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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리아 고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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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리아 고레티 동정 순교(1890-1902) 축일;7월 6일
이탈리아 출신의 가톨릭 성녀이다. 별칭 : 아녜스 성녀, 국적 : 이탈리아, 활동분야 : 종교
출생지 : 이탈리아 고리날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25만여 명의 군중들이 시성식에 참석하였다. 마리아 고레티의 단순한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나타낸 숫자였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Maria Goretti)는 이탈리아 안코나(Ancona)의 코리날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는데 6남매 중의 맏이였다. 1896년 그녀의 집안은 갈리아노 교외의 콜레 지안투르코로, 그 다음에는 페리에레 디 콘카로 이사하였다. 이곳에 정착한 직후에 부친은 말라리아에 걸려 운명하니, 남은 식구들은 생계를 위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학교에 갈 기회가 없어서 읽기와 쓰기를 배우지 못했다. 그녀가 첫영성체를 한것은 열 두살 때로 그녀가 죽기 얼마 전이었으며, 첫영성체 교리반에서는 덩치가 큰 편이었고 약간 뒤늦은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7월의 어느 더운 날 오후에 마리아는 오두막집 계단 꼭대기에 앉아 웃옷을 꿰매고 있었다. 아직 열두 살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신체는 성숙했다. 그때 짐마차 하나가 집 앞에 멈추더니 열여덟 살 된 이웃 청년 알렉산드로가 계단으로 달려왔다. 그는 그녀를 꽉 움켜잡고 강제로 침실로 끌고 갔다. 그녀는 굴복하기보 다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겠다는 식으로 숨을 헐떡거리면서 "안됩니다.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세요. 그것은 죄악입니다. 당신은 이로 인해서 지옥에 갈 것입니다."라며 반항했고 도움을 청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알렉산드로는 분별력을 잃고 단도로 그녀를 마구 찌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녀는 죽기 전 몇 시간 동안 착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보여 주는 단순한 동정심을 드러냈다. 자기 어머니의 잠자리를 걱정하고, 살인자를 용서했으며(그녀는 그를 두려워했으나 그의 가족에게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종할 때는 성체를 영하는 경건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참변을 당한지 약 24시간 만에 죽었다. 살해범인 알렉산드로는 30년형을 선고받고서도 오랫동안 참회하지 않았고 난폭하게 행동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는 마리아가 꽃을 모아서 그에게 주는 꿈을 꾸었다. 27년 후 그가 석방되자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마리아의 어머니께 용서를 청하러 간 것이었다. 어린 순교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생겨났으며, 갖가지 기적이 일어났고 죽은 지 50년이 되기도 전에 그녀는 시성되었다. 1947년 그녀의 시복식에서 그녀 어머니(당시 82세)와 두 자매 그리고 남동생이 교황 비오 12세와 함께 성베드로 성전의 발코니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3년 후 그녀의 시성식에는 66세가 된 알렉산드로 세레넬리가 25만 명의 군중 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설명 ; 마리아는 교리를 배우는 데는 몹시 힘이 들었는지 모르나 신앙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주님의 ?독은 거룩함,고결함,순결,절대적인 복종 그리고 온전한 신뢰였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그녀의 신앙은 단순했다. 그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특권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특권이다. 순결의 미덕 때문에 죽임을 당한 그녀는 정결한 사람이었다.
인용 ; 설혹 그녀가 순교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일상 생활이 너무도 거룩했기 때문이다. (사로티 추기경)
[내용 출처 : 성 바울로 성인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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