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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성 토마스교회 (Thomaskirche, Leipzig)

성지순례/서유럽(독일)

by baesungsoo 2013. 12. 13.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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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교회     (출처- http://blog.naver.com/zikimi_z/140143588978)


교회 건물은 원래는 카톨릭 교회로 지어 졌다. 그러나 독일에서 카톨릭이 쇠퇴 하고 특히 나치 시대와 동독 시대를 지나 면서 이제는 교회 라기 보다는 바하의 무덤으로 더 유명해 졌다. 성 토마스교회는 J.S.Bach가 27년간 칸토르(합창장)로 봉직하고 1750년에 그의 생을 마감했던 곳이다. 바하는 이곳에서 미사곡 ,오라토리오 등을 작곡 하였다. 성 토마스교회는 라이프치히 중앙역에서 한 10분 정도에 위치해 있다. 교회의 광장에는 바흐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교회 내부는 바흐 당시와는 실내의 구조나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다고는 하나  온통 바흐와 관련된 시설로 채워져 있다. 교회 2층에는 바흐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고 스테인드 글라스의 정중앙에는 바흐의 상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으로 하나 건너에는 멘델스존의 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흐를 발굴해 냈다는 공로를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제단이 있는 곳의 바닥에는 바흐의 무덤이 있고 그 옆에는 무덤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뿐아니라 교회내의 모테트 연주회나 오라토리오 연주회는 바흐의 작품들이 주요 레파토리를 이루고 있다.

 

성 토마스 교회          (출처- cafe.daum.net/ybpa/ODJU/793)

 

성 토마스 교회     (출처- http://blog.daum.net/jwbchun/71)

 

성 토마스 교회 

 

성 토마스 교회             (출처- cafe.daum.net/ybpa/ODJU/793)

 

요한 세바스찬 바흐            (출처- http://blog.daum.net/jwbchun/71)

 

요한 세바스찬 바흐            (출처- http://blog.naver.com/heyrain625/100187702603)

 

내부                   (출처- cafe.daum.net/ybpa/ODJU/793)

 

제단                   (출처- cafe.daum.net/ybpa/ODJU/793)

 

스테인드 글라스          (출처- cafe.daum.net/ybpa/ODJU/793)

 

제단                   (출처- cafe.daum.net/ybpa/ODJU/793)

 

 

스테인드 글라스          (출처- cafe.daum.net/ybpa/ODJU/793)

 

바흐의 묘지

 

보통 제단이나 설교단은 교회 정면에 있는 것이 통상적이나 토마스교회의 제단 위치에는 바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1950년에 옮겨진 바흐의 무덤

 

바하의 무덤             (출처- cafe.daum.net/ybpa/ODJU/793)

 

오르간

 

1889년 자우어(Wilhelm Sauer)에 의해 만들어진 오르간 바흐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오르가니스트와 지휘자로 근무하긴 했지만, 바흐시대의 오르간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출처- http://weekly.encyber.com 

 

스테인드글라스와 바흐 

 

 

 

 

 

 

 

 

 

 

  

성 토마스교회 합창단, 2004.3. 세종문화회관  (블로그 > 저 하늘 높이 뜬 흰구름)

 

 

 

요한 세바스찬 바흐

 

헨델과 같은 해인 1685년에 태어난 바흐는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소도시 거리의 악사인 아버지를 잃고나서 오르가니스트인 형 집에서 자랐는데 그곳에서 피아노의 전신인 클라비어라는 악기를 배웠다. 바흐는 악보가 귀하던 시절, 남의 악보를 베끼면서 거의 독학으로 작곡을 배웠다. 바흐는 1703년 4월 18세부터 아른슈타트(1703∼1707), 뮐하우젠(1707∼1708)에서 잇따라 오르가니스트로 일을 했다. 뮐하우젠 시기에 바흐는 별로 신통한 공적은 남기지 않았으나 뛰어난 연주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소수의 교회 칸타타 작곡에 손을 댔다. 궁정 오르간 주자가 되었던 바이마르(1708∼1717)시대에 그는 본격적으로 작곡 활동에 들어갔으며, 유명한 <토카타와 푸가>가 그때 작품이다. 1717년 연말 바흐는 바이마르를 떠나 작센지방의 소도시 쾨텐에서 궁전악장이 됐다. 그는 23세의 군주 레오폴트의 배려속에 수많은 실내악곡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라인켄이나 쿠나우 같은 다른 음악가들이 더 유명했지만, 오르간 분야에서 만큼은 바흐의 연주 기교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현란했다고 합니다. 마치 날개라도 달린듯 그의 발은 페달 위를 날아다녔고 힘찬 소리가 천둥처럼 교회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1720년 그가 외국여행을 갔다가 돌아와보니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이미 죽어 장례식까지 끝나 있었다. 이듬해 성악가수인 안나 막달레나 빌케와 재혼을 한 바흐는 1723년 봄 드디어 라이프치히로 옮긴다. 바흐의 성격은 매우 고집불통이고 흥분하기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곳에서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직장을 그만두려 하다가 그를 고용했던 공작이 극구 만류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바흐가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자 공작은 그를 감옥에 가두는 사태도 벌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성실함으로 살았다. 바흐의 자식은 21명이나 되는데 첫 부인과 7명, 재혼한 부인과는 14명을 낳았다. 그중 절반 정도가 아주 어릴 때 죽었다. 둘째부인 안나 막달레나는 "요람이 빌 틈이 없다"고 비명을 질렀지만 바흐는 풍성한 자식농사에 만족했다. 그는 "아이들이 모두 음악에 재능이 있어 가족과 함께 성악ㆍ기악ㆍ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겠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라이프치히가 바흐의 도시가 된 것은 1750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27년 동안 성토마스교회에서 성가대장(cantor)을 맡았기 때문이다. 즉흥 야외극이 벌어지는 라이프치히 시내 중심가 장터를 돌아서면 고즈넉히 자리잡은 성토마스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성토마스교회는 유럽의 다른 오랜 교회들과 비교하면 그리 큰 곳이 아니다. 그곳에서 바흐는 140여곡의 칸타타와 대위법의 극치라고 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 미완성곡인 <푸가의 기법>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만들고 연주했다. 바흐는 1750년7월28일 밤8시45분. 전년의 뇌졸중 발작과 시력 감퇴로 체력이 크게 약해진 상태에서 수술과 치료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생애를 마감했다. 바하의 무덤은 성 토마스 교회 안에 있다. 성직자가 아닌데도 교회 제단(alter room)에 묻혀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바흐는 죽고 나서도 한참 동안 무명(無名)이었다. 그러던 것이 1829년 베를린에서 펠릭스 멘델스존이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지휘하면서 본격적인 바흐 복원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멘델스존은 리스트ㆍ슈만 등과 함께 바흐 서거 100주기이던 1850년, 바흐협회를 창설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흐의 음악은 <평균율 클라비어>나 연주되었을 뿐, 성악곡은 악보로 출판되지도 않았다. 바흐가 남긴 작품 전체의 출판은 1900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비록 지금 성토마스교회에는 바흐 자신이 연주했던 오르간은 사라졌고, 바흐와 그의 대가족이 살았던 성토마스교회의 학교는 지난 1902년에 철거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과 동독 공산정권을 지나면서 성토마스교회는 물론, 바흐의 흔적은 많이 훼손되어 버렸다. 성토마스교회 바로 옆에 있는 바흐 박물관도 다른 위인들의 그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당시 라이프치히를 방문한 어느 한국인 유명 음악가는 "와서 직접 박물관을 보니 실망했는데, 결국 바흐의 위대함은 어떤 장소나 유적보다도 음악을 통해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라이프치히에는 성토마스교회 말고도 역시 바흐가 잠시나마 활동했던 성 니콜라이교회나 바흐를 역사적으로 부각시켰던 멘델스존 기념관 등도 함께 자리잡고 있다   (출처- 블로그 > 저 하늘 높이 뜬 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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