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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슬람사원(서울중앙성원 외)

타종교신전/이슬람교사원

by baesungsoo 2006. 9. 2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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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성원 (이태원 또는 한남동 이슬람사원)   서울시 용산구 한남2동 732-21번지

(블로그명 : 라이프 크리에이터, 플라잉대디!)

 

서울중앙성원   (블로그명 : jedaiwon .. 세상의 창을 열며...)

 

서울중앙성원

 

서울중앙성원

 

서울중앙성원

 

서울중앙성원

 

서울중앙성원

 

서울중앙성원

 

메카를 향해     (출처- http://blog.daum.net/michelcalmy)

 

내부로 들어가면 이슬람 사원에서 제일 중요한 메카의 위치가 문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를 드리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다. 이슬람에서는 그 어떤 우상도 금지하기 때문에 모든 벽면이 온통 이슬람 특유의 아라베스크 무늬로 이루어진 타일이 붙여져 있다. 또한 메카방향을 표시한 곳을 제외한 벽면에 원 모양의 타일이 한 줄로 건물을 빙 둘러 붙여져 있었는데, 그것은 알라의 99가지 이름(여기서 99는 무한을 의미한다고 한다.)을 아랍어로 써 붙여놓았다. 뿐만 아니라 모든 쿠란의 장의 첫 구절과 입구에 써 있던 말,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입니다’라는 구절도 타일로 붙여져 있다. 이곳은 2층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층은 남자 신도들이 기도를 하며 2층은 여자 신도들이 기도를 하는 곳이다. 사무실을 가는 길에도 이곳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여성 전용 계단’이라고 씌여져 있다. 

 

사원내부  (블로그 > 아쿵닷컴 (www.akoong.com)

 

사원내부

 

서울중앙성원

 

인천성원 (2004.10.10)  (블로그명 : habibi - love arabic culture , music ,travel)

 

인천성원

 

인천성원

 

전주성원   (전북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2가 1562-10 )

 

부산성원      (부산시 금정구 남산동 30-1 )  (블로그명 : 네가 보고싶어 난 너에게 다)

 

부산성원

 

광주성원   (경기도 광주군 광주읍 역리 48-9 )

 

광주성원   (블로그 > Carpe Diem ..♡)

 

광주성원 내부

 

안양성원  (경기도 안양시 안양5동 618-132 )

 

대구센타    (TAEGU #202-6, Chuk Chan-dong, Dal Seo-gu )

 

안산센타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741-5 )

 

제주지회

 

한국 회교의 역사와 연혁


한반도에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는 여말선초인 13-14세기이다. 이는 고려가 몽골 원제국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골관리와 함께 원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앙 아시아 계 무슬림들이 대거 고려로 몰려오면서 가능하였다. 이들 무슬림들은 고려에정착하여 그들만의 종교 민족적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한국사회에 이슬람 문화의 이식에 기여하였다.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공동체 내에는 예궁이라 불리는 이슬람 성원이 존재하였으며 Doro라 불리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법률과 관습에 의해 예배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공동체에서 선출되었다. 때때로 무슬림 지도자들은 공식적인 궁중의식에 초대되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꾸란 암송이나 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아랍식 Dua-기도 와 같은 그들 고유의 종교의식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20년대 이 후 한국 동란에 이르기 까지 이슬람과 한국의 또다른 접촉은 러시아 볼세비키 정권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한 터키계 러시아인들이 한국에 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 무슬림들 중 200명 정도가 한국에 영구 정착하였다. 이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한국의 터키계 무슬림들은 곳곳에 흩어지게 된 것으로 보였다. 이들은 주로 상업과 만주-일본을 있는 역내 무역을 통하여 상당한 부를 축척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mahall-i Islamiye'라 불리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 안에서 그들 고유의 종교와 문화를 유지하며 살았다. 그리고 서울 시내 요충지에 민족학교와 이슬람 성원을 건립함은 물론 꾸란을 출판 배포하고 서울 홍제동 근처에 이슬람 묘지까지 확보하여 근대 한국 이슬람의 태동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다.


1. 1950년 한국전쟁


오늘날 한국무슬림 공동체가 형성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50년의 한국 전쟁시 외국 무슬림 군인들의 참전이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가한 다국적 군가운데에는 이슬람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터키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여단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그들은 전선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군대로서 명성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는 ‘앙카라 학교’를 건립하고 전쟁고아의 양육과 교육에 헌신적인 모범을 보였다. 무슬림 군인들의 철저한 규율과 극한 상황속에서의 인도적인 대민봉사는 사령부주변의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터키 군인들에 대한 이러한 관심과 애착은 그들 문화의 바탕인 이슬람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심으로 발전하였다. 이들 중 최초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도한 사람은 당시 터키 제 6여단 사령부의 군 이맘(Imam)이었던 “압둘 가푸르 카라 이스마일-오울루(Abdulgafur Karaismailoglu)”로 그의 노력으로 한국 무슬림 제1세대가 형성되었다. 당시 윤리와 도덕의 말살을 당연시한 전쟁의 아픔을 경험한 한국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가치체계의 확립과 정신적 안주를 간절히 희구하였는데, 터키군인들의 이슬람 신앙에 바탕을 둔 윤리관과 도덕관, 그리고 인도주의는 한국인들을 감명시켰으며 그 결과 “압둘라 김유도”와 “우마르 김진규”등 한국 최초의 무슬림들이 탄생하였다.


2. 1955년 9월 15일


김진규와 김유도는 “한국 이슬람 협회”를 결성하고 한국인의 의한 최초의 이슬람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협회는 1955년 10월 터키 군당국의 지원을 받아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에 야전용 천막 3동을 설치, 이를 임시성원과 사무실로 사용하였으며, 매주 ‘압둘 가푸르’이맘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여는 등, 이슬람의 이해와 확산에 노력하였다. 그 이듬해인 1956년 4월에는 동협회 산하에 “청진학원”을 설립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불우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중등교육과 이슬람 교리교육을 무료로 실시하였다. 이 학생들중 일부가 이슬람에 귀의하였는데, 당시 학원의 규모는 3학급 80여명에 이르렀다.  초창기 한국무슬림들의 이러한 활동은 1956년 ‘압둘 가푸르’의 뒤를 이어 20대의 젊은 이맘 ‘주베이르 코치(Zubeyr Koch)’가 여단 사령부 군이맘으로 부임해오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의욕에 찬 ‘주베이르 코치’와 한국 무슬림들은 선교활동을 가속화하는 한편 터키 여단 사령부의 지원으로 이문동에 임시성원을 마련하였다. 이 대형 콘센트 막사에 미나렛을 올려 만든 이 성원은 한국 이슬람 근대사에 최초의 임시 이슬람 성원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역사적인 임시성원에는 ‘멘데레스’터키 수상을 비롯한 많은 이슬람국 지도자들이 다녀갔고 이 당시 입교자는 208명에 이르렀다.


3. 1960년대


한국 무슬림들은 1960년대에 들어와 조직적인 국내 선교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각 이슬람국가들과의 유대강화에도 적극성을 보이게 된다. 당시 협회 지도자인 ‘우마르 김진규’는 ‘사브리 서정길’을 대동하고 1959년 11월부터 약 1년간에 걸쳐 사우디, 파키스탄등의 이슬람 국가를 순방하며 한국 이슬람의 실정을 알리고 지원을 호소하였다. 이들은 1960년 사우디 순방중, 성지순례에 참가함으로써 한국 무슬림 최초의 성지순례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이슬람국 순방결과, 1961년 9월 말레이지아 상원의원 ‘우바이둘라(Ubaydullah)’를 단장으로 한 14명의 말레이지아 사절단이 내방하여 한국 이슬람의 실태를 직접 파악하였으며 그 결과 1962년 2월 현 서울 중앙성원 이맘’술래이만 이행래’를 비롯한 한국 무슬림 학생 11명이(여자 3명 포함) 6개월간 말레이지 “클랑 이슬람대학”에서 체계적인 이슬람 교육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 후 1962년 11월 ‘압둘 라작(Abdul-Razzaq) 말레이지아 부수상 내외, 1963년 10월에는 ‘하지 노아(Haji Noah)’말레이지아 국회의장이 내방하여 한국 이슬람의 어려운 실정을 파악하고 귀국한 직후, 1963년 11월 말레이지아 수상 ‘압둘 라흐만(Abdul-Rahman)’으로부터 성원 건립기금으로 미화 33,000불이 지원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이슬람교 협회”는 1964년 10월부터 서울 상도2동에 성원 건립용 부지를 확보하고 착공에 들어갔으나, 대규모 공사계획에 따른 후속 지원금 미확보와 누적된 부채로 인하여, 한국 최초의 성원건립의 꿈이 무산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 협회는 더욱 가중된 재정난으로 주요 업무가 마비되고 의욕을 상실한 무슬림들이 하나 둘씩 협회를 떠나 새로운 이슬람 단체를 조직하였다.


4. 한국 이슬람의 정착과 발전


1) 1965-1976

 군소 이슬람 단체로 분열되어 침체기를 맞고 있던 이슬람교는 그 후 수차례의 통합을 시도한 끝에, 1965년 4월 ‘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를 발족시켰고, 이 연합회가 오늘날 한국 유일의 이슬람 조직체로 발전한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의 전신이다. 연합회는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임시성원과 사무실을 마련하고 선교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해외 이슬람 단체들과의 유대강화에도 힘썼다. 한국이슬람의 대부로 추앙되는 파키스탄의 종교지도자 ‘사이드 무함맏 자밀’ 파키스탄 “꾸란협회”회장이 내한한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그는 1966년 10월 내한하여 약 40일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이슬람선교와 국내무슬림 교육에 심혈을 기울렸다. 그는 그후에도 여러 차례 방한하여 한국 이슬람 발전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성원건립의 필요성을 절감한 한국 무슬림들은 1967년 1월 “하지 사브리 서정길”회장과 “오스만 김용선”섭외부장을 약 7개월간 이슬람국가에 파견하여 선교상 성원건립이 시급함을 호소하였다. 이에 1967년 3월 쿠웨이트 종교성 희사금 미화 14,000불을 포함 전세계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성금이 답지하였다. 같은 달 “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는 문교부에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법인체 등록을 필함으로써 공인된 교단의 면모를 갖추었다. “술래이만 이화식”을 비롯한 “압둘 아지즈 김일조”, “핫지 사브리 서정길”, “무함마드 윤두영”, “유스프 윤형구”, “오스만 김용선”등이 이시기의 중견이사들로써 한국 이슬람 현대사에서 한국 이슬람의 정착과 발전에 공헌한 무슬림 지도자들이다. 1967년 6월 격월간지 “코리아 이슬람 헤럴드”를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하여 한국무슬림들의 활동을 전세계 이슬람국가에 홍보함과 동시에 예배근행과 선교활동의 구심점이 될 성원건립 사업에 전력하였다. 1967년 10월 임시성원과 사무실을 서울시 용산구 남영동으로 이전한 연합회는 교리강좌를 통해 무슬림 배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파키스탄, 이집트등의 이슬람 국가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무슬림지도자를 양성하였다. 동시에 이슬람 각국에 사절단을 보내, 본격적인 성원건립 추진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한국 무슬림들의 성원건립 소망은 1970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이 용산구 한남동 소재 시유지 1,500평을 중앙성원 건립용 부지로 하사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1970년 12월 부지가 확보되자 중앙성원 건립을 위한 모금사절단을 수차례 이슬람 제국에 파견시켰으며, 1976년 5월 21일 세계 17개 이슬람 국가로부터 장관 및 국회의원을 포함한 약 50여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원 개원식이 거행됨으로써 한국 역사상 최초로 아랍 건축양식에 의한 돔식 건물인 서울 중앙성원이 건립되었다. 또한 개원기념 행사의 하나로 “소수 무슬림 국가에서의 이슬람 선교”라는 주제로 국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2) 1976년 이후

 한국 이슬람교는 서울 중앙성원 건립과 중동 이슬람국가의 건축붐을 타고 수많은 인력이 아랍-이슬람 국가로 진출함에 따라 이들에 대한 현지교육과 이슬람 교육이 본회에서 실시되었다. 그 결과 약 3,700명이던 무슬림들의 수가 거의 배로 증가하였다. 이로써 한국 이슬람 선교는 증흥기를 맞이하게 되고 각 이슬람 국가와 종교를 통한 유대관계가 한층 강화되었다. 1976년 6월에는 선교의 일환으로 중앙성원 이슬람 센터에 “아랍어 연수원”이 개설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리비아로부터 한국에 파견된 외국인 선교요원과 함께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대상으로 아랍어와 이슬람 교리를 강의함으로써 일반인들이 이슬람세계와 이슬람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년 7월에는 “무슬림이 되는길”을 제1호로 17종에 이르는 이슬람 선교용 책자가 한글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들은 이슬람 지식의 습득과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후 계속된 출판사업으로 수많은 이슬람 서적이 번역 출판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무슬림 학자들에 의한 성꾸란의 한글 번역본이 나오기도 하였다. 또한 본회의 선교활동을 국내외에 홍보하기 위해 “무슬림 주보”(주간)와 “알이슬람(격월간)”이 발간되어 국내외에 배포되었다. 이러한 선교의 활성화와 함께 미래의 무슬림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기관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1977년 5월 쿠웨이트 실업가이며 “무슬림 대외원조 위원회”:회장 ‘압둘라 알리 무타와’의 적극적인 제안과 지원에 따라, 우리나라에 이슬람 대학을 건립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모색되어, “이슬람 대학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 후 1979년 7월 사우디아라비아 내무장관인 “나이프”왕자가 본 회를 내방, 한국 이슬람 대학 건립 계획에 적극 찬성하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대학건립 기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함으로써 대학 건립 추진사업이 현실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2차 석유위기를 맞아 1979년 10월 술래이만 이화식 이사장을 단장으로 한 순례사절단이 사우디 종교계 인사를 접촉하여 한국의 석유공급을 호소하였고 교단의 끈질긴 노력에 부응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한국에 원유를 특별공급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어 1980년 5월에는 최규하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여 양국 공동성명에 한국 이슬람대학 설립을 합의하였고 이에 따라 경기도 용인에 13만평에 달하는 대학부지가 확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982년 3월에 대학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공동위원회”가 정부차원에서 조직되어 구체적인 대학설립이 논의되었다. 동년 12월 3일과 6일에는 “한-사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어 대학설립 및 운영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안건이 협의되었는데 대학건립비와 운영비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지원키로 합의하였다. 한편, 한국이슬람교 연합회 산하에는 1977년 9월부터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학생회”가 자율적으로 조직되어 학생층을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학생회는 매주 3~4회의 교리연구 발표회를 통해 회원들의 이슬람 지식 함양은 물론, 각 대학에서 순회강연을 통해 이슬람의 보급에도 힘썼다. 또한 학생회는 연합회 및 주한 이슬람국 대사관들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문화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이슬람과 아랍의 문화를 소개함과 동시에, 이슬람을 바르게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학생회의 이러한 활발한 선교활동은 이슬람 각국에도 알려져, 해외에서 개최되는 각종 청년 무슬림 회의나 캠프는 한국 무슬림 대표들이 초청되기도 하였다. 1983년부터는 “세계 무슬림 청년협의회(WAMY, World Assebly of Muslim Youth)”의 지원으로 매년 한국에서 WAMY캠프가 개최되었다. 이 캠프를 통해 무슬림 학생들간에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이슬람 생활화의 실천, 그리고 무슬림 석학들의 초청 강연을 통한 이슬람학 지식의 향상을 꾀하였다. 또 많은 수의 학생회원들이 이슬람 국가의 장학생으로 초청되어 유학함으로써, 많은 무슬림 인재가 양성되었다. 1970년대 중반 중동붐을 타고 해외로 진출한 한국인 기술자들이 이슬람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짐으로써 이들에 대한 선교활동을 절감한 “연합회”는 1978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업가 “쉐이크 우마르”의 지원으로 젯다에 이슬람 센터 겸 지회를 설치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된 한국인 기술자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편 결과 입교자가 8,000여명에 이르렀다. 또한 1979년 7월에는 쿠웨이트 종교성의 배려로 자하라 삼호주택 캠프내에 한국인 전용성원과 지회가 설치되어 술래이만 이행래이맘의 노력으로 쿠웨이트 전역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이슬람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1984년 6월까지 약 3,000명이 이슬람교에 입교하였으며 1982년에는 인도네시아에도 지회가 설치되어 한국인 포교 선교 및 유학생 교류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76년 서울 중앙성원 개회를 계기로 지방의 선교도 서서히 활성화되었다. 1976년말에는 압둘 라힘 김명환을 중심으로 한 부산지역 무슬림들이 시내에 임시 예배실을 설치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978년 4월에는 경기도 쌍용리 마을 주민들이 “압둘라 전득린”의 인도로 다수가 이슬람에 귀의하여 비닐 하우스로 임시 예배실을 마련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농촌지역 선교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기도 하였다. 또한 1986년에는 압둘라쉬드 엽보섭을 중심으로 전주지역에도 이슬람의 씨앗이 뿌려져 지방선교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국에서의 이슬람의 확산은 이슬람 각국의 관심을 불러모아 리비아, 쿠웨이트, 이집트의 독지가들의 지원으로 이들 지역에 성원이 건립되었다. 또한 1986년 4월에는 후세인 유창식이 사재로 기독교 교회를 매입하여 이를 이슬람 성원으로 개조함으로써 서울 근교 안양에서의 선교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현재는 울산과 제주에도 임시 예배당이 설치되어 지역 선교 활성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 이슬람이 이땅에 뿌리내린지 40년만인 1995년말까지 한국에는 5개의 이슬람 성원과 6개의 이슬람 지회, 그리고 약 3만 4천명의 무슬림들이 알라의 복음에 충실하고 있다

 

  (출처 : '한국회교의 역사와 연혁'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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