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손골성지 2 (성 도리 헨리꼬 신부 기념관 )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1. 28. 17:04

본문

손골성지 성당(좌), 기념관(우)

 

성 도리 신부 기념관 (전시실)


성 도리 헨리꼬 신부 기념관은 2007.10.17 성 도리 신부의 고향인 프랑스 순례단을 맞이 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2007.10.17일 프랑스 순례단 (도리 신부님 고향 교구 신부 8명과 종신 부제 2명, 신자 12명과 오매트르 신부님의 고향 교구 신부 1명, 드 브르뜨니에르 신부 고향 성당 신부 1명  등 24명)이 손골 성지를 답방 (2006.1.27. 과 10월 도리 신부 순교 140주년을 맞아 손골성지 순례단이 딸몽을 순례 하였다)  하면서 3가지 선물을 가져왔다. 첫째가 도리 신부님 생가 앞 마당 꽃밭에서 채취한 흙이다. 현양 미사예서 이 흙과 손골성지 성모상 주변 꽃밭에서 채취한 흙을 서로 합치는 예식도 있었다. 둘째는 도리 신부님이 손골에서 고향 부모님께 보낸 편지 원본 1통과 신학생 때 부모님께 보낸 편지 원본 2통이다. 도리 신부님은 1865.6.23 에 손골에 오셔서 10.16 에 부모님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손골에서 보낸 유일한 편지이다. 셋째는 도리 신부님이 쓰시던 이불 호청 조각(침대 시트)이다. 시트 조각은 도리 신부님의 큰 누나이며 대모인 뽈리느의 후손들이 간직하던 것이다. 손골 성지는 프랑스 순례단을 맞을 준비로 기념관을 마련하고 이곳에 3가지 선물을 중심으로 전시실을 개관 하였다.   (손골 제 27호 참조)

 

기념관 내부

 

현양미사 ( 2007.10.17)  

 

기념관 내부

 

기념관 내부

 

기념관 내부

 

도리 신부님이 오신 길

 

도리 신부님께 드리는 노래

 

도리 신부님 세례 본당 생가 침실   

 

도리 신부님 출신 본당  힐라리오(쌩 띨레르)성당 

 

도리 신부 세례 본당,  힐라리오(쌩 띨레르)성당 

 

도리 신부님 출신 본당 "쌩 띨래르 드 딸몽" 성당

(출처- http://cafe.daum.net/Sonkol, 홈피)

 

도리 신부님 출신 본당 "쌩 띨래르 드 딸몽" 성당, 상복입은 마르티아노 형제

 

도리 신부님 출신 본당 "쌩 띨래르 드 딸몽" 성당 

 

도리 신부님 출신 본당 "쌩 띨래르 드 딸몽" 성당 도리 신부 부모 묘소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마을

 

도리 신부 생가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돌 십자가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돌 십자가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출처- http://cafe.daum.net/Sonkol, 홈피)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1층 거실 기념관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1층 거실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2층 방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2층 방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2층 서재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2층 침실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2층 침실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2층 생활 용품들

 

프랑스 뤼송 교구 생 틸레르 드 탈몽 도리 신부 생가  2층 생활 용품들 

 

수원교구 신부들  

 

김 헨리꼬 도리 신부(뒤 오른쪽)

 

초기의 손골

 

초기 손골공소 교우들이 신부님을 새로 맞기 위하여 모인 모습 (손골성지 팜프렛)

 

 

 

 

손골성지 옛 성 도리 신부 순교 기념비

 

김 헨리 순교 기념비 (옛 현양비 초석)

 

김 베드로 순교 기념, 도리 신부를 이렇게도 부른다.

 

복자 김 헨리 신부 기념비, 도리 신부를 말한다. 

 

성 도리 신부를 파송한 파리외방전교회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http://cafe.daum.net/Sonkol, 홈피)

 

파리 외방 전교회

 

파리 외방 전교회

 

파리 외방 전교회

 

파리 외방 전교회 

 

 

 

성 도리 신부 유물

 

성 베드로 앙리 도리(Pierre-Henri Dorie)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한 농장에서 일하던 소박한 부부 사이에서 여섯 번째아들로 태어났다. 그 농장은 성 힐라리오.딸몽(St.Hilaire di Talmont)에 있는 뽀르트(Port)라는 시골의 벳세이(Bessay)백작의 농장이었다.앙리 도리의 부모나 형제들은 공부는 많이 못했으나 신심은 매우 깊었다. 따라서 어린 앙리 도리는 건전하고도 평화스러운 가정환경 안에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다. 한편 그곳 보좌 신부는 도리에게 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가1852년 어느 날 보좌 신부는 도리 부모의 승낙을 얻어 소년의 신학교 입학을추천하였다. 또한 벳세이 백작은 도리 가정의 생활양식이 부족하여 부모들이걱정을 하고 있을 때마다 자비롭게 이 가정을 돌보아 주었다. 1852년 10월 도리는 이윽고 소신학교에 들어가 8년 동안 모든 이들한테서칭찬과 귀염을 받으며 지냈다. 15세 때 그는 벌써 자기 생의 목표를 전교 생활에 두고 1860년 10월에 루쏭(Lucon)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도리는 부지런하고도 침착한 학생으로 점차 마음도 너그러워지고 생활도 열심 해 질 뿐 아니라 특히 그에게는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심이 다른 무엇보다 두드러지게 커져 갔다. 1866년 12월 21일 삭발례를 받은 도리는 다음해 6월 1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를 청원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때부터 자기를 잘 알고 있는 가장 가까운 분들한테 자기 계획을 말하기 시작하엿는데 이에 대해 누구보다도 먼저 건강이 허약한 도리를 염려해 주고 돌봐 준 백작이 그의 결심을 꺾으려고 반대하며 나섰다. 그러나 백작은 도리의 그 부드럽고도 굳은 의지에 탄복한 나머지 수그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도리는 이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매우 건강합니다. 전교생활의 피로같은 것쯤은 자신있게 이겨나감을 보실 것입니다. 신부님! 만일 제가 이 조그만 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전교 신부가 된 다음 순교까지하게될지 그 누가 압니까? 그렇게 되면 신부님도 자랑스럽고 행복하지 않으시겠어요?" 도리의 열렬하고도 패기에 찬 이같은 말에 본당신부는 더 이상 반대할 수 가없었다. 그래서 본당 신부는 교구 주교님한테 젊은 이 전교지망자를 데리고 가 소개하자 주교님은 도리를 축복하여 주실 뿐 아니라 여러가지 인자한 말로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실제로 도리는 더큰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는 반대하고 나서는 가족들로 부터 오는 고통이었다. 특히 어머니의 반대는 대단하였다. 그렇지만 그 아무도 도리를 프랑스에 머물도록 설득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 외국전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것은 저에게 있어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8년이나 이를 제 맘속에 생각해 왔었습니다. 하느님이 저의 마음속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그분께 순명해야 합니다. "아무리해도 헛수고라는 것을 안 도리의 아버지는 내심으로는 가슴이 아팠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서 1861년 8월 성 힐라리오 역까지 나아가 아들을 환송해 주었다. 고향을 떠난 도리는 자주 사랑하는 부모에게 편지를 드리면서 자기의 즐거움과 보람됨을 말씀드리곤 하였다. 그렇지만 부모는 아들이 돌아 와 주기를 고대하며 늘 하느님께 그의 귀국을 기도 드렸었다. 1864년 5월 31일 사제 서품을 받은 도리 신부는 장래문제에 있어 자기 뜻대로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웃어른들의 결정이 내려지기 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6월 15일 한국의 선교신부로 결정 발표되니 도리 신부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더욱이 친구 백 브르뜨니에르 신부와 더불어 동행하게 되었음을 대단히 반가와 하였다.


 <체포와 순교>


 1864년 7월 19일 마르세이에서 백 브르뜨니에르 신부 서 볼리외 신부. 그리고 민 마르띠노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출발하여 수많은 어려운 항해끝에 드디어 1865년 5월 27일 조선 땅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의 전교활동 기간은 생각했던 것보다 의외로 짧았던 것이다. 김 도리 신부는 손곡리(孫谷里:경기도 용인 손골)에서 교우들과 같이 있으면서 많은 존경을 받는 가운데 한국말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뜻밖에 일이 터졌다. 장 주교의 체포소식이 있은지 며칠 후 즉시 김 도리 신부는 1866년 2월 27일 방안에 앉아 꼼짝도 못하고 잡히게 되었다. 물론 위험의 신호가 있긴 했었지만 김 도리 신부는 우선 복사를 피신시키고 다른 교우들을 위태롭게 할 수 잇는 물건들을 모두 감춰버리고 기다렸었다. 김 신부는 서 볼리외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 감옥에서 다른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다. 김 도리 신부도 예외 없이 많은 고문을 받았지만 강인하고도 위대한 정신력으로 온갖 고통을 잘 참아 견디었다. 그리고 그는 장 주교를 비롯하여 다른 동료 신부들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그 다음 사형장인 새남터로 끌려갔다. 이를 목격했던 한 증인은 김 도리 신부에 관해 "눈을 내려뜬 모습은 확실히 참된 기도하는 자세였고, 순교를 준비하고 있는 그의 침착한 모습은 당당하기조차 하였다."고 말했다. 마침내 정해진 잔악한 의식 절차가 끝나자 처형이 실시되었다. 김 도리 신부는 이날 순교자들 중에서 맨 �으로 처형되었는데 그의 목은 두 번째의 칼에 땅에 떨어졌다. 이렇게 순교한 김 도리 신부와 다른 전교신부들의 머리는 그곳에 3일 동안 군문효수로 메달려 있다가 후에 와고개(瓦署峴)골짜기에 베드로 박순집 일행이 시신(屍身)들을 거두어 안장하였다.

(출처- 쥴리오 단테 著 심영택 譯 "한국 신앙의 씨앗들"에서 발췌, http://cafe.daum.net/Sonkol)

 

성 베드로 앙리 도리(Pierre-Henri Dorie)

(출처- http://cafe.daum.net/Sonkol, 홈피)

 

성 베드로 앙리 도리(Pierre-Henri Dorie)

 

 

오(오매트르, Aumaitre, Pierre) 베드로 신부


1837년 4월 8일 앙굴렘(Angoulême) 교구에 있는 에젝(Aizecq) 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맏아들이었는데 이 집안은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으나 자녀는 다섯 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그마한 땅을 경작하면서 나막신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훌륭한 천주교 신자였고 어머니 역시 훌륭한 신자였다. 어머니는 어떤 신비스러운 예감에 의해서 하느님께서 자신의 맏아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훌륭한 미래를 직감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들이 전교 지방으로 떠난다고 어머니에게 알렸을 때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속을 털어놓았다. “하긴 이 일은 내가 각오하고 있어야 했다. 너를 낳기도 전에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단다”. 오매트르는 영리한 소년이었지만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공부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끈기 있게 노력했다. 이 노력이 쌓이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는 훌륭하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가 신부가 되겠다는 뜻을 밝혔을때 본당 신부는 단호하게“안 된다.”고 대답했다. 물론 본당 신부는 교리 공부와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는 이 소년을 훌륭하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공부하는 데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집안에서 일어난 어떤 일로 해서 본당 신부는 그의 결정을 재고하게 되었다. 어느 주일이었는데 이웃 도시의 장으로 양떼를 몰고 가는 일을 거들어 달라고 아버지가 오매트르에게 말했다. 그러나 오매트르는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것과 미사에 참례하기를 명하는 교회에 복종하는 것, 이 갈림길에서 아버지의 꾸중과 매질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교회법에 충실하려고 했다. 이러한 용기에 눈을 뜬 본당 신부는 소년에게 라틴어의 기초를 가르쳐 주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본당 신부가 이동되었고 새로 부임한 본당신부는 제자의 형편없는 기억력 때문에 이내 라틴어를 가르치는 어려운 일에 진저리를 내고 말았다. 게다가 어린 성직 지망생의 학비를 누가 내주느냐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오매트르의 집안은 너무 가난해서 학비를 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본당 신부는 단호하게 오매트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는 공부가 맞지 않다. 너는 신부가 될 수가 없어.” 오매트르는 이 때문에 비애를 느꼈지만 계획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동네의 본당 신부가 그에게 라틴어 가르치기를 거절하자 4킬로미터 떨어진 이웃의 어느 평신도에게 가서 라틴어의 기초를 배우겠다고 했다. 몇 달 동안 그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작은 촛불을 켜고 공부를 했고 숙제를 끝내고는 나막신을 신고 걸어서 베르퇴이 마을로 갔다. 이러한 굳센 의지에 감동한 에젝의 본당 신부는 이 일을 교구 주교에게 맡겼다. 주교는 1852년 10월에 베드로를 리슈몽(Richemont)성모 소신학교 중등과 2학년에 입학 시키는 데 동의 했다. 본당 신부는 그 고장의 성주(城主)들과 살뤼스의 독지가들의 너그러운 도움을 받아 장래 신학생의 피복비와 기숙사 비를 충당하기로 했다. 오매트르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열다섯 살이었는데 그곳에서 5년을 지내면서 훌륭한 영향을 받기도 하고 그 자신도 급우들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 나막신을 신은 어린 시골뜨기는 긴 수단을 입고 은장식이 달린 구두를 신은 무서운 교장 신부 앞에서 몹시 서먹서먹해 했다. 그리고 부유한 집안에서 온 동급생들을 대할 때에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 부유한 집안 자제들이 있음으로 해서 신학교에는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오매트르는 반에서 나이가 제일 위였지만 성적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오매트르는 당황하지 않았고 남의 조소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꾸준한 열심으로 공부를 했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모든 것을 눌러 이겨 냈고 좋은 성적을 올려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 명단에 올라 상도 타게 되었다. 그는 신앙심과 쾌활함과 친절로 모든 급우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오매트르를 세 번이나 성모회 회장으로 뽑았고 여러 번 애정의 표시를 했으며 최종 학년이 끝나 착복식이 있던 날은 즐거운 잔치를 마련하고 그 전설적인‘오매트르의 나막신’을 한 나무 밑에 엄숙히 묻었다. 오매트르가 열다섯 살로 중등부 3학년 때이던 1853년 12월 31일에“나는 성직을 지망합니다. 천주께서 나를 그리로 부르시는 것을 느낍니다.”라고 썼다. 성소에 대한 이러한 자각이 리슈몽의 성모 소신학교에서 그의 생활 전체를 움직였고 성체와 성모께 대한 신심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그가 1857년 10월 앙굴렘 대신학교에 들어갈 때 사람들은 모두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소신학교 선생들이 그에대해 다음과 같은 내신서를 미리 보냈기 때문에 그는 대신학교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보통이 아닌 공동생활을 했다. 그의 순종하는 마음은 완전했다. 철학과 1학년 때부터 그는 영적 지도 신부에게 외국 전교지방에 몸을 바치려 한다는 자기 뜻을 밝혔다. 지도 신부는“그 얘기는 1년 후에 와서 하게.”라고만 말했다. 오매트르는 이에 복종했다. 그러나 전교 지방에 대한 생각을 얼마나 골똘히 했던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도 드러나 아버지가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어떻게 걱정을 표현했는지는 모르지만, 1858년 5월 4일에 쓴 편지에서 오매트르는 다음과 같이 아버지의 걱정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저는 전교 지방에 가겠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의 뜻보다는 다만 천주의 뜻이 제 뜻이라고…. 그래서 만일 천주의 뜻이 제가 미개한 나라로 가는 것이라면 아버지 곁을 떠나는 것이 무척 괴로운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이곳에서 살든 그곳에서 살든 저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제가 성직에 들어가기로 결정을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그분을 본받아야 합니다”. 땅에 집착하는 아버지로서는 사는 곳에 대해서 이렇게 무관심한 것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걱정은 아들의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비를 뽑게 되었을 때 (당시 프랑스에서는 제비를 뽑아 입대를 결정했다.) 오매트르는 추첨함에서‘좋은 번호’를 뽑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폴레옹을 위해서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면 잘 됐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하니까.” 그 후, 그의 아버지는 잠을 잃게 되었다. 방학이 끝나 앙굴렘 대신학교에 돌아왔을 때 오매트르가 1년 동안의 유예 기간을 주었던 그의 영적 지도 신부를 다시 찾아가 대답을 구했더니 쾌히 승낙했다. 오매트르가 주교에게 외방전교에 대한 요청을 했더니 주교는 그가 교구를 떠나는 것을 승낙했다. 1859학년이 끝날 때 오매트르는 그의 결정을 가족에게 솔직히 털어놓아야 했는데 그 날짜를 8월 15이로 잡았다. 오매트르는 전교 지방으로 아주 떠난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공부를 더 하려고 파리로 간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속지 않았다. 아버지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천주께서 그런 생각을 들게 하시다니, 말도 안 된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일제의 신앙심을 잃게 되겠다.” 어머니는 이‘불행’을 앞에 놓고 흐느끼면서 말했다. “네가 내 위안이 되기를 원했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러나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축복을 해주었다. 신학생 베드로 오메트르는 1859년 8월 18일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그곳에서 3년을 있게 되었는데 그 기간을 그는 공부와 기도와 신품 성사를 준비하는 생활로 보냈다. 그는 1860년 9월 18일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나를 이렇게 파리로 인도해 주신 천주의 섭리를 찬미합니다. 내가 결코 섭리에 항거하지 않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는 1862년 8월 3일 아래와 같이 아버지에게 알렸다. “천주께서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고 찬미하게 하라고 저를 보내시는 나라는 한국입니다.” 그 후, 오매트르 신부는 1863년 6월 23일에야 그의 전교 지방에 도착하게 되었다.

 

오(오매트르, Aumaitre, Pierre) 베드로 신부

 

오(오매트르, Aumaitre, Pierre) 베드로 신부  

 

전시물

 

미사 경본

 

성 도리 신부 생가 화단의 흙, 프랑스 순례단의 선물

 

2007.10.17일 프랑스 순례단 (도리 신부님 고향 교구 신부 8명과 종신 부제 2명, 신자 12명과 오매트르 신부님의 고향 교구 신부 1명  등)

이 손골 성지를 답방 하면서 3가지 선물을 가져왔다. 첫째가 도리 신부님 생가 앞 마당의 흙이다. 둘째는 도리 신부님이 손골에서 고향 부모님께 보낸 편지 원본 1통과 신학생 때 부모님께 보낸 편지 원본 2통이다. 셋째는 도리 신부님이 쓰시던 이불 호청 조각(침대 시트)이다.

손골 성지는 프랑스 순례단을 맞을 준비로 기념관을 마련하고 이곳에 3가지 선물을 중심으로 전시실을 개관 하였다.   

 

성 도리 신부 생가 침대보 조각, 프랑스 순례단 선물

 

도리 신부 침대보(홑이불)

 

도리 신부가 부모님께 보낸 편지 원본, 프랑스 순례단 선물 

 

신학생 때 부모님께 보낸 편지 원본

 

시성식 기념 메달과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옷

 

1984년 시성식 기념 메달

 

도리 신부 고향 소금과 고향 방데 지방의 마크

 

고향의 소금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