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몽셀미셀 수도원 (Le Mont Saint-Michel )

성지순례/서유럽(프랑스)

by baesungsoo 2014. 1. 1. 11:10

본문

몽셀미셀 수도원          (이하 출처-http://kr.blog.yahoo.com/lee1004gg) 


1979년에 지정된 유적. 몽셸미셸 섬에 있는 수도원 및 마을과 그 섬이 있는 만이 지정되었다. 이 유적은 '서부의 驚異' 라고 불리는 노르망디와 브리타니 사이의 해류가 드나드는 작은 섬으로 성 미카엘 대천사에 헌정된 고딕양식의 베네딕트 수도원과 수도원의 보호아래 성장한 마을이 주 대상이다.  몽생미셸 수도원은 78.6m 높이의 화강암 바위산에 자리잡고있다.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1847년에 몽생미셸의 위험한 길에 도전하고서 이렇게 기록했다. "... 우리 눈 앞에는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치솟아 있었다. 바윗덩어리 아래쪽은 총구멍 뚫린 성벽에 둘러싸였고, 꼭대기에는 성당이 우러러 보였다. 성당의 탑들은 너무나 견고했으며, 유달리 높은 종탑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었다." 이런 풍경은 1세기 반이나 지난 오믈날에도 전혀 변함이 없다. "프랑스에서 몽생미셸이 차지하는 위치는 이집트에서 피라미드가 차지하는 위치와 같다.

 

몽셀미셀 수도원

 

몽셀미셀 수도원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2020386)

 

몽셀미셀 수도원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2020386)

 

몽셀미셀 수도원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2020386)

 

몽셀미셀 수도원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2020386)

 

몽셀미셀 수도원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2020386)

 

몽셀미셀 수도원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2020386)

 

몽셀미셀 수도원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2020386)

 

몽셀미셀 수도원

 

몽셀미셀 수도원

 

몽셀미셀 수도원  

 

몽셀미셀 수도원

 

몽셀미셀 수도원

 

몽셀미셀 수도원

 

몽셀미셀 수도원

 

 

몽셀미셀 수도원 첨탑  

 

수도원 성당

 

가브리엘 탑

 

 

영국과의 전쟁이 있을 때, 몽생미셸은 전략상 중요한 거점으로 요새화되었다. 육지를 향해 섬 주위를 에워싼 성벽 곳곳에 방어용 탑을 쌓았다. 사진의 가브리엘 탑은 16세기에 서쪽에 증축한 것이다   

 

가브리엘 탑 

 

수도원 오르는 골목

수도원 오르는 계단 

 

 수도원 정문 

 

출입문 

 

 

 

수도원 오르는 길목 

 

수도원 오르는 계단  

 

13세기 대형 출입문

 

나오는 문  

 

성당 내부

 

성당내부

 

제대 

 

내부

 

수도원 내부 성당              (출처- http://blog.naver.com/wow823)

 

 

스테인드글라스

 

수도원 내부 성당 

 

내부 방  

 

 라 메르베유 회랑


고딕 양식의 '라 메르베유'(La Merveille, 경이로움)는 교회 본당 북쪽에 이어 붙여지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하나둘씩 건물을 완성 해 가는 동안에 건축 양식이나 기법 등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지은 건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라 메르베유 회랑


수도사들이 사색과 명상을 즐기던 '라 메르베유'의 회랑으로 날씨에 상관없이 본당과 숙소를 오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라 메르베유 회랑

 

라 메르베유 회랑

 

라 메르베유 회랑 

 

 라 메르베유 회랑

 

라 메르베유 회랑 

 

 

 The Guests' Room               (출처- http://blog.naver.com/wow823)


성지 순례를 온 최고의 귀빈, 즉 기사와 귀족들이 머물렀던 방이다. 연회장이지만 중세에는 방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취침실로도 쓰였다. 안쪽에 있는 두 칸짜리 화덕은 부엌으로 쓰던 곳인데 양탄자를 걸어 연회실과 차단해서 사용했다.

 

The Guests' Room

 

성당 지하 예배소, Saint -Martin's crypt

 

기중기, 식품저장창고로 연결되어있다. 

 

11세기 피에타 상

 

 

 

 

The Knights' Room(기사의 방)


원래는 13세기에 'scriptorium(중세 수도원의 기록, 필사실)' 로 쓰였던 곳으로 둥글고 굵은 가로보와 섬세한 조각이 새겨진 대접받침은 고딕양식의 걸작이다.

 

 

 성 미카엘이 오베르 주교에게 계시를 내리는 모습이 벽화로 조각      


708년 아브랑슈 일대를 관장하던 오베르 주교의 꿈에 대천사 미카엘이 나타나 몽똥브(Mont -Tomb, 무덤 산, 몽생미셸의 옛 지명)에 수도원을 지으라는 계시를 내린다.  계속해서 꿈속의 계시를 무시하던 오베르 주교에게 세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 미카엘은 주교의 한쪽 머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구멍을 낸다. 그때서야 놀란 오베르 주교는 계시를 받아들여 몽생미셸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 미카엘              (출처- http://blog.naver.com/wow823)

 

성 미카엘 

 

성 미카엘


'성 미카엘 전서'에 나오는 미카엘 대천사는 악마를 상징하는 용과 싸우고, 한손엔 칼을 다른 한손엔 저울을 들고  최후의 심판 때는 영혼의 무게를 재는 일을 한다. 미카엘은 히브리어로 '하느님과 같은 자는 누군가' 라는 뜻이다. 

 

성 미카엘, 생 미셀 상               (출처- http://blog.naver.com/wow823)

 

옛날 이 바위산이 아직 육지와 이어지고 드넓은 숲에 둘러싸여 있어 몽통브(묘지산)라 불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전설에 따르면, 708년에 아브랑슈의 주교 오베르의 꿈에 대천사 미카엘이 나타나, 몽통브의 바위산 꼭대기에 대천사를 모시는 성당을 지으라고 명했다. 몽통브에 작은 원형 예배당을 지은 오베르는 역시 대천사 미카엘이 강림한 땅인 이탈리아의 몬테가르가노에 사람을 보내, 대천사의 유물(붉은 옷 끝자락과 대리석 제단 한 조각)을 얻어 오게 했다. 이 심부름꾼이 몬테가르가노에 간 사이 몽통브 주변 바다에 격변이 일어나 바위산이 순식간에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이 되었다. 몽생미셸 만도 이 때 생겼다. 이 만은 조수 간만의 차가 대단히 크며, 간만 때는 물살이 아주 빨라서 순례하러 찾아온 사람이 밀물에 휩쓸려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래서 이 바위산을 '해난의 성미카엘(생미셸)'이라 불렀다. 현재 아브랑슈에 전하는 주교 오베르의 두개골에는 이마에 대천사 미카엘의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다. 오베르가 대천사의 출현에 의문을 품자 3번이나 꿈 속에 나타난 대천사는 세 번째에는 아예 손가락을 오베르의 이마에 얹어 기적이 나타난 증거로 남겼다. 그 뒤에도 대천사 미카엘은 자주 이 바위산에 내려와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다고 한다.

 

성 미카엘 상

 

수도원 내부 골목 

 

 역사박물관     (출처- http://weekly.encyber.com) 

 

10세기때의 수도원    (출처- http://weekly.encyber.com) 

 

노르망디공 리처드 1세가 이 바위산에 베네딕투스회 수도원을 지은 것은 966년의 일이다. 그 뒤 수사들은 수세기에 걸쳐 수도원을 짓고 확장했으며, 꼭대기에 있는 부속 성당의 종탑을 정점으로, 위고가 말한 '바다 위의 피라미드'를 완성시켰다. 10세기 말에 오베르는 대천사 미카엘을 모신 예배당을, 둥근 천장을 갖춘 지하 예배당으로 개축했다. 이것이 바위산 서쪽에 있는 노트르담수테르(지하의 성모예배당)이다. 그 옆에는 역시 10세기에 만든 산책 장소가 있다. 터널처럼 생긴 이 갤러리는 수사들이 명상하던 곳이다. 

 

11-12세기 때 수도원 

 

11세기에는 생마르탱 지하 예배당(남쪽)과 30개의 양초 성모상이 있는 지하 예배당(북쪽), 큰 기둥이 있는 지하 예배당(동쪽)을 만들어 바위산 꼭대기의 높이를 조정했고, 그 위에 새로운 성당을 지었다. 바위산 꼭대기에 솟아 있는 성당은 신랑의 옆면 벽이 자주 무너졌는데, 1184년에 수도원장 로베르 드 토리니가 주도한 개축공사로 튼튼해졌다. 토리니는 노르망디공의 핏줄인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몽생미셸 수도원을 크게 발전시켰다. 1066년에 노르망디공 기욤(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후, 이 바위산 수도원은 노르망디 공국은 물론이고, 잉글랜드로도 영지를 넓혀 커다란 세력을 형성했다. 이처럼 재력을 바탕으로 박학다식하고 책을 좋아했던 토리니 원장이 있었기에, 이 수도원은 그리스도교 학문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도서관에는 수많은 필사본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13세기 초에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으로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 공국을 점령했을 때, 공국의 지배 아래 있던 몽생미셸 수도원은 포위되어 불에 탔다. 그 뒤 프랑스령이 된 몽생미셸은 국왕의 원조를 받아 다시 부흥했다. 1211년에 시작된 북쪽 부분의 확장 공사로 나중에 '라메르베유(경이로운 건축)'라고 하는 우아하고 웅장한 고딕 건물이 탄생했다. 3층 건물인 '라메르베유'는 1층이 창고와 순례자 숙박소, 2층이 [기사의 방]과 귀족실, 꼭대기는 수사들의 대식당과 회랑 용도로 지었다. 맨 나중에 완성한 회랑의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주랑 형식은 고딕 양식의 극치이다.  바위산 북쪽 비탈길에 지은 '라메르베유'의 [기사의 방]은 야자수처럼 생긴 많은 리브를 공들여 다듬은 중후한 원주가 받치고 있다. 1469년에 몽생미셸을 찾은 루이 11세는 잉글랜드군의 습격을 격퇴시킨 수도원의 공적을 기려, 이 성지의 이름을 내건 기사단을 창설했다. 그 뒤 기록보존소였던 이 방을 [기사의 방]이라고 불렀다.

 

17-18세기 때 수도원

 

수도원이 요새로 변한 것은 몽생미셸이 새로운 군사적 긴장 관계에 둘러싸인 14세기부터이다. 백년 전쟁이 한창이던 1356년에 영국 군대는 몽생미셸 부근의 무인도 통블렌 섬을 점령하고, 바위산에 있는 수도원에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 그렇지만 수도원은 프랑스 국왕의 지원을 받아 침략을 면했고, 1450년에 영국군은 결국 통블렌 섬에서 물러났다. 그 뒤 몽생미셸은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상징처럼 되었다. 1022년에 착공한 수도원 성당은 증개축을 거듭하다가 마지막으로 15세기에 후기 고딕 양식인 플랑부아양 양식의 내진을 완성했다. 그러나 16세기부터 수도원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791년에는 혁명군이 몽생미셸에서 수사들을 쫓아내고, 바다에 있는 이 바위산을 감옥으로 사용했다. 1863년에 결국 대천사 미카엘의 수도원은 폐쇄되었다. 이 수도원은 지금 기도와 명상 생활로 부흥하고 있다.  

 

 20세기 현재 수도원 

 

19세기 말에 몽생미셸의 바위산과 육지를 연결하기 위해 몽생미셸 만에 긴 방파제를 쌓았다. 또한 만조 때 바닷물 역류와 논밭 침수를 막으려고 만으로 흘러드는 쿠에농 강과 셀륀 강의 수로를 막았다. 만조 때 3번에 1번 꼴로 바닷물이 몽생미셸의 바위산을 완전히 에워싼다. 이로 인해 바닷물이 날라온 모래와 진?이 쌓이는 바람에 바위산 주변의 해저가 100년 동안 3m나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90년에 몽생미셸 만 가운데에 2개의 인공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것이 썰물 때 빨대 역할을 해, 만 안에 괴어 있던 모래를 만 밖으로 단숨에 밀어낸다. 이리하여 육지와 연결된 대천사 미카엘의 성스런 요새는 준엄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계속 간직하고 있다.  

 

수도원 모형도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