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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테레사 생가 마당 십자가 (스페인 아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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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테레사 생가 마당의 십자가    출처 블로그 > 모방베드로

 

아빌라 성녀 테레사 관련 유적

 

아빌라는 성 테레사수녀에 의해 카톨릭 성지순례지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테레사수녀 탄생지와 산타 테레사 수도원, 앵카르나시온 수도원, 산 호세 수도원 등이 모두 성 테레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건물들이다. 재이주 시대 초기에 지은 대성당은 성벽과 연결되어 있다. 대성당 후진은 성벽이 탑을 이루는데, 보통 ‘엘시모로’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파사드 옆을 고정시키는 튼튼한 탑 1기가 요새다운 모습을 강조하며, 시대 배경을 보여 준다. 이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 양식으로 옮겨가는 과도기 건축으로, 12세기 초에 순수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짓기 시작했다. 1157년이 되자 부르고뉴 출신의 명공 훌첼이 작업을 맡게 되었다. 그는 피레네 산맥 저편의 새로운 예술 경향에 밝았으며, 이 대성당에 고딕 범주로 간주될 수 있는 요소를 끌어들였다. 작업은 14세기까지 계속되어 완공되었다. 파사등 옆에 달린 탑 하나는 지금까지 건설되지 않았다. 대성당 내부에는 훌첼이 만든 앰뷸러토리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이 앰뷸러토리는 공간을 교묘하게 처리해 작은 예배실을 들여놓을 만큼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며, 줄지어 늘어선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수한 기둥에 따라 2개의 보랑으로 나뉜다. 또한 늘어선 기둥은 지붕 구실을 하는 리브 궁륭의 리브를 받쳐 준다. 제단 안쪽 중앙에는 아빌라에서 태어나 1445년에 죽은 ‘엘 토스타드(불에 타 죽은 남자)’라고 부르는 주교 알폰소 데 마드리갈의 무덤이 있다. 그 시대의 박식한 인물이자 인격자였던 마드리갈을 기념하는 묘비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그의 모습을 그린 빼어난 설화석고 조각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이 묘비는 조각가 바스코 데 라 사르사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중앙 제단 장식벽의 디자인, 그리고 그 아래쪽에 있는 설화석고 성궤도 바스코 데 라 사르사의 작품이다. 이 제단 장식벽은 지금 에스파냐에서 볼 수 있는 제단 장식벽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다. 이 제단 장식벽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일련의 극적 장면으로 이루어졌으며, 여러 명의 화가가 제작에 관여했다. 그 가운데 페드로 베르게테가 유명한데 그는 1499년부터 세상을 떠난 1503년까지 제작에 종사했다


성녀 테레사의 신비 체험


아빌라가 가톨릭 신앙의 성채로 알려지게 된 것은 1515년 이 곳에서 테레사 데 세페다 이

아우마다가 태어났으며, 또한 1582년에 죽을 때까지 이 곳을 발판으로 계속 수도원을 지었기 때문이다.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테레사는 18세 때 카르멜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 뒤 30년 동안 엥카르나시온 수녀원에서 생활했고, 여러 가지 신비를 체험했다. 수녀원 안에는 신앙심 깊은 신비주의자의 활동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교회 박사란 칭호를 얻은 테레사는 15세기 후반에 설립된 카르멜 수도회를 개혁해 계율이 더욱 엄격한, 맨발의 카르멜 수도회를 발족시켰다. 테레사가 성인으로 추종되자 그 때까지 에스파냐의 주된 수호성인이었던 산티아고(성야고보)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으며, 사람들에게 더욱 친숙해졌다. 성녀 테레사가 맨 처음 세운 산호세 수도원은 일반에는 라스마드레스 수도원으로 알려졌다. 이 수도원은 엄격한 개혁 사상을 반영해 지었으며, 다듬은 돌을 그대로 쌓은 수수한 파사드, 신랑 하나, 안뜰, 신랑 측면의 제실로 이루어졌다. 바로크 양식의 제단 왼쪽에 있는 벽감에 안치된 [원죄 없는 성좌상]은 17세기 그라나다파의 걸작으로 꼽힌다. 성녀 테레사가 태어난 집은 현재 성녀의 이름을 딴 수도원으로 바뀌었다. 또한 성녀 테레사의 유해는 바로크 양식의 예배당 안에 있는 제실에 안치되어 있다. 산비센테 성당은 고대 그리스도교 순교자인 성비센테와 그의 누이 크리스테타와 사비나를 모신 성당으로, ‘산비센테 성문’ 앞에 있다. 자그마한 사도 조각상들로 꾸민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문과 파사드에 딸린 문이 특징적이다. 11세기 말에 짓기 시작한 이 성당이 완성되자, 아빌라는 순례자를 위한 성당으로 지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수수한 산페드로 성당은 산비센테 성당과 비슷한데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요소를 함께 갖추고 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산토마스 수도원에는 회랑이 3개 있다. 가톨릭 양왕이라고 불린 페르난도 2세와 그의 부인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는 유대교도에게서 몰수한 재산을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도원에 기증했다. 그래서 이 수도원은 겨우 10년 만에 공사를 끝마쳤고, 오래지 않아 에스파냐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수도원이 되었다. 성구실에는 에스파냐 최초의 종교 재판소장이자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가 묻혀 있다. 한때는 페르난도 2세가 이 건물에서 여름을 나기도 했으며, 그의 외아들 후안 왕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후안 왕자는 살라망카의 통치권을 넘겨받은 19세에 죽었다. 12세기 초에 지은 산안드레스 성당에서는 서쪽 문과 북쪽 문, 조각이 새겨진 기둥머리, 보존 상태가 완벽한 3개의 후진이 눈길을 끈다. 멋진 주제단은 페드로 베르게테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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