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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교회(사도 도마가 세운 교회, 인도 코친)

성지순례/인도,아프리카,호주 등

by baesungsoo 2006. 4. 1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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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교회     (출처-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25&logId=871755)
조선일보 뉴델리 특파원, 최준석 기자의 블로그

 

인도 서해안 남단의 케랄라주 최대 도시 코친은 특이했다. 기독교도가 주민 135만(2001년 인구 조사)의 다수를 차지하는 힌두교 나라속에 자리잡은 ‘종교의 섬’이고, ‘시리아 교회’라는 잘 들어보지못한 기독교 종파가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국인 여성 임정숙씨(1956년생)와 19년전 열애끝에 결혼한 케랄라의 최대 호텔 체인 CGH어스그룹의 이사인 바부 도미니크 이사(1959년생)를 만나 그의 종교를 물으니 “시리아 교회 신자”라고 했다. 코친에서 오래된 역사적인 장소인 ‘포트 코친’을 갔을 때 만난 CGH호텔의 계열사인 브룬톤 보트야드 호텔의 20대 직원도, 현지에서 만난 LG전자의 지역 책임자 마틴 조셉도 마찬가지였다. 이로인해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종교를 물어보곤했다. “기독교도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절대적입니다. 코친 시장, 연방의회 하원의원, 주 의회 하원 의원이 모두 로마 카톨릭이거나, 시리아 교회 소속이지요. 공산당도 기독교의 지역내 영향력 때문에 기독교도인 무소속 후보를 선거에서 지지했을 정도입니다.” 이 지역 최대 신문인 말라얄라 마노라마의 자베드 파르베쉬 기자가 말한다. 말라얄라 마노라마의 사주도 시리아 교회신자이다. 시리아 교회는 서기 52년 예수의 12사제중 한 명인 사제 도마가 인도에 건너와 전도하면서 시작됐다고 현지인들은 말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커뮤니티중의 하나라고 이들은 자랑했다. 코친 시내의 마린 드라이브에 자리잡은 코친 최대의 시리아 교회인 성 마리아 성당(St. Mary’s Cathedral Basilica)은 밝은 노랑색으로 칠하고 공을 들여지은 예쁜 건축물이었다.  50대의 피부가 검은 인도인 주교인 안토니 신부는 기자에게 “기원후 52년에 사도 도마가 코친 북부 케랄라의 해안에 상륙해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도했지요. 그가 세운 교회가 시리아 교회입니다”라고 했다. 교회 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자신의 방 책상 위에 놓인 소책자를 들더니 손으로 세기 시작해 23개라고 한다. 숫자를 좋아하는 기자가 그러면 신자는 얼마냐고 다시 물으니, 사전 예고없이 찾아온 불청객의 질문에 그렇게 싫다하지 않고 다시 책자를 넘겨가더니 5961 가족이라고 했다. 하지만 신자들이 뒤에 기다리고 있어 바쁘게 보이는 그를 붙잡고 다시 질문을 하기는 힘들었다. 기자는 기독교하면 신교와 구교의 구분, 그리고 신교에는 다양한 종파가 있는 줄 알고 있고, 구교에는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의 구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동방 정교는 콘스탄티노플에 대주교가 있었고, 아르메니아교회, 러시아정교 등만 알고 있었다. 코친에서 기자가 발견한 시리아 교회에 대해서는 사전 지식이 없었다. 더구나 ‘시리아 교회’는 인도에 뿌리를 내린뒤 2000여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분파가 적지않게 생겨 기자의 혼선을 부채질했다. 코친에서 만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설명을 해줬다. 어떤 이는 ‘시리아 정교’(Syrian Oxthodox Church) ‘시리아 자코바이트’(Syrian Jacobite) ‘시리아 카톨릭’(Syrian Catholic) 등 3개가 있다고 했고, 다른 이는 더 종류가 많다며 다른 ‘버전’을 내놨다. 이로인해 끝내 명쾌한 해답을 얻지못했고, 숙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코친에서 시리아 교회는 소수였고, 훗날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전해진 로마 카톨릭교회가 다수였다. 코친의 기독교인들은 상당수 서양식 이름을 갖고 있는 점도 특이했다. 필립 매튜, 마틴 조셉, 바부 도미니크 등. 이름만 봐서는 서양인으로 착각할 정도. 이들은 기독교 신자일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실력자들이다. 인도는 힌두교가 전체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며 정치·경제를 압도하고 있는 나라다.  필립 매튜(58)는 지역 최대 신문인 말라얄라 마노라마 경영주이고, 마틴 조셉은 말라얄라 마노라마 신문에 연 1000만 루피(2억5000만원)의 광고비를 쓰는 지역 최대의 광고주인 LG전자 지역 책임자. 바부 도미니크는 위에서 말한대로 케랄라주내 최대의 호텔 체인의 이사이자 오너의 아들이다.  기독교가 코친에 일찍 전도될 수 있었던 건 이 지역 특유의 개방성 때문이다. 코친은 인도 서해안에서 뭄바이(옛 봄베이)에 이은 두 번 째 크기의 항구도시로, 서쪽으로는 동아프리카  및 중동 지역과, 동쪽으로 중국과 고대부터 교역이 있었다. 외부 세계와 교역과 교류로 인해 이곳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외부 문화를 존중하고 극단적으로 배척하지 않는 포용성과 개방성인 문화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유대교회. 바닥의 값비쌌을 청화백자 타일이 단연 눈에 띈다

 

사도 도마가 인도의 코친 인근 해안에 배를 타고 온 건 고대부터 팔레스타인땅과 인도간의 해상 무역이 있었고, 예수 사후 그는 이같은 무역항로를 따라 인도 땅으로 복음 전도를 위해 건너왔다고 현지인들은 말했다. ‘포트 코친’ 지역에 있는 유대교회는 이같은 양쪽 지역의 교역설을 뒷받침한다. 유태인지역내 골목 끝에 자리잡은 수백년된 대교회 ‘파라데시 시나고그’. 회당 입구 오른쪽에 있는 역사 소개 전시장에 걸린 한 그림의 설명을 보니 “기원전 992-952년 솔로몬 왕국과 (케랄라 주 북쪽의)말라바르 해안간의 무역이 있었다. 당시 인도는 오두(ODHU)라고 불렸다. 인도는 티크, 상아, 향료, 공작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했다”고 적고 있다  

 


 

이 항로를 타고 유대인이 오갔고, 사도 도마도 왔다는 것이다. 도마는 이곳에 와서 힌두교의 상위 카스트들을 개종시켰으며, 7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당시 이 지역에 살던 인도 사람들이 외부 세계와 다른 종교에 대해 보인 놀라운 관용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코친 인근 고대 주민들의 관용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유태인의 정착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온 유태인을 받아들이고 먹을 것과 땅을 제공했다. 포트 코친의 유대교회의 역사전시실은 그림과,그 밑에 붙인 설명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단의 유태인들은 기원후 70년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의 두번째 성전을 파괴한뒤 유태인을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하자 인도를 향해 떠났다. 이들은 기원후 72년 말라바르 해안의 도시 크란가노르에 도착했으며, 이 지역의 라자(왕)는 유태인을 받아들였다. 이후 379년에는 (라자의 허용 아래)유대인 왕국을 세웠다.” 유태인들은 크란가노르에 정착해 1500년 가까이 잘 살았다. 하지만 1524년 코친으로 옮겨가야 했는데, 그것도 인도인이 아닌 멀리 유럽에서 지구를 반절 돌아 뒤늦게 찾아온 포르투갈인의 탄압 때문이었다. ‘코친 유태인’으로 알려진 이들은 하지만, 코친에서 다시 인도 주민의 환영을 받았고 그곳에서 안정된 삶을 누렸다. 당시 유태인 커뮤니티의 엄청난 부는 ‘파라데시 시나고그’의 바닥에 깔려있는 값비싼 중국제 자기 타일 1000여장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유태인들은 지금은 대부분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주해가고 없다. 10여명만이 남아있는 실정. 유대인 동네(Jew Town)에서 수공예품 가게를 운영하는 알타프 아흐마드씨는 “1954년만해도 이 지역에 유태인 5000명이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건국 뒤 대부분 떠났다”고 말했다. 길에서 만난 유태인 러첼 할머니는 나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오래 살았다”고 하더니 “이제는 13명만 동네에 남아있다”고 말했다. 사도 도마 시대로부터 1500년 가까이 지나 이 지역을 찾은 유럽의 유명한 인사는 포르투갈의 항해사 바스코 다 가마였고, 그 역시 당초 이 지역 주민들로 부터 환대를 받았다. 역사책에 유럽에서부터 인도항로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포르투갈을 떠나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1948년 5월 코친 북부의 항구 도시 캘리컷 인근에 도착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인이 값싼 장신구를 귀중품으로 주민들을 속이려 했을 때 이에 분개하고 그를 감금했다.


성 프란시스 교회내의 바스코 다 가마 무덤자리. 이곳에 매장됐다가 나중에 포르투갈로 유해가 옮겨졌다

 

동쪽으로부터는 중국인들이 해양 실크로드를 따라 코친을 찾았다. 명나라의 3번째 황제인 영락제는 정화(鄭和)가 이끄는 함대를 파견했고, 코친의 지배자도 1405년과 1412년 두 차례 대표단을 명에 보냈다. 영락제는 1416년 코친의 지배자 키일리를 왕으로 책봉하는 한편, 한자 64개로 된 자작시도 석판에 새겨 하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도 중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는 중국식 어망(Chinese Fishing Nets). 코친 항구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의 포트 이마누엘 인근 해변가에 중국식 어망이 10여개 놓여 있다. 해안가에서 고기를 쉽게 잡아올릴 수 있었던 과거의 생활 방식을 보여주는 관광 코스로 지금도 인기다. 코친과 케랄라인들은 외부인들을 받아들인 만큼이나, 바다를 건너 외국에 건너갔다. 바스코 다가마가 동아프리카의 모잠비크와 뭄사바에 도착해 그곳에서 아라비아해를 가로지를 수 있었던 건, 일찍부터 이 바다를 건너다닌 케랄라인 항해사의 도움 때문일 것이라고 베스트셀러 ‘인도’(1997년간)의 저자 샤시 타루르는 주장한다.  이같은 전통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중동에 오일달러가 쏟아지면서 건설 붐이 일어나자 이곳에 제일 먼저 달려간 건 케랄라인들이었다.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사우디 등 걸프 지역에 취업과 정착을 위해 현재 체류중인 인도인들은 360만명에 달하며 이중 절반이 케랄라 출신이다. 특히 바레인(인구 68만8000명·2005년 통계)에는 인도인이 수적으로 현지인을 압도하고 있다. 코친의 중심인 엠지로드 인근에 사는 비나 보비(32)씨. “전기 기술자인 남편과 함께 7년동안 사우디 아라비아, 오만의 머스캐트,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의 아부다비에서 살았어요. 코친에 있으면 저축할 정도로 수입이 안됐거든요.” 그는 작년 12월 중동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고, 그간 모은 돈에 은행대출을 받아 250만 루피(약6250만원)상당의 깨끗한 아파트를 샀다. 케랄라 주 정부는 해외 거주 주민이 많은 점을 감안, 이들 문제를 전담하는 주정부 부처를 인도의 주중에서는 최초로 만들었고, 비싼 항공료가 주민들에 부담이 되는 점을 감안해 독자적인 항공사인 케랄라 항공을 추진하고 연방정부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기자가 뉴델리에서 3시간여를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날아 코친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인도 국영항공기와 함께 서있던 다른 항공기도 중동에서 날아온 파란색 디자인의 쿠웨이트 항공 이었다. 코친 국제공항의 국제선 노선은 대부분이 중동행이고, 중동으로 연결된 노선이 인도내에서 가장 많은 공항이기도 하다. 중동에서만 걸프 항공(바레인, 오만 등 소유), 오만 항공, 아랍에미리트 항공, 쿠웨이트 항공, 카타르 항공, 사우디 아라비아 항공 등이 취항하고 있다. 이같은 활발한 해외 진출로 인해 케랄라 주의 최대 수입은 해외 송금이다. 이를 빗대 케랄라 경제는 ‘우편환(Money Order) 경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도의 지난 1991년 외환위기는 ‘케랄라 발(發)’이라는 설명도 있다.  인도는 1991년 1월 외환보유고가 10억달러 밑으로 떨어지면서 외환위기에 처해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내밀어야 했다. 이는 사회주의 성향 경제의 한계로 인도중앙은행의 외화가 바닥을 드러낸데다가, 제 1차 걸프전 발발로 이 지역의 인도 취업자 상당수가 철수하면서 이들의 해외 송금이 격감했기 때문에 촉발됐다는 것. 중동 취업자의 절반이 케랄라 출신임을 감안하면, 인도가 경제개방으로 가는 출발점이 됐던 외환 위기는 ‘케랄라 발’이라는 주장이다. 케랄라 주민들의 해외 진출에는 문맹율이 0%에 가까운 이 지역의 높은 교육수준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전국 평균 문자해득율이 65.38%에 그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코친의 문자해독율 100%는 기적에 가까울 정도. 교육수준은 높은데 지역에서 좋은 직장을 찾기힘드니 케랄라인들은 다른 주로, 외국으로 뛰어나가고 있다.뉴델리의 주요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의 상당수가 케랄라 출신이며, 이들은 성실하게 일한다고 알려져 있어 평판이 좋다고 주민들은 자랑했다. 이와관련 코친의 사립 명문 초중등교인 초이스 학교의 몰리 시킬 교장(여)은 “코친과 케랄라에는 모든 작은 마을에도 최소한 조그만 교회가 있고 이들은 반드시 학교와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문자해득율이 높은 배경을 설명했다. 코친은 지난 1996년 현지어 발음에 가까운 코치(Kochi)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여전히 현지인과 외국인에게는 코친이 더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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