결흔을 시작했으나 보라수녀는 루터 외에는 도무지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인문주의자들이 빈정대는 말, 곧 종교개혁은 한 수도사와 한 수녀의 연합으로 끝났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니었다. 루터는 보라를 깊이 사랑하여 "나는 나의 카티(Katie)를 프랑스 베니스하고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카티, 당신은 당신 사랑하는 정직한 남자와 결혼했소 당신은 황후요"라고 고백했다. 루터는 1546218일에 63세의 나이로 아이스레벤에서 사망하여 유해는 비텐베르그 성 교회(the Castle Church)에 안치되었다. 그의 말년은 그의 개혁초기와 같이 매일 매일 분주하였다. 끊임없는 편지답장, 계속되는 강의와 설교, 교회지도 등이 그를 여전히 바쁘게 했다. 게다가 만성적 귓병, 담석증과 같은 질병도 계속적으고 그를 괴롭혔다. 또한 그가 진정 원치 않았던 개신교회의 분열과 다툼도 그의 마음을 몸시 아프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초지일관 성경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가 젊었을 때부터 가졌던 신앙의 자세로 무지한 농민과 욕심많은 정치가들, 자신과 의견이 다른 형제들을 지도했다. 그는 만스펠트 백작 영지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태어나고 세례받은 아이스레벤에서 최후의 날을 맞이했다. 그의 동역자가 임종 직전 "선생님, 선생님께서 평생에 가르치신 교리와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서 돌아가시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루터는 육신이 연약한 중에도 온 힘을 다해 큰소기로 "! 아멘"하고 말하였다. 새벽 3시가 되어 루터는 운명하였다. 그의 수제자이자 후계자인 멜랑히톤은 루터의 죽음을 표현하기를 "! 마부는 갔다. 이스라엘의 마차가 사라졌다" 말을 하였다


마틴 루터가 재판받은 자리 터 기념신발


보름스 성문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19 )


루터가 재판 중 설교하던 교회


보름스 성마그누스교회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19 )


보름스에서 루터를 지지하는 첫 설교가 이루어진 성마그누스교회


<종교개혁기념공원>


보름스 종교개혁 기념공원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19 )


1868년 완성된 보름스 종교개혁 기념공원, 루터를 비롯하여 발도,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롤라 등  앞선 종교개혁자들과 루터를 도와 종교개혁을 이끈 멜랑히톤, 작센 선제후(프리드리히), 헤센 방백(필립) 등의 동상이 서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개인의 의지와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느끼게 한다. 12세기 프랑스에서 이단으로 화형당한 발도의 작은 불꽃이 4백년 만에 유럽 전체를 불태운 불길이 되었다.




루터의 동상(중앙), 멜랑히톤(오른쪽에서 세번째) 등과 몇몇 선제후들의 동상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09)

 

루터 기념비          (출처- http://www.cyworld.com/los_cielos/4478645)

 


마틴 루터


필립


왈도


얀 후스




























 

루터가 기사들에게 체포를 당했던곳

 

루터가 기사들에게 체포를 당했던곳


마틴 루터의 체포와 투옥

 

1517년 10월 31일 "모든 성인의 날" 전날 밤에 루터는 면제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 논제를 성 교회 정문에 내걸었다. 이것을 부친 날이 제성절 이었다.  제성절은 카톨릭 신자들이 성자칭호를 받고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하며 신유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예를 들면 관절염 환자는 성 야고보에게, 열병이면 비투스에게, 암을 고치기 위해서는 페레그린에게, 심장은 성요한에게, 피부병은 성 로치에게...그들의 이름으로 비는 미신적 행위를 하는 날이 제성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날을 잡아서 정문에 부착하게 되었다. 논제는 라틴어로 쓰여졌지만 곧바로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 전역에 퍼져나갔다. 루터는 마인즈의 대주교에게도 이 논제의 사본을 보냈고, 대주교도 그 사본 하나를 레오 10세에게 보냈다. 그러나 교황청은 루터의 95개 논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황청에서는 한 미친 수도승의 입을 막으라는 명령 하나로 모든 일이 진정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상황은 교황청의 의도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추기경이자 도미니크 수도회 원장인 카예탄이 멀리 독일에 나타나 루터에게 말하기를 "나는 뉘우친다"(revoco)라는 말 한마디만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루터가 단호히 거부했을 때 교황청은 1520년 6월 15일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란 교서로 루터를 또 다시 위협하였다. 이 교서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 오 주여 일어나서 당신의 입장을 밝히소서. 야생의 산돼지가 당신의 포도나무를 침범했나이다 . 모든 성자들과 우주적 교회여! 일어나소서. 당신들의 성경해석이 침해받았나이다. 이 교서 접수후 60일 이내에 루터는 교황청에 출두하여 자신의 모든 잘못을 모든 인정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루터는 불태워 버렸다. 교황청은 1521년 I월 3일 "로마 교황이 하는 일은 옳다" (Decet Romannum Pontificem)란 교서로 루터를 파문했다. 1521년 4월 17일 루터는 보름즈(Worms)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앞에 서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게 되었다. 새로 황제가 된 찰스 5세(그는 스페인의 국왕이기도 함)는 교황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신앙적으로는 독실한 카톨릭이었다. 황제를 위시하여 선제후, 영주, 주교, 대도시의 대표자들과 질문을 받게 되었다. 하나는 그가 쓴 책의 저작권을 인정할 것인가였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중에 지금이라도 뉘우칠 부분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자기 앞에 놓여진 책들을 보고 "이 책들은 모두 다 내 것이고 나는 이것 외에도 쓴 책이 더 있습니다"고 용기를 내어 단호하게 말했으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응답했다. 루터는 간신히 하루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루터에게는 자신의 저술 중 자신의 생을 위태롭게 하는 내용을 번복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다음날 루터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황제 폐이브 여러 높으신 분들이 간단한 답을 요구하시니 번잡한 이유없이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납득되지 않는 한 저는 교황이나 종교회의들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모순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또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내가 서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황제는 1521년 5월 26일 교황과 마찬가지로 루터를 파문했다. 마틴 루터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정원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말 것이며, 그를 숨기지 말고, 은밀하게 공공연하게 말로나 행위로써 그에게 도움을 베풀거나 추종하거나 지지하거나 혹은 원조하지 말 것이다. 그를 잡을 수있는 곳에서는, 그를 붙잡아 제어하고 생포하여 단단히 결박한 다음 우리에게 압송해야 한다. 이때 작센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납치극’을 벌여 루터를 그의 영지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채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이 성채에서 가명을 쓰고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변장을 한 채 10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이 기간은 루터에게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신약 성경 전체를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성공했고 곧 이어 구약 번역도 시작되었다. 경이롭게도 총 12년이나 걸려 1534년 9월 최초의 완역본인 비텐베르그 성경이 출판되었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루터는 1525년 6월 13일 카타리나 폰 보라 수녀와 결혼하게 됐다. 수도원의 해체로 말미암아 수녀들이 결흔을 시작했으나 보라수녀는 루터 외에는 도무지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인문주의자들이 빈정대는 말, 곧 종교개혁은 한 수도사와 한 수녀의 연합으로 끝났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니었다. 루터는 보라를 깊이 사랑하여 "나는 나의 카티(Katie)를 프랑스 베니스하고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카티, 당신은 당신 사랑하는 정직한 남자와 결혼했소 당신은 황후요"라고 고백했다. 루터는 1546년 2월 18일에 63세의 나이로 아이스벤에서 사망하여 유해는 비텐베르그 성 교회(the Castle Church)에 안치되었다. 그의 말년은 그의 개혁초기와 같이 매일 매일 분주하였다. 끊임없는 편지답장, 계속되는 강의와 설교, 교회지도 등이 그를 여전히 바쁘게 했다. 게다가 만성적 귓병, 담석증과 같은 질병도 계속적으고 그를 괴롭혔다. 또한 그가 진정 원치 않았던 개신교회의 분열과 다툼도 그의 마음을 몸시 아프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초지일관 성경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가 젊었을 때부터 가졌던 신앙의 자세로 무지한 농민과 욕심많은 정치가들, 자신과 의견이 다른 형제들을 지도했다. 그는 만스펠트 백작 영지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태어나고 세례받은 아이스레벤에서 최후의 날을 맞이했다. 그의 동역자가 임종 직전 "선생님, 선생님께서 평생에 가르치신 교리와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서 돌아가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루터는 육신이 연약한 중에도 온 힘을 다해 큰소기로 "오! 아멘"하고 말하였다. 새벽 3시가 되어 루터는 운명하였다. 그의 수제자이자 후계자인 멜랑히톤은 루터의 죽음을 표현하기를 "아! 마부는 갔다. 이스라엘의 마차가 사라졌다"는 말을 하였다.


보름스 외각의 루터나무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9qYT/319 )


루터가 보름스에 와서 심문을 받을 때 주민들 사이에 찬반 논쟁이 벌어졌는데, 루터를 지지하던 한 여인이 논쟁을 하다가 "루터가 옳다면 이 지팡이에서 싹이 날 것이다." 하면서 잡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그것이 싹이 나서 거목이 되었다는 전설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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