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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외방 전교회(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성지순례/서유럽(프랑스)

by baesungsoo 2014. 1. 4.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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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cafe.daum.net/chemicalseven/E7XZ/1186)

 

1658년 7월 29일 창설되고, 1831년 9월 한국에 처음 진출하여 한국천주교회의 초창기 발전은 물론 교회를 통하여 한국 민족과 고락을 같이 한 선교단체이다.

1. 창립과 창립정신 : 17세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전세계를 통하여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아울려 종교적으로 로마와의 계약, 이른바 포교상의 ‘보호권’에 의하여 복음전파 활동에 있어서도 상당한 우위권을 갖고 있었다. 당시 교황청의 포교성성(布敎聖省)은 이러한 종교상의 우위권을 분쇄하기 위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의 포교열(布敎熱)을 이용하여 1658년 선교단체의 설립은 물론, 1659년 팔뤼(F. Pallu)와 모트(P.L. de la Motte) 두 신부를 주교[代牧]로 임명한 뒤 그들을 샴(오늘의 태국)으로 파견하였다. 1664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교구사제뿐만 아니라 선교사제 희망자를 모든 교구로부터 모집하여 성직자로 양성한 후 아시아로 파견하였다. 이 신학교의 설립은 포교사(布敎史)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포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포교지역에 종신토록 머무르면서 그곳의 언어와 풍습을 배워 포교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즉 그들은 통역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각 지역에 회장(會長)을 임명하여 포교활동을 하고, 회장들 중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방인성직자(邦人聖職者)를 양성하게 된다. 결국 파리 외방전교회는 파견된 포교지역에서 교회를 조직하고, 현지인(現地人) 성직자를 양성하여 그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창립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에 4,000여명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 170여명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한편 본회는 약 2,000여명의 현지인 성직자들을 양성하였는데 그 중 한국인은 100여명에 이르고 있다. 오랜 역사 동안 파리 외방전교회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민족들과 함께 그 나라 역사에 참여를 했으며 선교사 170명이 살해되었는데 그 중 24명의 선교사가 한국에서 살해되었다. 최근 50년 동안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중국과 만주에서 추방되었고(1949∼1953), 1970년대에는 월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서 철수해야만 되었다(1975∼1976).

2. 한국진출 : 1825년 사제를 요청하는 한국인 교우들의 편지를 접하게 된 교황은 1827년 9월 1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 내에서는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 역시 프랑스혁명 때문에 회원이 10여명밖에 없었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방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그는 1831년 9월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되자 즉시 입국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하였지만 한국 입국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1835년 10월 한국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馬架子)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836년 모방(Maubant, 羅) 신부, 1837년에 2대 조선대목인 앵베르(Imbert, 范) 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입국하였다. 그들은 곧 파리 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교육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배출되었다. 이에 앞서 1839년 1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39년 9월에는 마침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3명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 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의 입국을 시도하여 1845년 10월 3대 조선대목 페레올(Ferreol, 高) 주교, 다블뤼(Daveluy, 安) 신부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江景)에 도착하였다. 1846년 병오(丙午)박해를 치른 뒤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메스트르(Maistre, 李),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푸르티에(Pourthie, 申), 페롱(Feron, 權),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볼리외(Beaulieu, 徐), 도리(Dorie, 金), 위앵(Huin, 閔) 신부 등이 계속 입국하였다. 하지만 1866년 병인년 대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3명 선교사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10년이 지난 1877년이 되어서야 다시 한국에 입국할 수가 있었다.

3. 한국 내에서의 주요 활동 :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입국한 뒤 제일 먼저 한국인 성직자 배출을 위하여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낸 후 1853년 충청도 배론[舟論]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성직자 양성사업에 착수하였다. 이는 오래되지 않아 폐쇄되었지만 1885년 10월 강원도 원주땅 부흥골에 다시 신학교를 설립한 후 1887년 서울 용산(龍山)에 예수성심신학교(聖心神學校)를 개설하였다. 즉 오늘날 서울 혜화동(惠化洞)에 소재한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모체가 된 것이다. 아울러 1914년 대구교구에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설립하여 서울과 대구에서 각각 한국인 성직자를 배출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근간을 이루게 하였다. 신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일반교육에도 참여하여 1922년 ‘남대문상업학교’를 시작하였고, 1924년에는 이 학교 내에 을조(乙組)를 편성하여 소신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동성중고등학교로서 존속하고 있다. 한편 박해시대 때 회장과 공소(公所)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면서 회장들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볼 수 있는 한글본 신심서적(信心書籍)들을 저술해냈다. 즉 1864년대에는 ≪신명초행≫(神命初行), ≪성찰기략≫(省察記略), ≪회죄직지≫(悔罪直指),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등의 목판본들을 간행하였는데 이와 같은 간행사업은 꾸준히 계속되어 1880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한불자전≫(韓佛字典)이, 1881년에는 ≪한어문전≫(韓語文典)이 각각 간행되었다. 이들 모두는 한국 최초의 것들로서 한국의 언문(言文)에 있어서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있던 성서활판소(聖書活版所)를 서울 정동(貞洞)으로 이전함으로써 오늘날의 가톨릭출판사가 있게 되었다. 또 1906년 10월에는 <경향신문>(京鄕新聞)과 부록인 <보감>(寶鑑)을 창간하여 구한말 개화운동을 추진하다가 1909년 <경향신문>이 폐간되자 부록 <보감>을 <경향잡지>로 제호를 바꾸어 종교잡지로서 오늘날까지 계승될 수 있도록 하였고, 대구교구의 드망즈 구교는 대구에서 <천주교회보>를 발간하기 시작하여 오늘날 <가톨릭신문>으로 제호가 바뀌어 존속하고 있다. 제8대 조선대목 뮈텔(Mutel, 閔) 주교는 오랜 세월 동안 한국 순교자들의 치명사적(致命史蹟)을 조사함으로써 1925년 7월 79위의 치명자들이 복자(福者)의 품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파리 외방전교회의 본부에 보낸 보고서와 각종 서신을 통하여 같은 회의 소속인 달레(Dallet)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를 프랑스어로 저술하여 한국문화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오묘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코스트(Coste, 高) 신부는 약현(藥峴)성당(현 중림동 성당)과 종현(鐘峴)성당(현 명동성당)을 설계 건축함으로써 서양식 고딕식 벽돌건물을 한국에 소개시켰다. 이밖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많은 선교사들은 각지에서 포교활동 뿐만 아니라 교육활동 및 시약소(施藥所) 운영 등의 의료활동 등도 전개하여 한국 천주교회를 포함한 한국 전체사회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4. 현황 : 박해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파리 외방전교회는 한국 천주교회를 위하여 활동하다가 1942년 서울대목을 한국인 노기남(盧基南) 주교에서 인계하고, 1944년부터는 사목활동의 책무를 점차 방인 성직자들에게 인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25전쟁 당시에는 12명의 회원들이 희생당하였지만 1953년부터 다시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경상북도 안동(安東)을 중심으로 한 일부지역이 1959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지목구로 설정되었다가 1969년 안동지목구가 대구 대교구로부터 분리되어 안동교구로 승격하였다. 현재 한국에서는 23명의 회원들이 서울 · 대전 · 안동 · 인천 · 대구 · 광주(대건 신학대학) 등 6개 교구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자체적인 주요 사업은 계획하고 있지 않고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 사업계획에 협조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지부의 본부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에 소재하고 있으며 지부장에 펠리스(Rev. Marcel Pelisse, 배) 신부가 임명되어 있다. (글 출처- 가톨릭 대사전)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cafe.daum.net/chemicalseven/E7XZ/1186)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cafe.daum.net/chemicalseven/E7XZ/1186)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cafe.daum.net/moon.k617/MKmN/43)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http://blog.daum.net/ttobyttoby/10030032)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http://blog.daum.net/ttobyttoby/10030032)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http://blog.daum.net/ttobyttoby/1003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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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cafe.daum.net/moon.k617/MKmN/43)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cafe.daum.net/moon.k617/MKmN/43)

 

파리 외방 전교회 전면 건물                (출처- cafe.daum.net/chemicalseven/E7XZ/1186)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cafe.daum.net/chemicalseven/E7XZ/1186)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cafe.daum.net/chemicalseven/E7XZ/1186)

 

(출처- cafe.daum.net/moon.k617/MKmN/43)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cafe.daum.net/chemicalseven/E7XZ/1186)

 

정원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정원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한국 순교 성인 헌양비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서을대교구에서 현양비를 세웠다. 1887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되자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의 생명은 보장되었고, 포교활동에 있어서도 그 전보다는 훨씬 자유스럽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활발한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1911년에는 대구대목구(大邱代牧區)를 분할 선정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의 드망즈(Demange, 安) 신부가 초대 대목으로 취임하였다. 이밖에 한국 천주교회의 교계제도가 정착할 수 있도록 원산(元山)대목구, 평양 · 연길 · 의란 · 전주 · 광주지목구(知牧區) 등을 분할 설정하여 1962년 한국인에 의한 정식 교계제도가 수립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주력하여 1910년 61명의 성직자중 15명이 한국인이었는데 1920년에는 총 71명 중 30명이 한국인이었다. 1961년에는 총 516명 중 275명이 한국인이었다.

 

한국 순교 성인 헌양비                  (출처- cafe.daum.net/chemicalseven/E7XZ/1186)

 

한국 순교 성인 헌양비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한국 순교 성인 헌양비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한국 순교성인 헌양비                  (출처- http://blog.daum.net/choongbeom/12404548)

 

순교비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http://blog.daum.net/choongbeom/12404548)

 

파송 순교자 명부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모든 파견 선교사들은 발령을 받고 이곳에 와서 성모님께 기도를 드린다

 

성모상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파송 순교자 명부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파송 순교자 명부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본당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지하 소성당                (출처- cafe.daum.net/moon.k617/MKmN/43)

 

지하 소성당                 (출처- cafe.daum.net/emgcc/MrqI/989 

 

지하 소성당                 (출처- cafe.daum.net/emgcc/MrqI/989)  

 

지하 소성당              (출처- cafe.daum.net/moon.k617/MKmN/43)

 

지하 소성당                 (출처- cafe.daum.net/moon.k617/MKmN/43)

 

지하 소성당                (출처- cafe.daum.net/moon.k617/MKmN/43)

 

지하 소성당                (출처- cafe.daum.net/moon.k617/MKmN/43)

 

선교사 유품  

 

전시실                (출처- http://blog.daum.net/choongbeom/12404548)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cafe.daum.net/chemicalseven/E7XZ/1186)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cafe.daum.net/chemicalseven/E7XZ/1186)

 

한국 순교 성인 선교사들을 포함한 선교사들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cafe.daum.net/chemicalseven/E7XZ/1186)

 

순교화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병인 교란때 불란서사람 복자 다불뤼주교(43세)는 대원군을 만나보려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충남 내포로 돌아와 복자 민신부, 복자 오신부, 복자 황석두 루가, 복자 장주기 요셉등은 배신자 이순이의 밀고로 체포, 모진 형벌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아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함.

 

전시실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파리 외방 전교회                   (출처- cafe.daum.net/chemicalseven/E7XZ/1186)

 

전시실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전시실                   (출처- blog.naver.com/jahanjae/110126968213) 

 

김대건 신부, 옛글 기도문 

 

옛글로 쓰여진 기도문

 

한국진출: 1825년 사제를 요청하는 한국인 교우들의 편지를 접하게 된 교황은 1827 년 9월 1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 내에서는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 역시 프랑스혁명 때문에 회원이 10여명밖에 없었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망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Brugui re, )주교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그는 1831년 9월9일 교황 그레고 리오16세에 의해 초대 조선대목(朝鮮大牧)으로 임염되자 즉시 입국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하였지만 한국 입국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1835년 10월 한국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馬架子)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836 년 모방(Maubant, 羅) 신부, 1837년에 2대 조선대목인 앵베르(Imbert, 范)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신부가 입국하였다. 그들은 곧 파리 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교육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1845 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金大建)신부가 배출되었다. 이에 앞서 1839년 1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39 년 9월에는 마침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3명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 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의 입국을 시도하여 1845년 10월 3 대 조선대목 페레올(Ferr ol, 高) 주교, 다블뤼(Daveluy, 安) 신부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江景)에 도착하였다. 

 

한글 문답서

 

주교앞에 인사하고 동료 신부들과 가족들과의 작별하는 모습

 

1846년 병오(丙午)박해를 치른 뒤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날때까지 베르뇌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메스트르(Maistre, 李), 프티니콜라(Petitmicolaas, 朴), 푸르티에(Pourthe , 申), 페롱(F ron, 權), 블르트니에르(Breteni res, 白), 볼리외(Beaulieu, 徐), 도리(Dorie, 金), 위앵(Huin, 閔) 신부 등이 계속 입국하였다. 하지만 1866년 병인년 대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3명 선교사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10년이 지난 1877년이 되어서야 다시 한국에 입국할 수가 있었다. 1887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되자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의 생명은 보장되었고, 포교활동에 있어서도 그 전보다는 훨씬 자유스럽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활발한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1911년에는 대구대목구(大邱代牧區)를 분할 선정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의 드망즈(Demange, 安) 신부가 초대 대목으로 취임하였다. 이밖에 한국 천주교회의 교계제도가 정착할 수 있도록 원산(元山)대목구, 평양·연길·의란·전주·광주지목구(知牧區) 등을 분할 설정하여 1962년 한국인에 의한 정식 교계제도가 수립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주력하여 1910년 61명의 성직자 중 15명이 한국인이었는데 1920년에는 총 71명 중 30명이 한국인이었다. 1961년에는 총 516명 중 275명이 한국인이었다.   

 

한국화로 표현된 초기 선교사들의 모습 

 

한국 내에서의 주요 활동 :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입국한 뒤 제일 먼저 한국인 성직자 배출을 위하여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낸 후 1853년 충청도 배론[舟論]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성직 자 양성사업에 착수하였다. 이는 오래되지 않아 폐쇄되었지만 1885년 10월 강원도 원주땅 부흥골에 다시 신학교를 설 립한 후 1887년 서울 용산(龍山)에 예수성심신학교(聖心神學校)를 개설하였다. 즉 오늘날 서울 혜화동(惠化洞)에 소재한 가톨릭 대학 신학부의 모체가 된 것이다.  박해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파리 외방전교회는 한국 천주교회를 위하여 활동 하다가 1942년 서울대목을 한국인 노기남(盧基南) 주교에서 인계하고, 1944년부터는 사목활동의 책무를 점차 방인 성직자들 에게 인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25전쟁 당시에는 12명의 회원들이 희생당하였지만 1953년부터 다시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경상북도 안동(安東)을 중심으로 한 일부지역이 1959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지목구로 설정 되었다가 1969년 안동지목구가 대구 대교구로부터 분리되어 안동교구로 승격하였다. 현재 한국에서는 23명의 회원들이 서울·대전·안동·인천·대구·광주(대건 신학대학) 등 6개 교구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자체적인 주요 사업은 계획하고 있지 않고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 사업계획에 협조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지부의 본부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에 소재하고 있으며 지부장에 펠리스 (Rev. Marcel P lisse, 배) 신부가 임명되어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성인들

 

성 엥베르 라우렌시오 (1796~1839)

성 모방 베드로          (1804~1839)

성 샤스땅 야고보       (1804~1839)

성 베르뇌 시메온       (1814~1866)

성 랑페르 드브레트니에르  유스또   (1838~1866)

성 도리  헨리꼬         (1839~1866)

성 다불뤼  안또니오   (1817~1866)

성 볼례 루도비꼬       (1840~1866)

성 위앵  루가            (1836~1866)

성 오메뜨르  베드로   (1837~1866) 

 

(자료 출처- cafe.daum.net/proviforum/CmiP/29)

 

1. 브뤼기에르 Bruguiere, Barthelemy (1792~1835)

Bruguiere, Barthelemy(1792~1835) 파리 외방전교회원. 초대 조선교구장. 주교. 한국성은 소(蘇). 1792년 2월 12일 프랑스의 레사크(Reissac) 지방에서 태어나, 카르카손(Carcassone) 신학교에 들어가, 1815년 12월 1일에 신품을 받고, 모교에서 10년간 신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1825년 33세의 나이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 태국으로 건너가, 그 곳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1829년 5월에 보좌주교로 선정되었다. 바로 이때에 자발적으로 창설된 조선 교회로부터 성직자 파견을 요청받은 로마 교황청은, 파리 외방전교회와 논의하는 가운데, 제254대 교황으로 즉위한 그레고리오(Gregorius) 16세가 1831년 9월 9일에 두 가지 교서(敎書)를 통해, 조선 교회를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하여 새로이 독립된 대목구(代牧區)를 창설하는 한편, 초대 감목으로, 조선 전교를 자청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창설 46년만에 북경교구에서 독립되어 고유한 조직을 갖춘 교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교황청의 이러한 결정을 알게 된 것은 1832년 7월 25일 이후의 일이었는데, 그는 1831년에 이미 조선입국을 위한 장도에 올라 마카오에 와 있었다. 1832년 10월 21일 교황청의 사령장을 받은 그는 더욱 마음이 급해져 조속한 조선입국을 위해 중국으로 들어가 갖은 고난과 질병을 극복하면서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서만자(西灣子)까지 다다랐다. 그리하여 10월 19일에는 오늘의 열하성(熱河省)의 뻬리쿠(哵咧溝)라는 교우촌에 도착하였으나 20일에 갑자기 뇌일혈을 일으켜, 그리운 조선땅을 눈앞에 바라보며 선종하였다. 그 때 주교의 나이 43세였다. 조선을 향하여 페낭을 떠난 지 4년간, 오로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희망만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한 불요불굴의 굳은 신념의 소유자였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이상적인 성직자였다. 그의 개척한 길을 따라 곧 모방(Mau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 등이 조선입국에 성공함으로써 조선교회는 드디어 모든 조직을 갖춘 완전 독립된 교회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만자에서 때를 기다리던 모방 신부는 그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달려가 11월 21일에 장례를 치러 그 곳에 묻었으나, 1931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전교 100주년을 맞아 그 유해를 서울로 모시고 와 10월 15일 용산에 있는 성직자묘지에 묻으니, 승천한지 94년 만에 평생에 그리던 조선땅에서 잠들게 되었다.

 

2. 앵베르 Imbert Laurent Marie Joseph (1796∼1839)

Imbert, Laurent Marie Joseph(1796∼1839). 성인(聖人). 한국명 범세형(范世亨). 축일은 9월 20일.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조선 교회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갑자기 선종하자, 로마 교황청은 제2대 교구장으로 중국 사천성(四川省)에서 전교 중이던 앵베르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에 1837년 5월 14일 카프사의 명의주교로서 조선교구의 주교로 서품되는 성성식을 가진 다음 곧 임지인 조선으로 떠났다. 그는 1796년 4월 15일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18일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어, 다음 해 3월 20일 파리를 떠나 중국 사천교구로 가서 전교활동 중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때의 나이 42세였다. 그는 곧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1837년 12월 17일에 봉황성 변문에 다다라 이튿날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고, 13일 후에는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로써 그는 조선땅을 처음 밟은 주교가 되었고, 조선교구는 교구 설정 6년만에, 그리고 조선 교회 창설 53년만에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 및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와 힘을 합쳐 전교에 힘쓴 결과 1839년 초에는 신자수가 9,000명을 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인 성직자양성을 서둘러 이미 모방 신부에 의해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 교육받게 한 바 있으나, 다시 세 명의 소년을 유학시키고자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는 한편, 정하상(丁夏祥)과 이승훈(李承薰)의 손자인 이재의(李在誼) 등 네 사람의 성인(成人)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빠른 시일 안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다. 그리고 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일본에도 전교의 손을 뻗고자 여러 가지로 시도했으나, 모든 계획은 얼마 안 가서 일어난 1839년의 기해(己亥)박해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839년 주교는 지방교우들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주교의 입국 사실이 당국에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고, 주교를 추적하는 포졸들의 수색이 더욱 심해졌으므로, 주교는 하는 수 없이 수원에 가까운 바닷가 교우집에 몸을 숨겼다. 여기서 그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몸을 피하도록 하였으나, 그들이 함께 남아 있기를 원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몸조심을 당부하며 맡은 지방으로 각각 되돌려 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에 의해 그의 거처가 알려졌음을 알고, 그는 화가 다른 교우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몸을 맡기었다. 이어 얼마 뒤 자수한 모방, 샤스탕 신부와 함께 1839년 9월 21일 군문효수라는 극형을 한강 새남터에서 목을 잘리어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4세로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그의 유해는 처형된 지 20여일이 지나서야 교우들에 의해 몰래 지금의 노고산(老姑山)에 묻혔다가 1843년에 경기도 과천으로 옮겨 묻었던 것을, 1901년 11월 2일 서울 명동의 주교좌 대성당 지하실에 모시게 되고 1925년에는 복자(福者)의 영광된 자리로 올림을 받게 되었다. 그 뒤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3. 모방 Maubant, Pierre Philibert (1803~1839)

Maubant, Pierre Philibert(1803-1839). 파리 외방전교회원. 조선교구 선교사. 순교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한국명은 나백다록(羅伯多祿)이다. 프랑스 바시(Vassy)에서 태어나 1829년 5월 13일 신부가 되었다. 잠시 교구에서 보좌신부 생활을 한 후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이듬해 3월 중국 사천(四川) 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서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나 조선 선교사가 되기로 자원하고 조선에 입국하고자 복건성(福建省), 북경(北京) 등을 거쳐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이르렀다. 그곳의 교우촌에서 1년간 머무르며 한문공부를 하였고 1835년 10월 20일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사하자, 이미 그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필요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바 있는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준비한 길을 따라 조선 입국을 서둘렀다. 조선국경에 이르러 조선 교우들을 만나 1836년초 입국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가 되었다. 모방 신부는 조선말을 공부하면서 성사를 집전해야 했고 부활절을 서울에서 지내고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을 방문하고 200여명에게 영세를 주었다. 또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서두르고 이미 이 해에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의 경리부로 보냈다. 1837년 샤스탕(Chastan, 鄭) 신부를 맞아 그와 함께 남은 공소들을 방문하였다. 새 공소를 세우고 공소회장을 세우는 등 교우들에게 필요한 지침들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 1837년 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입국하게 되어 조선교회는 이제 필요한 교회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또 교세도 급속히 신장되어 그의 입국 당시 4천 명에 불과하던 신자가 1837년 말 8천 명으로 급증하였다. 그러나 1839년 큰 박해, 즉 기해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이미 체포된 앵베르 주교는 모방과 샤스탕 신부에게 자헌(自獻)할 것을 권고하였고, 두 신부는 자헌을 결심하고 9월 6일 홍주(洪州) 근처에서 대기중인 포졸에게 자헌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모방 신부는 여러 차례 신문과 고문을 받고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와 같이 군문효수형이 언도되어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의 영관(榮冠)을 차지하였다. 그의 시체는 20여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는 것을 교우들이 거두어 노고산(老姑山)에 안장하였고, 1843년에는 과천(果川)땅 삼성산(三聖山)으로 옮겨졌고 시복수속이 진행됨에 따라 1901년 명동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 모방 신부는 앵베르 주교 등과 함께 1857년 가경자(可敬者)가 되었고, 1925년에는 복자가 되었으며, 1984년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 102위와 더불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4. 샤스탕 Chastan, Jacques Honore (1803~1839)

Chastan, Jacques Honore(1803-1839). 모방(Maubant) 신부에 이어 서양인 선교사로서 두 번째로 입국하여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 순교한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한국 이름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샤스탕 신부는 1803년 10월 7일에 프랑스의 마르쿠(Marcoux)에서 태어나 1826년 디뉴(Digne)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월 신부가 되었다. 이듬해 1월 13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같은 해 4월 22일 우선 마카오로 보내졌다. 마카오에 상륙하자 그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여 수락되었다. 그는 페낭(Penang)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거기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 입국을 위해 떠나게 되자, 샤스탕 신부는 자기도 평소에 원했던 조선으로 함께 동행하기를 주교에게 청하였다. 그의 청은 받아들여져, 1833년 5월에 조선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 후 3년간을 중국대륙과 몽고 · 만주를 거쳐 조선 국경까지 갔으나 그를 인도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는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면서 2년간 산동(山東) 교우들을 돌보았다. 그동안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주 땅에서 잃었고, 동료 신부인 모방신부가 1836년 1월에 먼저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으므로, 그의 통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836년 12월 28일 모방 신부의 기별을 받고 변문으로 간 샤스탕 신부는,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金大建) 등 세 소년의 신학생을 전송하던 조선 교우들을 만나,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1837년 1월 15일에는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에 머무르면서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성사를 집행하다가 부활축일을 양근(楊根)에 가 있던 모방신부에게로 가서 함께 보낸 다음, 손을 나누어 각도의 교우들을 찾아보는 길에 올랐다. 상제옷을 입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 그 다음 날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떠나야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1837년 7월 중순에 지방에서 전교 중이던 모방 신부가 병을 얻어 중태에 빠져 서울로 이송되자, 샤스탕 신부는 곧 그에게로 달려가 병자성사를 주었다. 다행히도 모방 신부는 간병으로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샤스탕 신부는 남쪽지방으로 다시 내려가 전교에 힘썼다. 그 무렵 제 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그 해 12월말에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서울로 도착하니, 샤스탕 신부는 1938년 5월에야 서울로 올라와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이로써 조선교구는 교회 창설 52년만에, 그리고 교구 설정 7년만에 비로소 주교와 선교사를 함께 모시게 되어 명실공히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주교와 샤스탕, 모방 두 신부는 함께 서울의 교우들을 돌보다가 샤스탕 신부는 다시 남쪽지방으로 내려가 전교에 힘썼다. 한편 그는 회장 한 사람을 부산(釜山)에 내려 보내, 류우꾸(琉球)지방의 전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주교를 비롯한 세 서양인 성직자가 조선에 들어와 있다는 소문이 차차 퍼지게 되자 관헌에서는 당쟁의 여파까지 곁들여, 천주교의 탄압을 강화하여 1839년 기해년(己亥年) 봄에 많은 교인들을 잡아 피를 흘리게 했고, 외국인 선교사를 잡으려는 관헌의 추적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이에 수원(水原) 남쪽 서해안의 외딴 곳에 피신한 주교는 점점 심해지는 박해소식을 듣고 지방에서 전교 중이던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를 불러 이에 대처할 방도를 논의하였다. 주교는 이 자리에서 혼자만이 남고 두 신부는 청국으로 피신할 것을 종용했으나, 두 신부는 끝까지 함께 남기를 결심하여 다시금 각각 맡은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주교는 배교자 김순성(金順成)의 간계로 그의 거처가 알려져 1839년 8월 10일 스스로 나아가 잡히는 몸이 되었다. 주교가 잡히기 전에 쓴 자수를 권하는 편지를 받은 샤스탕 신부는 곧 모방 신부에게 달려가 함께 자수하기로 결심하고 교우들과 외방전교회에 보내는 고별편지를 쓴 다음 9월 6일 홍주(洪州)로 나아가 관헌에 자수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두 사람은 주교와 함께 포도청에 수용되어 고문을 받다가, 9월 21일에 군문효수(軍門梟首)라는 극형으로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샤스탕 신부의 나이는 37세로 조선 입국이래 2년 9개월만의 일이었다. 그의 시체는 다른 두 성직자의 시체와 함께 교우들의 손으로 신촌 노고산에 묻혔다가 1843년에 시흥(始興) 삼성산(三聖山)으로 옮겨 묻었으나, 1901년 11월 2일에는 명동 대성당 지하실에 모시게 되었다. 그의 거룩한 순교정신은 1925년 7월 5일, 로마 교황청에서 장엄한 시복식이 거행됨으로써 기해박해의 순교자 및 병오년의 순교자 78명과 함께 우리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복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5. 페레올 Ferreol, Jean Joseph (1808∼1853)

Ferreol, Jean Joseph(1808∼1853). 제3대 조선교구장. 1808년 12월 27일에 프랑스 아비뇽(Avignon)에서 태어나 1838년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1839년 5월초에 프랑스를 떠나 극동으로 향하였다. 1840년 1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중국에 상륙하여 중국대륙을 횡단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였다. 이때까지 그는 조선 교회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하여 어떤 큰 불행이 일어났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 봉천에까지 왔으나 그 곳 요동지방의 푸대접 때문에 서만자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요동지방은 원래 포르투갈 선교사의 관할구역이었으나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에 그 관할권이 넘겨짐에 따라, 이를 시기한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이 그 곳 신자들에게 프랑스출신 신부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사주했기 때문이었다. 서만자에 돌아온 페레올 신부는 그 곳에서 앵베르 주교로부터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고 그의 지시대로 조선 입국을 위해 양부(Yang Vou)로 가려고 했으나 요동지방 신자들의 적의로 말미암아 그 곳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1838년 8월 14일자로 벨리나(Bellina)의 명의주교로서 계승권을 가진 조선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1843년 12월31일 만주교구의 베롤(Verrolles) 주교로부터 성성식을 받았다. 이에 더욱 조선 입국의 길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여의치 않던 중, 때마침 그를 찾아온 김대건(金大建)을 먼저 조선에 입국시키기로 하고 자신은 마카오로 되돌아갔다. 갖은 고생 끝에 조선 입국에 성공한 김대건은 주교와의 약속대로 배를 구입하여 상해로 다시 돌아와서 주교에게 연락하니, 주교는 그때 프랑스로부터 새로 파견되어 온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를 거느리고 상해로 달려왔다. 이어 함께 배를 타고 모진 풍파를 헤쳐 간신히 한국 서해안에 다다라 충청도 나바위[羅岩)라는 곳에서 닻을 내렸다. 조선 입국을 시도한 지 6년만인 1845년 19월 12일이었다. 곧 서울로 올라와 전교활동을 전개했으나, 얼마 안 되어 그가 조선 입국에 앞서 상해에서 신품을 준 김대건 신부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는 가운데 1851년을 맞이한 주교는 거듭된 박해와 1만여명의 신자를 돌보아야 하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과로로 점차 건강이 쇠약해져 1853년 2월 3일 끝내 회복을 보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는 제3대 주교로서 조선 입국 이래 8년 동안에 폐허가 되다시피한 조선 교회를 소생시킨 큰 공을 남기었는데, 그의 유해는 4월 12일에 안성(安城) 미리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 무덤 옆에 묻혔다.

 

6. 메스트르 Maistre, Joseph Ambroise (1808~1857)

Maistre, Joseph Ambroise(1808-1857). 한국성 이(李). 조선교구 선교사. 안느시(Annecy) 교구의 앙트르몽(Entremont)에서 태어나 1832년에 신부가 된 후 7년 동안 교구사제로서 활약하다가 1839년 이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뜻을 품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1840년 1월 15일 프랑스를 떠나 우선 마카오로 향하였다. 마카오의 경리부장이 그의 임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9월 21일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임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마침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는 한편 경리부 일을 도왔다. 1842년 2월 프랑스 군함 편으로 우리 신학생들의 귀국이 결정되자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 교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를 떠났다. 이 때 그는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육로로 또는 해로로 10년간의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선교사의 입국이 불가능하게 보이자 그는 김대건만이라도 입국시키고자 김대건과 하직하였고, 1846년 초에는 최양업과 함께 동북 국경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으나 만주 군인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고, 간신히 풀려나 만주로 돌아왔다. 드디어 1852년, 1847년에 난파한 프랑스 군함들의 유물을 철거한다는 구실 아래 중국 배를 타고 조선 서해안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상륙하는 데 성공,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이미 중국에 있을 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더구나 연장자였으므로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사망하자 1856년 새교구장이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아보았다. 그간 그는 성영회(聖孀會)의 사업을 도입하였고 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고아나 기아를 거두어 키우는 성영회의 사업을 조선에서도 촉진시키고자 그는 성영회의 도움을 얻어 외교인들의 자녀들을 거두어 교우가정에서 양육하게 하였다. 비록 박해로 시설을 갖출 수는 없었을지라도 어쨌든 조촐하게나마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사업이 시작되었다. 또 그는 국내에서의 성직교육의 긴급성을 절감하고 1855년 제천(堤川) 배론에 성 요셉신학교를 개설하고 우선 그곳의 회장으로 하여금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신학교 살림을 돌보게 하였다. 새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하자 그는 충청도로 내려와 조그마한 교우촌을 맡아 오던 중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인근 덕산(德山) 황무실에 묻혔다. 그는 특히 그의 착하고 양순한 성격 때문에 최양업 신부와 조선 교우들의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었다.

 

7. 베르뇌 Berneux, Simeon Francois (1814~1866)

Berneux, Simeon Francois(1814-1866).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제4대 조선(朝鮮) 교구장. 한국명 장경일(張敬一). 프랑스 르망(Le Mans)교구 소속 샤토 뒤 르와르(Chateau-de-Loir)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르망 교구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서 수학했고 1837년 5월 20일 사제서품을 받은 후 르망 대신학교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하던 중 1839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41년 베트남의 통킹에 도착하여 전교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2년간의 옥살이 끝에 구조되었고, 그 후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滿洲) 교구에서 12년 동안 전교하였다. 1854넌 만주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이해 12월 27일 주교로 성성되었고, 이듬해 다시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 후 순교하기까지 10년 동안을 조선 교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 배론[舟論] 신학교를 세우고, 서울에 2개의 인쇄소를 차리는 외에 교세를 확장하는 등 조선 교회의 발전에 큰 공헌을 남겼다. 그러나 1866 2월 23일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브르트니에르(de Bretenieres, 白)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고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8. 다블뤼 Daveluy, Marie Antoine Nicolas (1818~1866)

Daveluy, Marie Antoine Nicolas(1818~1866). 순교자. 성인. 한국명 안돈이(安敦伊). 파리 외방전교회원. 주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프랑스 아미앙(Amiens)에서 태어나 이시(Issy)와 생슐피스(Saint-Sulpice) 소신학교를 거쳐 1841년에 1년 반 이상 교구사제로 활약한 뒤 1843년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몇 달 동안의 수련을 거쳐 1844년 2월 류우뀨(琉球)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고국들 떠나 1844년 9월말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주교를 만나 그의 요청으로 조선 선교사에 임명되어 그와 함께 조선에 들어가기 위해 1845년 7월 하순에 상해(上海)로 갔다. 때마침 이곳에 다시 온 김대건(金大建)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조선으로 향하여 10월 12일에 충청도 강경(江景)의 황산포(黃山浦)란 작은 포구에 닻을 내릴 수 있었다. 그는 이때부터 1866년 3월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신부로서 12년, 주교로서 9년)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으며 동시에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가장 능통하였다. 황산포에 도착하여 주교는 서울로 올라가고, 자신은 강경지방에서 조선말을 배워 이듬해 1월부터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어 서양인 성직자의 입국사실이 알려짐으로써 그는 박해를 피해 더욱 외딴 곳으로 숨어 다니며 전교에 힘썼다. 한편 교황청으로부터 성모무염시태를 조선 교회의 새 주보로 받게 되었고, 또 그 동안 성모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자 파리에 본부를 둔 성모성심회에 가입하기로 결정하고 1846년 11월 2일 충청도의 ‘수리치골’(현재 公主郡 新豊面 鳳甲里)에서 교우들과 같이 미사를 올리고 조선에 ‘성모성심회’를 창설하였다. 또 2년 뒤에는 신학생들의 지도를 맡았다. 1853년 그와 함께 입국한 페레올 주교를 잃었으나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전교에 더욱 힘을 쏟았으며 틈틈이 ≪한한불자전≫(漢韓佛字典)을 편찬하였다. 또 조선사연표를 번역하고 교우들을 위해 교리서와 신심서를 번역 · 저술하였다. 1857년 3월 25일에는 베르뇌(Berneux) 주교로부터 보좌주교로 선출되어 서울에서 아콘(Acones) 명의주교로 성성되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었다. 그러나 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고 1857년부터 이를 위해 새 자료를 발굴하여 그것을 프랑스어로 옮기었으며 목격증인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하여 그는 윤지충(尹持忠)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 1862년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탕이 되어 후일 달레(Dallet)의 유명한 ≪한국천주교회사≫가 저술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1863년에 그의 집에 불이 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일기와 주석책 등 귀중한 자료가 모두 타 버렸기 때문에 이 책은 한층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1861년에 그는 경상도지방에서 전교하였는데 외교인들의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1865년에 들어서면서 박해가 더욱 가혹해져 마침내 그해 2월 2일 베르뇌 주교가 먼저 잡히고, 그도 3월 11일 전교 중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 충청도 보령(保寧)의 수영(水營)으로 압송되어 3월 30일 참수를 당하였다. 베르뇌주교를 도와 9년 동안을 부주교로서, 그리고 주교의 순교 후 조선교구의 제5대 주교가 된지 21일 만에 순교한 것이다. 그 뒤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福者位)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 현지에서 시성(諡聖)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신명초행≫, ≪회죄직지≫, ≪영세대의≫, ≪성찰기략≫, ≪Parvum Vocabularium Latino-Coreanum≫ 등이 있으며 이 밖에 ≪성교요리문답≫, ≪천주성교예규≫, ≪천당직로≫ 등도 그가 번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9. 페롱 Feron, Stanislas (1827∼1903)

Feron, Stanislas(1827∼1903). 조선교구와 인도의 퐁티세리에서 전교한 선교사. 한국성 권(權). 프랑스의 세즈(Sez)에서 태어나 그 곳 대신학교를 나와 연령미달이었지만 특별배려로 1850년 12월 21일 사제서품을 받고, 플레르(Flers)와 아르장탕(Argentan)의 사제로 일하였다. 1854년 10월 1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년간 수련한 다음 1856년 1월 23일 프랑스를 떠나 14개월 만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베르뇌(Berneux) 주교가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여 다블뤼(Daveluy) 신부를 그의 후임으로 삼았을 때였다. 그는 곧 몽소승천지방 즉 경상도 서북부지방을 맡아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박해의 불꽃이 타올라, 2명의 주교와 7명의 성직자가 순교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요행히도 살아남게 된 페롱 신부는 한국 교회의 장상이 되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료인 칼레(Calais) 신부를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스스로는 한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달리 정해졌다. 본국으로 송환된 그는 1870년 인도(印度)의 퐁티세리로 파견되었고, 그 뒤 30년간을 그곳에서 사랑의 복음을 전하다가, 젊은 시절 그가 봉사했던 한국 교회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걸 보고 만족해 하면서 1903년 6월에 77세의 고령으로 선종하였다.

 

10. 프티니콜라 Petitnicolas, Michel Alexandre (1828~1866)

Petitnicolas, Michel Alexandre(1828~1866). 순교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성(韓國姓)은 박(朴). 1828년 8월 21일 프랑스 생 디에(Saint Die) 교구의 코앵시(Coinches)에서 출생. 샤텔 쉬르 모젤의 소신학교를 거쳐 생 디에 교구의 대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850년 1월 20일, 차부제(次副祭)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으나 그해 10월 병 때문에 외방전교회를 나와 1852년 생 디에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라블린본당 보좌신부로 1년 동안 사목하였다. 그러나 1853년 6월 다시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인도, 홍콩 등지에서 포교하다가 1856년 3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푸르티에(Pourtie, 申)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 충청도지방에서 사목하였고 1862년부터는 배론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어 이 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한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대성당으로 옮겨졌다.

 

11. 랑드르 Landre, Jean-Marie-Pierre-Eliacin (1828~1863)

Landre, Jean-Marie-Pierre-Eliacin(1828~1863). 조선교구 선교사. 한국성(姓)은 홍(洪). 프랑스 태생인 그는 일찍이 성직자 되기를 원하여 사제품을 받은 다음, 소신학교 교사, 본당 보좌신부 등으로 본국에서 봉사하다가, 1856년 10월 5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58년 3월 21일 한국 전교를 위해 고국을 떠나, 1861년에야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내포(內浦) 지방으로 파견된 그는 그 곳에서 전교활동 중 1863년 봄 중병을 얻어 9월 16일 충청도 황무실에서 선종하였다. 그가 입국한 지 불과 3년만의 일이었다.

 

12. 푸르티에 Pourthie, Jean Antoine (1830~1866)

Pourthie, Jean Antoine(1830∼1866). 순교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명 신요안(申妖案).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 교구의 ‘발랑스 앙 알비즈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貴州)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와 함께 상해(上海)를 거쳐 해로(海路)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배론[舟論]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張周基, 요셉)와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13. 리델 Ridel, Felix Clair (1830~1884)

Ridel, Felix Clair(1830-1884).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재위 : 1869-1884). 주교. 한국명 이복명(李福明). 1830년 7월 7일 프랑스 낭트(Nantes) 교구에서 태어난 그는 1857년 12월에 사제품을 받고 잠시 교구사제로 일하였다. 1859년 이방인에게 전교할 뜻을 품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60년 7월 27일에 한국을 향해 조국을 떠났다. 1861년 3월 31일에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베르뇌(Berneus, 張敬一)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보좌주교를 만나고 곧 충청도 공주(公州)의 진밧 지방을 맡아 전교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병인년(丙寅年)에 일어난 대박해로 두 주교와 5명의 동료신부를 잃게 되었으나 리델 신부는 다행히도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가 있었다. 이에 살아남은 페롱(Feron, 權) 신부, 칼레(Calais, 姜) 신부와 의논하여, 박해로 주교와 여러 성직자를 잃은 조선 교회의 사정을 알리고 새로이 성직자를 청하고자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중국으로 탈출키로 하였다. 연장자인 리델 신부가 그 임무를 맡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1866년 7월 7일 중국 치푸(芝罘)에 도착해서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를 만나 구원을 요청하였다. 리델 신부의 요청에 따라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를 구출코자 로즈제독은 3척의 군함을 이끌고 9월 20일 인천 앞바다에 이르니 이것을 병인양요(丙寅洋擾)라 일컫는다. 이 때 칼레와 페롱 두 신부는 군함이 왔음을 알고 탈출한 길을 찾고자 했으나 군함을 만나지 못하고 따로 청국으로 피신함으로써, 이제 조선땅에는 한 명의 신부도 없게 되었다. 그 뒤 리델 신부는 다시금 조선으로 들어가기 위해 새로이 조선교구에 배속된 여러 신부들과 함께 일본 · 만주 등 여러 곳을 찾아갔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1869년 6월 25일 조선교구의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주교로 임명된 리델 주교는 1870년 초에 로마로 가 그곳에서 6월 5일 주교 성성식을 갖는 동시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참석하였다. 1871년 7월에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는 조선 입국 시도를 잠시 중단하고 한불자전의 완성과 교리문답책을 편찬하는데 전심하였다. 1876년 4월에 블랑(Blanc, 白圭三) 신부와 드게트(Deguette) 신부를 데리고 조선 입국을 위해 다시금 배를 타고 조선을 향해 떠났다. 5월 8일 서해안에 닿은 주교는 조선 교우들의 요청에 따라 신교의 자유를 얻도록 하는 일에 전심하기 위해 상해로 되돌아가기로 하고 두 신부만을 상륙시켰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10년 만에 다시 목자를 갖게 되었는데, 중국에 돌아온 리델 주교는 일본 · 만주를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조선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트고자 애쓰던 때에 새로 두세(Doucet), 로베르(Robert), 뮈텔(Mutel), 코스트(Coste)의 네 신부를 새로 배속받아 그중 두세, 로베르 두 신부와 함께 중국배를 타고 조선으로 건너와 9월 23일 황해도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을 떠난 지 11년 주교로 임명된 지 8년만에 서울에 들어온 주교는 감시의 눈을 피해가면서 전교에 전심하였다. 그해 10월, 이러한 교회 형편을 알리기 위해 한 교우에게 편지를 주어 만주로 가서 코스트나 뮈텔 신부에게 이를 전하도록 하였던 바, 불행히도 잡히게 되어 주교의 입국사실이 탄로되었다. 이 때문에 1878년 1월 28일 그는 잡히는 몸이 되어 5개월 동안 옥중에 갇혔으나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의 교섭으로, 중국정부의 주선에 의해 6월 5일 옥에서 풀려나, 7월 12일 만주로 추방되었다. 그간 코스트 신부에게 맡겼던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이 완성되어 일본 나가사끼(長崎)로 건너가 이를 인쇄에 붙이니, 1880년말과 1881년 봄에 걸쳐 두 책이 다 나오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중풍의 치료를 위해 홍콩으로 건너갔으나 별 효과가 없었으므로 블랑 신부를 보좌주교로 선정하고 그해 11월에 고향인 반느(Bannes)로 돌아가 1884년 6월 20일 54세로 선종하였다.

 

14. 조안노 Joanno, Pierre Marie (1832∼1863)

Joanno, Pierre Marie(1832∼1863). 조선교구 선교사. 1832년 2월 9일 코트 뒤 노르(Cote du Nord)의 멜이오네(Mellionnee)에서 태어나, 1856년 1월 3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 1857년 12월 19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1858년 3월 21일 한국으로 떠난 그는 1859년과 1860년에 걸쳐 두 번씩이나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1861년 세 번째만에 비로소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성모영보구역인 충청도 공주(公州) 지방에 파견되어 전교활동을 계속했으나, 불과 2년 후인 1863년 4월 13일 충청도 둠벙이[公州郡 新下面 造平里]에서 병을 얻어 선종하였다.

 

15. 칼레 Calais, Alphonse (1833~1884)

Calais, Alphonse(1833∼1884).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성(韓國姓)은 강(姜).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뒤 1860년 7월 5일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의 선교사로 이듬해 4월 7일 한국에 입국, 1866년까지 5년 동안 경상도의 서부지역에서 전교활동을 벌였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로 여러 차례 위험을 넘기고 산 속에 피신해 있다가 이해 10월 페롱(Feron, 權) 신부와 함께 한국을 탈출,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이듬해부터 여러 번 한국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병인박해 때 얻은 병이 악화되어 부득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1869년 4월 시토회 수도자가 되어 모벡(Maubec) 수도원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일생을 마쳤다. 주요 저술로는 ≪강신부 훈계≫(필사본)가 있다.

 

16. 위앵 Huin, Martin Luc (1836~1866)

Huin, Martin Luc(1836~1866).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한국성(姓)은 민(閔). 프랑스 랑그르(Langres)교구의 기용벨(Guyonvelle)이란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1861년 랑그르교구 소속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어 2년 동안 보좌신부로 사목하다가 1863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고 이듬해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 볼리외(Beaulieu, 徐) 신부와 함께 프랑스를 떠나 중국을 거쳐 1865년 5월 27일 충정도 내포(內浦)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였다.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에게 조선어를 배운 후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충청도 지방에서 전교하던 중,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나 3월 11일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자수, 3월 30일 충남 보령(保零) 갈매못(일명 고마수영)에서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張周基), 황석두(黃錫斗) 등과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후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17. 오메트르 Aumaitre, Pierre (1837∼1866)

Aumaitre, Pierre(1837∼1866).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한국성(姓)은 오(吳). 프랑스 앙굴램(Angouleme) 교구의 에젝(Aizecq)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1862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 해 6월 14일 사제로 서품되었고 이어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프랑스를 떠나 1863년 조선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수원(水原) 근방의 샘골[泉谷里]에서 조선어를 익히고 곧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전교하고 있던 충청도지방으로 내려가 전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위앵(Huin, 閔) 신부와 함께 자수, 3월 30일 충남 보령(保寧)의 갈매못(일명 고마수영)에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장주기(張周基), 황석두(黃錫斗) 등과 함께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후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18. 브르트니에르 Bretenieres, 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1838~1866)

Bretenieres, 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1838-1866). 성인. 축일은 9월 20일.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신부. 한국성(姓)은 백(白). 프랑스 디종(Dijon)교구 소속 샬롱쉬르손느(Chalon-sur-Saone)에서 남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59년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철학공부를 하던 중 186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동회의 신학교를 졸업한 후 1864년 5월 21일 사제서품을 받음과 동시에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65년 5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 위앵(Huin, 閔) 신부 등과 함께 충청도 내포(內浦)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여 서울의 정의배(丁義培) 회장집에 머무르면서 정회장에게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나 1866년 2월 25일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의 하인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체포되었고 3월 7일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 등과 함께 군문효수(軍門梟首)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19. 도리 Dorie, Pierre Henri (1839~1866)

Dorie, Pierre Henri(1839~1866). 성인 (聖人). 축일은 9월 20일.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신부. 한국 성은 김(金). 1839년 9월 3일 프랑스 뤼숑(Lucon)교구 소속 성 틸레르 드 탈몽(Saint-Hilaire de Taimont)의 한 농가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1862년 소품자(小品者)로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864년 5월 21일 사제서품을 받았고 그 즉시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듬해 5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볼리외(Beaulieu), 위앵(Huin) 신부 등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경기도 용인(龍仁)의 손골[孫谷里]에 배속되어 선교하던 중 1866년 2월 27일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베르뇌(Berneux)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등과 함께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20. 볼리외 Beaulieu, Bernard Louis (1840∼1866)

Beaulieu, Bernard Louis(1840∼1866). 성인(聖人). 순교자. 축일은 9월 20일. 1866년 병인(丙寅) 박해 때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신부. 한국명 서몰례(徐沒禮). 프랑스 보르도(Bordeaux)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태어났다. 1857년 보르도신학교에 입학하여 1862년 부제서품을 받은 후 이듬해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고, 1864년 사제서품을 받음과 동시에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865년 5월 브르트니에르(Breteni res) 신부, 도리(Dorie) 신부, 위앵(Huin) 신부 등과 함께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후 고해(告解)를 들을 만큼 한국어를 배우고 공주(公州)지방에 배속되었으나 임지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하기도 전에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베르뇌(Beneux, 張敬一)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廣州) 근처의 교우집에 피신해 있던 중 1866년 2월 27일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도리 신부와 함께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21. 코스트 Coste, Eugene Jean George (1842∼1896)

Coste, Eugene Jean George(1842∼1896). 파리 외방전교회원, 조선교구 선교사. 한국명 고의선(高宜善). 프랑스의 몽타르노(Montarnaud)에서 태어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거쳐 1866년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868년 6월 6일 사제서품을 받고 7월 15일에는 프랑스를 떠나 극동으로 파견되었다. 2년간 홍콩에서 경리를 맡아 본 후 1870년에 싱가포르로가 2년간 요양소 건설에 종사하다가 홍콩에 돌아왔고, 1874년에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경리일을 맡아 보았다. 1875년 11월 21일 청원이 허락되자, 곧 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리델(Ridel) 주교가 오래 전부터 꾸며 오던 ≪한불자전≫(韓佛字典)의 인쇄일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 요꼬하마(橫濱)로 건너가 한국어의 자모를 주조하여≪한불자전≫의 간행사업에 착수, 1880년에 출판하였고, 이어 그 이듬해에는 한국어의 문법책과 천주성교공과를 출판하였다. 그 뒤 리델 주교에 의해 나가사끼(長崎)에 조선교구의 경리부가 설치되자 경리부장을 맡아 보게 되었다. 그 곳에서 인쇄일도 맡아 보던 중 1886년 블랑(Blanc) 주교에 의해 부주교로 임명되어 한국에 입국 이후 약현(藥峴)과 종현(鍾峴)성당을 비롯한 많은 성당과 교회건물을 직접 설계하고 감독하였다. 또 인쇄소를 나가사끼에서 옮겨와 한국어로 된 30여권의 책을 찍어 냈다. 이렇듯 박해에서 벗어난 한국 교회 발전의 초석을 튼튼히 다진 그는 만년에 고아원에서 어린이들을 돌보다 1896년 선종하였다.

 

22. 블랑 Blane, Jean Marie Gustave (1844~1890)

Blane, Jean Marie Gustave(1844-1890). 파리 외방전교회원. 제7대 조선교구장. 주교. 한국명 백규삼(白圭三). 1866년 12월 22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신품성사를 받고 이듬해 2월 15일, 파리를 떠나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병인(丙寅)박해로 두 조교를 함께 잃고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Ridel)신부를 만나, 함께 조선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 10년 동안 리델 주교를 도와 교리책의 번역과 ≪한불자전≫(韓佛字典)의 편찬 등으로 세월을 보냈다. 1876년 리델 주교, 드게트(Deguette)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조선을 향해 떠나, 5월 8일 리델 주교를 다시 청국으로 되돌려 보낸 다음 조선땅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목자를 다시 갖게 된 조선 땅을 숨어 다니면서 그는 전교에 힘쓰는 한편, 다시 주교를 맞을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그 결과 1877년 9월에 리델 주교를 다시 맞게 되었으나 곧 주교가 잡히는 몸이 되어 추방되자 주교없는 한국 교회를 지켜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1882년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83년 7월 8일 일본 나가사끼에서 주교 성성식을 갖고 조선에 돌아와 더욱 전교에 힘써 1887년말에는 14명의 성직자 14명의 신학생과 신자수 1만 5000명을 헤아릴 수 있게 되어, 박해로 거의 다 쓰러져가던 조선 교회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1887년 9월 21일에는 조선 교회의 지도서를 공포하여 통일된 법전을 갖고 규칙에 따라 교회 행사를 집행할 수 있게 했고, 1888년 6월 8일에 조선교구를 예수성심께 봉헌하는 장엄한 미사를 올려 신교의 자유를 얻게 된 최후의 승리를 감사드렸다. 한편 방인 성직자 양성에 힘써 1885년에 강원도 부흥골에 신학교를 설치하여 페낭유학생을 포함한 신학생을 수용하였고, 2년 뒤에는 용산으로 옮기었는데 그때의 신학생수는 21명이었다. 고아와 노인들을 위한 사회사업도 활발히 전개하여 1885년에 서울에 고아원과 양로원을 세우고 40명의 노인과 100명의 고아를 돌보게 하였는데, 이 사업을 위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요청하여 4명의 수녀를 파견받아 그들로 하여금 이를 맡아보게 하였다. 그리고는 새로운 성당을 짓기 위한 대지를 사들여 1887년부터는 종현(鐘峴)의 산등을 깎아 1890년 성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2월 2일 이를 감사하는 미사를 드리고 곧 주교관을 세우려 했으나 갑자기 중병을 얻어 2월 21일 46세로 선종하였다.

 

23. 두세 Doucet, Camille-Eugene (1853~1917)

Doucet, Camille-Eugene(1853~1917). 서울교구 부주교, 한국명 정가미(丁加彌). 1917년 4월 19일, 1876년부터 40여 년간, 갖은 박해를 헤치며 한국 교회를 끝까지 지킨 초기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인 부주교 두세 신부를 잃음으로써 한국 교회는 큰 슬픔에 잠겼다. 그는 1853년 11월 16일 쉬브롱(Chevron)에서 태어나 1873년 9월 10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76년 12월 23일 사제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25일 한국으로 떠났다. 이 때 한국에는 1866년 병인박해로 두 명의 주교를 포함한 9명의 성직자가 순교한 뒤에도 계속 박해가 끊이지 않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1877년 3월에 만주에 도착한 그는 9월 11일 리델(Ridel) 주교와 로베르(Robert)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떠나 23일 저녁에 황해도 배천(白川) 맞은편 한강 입구에 닻을 내리고, 배천으로 들어가 1878년 1월말에는 구월산(九月山) 일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서울에서 리델 주교가 체포되자 두세 신부와 로베르 신부를 만나 서로 무사함을 기뻐하였다. 이어 포졸들의 추적을 피해 이북 5도를 돌아다니면서도 전교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12월에는 남부지방으로 내려가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로 가는 도중, 천연두에 걸린 어린이에게 성사를 베풀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15일간 병석에서 신음하는 고통도 겪었다. 1881년 뮈텔(Mutel) 신부와 리우빌(Liouville) 신부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두세 신부는 충청도지방을 전담하여 근 10년간 이곳에서 복음 전파에 전력을 다하였다. 1890년에 서울에 올라온 그는 곧 약현(藥峴, 현 중림동) 성당의 건축을 담당했고, 성당이 준공되자 1892년 초대 약현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사망하기까지 25년간 그 곳에서 일생을 바쳤다. 1896년 코스트(Coste) 신부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부주교로 임명되어, 더욱 바쁜 봉사생활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몸이 노쇠해져 40년에 걸친 그의 헌신적 봉상에 종지부를 찍었다.

 

24. 뮈텔 Mutel, Gustave Charles Marie (1854-1933)

Mutel, Gustave Charles Marie(1854-1933) 대주교. 파리 외방전교회원. 제8대 조선 교구장. 한국명 민덕효(閔德孝). 프랑스 블뢰메리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조앵빌 중등학교와 랑그르 소신학교를 졸업하여 1873년 10월 11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뒤 1877년 2월 24일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12월 만주에 도착하였다.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인하여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하고 만주에 머무르면서 전교활동 준비와 한국에 관련된 여러 문서들을 정리하는 한편 일본에서의 시복수속 등을 견학하기도 하였다. 이는 후에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시복과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80년 5월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와 함께 입국하려 하였으나 조선 관헌들의 엄한 감시로 성공하지 못하고 같은 해 11월에 가서야 황해도 장연(長淵)에 상륙할 수 있었다. 1881년 황해도 백천(白川)에서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와 잠입하였으나, 당시 천주교 탄압교서인 신사 척사윤음(辛巳斥邪綸音)이 공포된 때라서 은거생활을 하며 한국어와 한문공부에 몰두하면서 순교자에 관한 자료와 기록 정리에 열정을 쏟았다. 1885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지도자로 임명되어 파리로 소환되었으나 한불조약(韓佛條約, 1886. 6. 4)이 조인된 훨씬 뒤인 1890년 8월에는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대목)으로 임명되어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성당에서 성성식(成聖式)을 거행하고 나서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와 함께 1891년 2월 조선에 재입국하였다. 박해시대에 활동한 적이 있는 뮈텔 주교는 한불조약 이후 지하교회에서 해방된 교회의 모습을 좀더 확연히 하기 위하여 예수성심신학교, 종현(鐘峴) 성당, 약현(藥峴) 성당 등을 준공시키는 이외에 각 지방에서의 본당 창설활동에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순교자들의 꽃을 피어나게 하라”(Florete Flores Martyrum)는 그의 표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순교자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순교자 현양과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립, 그리고 순교복자의 시복 등으로 꼽을 수 있다. 1894년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의 원본이 발견되자 곧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각 학계에 배포하고 그 원본은 교황에게 진상하였으며(1925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순교상황을 수집하여 1895년 ≪치명일기≫(致命日記)를 편찬하였다. 1904년을 전후하여서는 기해박해(己亥迫害)의 순교행적을 기록한 현석문(玄錫文)의 ≪기해일기≫(己亥日記) 한 벌이 발견되었는데 앞뒤의 일부가 상하여 이를 보충하고 서문을 붙여 1905년 ≪기해일기 뮈텔판≫을 간행하였다. 한편 뮈텔 주교는 확장되는 교세에 따라 교계제도가 확립될 수 있는 기초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1911년 전라도, 경상도의 남부지방을 분할하여 대구교구로 설정한 뒤 1920년에는 함경도, 간도지방을 분할하여 원산교구로 설정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1923년에는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Maryknoll Fathers)의 한국 진출을 주선하여 1927년에 창설된 평양교구의 사목을 이관하였다. 이와 같은 대내외적인 여러 활동으로 1920년 교황청으로부터 백작 작위를 수여받고, 1925년 3월 명의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더욱이 1925년 7월 5일에는 그의 오랜 숙원이던 한국 순교복자 79위에 대한 시복식이 교황 비오(Pius) 11세에 의해 거행되었다. 이밖에 일제하의 탄압 속에서도 교회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가 한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33년 1월 23일 80세의 생을 마쳤다. 주요 저서는 ≪Doc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de 1839 et 1846≫, ≪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1866≫, ≪뮈텔일기≫(Journal de Mgr. Mutel, 1890-1933), ≪뮈텔문서≫(Documents de Mgr. Mutel, 1890-1927) 등이 있다.

 

25. 리우빌 Liouville, Lucien Nicolas Anatole (1855-1893)

Liouville, Lucien Nicolas Anatole(1855-1893). 한국명 유달영(柳達榮). 조선교구 선교사. 1874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1878년 3월 16일 사제품을 받자 곧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조선교구의 주교가 체포되는 등 박해가 심해 곧 조선에 입국할 수가 없어, 그는 만주에서 2년간 머무르며 한국어와 한자를 익히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러는 동안 감옥에서 풀려나 만주로 추방된 리델(Ridel) 주교를 만났고, 1880년에 조선 입국을 시도하여 두 번째에 성공하였다. 1880년 11월 12일 황해도 땅에 들어선 그는 산간 옹기마을에 숨어서 전교활동을 계속하다가 1881년 3월 18일에 드디어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조금도 동요됨이 없는 태연자약한 태도에 포졸들은 그 이튿날 그를 풀어 주었으므로 그는 서울로 피신할 수가 있었다. 6주일 후에 충청도로 내려갔다가 그해 가을에 조선교구를 맡게 된 블랑 주교를 대신하여 전라도지방을 맡게 되었다. 그 후 6년간 잠시도 쉬지 않고 전교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교세 확장을 보았으나, 반면 그의 건강은 날로 약화되었으므로, 블랑 주교는 새로 세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당시의 신학교는 한식건물이어서 매우 불편했으므로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는 한편 항상 사랑으로 신학생들을 인도하여 장차 훌륭한 성직자로서의 자질을 함양시키는데 주력하였다. 1893년 4월 26일 장염과 복막염으로 그가 오랜 투병 끝에 선종하자 많은 제자와 성직자들이 다같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유신부 군난사기≫가 있다.

 

26. 프와넬 Poisnel, Victor Louis (1855~1925)

Poisnel, Victor Louis(1855~1925). 파리 외방전교회원, 서울교구 부주교. 한국명 박도행(朴道行).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 지방에서 태어났다.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거쳐 1879년 6월 29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1880년 8월 18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1년 8월 3일 한국으로 떠났다. 곧장 한국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기착한 그는, 때마침 한국에서 추방당한 리델(Ridel) 주교를 만나 그의 병간호를 하다가 병이 악화된 리델 주교를 본국으로 송환시키기 위해 그를 따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싱가포르에서 프랑스로 돌아가는 젊은 신부를 만나 주교를 그에게 맡기고 나가사끼로 돌아온 그는 곧 드게트(Deguette) 신부를 따라 한국에 잠입하였다. 첫 포교지도 황해도와 평안도를 맡게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뮈텔(Mutel) 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의 후임으로 조선교구의 경리일을 맡아 보게 되면서부터 장차 교회 발전에 대비하기 위해, 기회를 포착하여 토지를 매입하는 일에 착수했는데 그의 이러한 선견지명과 끈질긴 추진력으로 오늘의 명동대성당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는 종현(오늘의 명동) 주임신부로 있을 때 종현(鐘峴) 대성당의 건축을 맡아보던 코스트(Coste) 신부가 선종하자, 건축관계도 맡아 보아 오늘날 누구나가 감탄하는 대성당을 완공시켰다. 그래서 그 뒤 30년 동안 모든 성당과 기타 부속건물을 지을 때에는 반드시 그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 1917년부터 부주교를 겸임하였고, 1925년 12월 26일 70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27. 로베르 Robert, Achille Paul (1863~1922)

Robert, Achille Paul(1863~1922). 파리 외방전교회원. 대구교구 선교사. 한국명 김보록(金保祿). 그는 프랑스의 시골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는데 그는 그곳에서 두세(Doucet) 신부와 뮈텔(Mutel, 閔)신부를 만나 함께 공부하고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 오랫동안 함께 일하게 되었다. 즉 1876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1877년 1월 25일 두세 신부와 함께 한국을 향해 파리를 떠났다. 만주에서 리델(Ridel, 李) 주교와 만나 셋이서 함께 배를 타고 서울 근해에 도착하여, 리델 주교는 서울로 갔고, 두세 신부와 그는 함께 황해도로 상륙하여 산중에 숨어서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리델 주교로부터 강원도 이천(伊川)의 고메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1878년 음력 정월 초에 리델 주교의 투옥사실을 전해 듣고 곡산(谷山)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1881년부터 1885년까지 그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낭천(狼川), 지평, 부흥골 등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교활동을 했는데, 점차 선교사의 수도 늘어나, 1886년부터는 경상도지방을 전담하게 되었고, 신나무골을 거쳐 1890년 대구 부근 새방골로 갔다. 그러나 불량배들이 선교사와 교우들을 모욕하고 신부댁을 습격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고 심지어는 대구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정부당국이 로베르 신부를 대구로 호송함으로써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1년 대구(大邱) 시외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 후 30년간 이곳에 천주교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온갖 정력을 쏟아, 삼남지방은 1911년 조선교구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교구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갖은 고난을 겪어가면서 대구교구의 기반을 다지느라 몸이 쇠약해져, 급기야는 병석에 눕게 되자, 요양을 위해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갔다. 1913년에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한국으로 나와, 전교사업에 종사하였으나 1919년에 다시 발병함에 따라 도저히 더 이상 전교할 수가 없게 되자 주교관으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정리하던 중 1922년 1월 2일 주교관에서 사망, 교구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28. 르비엘 Le Viel, Emile Constant (1863-1893)

Le Viel, Emile Constant(1863-1893). 파리 외방전교회원. 조선교구 선교사. 한국명 신삼덕(申三德). 1888년 12월 12일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5월 한국에 입국했다. 원래 몸이 허약했던 그는 오랜 여행으로 병이 도져 상해(上海)에서 홍콩으로 되돌아가 병 치료를 하였다. 약간 건강이 회복되어 1889년 5월말 경에야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원도의 조그마한 구역을 맡았으나, 그의 허약한 체질은 이 낯선 땅의 음식이나 풍습에 적응되기가 힘들어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를 본 코스트(Coste) 신부는 그를 용산신학교 선생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몸은 더욱 쇠약해져, 도저히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직에서 물러나 제물포(濟物浦)로 갔다. 이 때 제물포는 교세가 날로 번창하여 새로운 교회건물을 필요로 했으므로 르비엘 신부는 손수 석수와 대목일을 하여 1890년 가을에는 이를 완성시켰다. 한편 그는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병원환자들을 날마다 찾아가 그들을 치료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의 병은 점점 심해져 이젠 기동조차 못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뮈텔(Mutel) 주교는 그를 홍콩으로 보내 요양케 하였다. 1892년 10월 홍콩에 도착한 그는 투병을 계속했지만 별 효과를 얻지 못하자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의 청원이 허락되어 고국으로 떠나기로 한 날, 심한 각혈을 일으켜, 그리던 고국에도, 그리고 한국에도 영영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1893년 4월 20일의 일이었다.

 

29. 드망즈 Demange, Florian (1875~1938)

Demange, Florian(1875~1938). 초대 대구교구장(大邱敎區長). 주교. 한국명 안세화(安世華). 1875년 프랑스의 로렌(Lorraine) 지방에서 태어났으나 1870년 독불전쟁(獨佛戰爭)으로 로렌지방이 독일에 점령되었기 때문에 파리로 이주해 살았다. 1893년 파리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철학과를 다시 이수하였으며,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을 전공한 다음 1898년 졸업과 동시 사제서품을 받고, 곧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그해 10월 6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우선 조선말과 풍속을 익힌 다음 1899년에 부산(釜山)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첫 포교사업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덕겸비의 고매한 인품은 그가 부산에 내려 온 지 불과 1년도 못되어 즉 1900년에 서울 용산신학교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6년간 봉직하면서 내국인 사제 양성에 정진 하던 차, 1906년 10월 19일에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그 경영과 편집을 맡아 개화기의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나, 불과 4년 만에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폐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법률문답’이란 고정란을 통해 민중과 공직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유익을 주었고 이로 말미암아 찬사와 신뢰 때문에 편집 책임자인 드망즈 신부의 사회적 영향력은 아주 컸었다. <경향신문>의 창간과 더불어 부록으로 <보감>도 발간하여 교리와 교회사에 대한 지식과 함께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알려, 교인들의 신앙과 새생활을 교도하는 데 큰 공을 남기었다. 1911년 4월 8일. 서울교구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이 분할되어 대구교구가 신설되는 동시에 드망즈 신부가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드망즈 신부는 6월 11일 명동성당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고 6월26일 대구로 부임하여 교구 창설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부임한 지 5년 만에 대구교구는 교구관리소, 신학교대성당 증축, 수녀원 등 주요 시설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에 날로 교세가 확장되어 1919년에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였고, 이때 대구신학교의 두 학생을 함께 데리고 가 로마 우르바노대학에 유학시켰다. 1925년에는 로마 교황청에서 거행된 조선 순교자 79위의 시복식에 참석하였고, 1928년에 중병을 얻어 고국에 돌아가 치료와 요양으로 3년을 체류하다가 1930년 11월 11일에 다시금 조선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연로하여 날로 늘어나는 교세를 전담키가 어렵게 되자, 오래전부터 계획해 오던 전라북도를 1931년 5월 감목대리구로 설정하고 김양홍(金佯洪, 스테파노) 신부를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하였는데, 1937년 이 지역이 지목구(知牧區)로 설정됨으로써 최초의 방인교구를 탄생시켰다. 바로 이 해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었으므로 주교 공의회는 교리서 문제에 있어서, 우선 전국에 통일된 교리서의 필요성을 느껴, 새로운 통일된 교리서 편찬을 위한 5교구위원회가 설치되고 그 위원장에 드망즈 주교가 임명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2년 동안 교리서 편찬작업에 전심하여 1934년에 간행을 보게 되었다. 1934년 10월 31일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아 그의 36년 걸친 조선교구에서의 헌신적인 봉사와 대구교구 설창에 대한 절대적인 공로를 보상받았다. 1933년에 전라남도지방을 애란(愛蘭)의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전교를 전담케 하여 1937년 4월 15일 대구교구로부터 광주교구를 분할 독립시켰다. 이와 같이 드망즈 교주는 신설된 대구교구를 맡아 불과 25년 만에 대구교구와 전주, 그리고 광주의 3개 주교구로 이를 나누어야 할 만큼 크게 성장시키는데 온갖 정력을 다한 끝에 1938년 2월 9일에 대구에서 선종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지 40년 동안을 전교에 힘쓰다 63년를 일기로 선종한 것이다.

 

30. 무세 Mousset, Germain (1876-1957)

Mousset, Germain(1876-1957).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 제 2대 대구교구장. 주교. 한국명 문제만(文濟萬). 프랑스에서 출생. 1900년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졸업과 함께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해 10월 한국에 입국하였다. 1901년 첫 사목지인 제주도에 부임했으나 5월 신축교난이 일어나자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교난의 경과를 상세히 보고한 후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와 함께 목포로 피신했다가 10월에 제주도로 귀환, 다시 전교를 시작하였다. 1902년 마산본당(현 완월동 본당)으로 전임되어 성당을 신축하고 창원, 진주, 통영, 거제 등지를 전교하는 한편 1910년 현 성지(聖旨) 여중고의 모체인 성지학교를 설립했고, 1911년 대구교구가 서울교구로부터 분할, 창설되자 대구교구 당가(재정부장)로 임명되었다. 그 후 1928년 대구교구 부주교를 거쳐 1938년 2월 대구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사망하자 이해 12월 교구장(대목)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5월 6일 주교로 성성되었고 그 후로는 대구교구의 교육사업에 주력하여 효성(曉星) 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주교관내에 루르드 성모당을 건립하였다. 1942년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교구장직을 사임당하고 광복 후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으로 활동, 그 성과로 인해 195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았다. 1957년 6월 8일 노환으로 서울에서 사망, 대구교구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31. 드브레 Devred, Emile Alexandre Joseph (1877-1926)

Devred, Emile Alexandre Joseph(1877~1926). 서울교구 보좌주교. 한국명 유세준(兪世俊). 1877년 1월 7일 루쿠르(Roucourt)에서 태어나 1898년 9월 15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간 그는 1899년 9월 23일 사제품을 받고 1899년 11월 15일 임지인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원주(原州)본당의 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6년간 전교에 전념함으로써, 강원도 지방의 교세신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이웃 풍수원(豊水院)본당 신부와 협의해서 1904년에 용소막(龍召幕)본당을 새로 탄생시켰다. 1906년에는 드망즈(Demange) 신부가 경향신문사 사장으로 전임되자 그의 후임으로 신학교를 맡아 정성껏 신학생들을 돌보았고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군복무를 위해 프랑스에 돌아갔으나 그 동안 제2의 조국인 한국을 잊지 않고 때때로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내 동료와 제자들을 걱정하였다. 그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뮈텔 주교는 모든 성직자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드브레 신부를 계승권을 지닌 그의 보좌주교로 추천, 교황청의 승인을 얻었다. 이에 1921년 5월 1일 주교성성식을 갖고 이후 5년 동안 서울교구 지도서를 출판하는 한편 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자료수집 등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해 많은 공적을 남기고 1926년 1월 17일 갑자기 졸도하여 그 이튿날 깨어나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32. 달레 Dallet, Claude Charles (1829~1878)

Dallet, Claude Charles(1829~1878).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교회사가. 1829년 10월 18일 프랑스 디종(Dijon)의 동북부에 위치한 랑그르(Langres)에서 출생. 랑그르의 소신학교(小信學校)를 거쳐 대신학교(大神學校)에 진학하여 수학하던 중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850년 10월 5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852년 6월 5일 사제서품을 받고 인도 마이수르(Maissour) 지방의 선교사로 포교에 전념하는 한편 저술활동을 벌여 1859년 마이수르 지방의 개신교의 공격을 논박한 교리서 《A Controversial Catechism or short Answers to the Objections of Protestants against the true Religion》을 영어로 저술, 모든 선교사들의 필수품이 될 정도로 찬사를 받았다. 1860년 간질(癎疾)에 걸려 귀국, 치료를 받고 병이 어느 정도 낫자 힌두어의 보급을 위해 힌두어 활자를 주조(鑄造)하여 파리 국립인쇄소에 힌두어 인쇄시설을 갖추게 하고 1863년 포교지 인도로 돌아갔으나 간질이 재발되어 1867년 다시 귀국, 파리에서 병을 치료한 후 파리 외방전교회와 신학교를 위해 활동하였다. 1871년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보불전쟁(普佛戰爭)이 일어나 신학교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캐나다와 미주지역을 방문, 기부금을 모집하는 한편 캐나다와 북미(北美)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활동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고 이듬해 한국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보낸 기초 자료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의 비망기, 보고 및 편지들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사의 편찬에 착수, 2년 후인 1874년 상 · 하 2권으로 된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를 출판하였다. 그 후 파리 외방전교회사의 편찬에 착수, 자료 수집차 외방전교회 관할의 각 포교지를 방문하기 위해 1877년 2월 파리를 떠나 일본(日本), 만주(滿洲)를 방문하였으나 한국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북경(北京)에서 오래 체류한 뒤 다시 코친차이나, 홍콩을 거쳐 안남(安南)의 케소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케소에서 이질에 걸려 1878년 4월 25일 사망, 케소에 안장되었다. 평소 시와 철학에 관심이 깊어 몇 편의 철학 논문을 남겼고 선교사로 떠나가는 동료신부들을 격려하는 시 《선교사의 출발에 붙이는 노래》(Chant du depart des missionnaires)에는 작곡가인 친구 구노(Gounod)가 곡(曲)을 붙이기도 하였다. 달레의 사망으로 편찬이 중단되었던 《파리외방전교회사》(Histoire generale de la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는 1894년 동회원 로네(Adrien Launey)에 의해 완성되어 전 3권으로 간행되었다. [2009.04.03 니나]    (자료 출처- cafe.daum.net/proviforum/Cmi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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