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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이스티크랄 회교사원 (인도네시아)

타종교신전/이슬람교사원

by baesungsoo 2006. 9. 2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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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이스티크랄 국립 회교사원  (블로그명 : in_bali님의 블로그)

 

사원 안뜰  (출처 : kbsworld.net )

 

무슬림들은 성지인 메카를 향하여 기도를 드리는데 건물의 방향과 메카방향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는 반드시 방향표시를 한다. 이슬람사원 야외기도실에 메카를 향하여 타일을 깐 모습이 보인다

 

이슬람력으로 새해 첫날인 1.31일 인도네시아 무슬림들이 자카르타의 이스티크랄 사원에 모여 기도하고 있다. 태음력을 사용하는 이슬람력의 1년은 354일 또는 355일이다. 이슬람력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헤지라)한 서기 622년을 원년으로 삼기 때문에 2006년 올해가 1426년이다  (자카르타 로이터=연합뉴스)

 

출처- 동아일보

 

사원내부

 

라마단 금식기간 기도 중 휴식을 취하는 무슬림 <에이피통신/모바클뉴스 제공/ 2005-11-06>


 

자카르타 국립회교사원  이스티크랄 사원 (Mesjid Istiqlal)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지아, 브루나이와 함께 아시아의 대표적인 이슬람국가입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사원인 ISTIQLAL MOSQUE사원은 그 파워를 과시하려는듯 자카르타성당 바로 앞에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이 사원은 아시아권 최대의 사원이며 전세계적으로는 3번째로 큰곳이다. 이스띠끄랄(Istiqral)은 '독립'을 뜻하며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인도네시아 민족의 우수성을 상징하는 사원으로 약 9.9 헥타아르에 달하는 네덜란드 요새의 폐허 위에 설립되었다. 이 사원의 건립은 1950년에 종교성 장관인 와히드 하쉼과 안와르 쪼끄로아미노또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 되었으며 신문과 다른 대중 매체를 통해 이스띠끄랄 사원 디자인 공모전을 개최하여 건축가 에프 실라반의 '신앙(Ketuhanan)' 이라는 작품을 최종 모델로 선정하였다. 1961년 8월 24일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었고 총 1천 1백 4십 억 루삐아의 공사비가 투입되었다. 그러나 사원의 건립은 경제 위기와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9월 30일 사태(G-30S)로 중단되었다가 1978년 2월 22일 수하르또 대통령이 이스띠끄랄 사원 건립을 공식화 하면서 비로소 완공의 꿈을 이루게 된다. 이스띠끄랄 사원은 종교적인 장소이면서 정보 교류 및 교육 등 사회 활동의 장소이기도 하다. 대통령, 국회 의장, 장관급등의 이슬람교도인 국빈이 인도네시아를 방문 할 때는 꼭 이 사원을 방문하고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기본 구조로는 거대한 여러 개의 큰 기둥을 비롯해서 회교사원의 기본양식인 둥근 탑과 뾰족한 철탑도 가지고 있다. 매주 금요일 오후 1시경에는 수많은 이슬람 신자들이 합동 예배하는 모습도 볼 수 있으며 매년 이슬람의 최대 행사인 Lebaran(르바란)에는 대통령도 이곳에서 예배를 보기도 한다



자카르타 [Jakarta]


 인도네시아 자바섬 북서안에 있는 수도이다. 면적은 577㎢, 인구는 916만 500명(1995)이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시대(1949)에는 바타비아라고 하였다. 동남아시아 제1의 대도시이며, 행정상 ‘대(大) 자카르타 수도 특별지구’를 형성한다. 시가는 북쪽의 리웅강(江) 하구에서 남쪽으로 약 25km에 걸쳐 뻗으며, 해발고도는 낮아 도심에 있는 기상대 자리가 8m이다. 연평균기온은 26.9 ℃로 연교차가 1 ℃에 불과하며, 1월과 2월에는 20 ℃ 이하가 되는 날도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1,755mm로 2/3는 12∼4월의 우기에 집중하며, 저지대에서는 홍수를 일으키기 쉽다. 습도는 1년 내내 높다. 자카르타는 16세기 경에는 서부 자바의 파자자란 왕국의 영토였으며, 당시 리웅강 하구에는 특산물인 야자(칼라파) 열매를 적출하는 순다 칼라파라고 하는 항구가 있었다. 이 항구는 1527년 서(西)자바의 강력한 이슬람교국 반탐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자야카르타(Jayakarta:승리의 도시)라고 개명되었다. 16세기 말 자바에 진출한 네덜란드인은 지리적 위치가 뛰어난 점에 주목하였다가, 마침내 초대 동인도 총독 쿤(Coen)은 리웅강 하구에 성채를 건설하고 운하를 만들어 시가를 건설하였으며, 지명도 바타비아라 명명하여 동인도 제도에서의 네덜란드 식민 세력을 위한 최대 거점으로 삼았다. 그후로 이곳은 군도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으로서 번영하였으며, 19세기에는 시가가 차차 남쪽으로 확대되고, 리웅강 하구의 동쪽에는 탄중프리오크가 근대적 설비를 갖춘 외항으로서 건설되었다. 자카르타는 산업적으로는 거대한 소비도시지만, 근교에 외국자본의 원조에 의한 방직·식품·전기기계·약품 등의 근대공업이 일어나고 있다. 또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한 육·해·공의 교통로도 잘 정비되어 동남아시아의 일대 중심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무역의 절반은 자카르타를 통하여 행해진다. 자카르타는 또한 문화의 중심이며, 인도네시아대학을 비롯하여 각종 학교와 연구기관이 있다. 시는 관광대상이 많으며, 대통령 관저·독립광장·높이 137m의 독립기념관(꼭대기는 35 kg의 순금으로 된 불꽃 모양을 이루고 있음)·구(舊)바타비아성의 유적·박물관·어시장·공화국 방송국·영웅묘지와, 하구 근처의 구시가지, 전후에 만든 남부의 크바요란새 주택지, 10만 명을 수용하는 근대적 경기장, 남동 16 km 지점에 신설된 라그난 동물원, 남쪽 60 km 지점에 있는 보고르 식물원, 이슬람교 사원과 로마가톨릭 성당 및 개신교 교회(17세기) 등을 볼 수 있다. 자카르타는 동남아시아의 전형적 복합도시이며, 주민의 종족 구성은 역사적으로 복잡하다. 외래민족인 유럽인·중국인·아랍인·인도인 등 외에 섬에 따라 언어와 문화를 달리하는 말레이계 각 부족이 내주(來住)하여 저마다 집단거주지를 형성하였다. 또 이들은 도시기능과 결부되어 하구 부근의 저지에는 상업 지구, 남쪽에는 정치·문교교육 지구 및 주택 지구가 전개되는데, 한길의 근대적 도시경관과는 대조적으로 뒷길에는 원주민이 밀집 거주하는 농촌적 경관을 보이며, 양쪽 사이에는 생활 수준의 격차도 현저하다. 또한 전후의 폭발적인 인구증가(1944년 말의 인구는 85만)는 시민의 생활격차를 더욱 조장하였다. 수카르노 정권 이후 시가의 근대화에 주력하여 도심부와 새 주택 지역에서는 건물과 도로가 새롭게 건설되었으나 시 전체에는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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