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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독일 하이델베르크 신학 논쟁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성지순례/종교개혁지(루터,칼뱅 등)

by baesungsoo 2018. 3. 2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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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8년 하이델베르크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와 루터의 논쟁 기념비


하이델베르크 논쟁 (Heidelberg Disputation) 1518425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강당에서 열렸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수도원 대의원으로서 그의 견해를 분명히 밝히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의 대조는 그의 논제의 핵심이었다. 여기서 루터는 인간 부패와 노예의지에 대한 교리를 옹호했다.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부서 (Martin Bucer)는 루터 (Luther)를 이곳에서 들었고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이 논쟁이 요한 엑크(Johann Eck) 마틴 루터에게 도전하여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ebate) 으로 이끌게 되었다. (출처-https://ko.wikipedia.org/wiki)


95개 논제 발표후 5개월이 지난 15184월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한 이름 없는 수도사의 주장 안에서 점차 비등하는 폭발력을 잠재우기 위해 그로 하여금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독일 분회에서 자신의 신학을 소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모임은 루터의 주장을 결코 억누를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바르고 강한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원 담을 훌쩍 넘어서 온 세상에 메아리로 번졌으며, 면죄부 판매 논쟁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는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십자가 신학을 발표하여,영광의 신학, 힘과 정복을 추종하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을 비판하였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인간은 구원을 받을만한 도덕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던 영광의 신학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강조한 은혜의 신학이기도 하였다. 루터는 십자가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영광의 신학은 통찰력을 갖고 있지도 합당한 신학도 아니다. 실제로 자연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는 그리스도를 모르므로 고통보다 행적을, 어리석음대신 지혜를 선호하기 때문에 십자가 고통에 감추어진 하느님(Absconditus Deus)를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한 자들은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필립비 3:18)이다. 실제로 그들은 십자가의 고통을 혐오하고, 업적들과 그 영광을 좋아하며, 그리하여 십자가의 선을 악이라, 악의 행업을 선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자기 행업들에서 추론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남용했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와 반대로, 즉 당신의 고통을 통해 인식되기를 원하셨고, 또 그리하여 가시적인 것에서부터의 인식을 새로이 입증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행적안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분으로 하느님을 흠숭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고통 안에 자신을 감추시는 분으로 예배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라도 그런 자들이 하느님의 자기 비하와 십자가 사건을 인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고, 그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배척하신다. '야훼 당신은 진정 숨어계신 하느님이십니다.(이사야45:15)” 루터가 자신의 주장 포기를 거부하자, 교황은 그를 종교 재판에 넘기려고 로마로 소환 지시하였다. 그러나 프레데릭 선제후와 대학이 이것에 반대하면서 대신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카예탄 추기경이 그를 심문하도록 주선하였다. 추기경은 15181012- 15일에 소환당한 그에게 면죄부에 대한 교황의 교령(Unigenitus. 1343)을 가리키면서 면죄부를 승인한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위협하였다. 루터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회가 아닌, 성서가 가진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죄인이라는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인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신다는, 루터의 표현대로 수동적인 의인 칭의론(이신칭의)도 굽히지 않았다. 추기경은 결국 루터로부터 나는 뉘우친다’(revoco)는 말을 얻어내지 못하자 프레데릭 선제후에게 편지를 써서 루터를 로마로 넘기거나 영지로부터 추방하라고 위협 섞인 강권을 하였지만, 선제후는 루터를 보호하였다. (출처- )


하이델베르크 논제(1518.4.26)   (출처-http://cafe.daum.net/11bible/)

     

신학적인 논제   

1. 생활의 가장 유익한 교리인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을 의의 길로 나가게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한다.

2. 자연적인 이성의 도움을 받아 거듭거듭 행해지는, 말하자면 인간적인 업적은 더욱 더 그 목적에 이를 수 없게 된다.

3. 비록 인간의 업적들은 언제나매력 있고 선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그 업적 자체는 "죽을 죄"인 것과 같을 따름이다.

4. 비록 하나님의 업적은 항상 매력없고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그 업적 자체는 참으로 영원한 공적인 것이다.

5. 이미 말한 대로 인간의 업적은 마치 범죄인 것같이 보이나 그것은 "죽을 죄"는 아니다.(선하게 보이는 업적을 말한다)

6.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이(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행하시는 일을 말한다) 마치 죄 없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공적이 아니다.

7. 만일 의인들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공포상태에서 그들의 행위를 "죽을 죄"로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업적은 "죽을 죄"가 될 것이다.

8. 더군다나 인간의 업적이 아무 두려움 없이 순수하고 악한 자아안전 가운데서 행해진다면 그것은 "죽을 죄"가 되는 것이다.

9. 그리스도 없는 업적은 죽은 것이며,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포기하는 위험한 일을 행하는 것과 같이 보인다.

10. 사실 인간의 업적이 무기력할 수는 있지만 그 반면에 유해하고 중한 죄는 돌 수 없다고 하는 이론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11. 정죄의 심판이 모든 행동에 있어서 두렵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교만을 피할 수 없거나 혹은 참 소망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12. 인간들이 죄를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두렵게 여길 때 비로소 그 죄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용서받을 수 있게 된다.

13. 자유의지는 타락 이후 오직 그 명칭뿐이며,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한 그것은 죽을 죄를 범하는 것이다.

14. 타락 이후 자유의지는 다만 수동적인 능력으로만 선을 행할 힘을 가지고 있으며, 능동적인 힘으로는 항상 악을 행하게 된다.

15. (타락 이후)자유의지는 무죄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더우기 능동적인 힘으로 선을 행할 수는 없고 다만 그의 수동적인 힘으로만 선을 행할 수 있다.

16.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행함으로써 은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죄에 죄를 더 함으로써 이중으로 범죄하게 된다.

17.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겸비케 하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구하는 욕망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다.

18.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기 전에 인간은 그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전적으로 실망할 수 밖에 없다.

19.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실제로 일어난 사물들 가운데서 분명히 인식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학자로 불림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1:20)

20. 그러나 고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내어진 하나님의 보이고 명백한 것들을 깨닫는 사람은 신학자로 불림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21. 영광의 신학(eine Theologie der Herrlichkeit)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고 선을 악이라고 부른다. 십자가의 신학(eine Theologie des Kreuzes)은 사물을 사실 그대로 부른다.

22. (인간의)업적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인지에 의하여 이해된 대로 관찰하려는 그런 지혜는 완전히 교만해지고 어두워지고 완고하여져 있는 것이다.

23.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을 죽이고 욕하고 비난하고 심판하며 정죄한다.(4:15)

24.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지혜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며, 또한 율법이 회피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이 없이는 사람은 가장 선한 것을 가장 나쁘게 오용하게 된다.

25. 많이 행하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업적 없이라도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사람이 의롭다.

26.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고 명하나, 그것이 이루어진 일은 결코 없다. 은총은 "이것을 믿으라"고 말하나, 모든 것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

27. 사실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업적을 활동하는(wirkend)일이라고 부르고 우리의 업적을 완성된 일(das gewirkte Werk)이라고 불러야 하며, 그 활동하는 일은 은총에 의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완성된 일이 되어야 한다.

28. 하나님의 사랑은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을 발견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창조하신다. 인간의 사랑은 그것을 기쁘게 하는 것을 통하여 존재하게 된다.

 

<철학적인 논제>

29. 자신의 영혼에 대하여 위험을 범함없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여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어리석게 되어야 한다.

30. 만일 어떤 사람이 미혼이라면 그의 정열의 악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어리석은 자 곧 크리스찬이 되지 않으면 충분히 철학적으로 사색하지 못할 것이다.

31.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영혼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가 세계를 영원하다고 믿은 것은 용이한 일이었다.

32.피조물들의 수만큼 질체적인 형상 (forms substantiales)도 있다는 명제가 수락된 다음에는 그것들이 모두 물질적인 것임을 수락할 필요가 있다.

33. 이 세상에는 필연적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materie)에서 나오는 것은 역시 필연적으로 자연에 따라(natuerlicheweise)존재하게 된다.

34.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을 인정했다면, 거기에 따라서 물질이 혼자서 저절로 존재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35.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활동면에는 무한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나, 힘과 물질면에 있어서 창조된 것들은 모두 다 무한하다.

36.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자신의 이념보다 실제로 나은 플라톤의 철학이념을 부당하게 비난하고 비웃는다.

37. 물질적인 것들의 매우 정확한 질서가 피타고라스에 의하여 교묘하게 주장되었으나, 플라톤에 의하여 주장된 이념의 상호작용(die Gemeinschaft der Ideen)은 더 교묘하다.

38.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쟁은 그 설전(Luftstreiche)에 있어서 팔메니데스의 단일성에 관한 이념(이것은 크리스찬으로서 용납할 만하다)을 맹렬히 공격한다.

39. 실제로 그렇게 된 것같이 보이는 대로, 만일 아낙사고라스가 무한대로(Infinity)로 형식(Form)에 선행하도록 하였다면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것을 인정치 않으려고 했다 할지라도 아낙사고라스는 철학자들 중에서 최고의 철학자였을 것이다.

40.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손실(Beraubung), 물질, 형식, 가동적인 것, 부동적인 것, 추진력, 힘 등이 모두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Heidelberg Katechismus]


독일의 파르츠 선거후(選擧侯) 프리드리히(3세)가 루터파(派)가 우세하던 자기 영내에 칼뱅계의 개혁운동을 완성시키기 위한 4대 계획의 하나로 C.올레비아누스, Z.우르지누스 등의 교회인(敎會人), 하이델베르크 대학인 등의 그룹에게 명하여, 루터파와도 타협할 수 있도록 작성한 문답체의 교리서이다. 1563년 파르츠의 교회회의를 거쳐 공포된 이 교리문답은 <인간의 범죄와 참상><구원><감사>의 3부로 나누어,사도신경, 성례전, 십계명, 주기도문 등에 나타난 기본교리를 정리한 것으로서, 칼뱅주의이면서도 조화와 포용의 입장을 취하여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이 교리문답은  총론(1-2문), 1부(3-11문), 2부(12-85문), 3부(86-129문) 로 구성되어 있다.

제1문을 예로 보면

<제 1 문> 생사간에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 임시 위로, 거짓 위로

▣ 임시 위로   당장은 위로 같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 것

▣ 거짓 위로   우선은 위로 같으나 단지 속임수에 불과한 것

☞ 생사간에  나의 유일한 위로는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 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자기의 보배로운 피로 온전히 대속하셨으며,

  ▣ 나를 사탄의 모든 힘으로부터 구속해주셨으며,

  ▣ 보호하십니다.

◎ 보호하심

-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내 머리에서 머리카락 하나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시며,

- 모든 것이 내게 복이 되도록 하신다.

◎ 그 때문에

  ▣ 그는 나에게 성령으로 영생을 보증하시며,

  ▣ 그를 향하여 자원하는 마음과 준비된 마음으로 살도록 하십니다.

요점

 ▣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 이 위로를 가슴에 품고 우리의 남은 생애를 성도로 살아가십시다 



<하이델베르그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출처-http://www.dtnews24.com/news/articleView.html?idxno=425835)       

 

세계 최초의 대학은 1186년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Bologna, 법학)이라고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프랑스 파리 대학(Paris, 신학), 영국의 옥스퍼드대학(Oxford), 케임브리지대학 등이 설립되었지만, 북유럽은 남유럽보다 약1세기 가량 늦은 1347년 체코의 프라하대학과 오스트리아 빈 대학이 설립된데 이어서 1385년 황제선출권을 가졌던 7명의 선제후(選帝侯) 중 한 사람이던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루프레히드 1(Ruprecht : 1309~1390)가 교황 우르반 6(Urban : 1378~ 1390)의 인가를 받아 세 번째로 하이델베르크대학을 설립했다(선제후에 관해서는 2017.3.14. 비엔나 슈테반 대성당 참조). 당시 일반인들은 여행이나 거주이전이 불가능했으나, 대학생은 루프레히드 황제의 대학 헌장(憲章)’으로 자유통행권, 체류권(즉 시민권), 면세권 등 3개의 특권을 누릴 수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개교하자 유럽 각지에서 50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몰려들 만큼 인기였다. 하이델베르크는 오늘날 3만 명이나 되는 대학생 중 1/5인 약6000명이 외국 유학생이라고 하는 대학의 도시로서 학생을 존중하는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도서관은 물론 지하실의 무기고를 개조한 학생식당 멘자(Mensa)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여 하이델베르크를 찾은 여행객들도 학생식당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의 중심지인 시청사와 성령교회 등이 있는 마르크트 광장에서 비스마르크 광장까지 구시가지 중심지를 하우프트 거리(Hauftstraße)라고 하는데, 하우프트 거리 양쪽에는 각종 기념품가게, 레스토랑 등이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여행의 시작이자 마지막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 끄트머리에 오래된 프라타너스 가로수가 듬성듬성 있고, 바로크식 지붕과 예술감 넘치는 건물이 하이델베르크대학이다. 대학은 설립 당시에는 신학, 법학, 철학만 가르치다가 점점 영역이 확대되고 학생 숫자도 크게 늘어나 도시의 여러 건물로 분산되어서 얼핏 보면 일반주택이나 사무실처럼 보이는 수많은 대학 강의실이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이다. 사자상과 분수대가 있는 곳이 최초의 대학 광장인데, 워낙 비좁아서 1960년대 네카 강 건너편에 캠퍼스를 옮기고 최초의 대학건물은 도서관과 박물관 등 이른바 학생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학생회관 2층에는 아름다운 성당처럼 꾸민 대강당과 고서 98만권을 비롯하여 필사본 6800권 등 300만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도서관이 있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은 15171031일 베를린과 라이프치히 사이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교수이자 사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5)가 비텐베르크의 만성교회(Church of All Saints) 출입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고 개혁을 요구함으로서 벌어진 종교개혁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다른 대학과 달리 오랫동안 학생감옥(Sutudenten Karzer)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이 특징이다. 먼저, 이슬람에게 성지 예루살렘을 빼앗긴 가톨릭은 이를 되찾기 위하여 교황 우르반 2세의 호소로 전후 14회에 걸친 십자군전쟁(1095~1456)을 벌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어서 클레멘스 5, 요한 22, 베네딕트 12, 클레멘스 6, 이노센트 6, 우르반 5, 그레고리 11세 등 7명의 프랑스출신 교황은 로마교황청이 아닌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에 머물렀다(1309~1377). 이로서 아비뇽교황청과 로마교황청간의 정통성 분쟁이 시작되었고, 14세기 말에는 영국의 위클리프(John Wycliff: 1324~1384), 보헤미아 프라하대학의 후스(Jan Hus; 1372~1415), 네덜란드의 에라므스(Erasmus: 1469~1536) 등이 세속화 되어가는 가톨릭과 성직자들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의 물꼬가 터졌으나, 1517년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가 성베드로 대성당의 신축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벌인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자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고,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과 이를 반대하는 교황파와 30년 동안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다. 1555년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 의해서 주민의 신앙의 결정권은 영지를 다스리는 제후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불완전한 신앙의 자유였으나, 그나마 17세기 로마제국의 황제가 개신교 신앙을 취소하자 또다시 신구교도간의 30년전쟁(1618~1648)이 벌어졌다. 결국 1648년 웨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종교전쟁이 끝나고 개인의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는데, 1803년 프레드리히 빌헬름 3세가 하이델베르크대학을 독일 최초의 국립대학으로 승격한 뒤부터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 강의를 시작하고, 대학명칭도 빌헬름 3세의 이름을 추가하여 루프레히트 카를스 하이델베르크대학(Ruptrecht Karls Universitet Hidelberg)’이라고 했다. 이 대학교의 지질-고생물학 연구소에는 턱뼈 화석인 '하이델베르크인의 하악골'이 전시되어 있는데, 학자들은 이 화석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분류하고 있다.


대학설립자 루프트레히트 1세     (출처-http://www.dtnews24.com/news/articleView.html?idxno=425835)


하이델베르그대학 총장실 건물


하이델베르그대학 총장실 건물


하이델베르그대학 총장실 건물


하이델베르그대학 총장실 건물


하이델베르그대학 총장실 건물


하이델베르그대학 총장실 건물


하이델베르그대학 총장실 건물


하이델베르그대학 총장실 건물




하이델베르그 대학 , 시내 도처에 단과대별로 나누어져 있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루프레히트카를대학교)


하이델베르그 대학


하이델베르그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물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물관       (출처-http://cafe.daum.net/lcg420)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물관       (출처-http://cafe.daum.net/lcg420)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물관       (출처-http://cafe.daum.net/lcg420)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물관       (출처-http://cafe.daum.net/lcg420)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물관       (출처-http://cafe.daum.net/lcg420)


노벨상 수상자들       (출처-http://cafe.daum.net/lcg420)


1986년이 설립 600주년 해이다.       (출처-http://cafe.daum.net/lcg420)


2008년 노벨의학상 수상자 하랄트 쭈어 하우젠 교수       (출처-http://cafe.daum.net/lcg420)


2층 대강의실       (출처-http://cafe.daum.net/lcg420)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물관  2층 대강의실     (출처-http://cafe.daum.net/lcg420)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물관 2층 대강의실      (출처-http://cafe.daum.net/lcg420)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물관 2층 대강의실      (출처-http://cafe.daum.net/lcg420)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물관  2층 대강의실     (출처-http://cafe.daum.net/lcg420)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물관 2층 대강의실      (출처-http://cafe.daum.net/lcg420)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박물관 2층 대강의실      (출처-http://cafe.daum.net/lcg420)


설립자 루프레히트 1세       (출처-http://cafe.daum.net/lcg420)


1760-1770년대 교정       (출처-http://cafe.daum.net/lcg420)


교황 우르반 6세의 설립인가서, 1385년 10월 23일          (출처-http://cafe.daum.net/lcg420)


루프레히트 1세의 재단 설립증서, 1386년 10월 1일       (출처-http://cafe.daum.net/lcg420)


14세기 인체조직도       (출처-http://cafe.daum.net/lcg420)


결투       (출처-http://cafe.daum.net/lcg420)


19세기 독일 대표적 법학자 게오르그 엘리네크       (출처-http://cafe.daum.net/lcg420)


막스베버와 마리안베버       (출처-http://cafe.daum.net/lcg420)


1804년 대학광장       (출처-http://cafe.daum.net/lcg420)


<학생감옥>


학생감옥     (출처-http://blog.naver.com/dkseon00/221113034509)




하이델베르크 대학 학생감옥     (출처-http://cafe.daum.net/posung57/MK51/)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구시가지의 도로변에 다른 건물들과 섞여 있어 대학 캠퍼스라는 구분이 없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영국과 독일은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와 괴팅겐 대학에 대해서는 양국이 폭격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건물은 구시가지에 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 대부분이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는 학생감옥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한데,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학생감옥은 구시가지의 주택가처럼 보이는 뒷골목에 있다.

<학생감옥> 중세대학은 제후의 행정권사법권과 독립하여 대학자치권을 갖고 학생들이 무단결석하거나 과음, 혹은 국가권력에 반항하는 경우에는 그 책임의 정도에 따라서 약1~4주 동안 감옥에 가둘 수 있는 재판권을 행사했다. 1778년부터 1914년까지 150여 년 동안 유지되었던 학생감옥은 대학 구건물 뒤에 붙어있는데, 감옥은 대학의 수위(守衛)가 관리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낮에는 강의를 받으러 나가고 밤에 감옥에 돌아와서 잠만 잤다고 하는데, 일부 학생들은 젊은이의 치기를 자랑하며 일부러 술을 마시고 감옥을 자청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학생감옥의 입장료는 3유로인데, 강의실 일부를 개조한 감옥의 벽마다 당시 수감되었던 학생들의 낙서가 수두룩하다. 게다가 근래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의 낙서까지 더해져서 매우 지저분해졌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학생감옥     (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ww2058&logNo=221135489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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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감옥     (출처-http://blog.naver.com/dkseon00/221113034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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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대학 학생감옥     (출처-http://cafe.daum.net/posung57/MK51/)


학생감옥     (출처-http://blog.naver.com/dkseon00/221113034509)




하이델베르크 대학 학생감옥     (출처-http://cafe.daum.net/posung57/MK51/)




하이델베르크 대학 학생감옥     (출처-http://cafe.daum.net/posung57/MK51/)


<레드 옥선(Red Oxen)>        (출처-http://www.dtnews24.com/news/articleView.html?idxno=425835)


대학에서 고성으로 올라가는 골목에는 예술애호가인 보아제(Biosseree)가 지은 건물에 문을 열었던 학사주점이 지금까지도 몇 개 운영되고 있다. 당시 학생들이 즐겨 찾았던 주점 중 가장 유명한 주점은 1839년에 개점한 붉은 황소 머리를 상표로 하는 레드 옥선(Red Oxen)으로서 이곳은 1899년 가상의 국가 칼스버그의 황태자 하인리히가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유학와서 하숙집 하녀와 사랑하게 된다는 빌헬름 마이어-푀르스터’(Wilhelm Meyer- forster)의 중편소설 카를 하인리히(Karl Heinrich)의 무대가 되고, 1927년 영화 황태자의 첫 사랑(The Student Prince in Old Heidelberg)1954황태자의 첫사랑(The Student Prince)’이란 5막짜리 뮤지컬 영화로 제작되어서 더욱 유명해졌다. 나는 소설이나 영화도 관람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은 레드 오션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는 것을 마치 하이델베르크 관광의 필수 코스처럼 여길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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