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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희문 성지 (서울 중구 신당동 을지로 7가 )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1. 2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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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희문 성지 

 

조선의 사소문(四小門)중의 하나인 광희문(光熙門)은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었다.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閔鎭厚)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門樓)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박해당시 치명한 순교자들은 모두 광희문 밖으로 내던져 졌는데, 그때마다 문 밖은 굴러 떨어진 시신이 너무 많아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그의 가족이나 친지에 의해 남녀 구별에 따라 옷을 달리 입히고, 동여매서 거적으로 싸는 정도로 겨우 매장되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 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던 것이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현재는 퇴계로와 을지로 길이 만나 왕십리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온갖 사연을 간직하고서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며 서있는 광희문은 돌 하나하나마다, 풀섶의 풀 한 포기마다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깊은 감동을 간직하고 있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 꼽히는 곳을 바로 남한산성의 수구문이다. 남한산성 동문 한켠 산비탈 아래에는 사람 두어 명이 지나갈 만한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살아서 들어간 동문'은 곧 '죽어서 나온 시구문'으로 이어진다. 경기도 광주뿐만 아니라 인근 지방인 양주, 이천 등지의 교인들은 체포되자마자 오랏줄로 꽁꽁 묶여 바로 이 동문으로 들어갔다 죽어서는 수구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섰던 것이다.   (글 출처- http://info.catholic.or.kr)  

 

 광희문 성지 

 

 광희문 성지 

 

 광희문 성지 

 

 광희문 성지 

 

 광희문 성지 

 

 광희문 성지 

 

 광희문 후면

 

광희문 후면

 

광희문 후면 

 

광희문 성지 약도   (출처- http://www.pax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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