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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헨 대성당 (Aachener Dom, Nordrhein-Westfalen)

성지순례/서유럽(독일)

by baesungsoo 2014. 1. 1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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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헨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독일의 북부 라인베스트팔렌 주[State of North Rhine-Westphalia],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에 위치한 아헨 대성당은 샤를마뉴 대제가 790~800년경에 궁정 예배당으로 건설하였다. 팔각형 바실리카와 둥근 지붕[cupola]이 있는 아헨 대성당은 신성로마제국의 동부 지역 교회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중세에 들어 웅장하게 증축하였다. 아헨 대성당은 궁정 예배당으로 건설할 당시부터 뛰어난 예술적 창조물로 여겨졌다. 그리스에서 가져온 기둥과 이탈리아 산 대리석, 청동제 창문, 돔에 있는 가장 큰 모자이크[현재는 파괴되어 없음] 등으로 장식하였다. 이 유산은 고대 이래 알프스 북부 지역에서 둥근 지붕이 있는 첫 번째 건축물이다. 고전 양식과 비잔틴 양식의 전통을 온전히 따른 이 성당은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 뿐 아니라 중세 초기에도 종교적 건축물의 원형으로 유지되었다. 메틀라흐(Mettlach)와 네이메헌(Nijmegen) 등은 아헨 대성당을 모방하여 건축하였다. 아헨 대성당은 설교단이 있는 집중식 평면 구도를 기반으로 한 궁정 예배당의 우수하고도 특별한 사례이다. 아헨 대성당은 서유럽 통합과 샤를마뉴 치하의 종교적・정치적 부흥을 상징한다. 샤를마뉴 대제는 814년 이곳에 안치되었다. 중세 시대에 걸쳐 1531년까지 독일 황제의 대관식은 아헨 대성당에서 거행하였다. 보물실의 소장품은 고고학, 미학, 역사적 측면에서 가치가 크다. 아헨 지방에게 가장 중요한 시대는 768년 샤를마뉴 대제가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온천 옆에 있는 황궁은 곧 샤를마뉴 대제의 영구 거주지가 되었고,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그로부터 200년 뒤에 샤를마뉴 대제는 성인 반열에 올랐다. 이 덕분에 그의 무덤과 유품을 보려는 순례자들이 아헨으로 모여들었다. 샤를마뉴 대제와 이 도시의 관계는 도시 풍경에 있는 수많은 건축 유산과 기념물에서 볼 수 있다. 샤를마뉴 대제가 786년 아헨에 궁정 예배당을 건설할 때 그의 꿈은 ‘새로운 로마[new Rome]’의 창조였다. 건설 당시 아헨 대성당의 핵심은 알프스 북부에서 가장 큰 돔이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 건축물의 정수는 고전 양식, 비잔틴 양식, 독일・프랑크 양식를 융합한 매혹적인 건축물이다. 936~1531년까지 600여 년 동안 30여 명에 이르는 독일 왕이 아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대성당은 오늘날에도 과거 역사의 매력을 상당히 유지하고 있다. 대성당의 현재 형태는 천 년 이상 세월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처음에 지은 건물 가운데 14세기에 지은 시청 건물에 위치한 대관식장[Aula Regia]과 궁정 예배당 두 곳이 지금까지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궁정 예배당을 건설한 뒤 그 주위에 대성당을 건설하였다. 궁정 예배당은 790~800년경에 건축하였는데 팔각형 평면 설계에 기반을 두었으며, 원형으로 둘러싼 복도・솟아오른 설교단・돔형 지붕이 있다. 예배당은 구조가 독특하여 나중에 건축한 부분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서쪽에 있는 안마당은 주랑[portico] 현관을 따라 궁궐의 방으로 통한다. 고딕 양식의 성가대석과 일련의 예배당은 중세 시대에 건축하였는데, 아헨 대성당을 특징짓는 혼합된 배치를 형성한다. 예배당 내부는 큰 십자형 기둥 8개에 둥근 아치를 올린 1층, 여성을 위한 방들이 있는 2층으로 구분된다. 서민들은 예배당 아래 부분으로 들어왔고, 황제는 독일 왕들이 즉위하는 석재 왕좌 위 높은 곳에서 제단을 향해 앉아 있었다. 높은 돔에는 원통형 구조물 위에 있는 열린 아치 형태 창문 8개로 빛이 들어온다. 이 돔은 처음에는 보라색 가운을 입고 요한계시록의 장로들에게 둘러싸여 보좌에 오른 예수 모습을 묘사한 모자이크로 덮여있었다. 현재의 모자이크는 1870~1873년에 만들었다. 예배당 내부는 샤를마뉴 대제가 로마와 라벤나에서 가져오게 했을 거라고 추정되는 색색의 대리석으로 장식하였다. 그 뒤 증축하였는데도 궁정 예배당은 아헨 대성당의 구조적 중심을 이룬다. 아헨 대성당의 부속 보물실은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보물실로 손꼽힌다. 성당 지하실에는 보석을 아로새긴 금제 로타의 십자가(990), 진주를 수놓은 짙은 청색의 벨벳 제의, 은과 금으로 만든 샤를마뉴 대제의 성골함 흉상, 샤를마뉴 대제의 유해가 있다. 그리스 신화 중 페르세포네 납치 내용을 양각한 대리석 관도 있다.

 

아헨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nachDeutschland/4z4N/)

 

8각형 돔                 (출처- http://cafe.daum.net/k963210/2s1i/)

 

대성당의 중심을 이루는 돔 건물은 8각형이며 16각형으로 된 외벽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것은 비잔틴양식의 전형이다. 이것은 그 당시 8 이 종교적으로 완벽함과 조화로움을 뜻하는 숫자였기 때문이다.  건물 내부의 위쪽 벽과 천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아쉽게도 이 모자이크는 1165년에 프리드리히 1세가 지름 4.2m의 커다란 바퀴모양 촛대를 달면서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 이 촛대는 예루살렘을 상징한다고 하며 27m 길이의 쇠사슬로 고정되어 있다.

 

아헨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아헨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k963210/2s1i/)

 

아헨 대성당 서쪽 탑                (출처- http://cafe.daum.net/k963210/2s1i/)

 

서쪽 탑은 1350년 무렵에 지었는데, 이곳에는 1239년에 만든 《성모 마리아의 성유물 상자》와 1349년 제작한 《샤를마뉴 흉상을 장식한 궤》 등의 보물을 보관하고 있다. 1978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이다. A.D, 790~800년 사이 샤를마뉴 대제 시 건설되었으며 중세건축의 장엄미를 대표한다. 785년경에 착공한 궁정 예배당은 그 후 몇 세기 동안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아헨 대성당이 되었다. 꼭대기에 탑이 있는 바로크 양식의 둥근 지붕은 1664년에 덧붙여졌다.

 

아헨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아헨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k963210/2s1i/)

 

아헨 대성당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8각 구조 천장엔 동로마 양식의 예수 모자이크화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프랑크 왕국의 황제, 샤를마뉴 대제(재위 768-814)가 심혈을 기우려 건립한 아헨대성당은 특이하게도 천장이 8각 구조다. 서양에선 원과 사각의 중간형태인 이 8각을 완전함의 상징이라 보았기에 궁정예배당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거기에는 예수와 성자들의 모습이 모자이크화로 새겨져 있다. 높은 그곳은 바로 그들이 지향하는 천국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모자이크 그림이 서유럽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도읍지로 한 동로마제국에서 태어나고 또 꽃피었던 미술형식이다. 라벤나(이탈리아)의 성 비탈레성당을 방문한 샤를마뉴 대제가 그 벽면과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 그림에 감탄한 나머지 저렇게 만들게 한 것이었다. 흰색 승복을 입고 있는 성자들의 모습도 영락없이 비탈레의 그것을 닮았다. 로마교황청과 특수관계를 유지해야 했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로마와 오랫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비잔틴(동로마)제국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했는데, 이렇게 알프스 북쪽의 아헨에다 비잔틴 풍의 성 비탈레를 건설함으로써 동서문화의 화합을 이루려 했던 것이다.  

 

제대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샤를마뉴의 성유물 상자           (출처- http://cafe.daum.net/millk47/6sob/)

 

15세기 초 고딕양식으로 만든 내진(內陣)에는 샤를마뉴의 성유물 상자를 안치하고 있으며, 벽면은 긴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였다. 

 

샤를마뉴의 성유물 상자             (출처- http://cafe.daum.net/millk47/6sob/)

 

제대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천장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천장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천상의 예루살렘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사자 머리 손잡이로 잘 알려진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청동문이 있는 서쪽 입구로 들어가 작은 홀을 가로지르면, 유명한 팔각형 중앙부가 나타난다. 중세에는 8이라는 숫자가 조화와 완벽함을 상징했다. 중앙부는 지름이 14.4m이며, 바깥쪽은 십육각형의 2층으로 구성된 주랑에 둘러싸여 있다. 튼튼한 각주에 붉고 화려한 대리석 원주와 색깔이다른 석재를 쓴 아름다운 아치에 둘러싸인 이 중앙 공간은 보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둥근 천장의 높이는 십육각형으로 된 주랑의 평면 지름과 일치한다. 이것은 [요한묵시록] 제21장에 나와 있는,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동일하다는 천상의 예루살렘을 연상하게 한다. 둥근 천장은 화려한 금빛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고, 지붕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쇠사슬 끝에는 작은 탑 16기와 촛대 48개가 달린 청동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이 샹들리에는 1165년 카롤루스 대제가 성인 반열에 오른 것을 기념해 프리드리히 1세가 헌납한 것이다.

 

내부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중앙부는 8각 모양이고 지름 14.4m, 높이 32m에 이르며, 바깥쪽은 16각 모양의 2층으로 된 주랑(周廊)에 둘러싸여 있다. 중앙 공간은 각진 기둥과 아름다운 아치에 싸여 있으며, 둥근 천장은 모자이크로 꾸며져 있다. 천장 아래로 길게 드리운 쇠사슬에는 작은 탑 16기와 촛대 48개가 달린 청동 샹들리에를 매달아 놓았다. 주랑의 위층 회랑(回廊)에는 샤를마뉴의 왕좌가 있다. 왕좌는 대리암으로 만든 대좌와 소박한 나무의자로 되어 있는데, 나무의자는 6단의 계단 위에 놓여 있다. 

 

설교단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샤를마뉴의 왕좌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주랑의 위층 회랑(回廊)에는 샤를마뉴의 왕좌가 있다. 왕좌는 대리암으로 만든 대좌와 소박한 나무의자로 되어 있는데, 나무의자는 6단의 계단 위에 놓여 있다. 

 

1349년 제작된 카를루스 대제 흉상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카를대제 또는 카롤루스대제라고도 한다. 이 흉상은 1349년에 제작된 것으로 파손이 심해 지난 1년여 동안 복구작업을 거쳐 이전 상태를 겨우 회복했다. 전문가들은 이 흉상은 내부를 나무로 만든 뒤 이 위에 금과 은으로 덮는 방식으로 제작했다고 말했다. 부왕 피핀이 죽은 뒤 동생 카를만과 왕국을 공동통치하였으나, 771년에는 동생 역시 죽어 단일통치자가 되었다. 772년부터 804년까지 몇 차례의 원정을 감행하여 작센족의 정복, 북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 병탄,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사라센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에스파냐 국경에 변경령(邊境領)의 설치, 바이에른족 토벌, 그 부족의 태공(太公) 타시로 폐위, 바이에른과 케른텐 병합, 아바르족 ·벤드족 정복의 업적을 이루고,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는 이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하여 각 부족이 시행하던 부족법전을 성문화(成文化)하여 각 부족의 독립성을 인정하였고, 아울러 중앙에서 그라프 ·순찰사 등의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적 지배를 가능하도록 하였다. 지방봉건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세 여러 봉건국가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 실력을 배경으로 로마 교황권과 결탁하여 그리스도교의 수호자 역할을 하여 서유럽의 종교적인 통일을 이룩하였다. 800년에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로서 대관(戴冠)되었는데, 이 사건은 서유럽이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영향에서 명실공히 완전히 독립한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로마 고전문화의 부활을 장려하여 아헨의 궁정을 중심으로 알쿠인, 파울루스 디아코누스 등 성직자들이 활약하여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룩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전문화 ·그리스도교 ·게르만 민족정신의 3요소로 이루어지는 유럽 문화가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러 개화(開花)되어, 유럽의 역사적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전기(傳記)는 측근이었던 아인하르트의 《카를대제전》 등 몇 편이 있고, 점차적으로 이상화 우상화되어'샤를마뉴 전설’이라고 불리는 사상적 ·문학적 전승을 이루게 되었고, 중세 무훈시(武勳詩)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샤를마뉴의 유해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814년 샤를마뉴의 유해를 예배당에 안치하였다. 내실 중앙에는 샤를마뉴대제의 관이 놓여 있다. 이 관은 프리드리히 2세가 만든 것으로 대관식 때 그가 직접 새 관에 샤를마뉴대제의 유골을 옮겨 담았다고 한다. 8각형 건물의 중앙부에는 하인리히 2세가 기증한 설교대가 있었으나, 내실 홀을 마련할 당시 성물실 입구 위쪽으로 옮겨졌다. 내실에 있는 창과 창 사이의 기둥에는 교회 모형을 품에 안은 샤를마뉴대제와 성모마리아, 사도들의 상이 새겨져 있다.

 

(출처-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

 

 

<아헨대성당의 보물>  

 

성모마리아 유해 상자, 은과 구리 및 밀랍으로 만든 ‘성모 마리아의 성유물 상자’

 

로타의 십자가         (출처- http://blog.naver.com/unesco114)


1000년경에 제작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를 부조한 1세기 로마시대의 카메오가 박혀 있다. 유명한 ‘복음서’는 구름모양 바위 위에 앉아 복음서를 저술하는 저자들을 미니어처로 표현한 것이다. 

 

상아로 만든 샤를마뉴대제의 ‘뿔피리’

 

4명의 복음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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