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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우 포로수용소 (Dachau concentration camp)

성지순례/서유럽(독일)

by baesungsoo 2013. 10. 2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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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우 유태인 포로수용소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227562) 

 

아돌프 히틀러의 총리 취임 약 5주 뒤인 1933년 3월 10일 독일에 만들어진 최초의 나치 집단수용소이다. 뮌헨 북쪽 약 16㎞ 거리의 다하우시 변두리에 세워진 이 집단수용소는 SS(나치 친위대)가 조직한 수용소들의 모델이 되었으며 훈련 중심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약 150개에 달하는 지부 수용소가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 여러 곳에 세워졌고 이들은 본부 수용소와 합쳐 다하우라 불렸다. 이 남부 조직과 함께 부헨발트에 중부 수용소, 작센하우젠에 북부 수용소가 세워졌으며 적어도 16만 명의 죄수가 본부 수용소를, 9만 명이 지부를 거쳐갔다. 질병, 영양실조, 육체의 억압 등 소위 '자연감소'로 적어도 3만 2,000명의 입소자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입소자들이 폴란드의 집단학살수용소로 보내졌다. 다하우는 독일인 의사와 과학자들로 하여금 입소자들을 의학실험에 강제로 사용케 하기 위해 최초로 실험실을 세운 가장 중요한 수용소였다. 의사와 과학자들은 입소자를 실험재료로 삼아 ① 대기압의 급격한 증감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고, ② 온혈동물의 냉동을 연구하며, ③ 죄수들을 말라리아에 감염시킨 뒤 여러 치료약제를 시험해보고, ④ 바닷물을 마시거나 음식이나 물을 먹지 않는 것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실험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계속된 이런 실험과 혹독한 생활환경으로 다하우는 가장 악명 높은 수용소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수용소 및 다른 수용소 출신 과학자와 의사들은 뉘른베르크에서 '의사 재판'(Doctors' Trial)을 받았고 이중 7명이 사형당했다.  (글 출처- daum 백과사전)

 

수용소 입구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1722460)

 

NEVER AGAIN

 

다하우 유태인 포로수용소 대형 추모비           (출처- http://blog.naver.com/dusl1984) 

 

추모 조형물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1722460)

 

복원한 수용소 전경

 

복원한 수용소 전경

 

복원한 수용소 내부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1722460)

 

복원한 수용소 내부

 

유태인 추모 기념비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1722460)

 

러시아 포로 추모관

 

다하우 유태인 포로수용소 기념비

 

다하우 유태인 포로수용소 기념비

 

다하우 포로수용소 메인전시관    

 

다하우 포로수용소

 

수용소

 

다하우 유태인 포로수용소  (출처- http://blog.chosun.com)

  

조각물   

 

다하우 포로수용소 뒷편 

 

다하우 포로수용소 뒷편 

 

다하우 유태인 포로수용소 화장터

 

다하우 유태인 포로수용소 화장터 소각로

 

다하우 유태인 포로수용소 화장터 소각로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227562)

 

수용소 실내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227562)

 

수용소 모형도

 

다하우 포로수용소 입구 조형물 

 

조형물 

 

실내 책상 

 

전시물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227562)  

 

전시물

 

전시물

 

전시물

 

전시물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

 

전시물

 

전시물 

 

전시물

 

전시물  

 

학살 장면    (출처- http://blog.naver.com/ddody11)

 

1933년에서 1946년까지 206,206명의 죄수가 다차우 수용소에 들어왔다. 그중 몇명이 죽었는가는 알려져있지 않다. 소련군 포로들이 대략 수천명이 사살되었고, 게슈타포에 의해 특별취급(Sonderbehandlung="Special Treatment," a Nazi euphemism which signified "killing")표식이 붙은 시민들은 죽이도록 되어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음의 기계로 죽여졌다. 이러한 사람들은 서류로 남아있는게 없고 1933년에서 1945년사이 다하우 수용소에서 죽은 유대인은 5,000명을 넘지않는다. 해방이 되는날 대략 전체 32,000명의 피수용자들중 2,500명이 유대인이었다.

 

미군에 항복하는 수용소 독일군  (출처- http://blog.naver.com/ddody11) 

 

항복하는 Heinrich Wicker (가운데 모지 쓴 독일인)

 

1945년 4월 29일 오후, 뮌헨근처의 다하우수용소의 SS 중위(SS-Totenkopfverbande) Heinrich Wicker는 미군에게 항복한다.

 

이날 미군에 의해 처형된, 항복한 SS대원(군 병원에 부상으로 입원한 환자가 대부분)은 520명에 달한다.

 

1935년의 수용소 사진

 

당시 수용소의 주출입구   (출처- http://blog.naver.com/ddody11)

 

 철문에 '노동은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수용소가 해방된뒤 풀려나는 남,여들

 

수용소가 해방된뒤 풀려나는 남,여들

 

 희생자들의 옷가지를 모아둔것

 

영화관

 

다하우는 1933년 3월 군수품 공장이 있던 자리에 처음으로 수용소를 세운 곳이다. 유태인, 정치적 반대자, 목사 등 나치정권에 대항하던 사람들을 수용했었다. 1933년~1945년 동안 무려 20,6000명의 등록된 수용자가 있지만 등록되지 않고 무작정 끌려온 수용자들이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정확한 수치는 얼마인지 알 수 없다.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뉘우치기 위해 1965년에 이 안에 세워진 박물관에는 그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과 설명 그리고 전시물 등이 있다. 이 안에서는 당시의 수용소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필름을 1일 3회 상영한다.

 

유태인 숙소

 

유태인 숙소 세면장

 

유태인 숙소 화장실

 

 수용소 수용복    (출처- http://cafe.daum.net/bpguide)

 

실내 독방

 

내부      (출처- http://blo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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