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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시바 여왕 왕궁터

성지순례/인도,아프리카,호주 등

by baesungsoo 2007. 4. 1.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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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의 여왕의 왕궁 터로 알려진 곳. 오른쪽 철판 지붕이 부엌 아궁이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는 둔구르 유적지이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는 훤하게 트인 넓은 벌판에 있다. 돌들을 쌓아 만든 왕궁터의 건물은 거의 무너지고 토대가 된 돌기반과 형태만을 알 수 있을 정도의 2∼3m 높이의 벽만이 복원되어 있다. 한 방에는 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샤워시설과 바닥의 돌에 물이 흐르는 도랑이 파여 있는데 목욕탕으로 사용되던 것이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물을 흘려보내는 하수구가 잘 만들어져 있었다. 내 관심을 끈 것을 바로 천장 위에 홈을 파서 물이 위에서 떨어지도록 한 샤워시설이었다. 그 옛날 시바의 여왕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 오늘날처럼 천장 위에서 떨어지게 하는 샤워시설을 갖춰 놓고 매일 목욕을 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사람들이 이곳을 여왕의 왕궁터로 믿는 데는 바로 샤워시설과 시바의 여왕의 미모를 연관시키는 상상력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건물 끝에는 별도로 네모난 공간이 보이는데, 빵을 굽는 화덕과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잘 보존되어 있어 인상적이었다. 두 개의 화덕과 빵에 여러 가지 무늬를 내기 위한 틀도 그대로 놓여 있었다. 부엌은 빗물에 훼손되지 않도록 위에 철판 지붕을 덮어 씌워놓고 있었다. 옛날에도 사람이 사는 집에서 가장 중요한 부엌과 물을 흘려보내는 하수구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는 것을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는 잘 보여줬다. 왕궁의 뒤쪽에는 여행객들이 왕궁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5m 정도의 망루 같은 철제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다. 전망대에 올라가 왕궁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왕궁터의 전면이 위에서 아래로 나온다. 실제로 철제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보니 왕궁터의 모습과 탁 트인 벌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에티오피아에서는 보기 드물게 여행객을 위한 시설을 갖추어 놓은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출처-  2007.2. 오마이뉴스 김성호 기자 (내가 만난 아프리카)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로 알려진 내부의 모습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라는 둔구르 역시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과 같이 애석하게도 그 건축연대가 여왕이 살던 기원전(B.C.) 10세기보다 무려 1500여년 뒤인 7세기경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 유적지의 석조기술이 7세기 무렵에 만들어졌고, 용도도 왕궁이 아니라 당시 귀족의 저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유적지 뒤로는 작은 둔덕 같은 언덕이 보이고, 건너편 앞에는 10세기 구디트 여왕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구디트 오벨리스크 유적지가 있다. 당시 왕을 죽이고 권좌에 오른 구디트(Gudit) 여왕은 요디트(Yodit.영어의 유디트(Judith)라는 뜻) 여왕이라고도 불리는 데, 다신교도 또는 유대교도로 알려졌다.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구디트 여왕은 악숨 왕조를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둔구르 유적지와 칼렙 왕의 왕궁터, 교회, 오벨리스크 등 유적지를 철저히 파괴해 악숨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구디트 여왕은 구교도로서 수많은 신교도들을 처형한 16세기 영국의 메리 1세 여왕과 18세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7세기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처럼 에티오피아에서는 악명 높은 여왕의 대명사로 꼽힌다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으로 알려진 곳

 

경사진 산의 바위를 깎아 만든 시바의 여왕의 야외 목욕탕은 폭 30m, 길이 67m나 되고 깊이가 5m나 되어 목욕탕이라기보다는 대형 수영장이나 저수지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내가 찾았을 때도 한 여인은 빨래를 하고 있었고,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는 노란색과 파란색의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집으로 가져가려는지 물통을 옮기고 있었다. 옛날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이라는 이곳은 지금 지역주민들이 물을 깃는 생활용수 저장소이자 옷을 빠는 빨래터로 이용되고 있었다. 재미난 사실은 에티오피아인들이 이곳을 시바의 여왕이 아름다운 몸매를 드러내며 목욕을 하던 신성한 장소로 철썩 같이 믿고 있는데 반해 역사학자들은 시바의 여왕 시대보다 1천여 년이 뒤진,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시바의 여왕은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인 B.C.10세기의 인물이기 때문에 목욕탕이 만들어진 시기와 1천여 년의 시대적 차이가 나는 것.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하나로 부합되지 못하고 엇갈리는 순간이다. 전설은 역사적 사실에 의해 무너져 내려야 할 운명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전설은 역사적 사실과 별도로 당시 민중들의 열망과 바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민중의 꿈과 희망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전설로 승화되는 법. 예로부터 물이 귀한 자신들의 터에 중요한 식수를 제공하는 이 저수지를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이라고 여길 정도로 신성시해왔으며, 시대를 넘어 시바의 여왕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자부심, 나아가 자신들의 공동의 시조로 여기는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이기 때문에 당연히 조상대대로 지역주민 모두의 공동재산이고, 시바 여왕의 목욕탕의 물처럼 물 한방울도 아껴 사용해야 한다는 에티오피아인들의 물에 대한 숭배의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에티오피아인들에게는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선조들의 혼과 교훈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가 시바의 여왕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는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하기 전 내가 타고 온 비행기 안에서도 알 수 있었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아디스아바바로 오는 비행기를 갈아타고 오는데, 에티오피아 비행기 안에 있는 항공사 안내책자에 보니 에티오피아항공사의 마일리지 서비스 이름이 '시바마일스(ShebaMiles)'였다. 마일리지 서비스 이름을 시바의 여왕의 전설에서 따온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솔로몬 왕과의 관계, 그리고 에티오피아 건국신화에 대해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에티오피아는 시바의 여왕의 '미모'와 유대왕국의 솔로몬 왕의 '지혜'를 겸비한 민족이라는 과시였다.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이라는 곳에서 물을 깃고 있는 주민들

 

솔로몬왕과 시바여왕, Giovanni Demin 

 

B.C.10세기 고대 이스라엘(유대) 왕국의 지혜의 왕으로 알려졌던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 사이의 전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원본에서 시작되는데, 그 이후 시대가 지나면서 계속해서 첨가되거나 윤색되면서 에티오피아의 전설로 굳어졌다. B.C 555년 이후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구약성서 열왕기(상 10:1∼13)에 나오는 이야기에 보면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의 명성을 듣고 어려운 문제를 들고 시험하고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많은 수행원과 함께 향료와 금과 보석 등을 낙타에 싣고 왔는데,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바친 것처럼 그렇게 많은 향료가 온 적이 없었다. 솔로몬 왕은 시바의 여왕에게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하사품으로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갖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구약 성서에는 이처럼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 시바의 여왕의 이름이나 솔로몬 왕과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서기 646년 완성된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의 사자(使者)(수라 27)에는 시바의 여왕의 이름이 '빌키스(Bilqis)'이라는 새로운 사실과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이야기가 다른 버전으로 나온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해 왕궁으로 들어가는데 입구에 호수 같은 물웅덩이가 있어 치마를 들어올려 물을 건너기 위해 두 다리를 드러냈다. 그러자 솔로몬 왕은 그것은 물이 아니라 바닥에 유리로 깔은 길이라며 치마를 내리도록 했다. 물이라고 보인 것은 진짜 물이 아니라 유리에 비친 반사일 뿐이었다. 이와 같이 실체는 하나일 뿐이고 그것은 바로 창조주 알라이다. 여왕은 그 이후 태양신을 숭배하는 것을 버리고 창조주 알라를 숭배하게 되었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만난 뒤 태양신을 버리고 이슬람교의 유일신인 알라를 믿게 되었다는 '이슬람판' 이야기로 바뀌어 있다. 한참 지나 14세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작가들에 의해 쓰인 에티오피아의 대서사시인 <케브라 네가스트(Kebra Negast)>라는 전설모음집에서는 시바의 여왕의 이름이 코란과 달리 '마케다(Makeda)'로 나온다.  암하릭어로 '왕들의 영광'이라는 뜻의 '케브라 네가스트'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여왕인 시바의 여왕은 오랜 여행을 통해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솔로몬 왕을 방문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게 되자 솔로몬 왕은 방안에 선을 긋고 자신의 물건에 시바의 여왕이 손을 대지 않으면 자기도 그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하도 목이 말라 잠을 자다 깨어난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 왕이 옆에 놓아두었던 물통의 물을 그만 마셔버리고 말았다. 지혜로운 솔로몬 왕이 저녁 음식으로 매운 향신료가 많이 담긴 음식을 시바의 여왕에게 먹여 갈증이 나도록 했던 것이다. 시바의 여왕이 약속을 어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솔로몬 왕은 아름다운 시바의 여왕을 품에 안고 밤새 사랑을 나누었다. 오랜 기간 이스라엘에 머물던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 왕과 나눈 하룻밤 사랑으로 아들 메넬리크를 낳아 에티오피아로 돌아왔다. 메넬리크는 성장한 후 다시 자신의 아버지인 솔로몬 왕을 보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십계명을 담은 법궤를 가지고 돌아와 악숨 왕국을 세웠다. 그가 바로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인 메넬리크 1세 황제이다. 이처럼 시바의 여왕의 이야기는 처음 구약성서의 '유대교판'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코란의 '이슬람판' 이야기로, 그 뒤 케브라 네가스트의 '기독교 에티오피아판' 이야기로 시대에 따라 내용이 첨가되거나 바뀌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솔로몬왕 앞에 선 시바여왕, 귀스타브 도레

 

시바영왕을 맞이하는 솔로몬, Van Delen 

 

솔로몬앞의 시바여왕

 

솔로몬과 시바영왕, 피렌체 두오모성당 청동문 조각 

 

솔로몬과 시바여왕

 

사진, 글 출처-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87876

                      2007.2. 오마이뉴스 김성호 기자 (내가 만난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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