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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틔 공소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상반 )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1. 28.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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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틔 공소


용인지방에 천주교의 전래가 언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첫 신앙운동이 시작된(1777∼1779년) 천진암과 경기도 광주 등이 용인과 인접한 거리라는 사실로 보아 다른 지역보다 상당히 일찍이 복음이 전해졌으리라 여겨진다. 첫 박해인 신유년(1801년)박해 때부터 각지에 흩어진 교우들이 이곳 용인지방으로 숨어들었고, 이들이 용인지방에 전교한 장본인일 수도 있다. 용인지방에는 오래된 전설을 갖고 있는 교우촌으로 사리틔(현 용인시 이동면 서리)에 전해오는 <신부터>, <붉은고개>에 관한 이야기와 태화산 중턱에 성지굴(聖地屈)이 있다. 문헌상으로는 1827년 정해 박해 때 경상도 상주 잣골에서 살다가 포교에게 잡혀 전주 감옥에서 1839년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의 경우로 보아 1815년 을해박해 때 이미 용인지역에 교우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글 출처- http://www.paxkorea.co.kr)

 

사리틔 공소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훗날의 행적에서 미루어볼 때 그는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학식을 습득했던 것 같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10년 정도가 되었을 때, 베드로는 사촌 이여진(요한)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런 다음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자 하였지만, 신부가 워낙 비밀리에 활동하였던 탓에 만날 수는 없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끝난 뒤, 베드로는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용인지방에 알려진 교우촌으로는 은이, 골배마실, 한터, 사리틔, 먹뱅이, 한덕골, 손골, 고초골, 용바위, 모래실 등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활동은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서울, 경기(용인)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서울과 경기지방의 은석골, 텃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묵리), 한덕골, 미리내, 한터,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단내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사리틔 공소 성모상 

 

서리 하반은 박해 때 교우들이 피신해 살던 마을이며 이곳에서 성명 미상의 성직자가 거처했으므로 신부 고개와 붉은 고개의 설화를 신자들에게 남겨 주었다. 아직도 신부가 거처하던 집터가 남아있고 신부터로 넘어가는 붉은 고개는 신부가 전교갔다가 밤 늦게 돌아오는 길에 호환(虎患)을 당해 세상을 떠난 신부를 마음 아파하던 교우들이 고개 이름을 붉은고개라고 칭하게 되었다. 또한 사목을 하려고 넘나들던 고개는 신부고개라고 이름지어 지금까지도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구전을 전해줄 수 있는 유물이 70여년전에 밭을 일굴 때 항아리가 발견되었고, 그 안에는 썩은 기도책과 묵주알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증언자는 작고한 전 공소회장인 권희집(權熙集) 마티아이며, 그는 어렸을 때 그 광경을 목격했다고 전해준다.

 

사리틔 공소 성모상 

 

더우기 1801년 신유박해로 모진 매를 맞고 귀양가던 권일신이 길(말죽거리 : 현 강남구 역삼동)에서 객사하자 그의 자손들은 선영인 양평군 대석리(대감마을)에 안장하고 남은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사해 와 살았다.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7대손이 되는 권혁진씨가 공소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초대 사리틔 공소 회장이며 공소 강당을 지은 조면(趙綿) 바오로는 1860년 때에 호조판서 조일(趙馹)의 손자로 일찍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부귀영화를 버리고 진천 백곡에서 살았는데 몇차례의 고난으로 인하여 가산은 몰수되고 가정은 풍지박산이 되어 길을 떠났다. 그럴즈음 포졸들이 추적해와 포박하려하자 조 바오로는 워낙 힘이 센 장수였기에 포졸의 상투를 풀어 나뭇가지에 단단히 동여매어 놓고 이곳 사리틔에 왔다는 일화가 전하여지기도 한다. 조면 바오로의 종증손(從曾孫)이 서울대교구 조창희(趙昌熙) 분도 신부이다.

 

종탑

 

공소 내부 문 

 

이 공소 강당은 1976년 용인 본당 장덕호 신부에 의해 서리 상반에 옛 모습대로 재건되었다. 지금은 사리틔 공소가 천리 성당에 속해 있다.  현재 상반과 하반에 모두 약 10가구 정도의 교우가 살고 있으며, 공소에서는 정기적인 미사는 없다.

 

공소 내부 문

 

공소 내부

 

제대 

 

교황과 십자고상

 

제대  

 

ㄱ자 내부

 

제대 중심 ㄱ자 내부

 

천장

 

십자가 14처  1처

 

2처

 

3처

 

4처

 

 

 

5처

 

6처

 

7처

 

8처

 

9처

 

10처

 

11처

 

12처

 

13처

 

14처

 

수원교구 소속, 현재 인근 천리 성당에서 관리하고 있다.

 

내부 작은 방

 

 

 

공소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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