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페라라 대성당 (이탈리아)

성지순례/서유럽(이탈리아,로마)

by baesungsoo 2006. 7. 23. 13:26

본문

페라라 대성당

 

1135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대성당의 파사드는 나중에 첨가된 고딕 양식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파사드는 수직으로 뻗은 2개의 두꺼운 각주에 의해 3구역으로 갈라지고, 입구가 각각 있다. 아랫부분은 세련된 로마네스크 양식이지만 윗부분은 18세기에 다양한 아치를 구사하여 고딕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처음에는 오신랑이었으나, 18세기의 개축으로 현재의 삼신랑의 모습으로 변경되었다. 입구를 장식하는 당당한 조각은 니콜로 공방에서 제작된 창건 당시의 것이다. 1441~1596년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설계에 의해서 건설되었다는 대리석 종루도 있다

 

대성당

 

페라라 역사지구

 

1995년에 지정되었으며 1999년에 재차 지정된 세계문화유산, 15세기,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대한 정신'을 이끌었던 지성과 예술의 중심지 포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로, 1492년 Biagio Rossetti가 건설한 이후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이상적 도시로 생각하여 이 곳에 거주하였다. 이 도시는 새로운 근대도시계획의 탄생을 의미했고 지속적 발달을 가져왔다. 처음에는 페라라의 북쪽 수비를 위한 요새로 축조된 에스테 성. 이 성은 화려한 궁정 생활이 펼쳐지는 한편, 감옥은 다수의 잔인한 사건의 무대도 되었다. 현재는 페라라 옛 시가지의 중심이다

 

스키파노이아 궁 월력도

 

스키파노이아 궁의 큰 홀을 장식하는 ‘월력도’의 3월의 상/중단. 상단 중앙에는 창과 책을 손에 들고 개선마차에 앉은 지혜와 학예와 전투를 관장하는 로마 신화의 여신 미네르바, 그 좌우에는 많은 학자와 배틀과 수를 놓는 아가씨들이 그려져 있다. 중단에는 황도 12궁 중 백양궁을 상징하는 성좌의 목양과 빨간 옷을 입은 소녀로 나타낸 카시오페이아 등의 천구의 신들이 그려져 있다. 같은 동쪽 면에 그려진 3, 4, 5월은 모두 프란체스코 델 코사의 작품이다

 

콤무네 궁 안뜰

 

현재는 시청사 광장으로 불리는 콤무네 궁의 안뜰.이 곳에는 1481년에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들어진 큰 옥외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을 올라 내부로 들어가면 ‘시민 투표의 방’과 ‘민회의 방’ 등이 있다

 

콤무네 궁

 

현재는 시청사가 된 에스테가의 궁전 중 하나인 콤무네 궁. 에스테가의 니콜로 3세의 기마상과 보르소 에스테의 좌상이 궁전 현관의 양쪽을 지키고 있다. 1924년에 실시된 복구 공사에서는 건물을 예전 모습과 비슷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르네상스 도시 페라라


괴테는 희곡 [토르콰토 타소]에서 피렌체는 크고 멋있는 도시이지만, 그 곳에 축적된 재물의 가치도 페라라의 가치에는 미치지 못하며 피렌체는 그 곳에 사는 주민에 의해 축조되었고, 페라라는 영주에 의해 만들어졌다면서 페라라를 찬양하고 있다.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진주’라고 불리게 할 정도로 번성하게 했던 메디치가는 이 같은 비교에 분개하며 부정했다. 그러나 페라라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진 역대 영주인 에스테가 아래에서 15~16세기의 르네상스 시기에 가장 중요한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이 ‘유럽 최초의 근대 도시’에 남아 있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예술 유산이 말해 주고 있다. 15~16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는 일종의 이상주의적인 인문주의를 길러낸 고대의 재발견과, 권력과 욕망을 둘러싼 폭력이 공존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이후 볼 수 없을 정도로 예술가에 대한 두터운 후원은, 예술의 창조와 과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활기차고 창작력 넘치는 이 황금시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가치관의 변화와 일종의 윤리적인 공백을 초래하기도 했다.  에스테가가 다스리던 페라라 공국 또한 이 같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 궁정에서 루드비코 아리오스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혹은 토르콰토 타소 같은 시인들과 코즈메 투라, 도소 도시 같은 화가들이 혜택을 받는 한편,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은 마키아벨리적인 책략이나 궁정 내의 음모도 늘 공존하고 있었다. 이 같은 시기에 절정기를 맞은 페라라를 19세기의 스위스 역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유럽 내 최초의 근대 도시’라고 단정했다. 왜냐하면 이 곳은 처음으로 “역대 군주의 명령에 의해 계획적으로 설계된 대규모 시가지가 구획되었다. 그 곳에는 관청이 집중적으로 들어서고, 산업이 유치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피렌체를 비롯하여 전 이탈리아에서도 유복한 자들이 이주하여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시대와 함께 번성하는 상업의 중심 도시가 된 페라라의 절정기는 에스테가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에스테가는 프랑크 왕국을 지배한 카롤링거 왕조의 귀족을 선조로 가진 명문인데, 현재의 남독일부터 북이탈리아에 걸친 지역에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성직자의 서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이 대립하던 시대에, 페라라도 장기간에 걸쳐 혼란스러웠으나, 교황파인 에스테가가 이를 제압하여 1264년에 이 집안의 오비초 2세가 도시를 장악했다. 그 후 1332년에 에스테가는 교황으로부터 페라라의 통치권을 승인받는 동시에 처음엔 후작 지위를, 나중에는 공작 작위를 부여받아 페라라 공국이 탄생했다. 이리하여 페라라는 경제적, 문화적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유수의 경제력을 비축한 페라라는 활발한 문화 활동에 힘입어 르네상스의 가장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에스테 공작가가 획득한 높은 명성은 1502년에 이 집안의 알폰소(알폰소 2세)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딸인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결혼한 시점에서 확실해졌다. 그러나 1594년 알폰소 2세가 사망함에 따라 에스테 가문은 페라라에서의 화려한 역사의 막을 접었다. 1598년 로마 교황은 이 도시를 교황령으로 정했다. 이탈리아 포 강 하류의 왼쪽 기슭에 성채를 축조하여 탄생한 페라라는 포 강을 이용한 수운으로 번성했는데, 12세기 중반에 제방의 붕괴로 흐름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수운업은 단절되었다. 그 후 페라라의 영주가 된 에스테가는 세 차례에 걸쳐 도시를 확장했다. 1386년, 니콜로 2세 시대의 제1차 확장 공사에서는 주위에 성벽을 두르고, 전 해부터 건설하기 시작한 에스테 성을 북쪽의 방어벽으로 삼았다.  1451년에는 보르소 에스테가 제2차 확장 공사를 실시했다. 이 때 예전의 포 강이 매립되고 강에 있던 산탄토니오 섬이 육지와 연결되었다.  1492년 에르콜레 1세에 의해 세 번째이자 마지막 확장 공사가 실시되었는데, 에르콜레 1세의 명을 받은 건축가 비아조 로세티는 도시 계획에 따라 에스테 성 북쪽의 광대한 구역에 넓고 긴 직선 도로를 만들어 이 일대를 도시화했다. 로세티는 그 전까지 좁고 구불구불했던 도로와 새로운 직선 도로를 교묘하게 연결하여, 두 지역을 유기적으로 기능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유럽 최초의 근대 도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괴테가 찬양한 이 도시의 가치는, 첫째 알폰소 1세의 왕비 루크레치아 보르자를 중심으로 한 현란한 궁정이고, 둘째 1391년에 창립된 대학이 인문주의의 정신적인 중심이 된 점, 나아가서는 건축과 회화라는 보배로운 예술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결과 에스테 성과 대성당이 완성되었다.  둘 다 세 번째의 확장 공사에 의해 완전히 성벽으로 둘러싸인 페라라의 지리적,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다. 4기의 큰 탑을 갖고 호를 두른 벽돌 구조의 사각형인 에스테 성은, 중세 말기 이탈리아의 요새 건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1385년에 건설되기 시작한 이 요새는 약 200년 동안 건축 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에스테가가 요새를 평소에 거처하는 성으로 개축했을 뿐만 아니라, 잇따른 화재와 지진으로 재건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요새 특유의 견고한 군사적인 성격은, 총기 구멍이 붙은 석벽을 대리석 난간으로 교체하고 안뜰에 아케이드의 주랑을 첨가함으로써 부드러워졌다. 부속 건물을 장식한 카밀로 필리피의 프레스코화는 에스테 궁의 현란함과 궁정인들의 우수한 예술 감각을 엿보게 해준다. 1135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대성당의 파사드는 나중에 첨가된 고딕 양식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파사드는 수직으로 뻗은 2개의 두꺼운 각주에 의해 3구역으로 갈라지고, 입구가 각각 있다. 아랫부분은 세련된 로마네스크 양식이지만 윗부분은 18세기에 다양한 아치를 구사하여 고딕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처음에는 오신랑이었으나, 18세기의 개축으로 현재의 삼신랑의 모습으로 변경되었다. 입구를 장식하는 당당한 조각은 니콜로 공방에서 제작된 창건 당시의 것이다. 1441~1596년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설계에 의해서 건설되었다는 대리석 종루도 있다. 에스테 성을 평소 거주하는 성으로 정하기 전에는, 현재 시청사가 된 콤무네 궁이 에스테가의 거처였다. 이 건물은 1243년에 창건되어 1493년에 로세티가 개축하였는데, 르네상스 후기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로세티의 도시계획에 따라 이 밖에 많은 건물이 세워졌다.  예를 들면 12,000개가 넘는 작은 사각추의 대리석 포석이 외벽을 가득 메운 디아만티 궁, 열주의 아케이드와 가로팔로가 그린 천장화가 있는 루드비코 일 모로 궁, 혹은 인상적인 페라라파의 회화가 있는 산타마리아 인 바도 성당 등이다. 또한 궁전 건축 중에서는 스키파노이아 궁이 손꼽힌다. 페라라를 대표하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인 스키파노이아 궁은 1385년 에스테 공작이 오락과 연회를 즐기기 위한 궁전으로 세운 것이다.  그 후 1466~93년에 피에트로 데리 오르디니와 로세티에 의해 증개축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1496년에는 2층의 큰 방에 벽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사방의 벽면은 그 곳에 그려진 기둥에 의해 12개로 구분되어, 1월부터 12월까지의 ‘월력도’가 그려졌다. 그 하나하나는 다시 3단으로 구분되어 상단에는 개선하는 각 달을 관장하는 로마 신화의 신을 중앙으로 하며 많은 인물상을 담은 우의화가, 중단에는 ‘황도 12궁’을 나타내는 동물, 인도와 페르시아의 천구의 신들이 그려져 있다. 가장 면적이 넓은 하단에는 보르소 에스테의 궁정 생활 장면과 영지 내의 시민들의 생활상이 그려져 있다. ‘월력의 방’으로 불리는 이 방에는 손상되었지만, 동쪽과 북쪽 벽면에 그림이 남아 있다. 보존 상태는 완전하지 않지만, ‘월력도’는 페라라파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1400년대에 지어진 20개 이상의 종교 건축 중에서 가장 감명을 주는 것으로 평가되는 산프란체스코 성당에서도 로세티의 서명이 익랑의 기둥머리 부분에서 확인되었다. 또한 산탄토니오 인 포레시네 성당에 있는 15~16세기에 제작된 [신약성서]의 프레스코화가 찾는 이들을 감탄시키고 있다

 

출처- 블로그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