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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인언민 순교자 사적지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중룡 마을, 배나드리)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1. 2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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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언민(인은민) 마르티노 순교자 사적지


인언민 순교자 기념비는 619번 도로를 진입하여 약 4km가면 용동성결교회 푯말이 보이고 우측으로 교회쪽으로 들어서면 교회 바로 지나서 순교자 인언민과 무명 순교자 기념비가 나온다. 이곳은 용동리 2구(중룡)이다. 이곳 배나드리는 인언민 순교자 기념비(삽교읍 용동리 중룡)를 제외하고 특별히 성지나 사적지로 조성된 곳이 없어 마을을 찾는데 어려움이 있다.

(글- http://www.paxkorea.co.kr)

 

인언민(인은민) 마르티노 순교자 사적지

 

배나드리 교우촌


예산군 삽교읍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삽교천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부르며,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 다녔으므로 '배나드리'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은 삽교읍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지만 삽교천으로 인해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비밀히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고 명칭 또한 바로 이런 지형적 위치에서 연유되었다.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배나드리 교우촌

 

1817년 10월, 박해자들의 손길이 삽교 지역에도 뻗쳤다. 이때 삽교 지역에서 타격을 받은 곳은 바로 배나드리 공동체였다. 해미 포졸들이 갑자기 배나드리에 나타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해 간 사실로 보아 밀고자의 소행이었던 것 같다. 이곳에서 해미로 체포되어 간 신자는 20-30명 가량인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며, 민 첨지(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 첨지(요셉), 손연옥(요셉), 민숙간 등은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손연옥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아마도 이때 배교하고 석방된 신자들은 다른 지방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배나드리 교우촌은 없어졌다. 배나드리의 박해가 공식적인 박해가 아니었으므로 이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하여도 분명하게 알려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들 중 민 첨지는 결성(結城) 출신으로 목천 소학골(지금의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서 살다가 배나드리로 이주하엿고, 손연욱은 홍주 출신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배나드리는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모여 이룩한 교우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삽교본당 30년사 참조).

 

인언민(인은민) 마르티노 순교자 사적지

 

인언민(인은민) 마르티노 순교자 사적지

 

인언민(인은민) 마르티노 순교자 사적지

 

순교자 인언민(마르티노)( ? -1798)


삽교 지역 최초의 순교자이다. 덕산현 주래(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학문을 닦다가 진사 출신의 황사영(알렉시오)과 친분이 있게 되었고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단지에 넣어 삽교천에 던져버리고 한양으로 올라가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후에는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하였고, 빈민 구제에 자기의 재산을 모두 바쳐 인근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아들 요셉을 신부 곁에 남겨 놓고 공주로 이주한 인언민은 1797년 박해 때 이미 신자로 이름이 드러나 있었으므로 즉시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기는 커녕, 오히려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 주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원의를 나타냈다. 이후 그는 감사의 명대로 공주와 청주, 해미 옥으로 장소를 바꾸어가면서 갖은 형벌과 고난을 받았지만 그의 마음은 한결 같았다. 그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없음을 알고는 때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포졸들은 이 명에 따라 돌로 쳐서 턱뼈와 갈비뼈를 부수고, 온몸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1798년 12월 5일(또는 1802년 12월 5일) 목숨이 서서히 꺼져 가는 중에도 마르티노는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목숨을 바치는 거야"라고 여러 차례 되뇌이면서 63세로 순교의 영광을 드러냈다. 현재 용동리 교우촌 자리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인언민은 그 동안 샤를르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번역본에서 '인은민'으로 기록되어 온 탓에 모두 이를 따랐다. 현지의 기념비에도 '인은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삽교 본당사' 편찬과정에서 그 집안(삽교읍 용동리 소재)의 족보가 알려지게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인언민(印彦敏)'으로 표기되어 있다.  

 

인언민(인은민) 마르티노 순교자 사적지

 

인언민(인은민) 마르티노 순교자 사적지 

 

인언민(인은민) 마르티노 순교자 사적지

 

인언민(인은민) 마르티노 순교자 사적지

 

삽교 본당에서 관리하고 있다.

 

삽교 본당에서 관리하고 있다.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기념비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기념비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기념비 뒷면

 

인언민(인은민)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기념비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제대를 중심으로 십자가 형의 길이 조성되어있다. 

 

야외제대

 

제대쪽에서 본 입구  

 

대전교구 박해시대의 교우촌인 배나드리 마을 , 현재는 용동 3리(배나다리)로 부르고 있다. 

 

  배나드리 마을              (이하 출처- http://info.catholic.or.kr/)

 

배나드리 마을

 

  배나드리 마을

 

대전교구 삽교 성당.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가 속한 용동리를 관할하는 본당

 

삽교 성당 외부 모습          (이하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삽교 성당 외부 모습

 

삽교 성당 외부 모습 

 

삽교 성당 내부

 

제대

 

제대

 

약도        (출처- http://www.pax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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