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사 오웬 (Clement Carrington Owen, 오원, 1867.7.19.- 1909.4.3.)
오웬 (Clement Carrington Owen)은 1867년 7월 19일 미국 버지니아 주(Black Walnut, VA)에서 태어났다. 햄튼 시드니 대학(Hampden-Sydney College, VA)을 1886년에 졸업하고 스코틀랜드 뉴 대학(New College), 유니온 신학교(UTS, VA)를 1894년에 졸업하고,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에서 의학을 전공했다(1896년). 그는 1894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1897년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8년 11월 5일에 입국했다. 오웬은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울 겨를도 없이 서둘러 목포로 내려가 유진 벨이 개설한 목포 선교부에 합류하여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면서 의료 선교를 하며 교회에서는 성경 공부를 가르쳤다. 1900년 12월 12일에 북장로회 소속 한국 선교사이며 여자 의사인 조지아나(Georgiana Whiting) 양과 결혼하였는데, 언더우드 목사 사택에서 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 후 그들은 목포에 와서 진료소를 설치하여 의료 사업을 통하여 전도에 힘썼고 유진 벨과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 오웬 선교사는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였으므로 이 두 분야에 시간을 쪼개어 일하다 보니 과로가 겹치고, 기후나 풍토에 적응하기가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그리하여 부부가 함께 몸이 쇠약해지고 급기야 병환이 심해져서 치료를 받기 위하여 일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에 다시 입국한 그들은 1904년 12월에 유진 벨 가정과 함께 광주로 가서 의료와 전도 두 분야에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의 선교 지역은 화순, 보성, 장흥, 순천 등 13개 군이었다고 한다. 주로 강진에서 순천과 여수, 구례에 이르는 전남 동부지역에 복음전파를 위해 애를 썼다. 그를 통하여 광주 송정리교회(1901), 해남 선두교회(1902), 광주 양림교회(1904) 등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오웬은 순회 선교를 나가면 한 달씩이나 걸렸다고 한다. 때로는 200명 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430명에게 학습(교리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1909년 3월~4월 초에 광주 남쪽 280리 지역의 순회 전도를 하던 중 과로로 인하여 쓰러졌다. 그는 이 마지막 전도 여행을 떠날 때에 몹시 지쳐 있었고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다. 더욱이 날씨도 차고 일기는 불순하였다. 그가 이런 악천후 속에서도 기어이 전도 여행에 나선 것은 이미 약속한 지방의 성경공부가 누적된 업무로 말미암아 중지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충분히 준비된 약품도, 적당한 영양 식품도 갖지 않고 얼굴에 북풍이 부딪히는 가마 속에 누구도 모르는 옆구리의 심한 통증을 참고 쭈그리고 앉아서 돌아다닌 것이 이 불행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그는 광주에서 280리쯤 떨어진 장흥 어느 시골에서 열흘 동안 순회 전도하던 중이었다. 3월 28일 주일날 아침에 갑자기 몰아닥친 한파로 병을 얻어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하루 종일, 그리고 한밤을 고열로 시달려야 했다. 이튿날 점심때에야 몇 명의 신자들이 알고 달려와 가마에 태워 산등성을 세 개나 넘어 육칠십 리 길인 장흥읍까지 왔다. 그곳 여관 방에서 뜬 눈으로 또 한 밤을 새우고 이른 새벽에 광주로 떠나려했으나 가마꾼들을 구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새벽에 떠나지 못하고 늦은 아침에 떠나 부지런히 뛰었으나 땅거미가 질 때까지 130리를 올 수밖에 없었다. 오웬의 기력은 급히 떨어지고 있어서 지체할 수도 없었다. 새 가마꾼을 사서 남은 밤길 70리를 재촉하여 이튿날 수요일 새벽 2시에 광주에 도착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정성어린 간호와 의술로 목요일, 금요일에는 병세가 좀 좋아지는 듯하더니 토요일 아침에 상태가 악화되어 윌슨 의사는 놀라 목포의 포사이트 의사를 불러 협의하기로 하였다. 오웬은 이 때에 이미 의식이 없었고 임종을 예고하고 있었다. 오웬은 급성 폐렴으로 1909년 4월 3일 토요일 저녁 10시 45분에 숨을 거두었다. 오웬 선교사의 장례는 5일장으로 4월 8일(목)에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그를 따랐던 광주 북문 안교회 교인들과 80리 심지어 120리 밖에서까지 걸어서 문상온 지방 교회의 교인들, 동료 선교사들, 그리고 광주 숭일학교,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그의 시신은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광주 북문안교회와 두 남녀학교, 광주진료소 등 여러 정든 곳과 그가 살던 집이 내려다보이는 선교부 동산 위에 안장되었다.
오웬 목사의 부인 조지아나(Georgiana Whiting, MD)는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서 1869년 9월 12일에 태어나, 노스필드 대학(Northfield Sem. Mass)과 필라델피아 여자의과대학(Womens’ Medical College, Philadelphia)을 졸업하였고 사범 교육도 받은 여의사였다. 그는 1895년 1월에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 해 4월 7일에 입국하였다. 1900년에 오웬과 결혼하여 1901년 10월 3일에 첫딸 메리(Mary Virginia)를 낳았고 1903년, 1905년에 두 자녀를 더 낳았으며, 오웬 목사가 죽은 다음 달인 1909년 5월 13일에 마지막 유복자를 낳았다. 그녀는 1923년까지 광주에서 의료선교사로 봉사하다가 은퇴 귀국하여, 1952년 1월 24일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출처 : 크리스찬저널(https://www.kcjlogos.org)

오원 선교사와 부인 조지아나(Georgiana Whiting, MD, 1869.9.12.- 1952.1.24.)
C. C. 오웬(Owen, Clement Carrington, 한국명: 吳基元)은 1867년 7월 19일 미국 버지니아 주 블랙 월넛트(Black Walnut)에서 출생하였다. 1886년 햄덴시드니(Hampden Sydney)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유니언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전공하고 스코틀랜드(Edinburgh)에 유학하였다. 해외 선교지에서 의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897년 5월 버지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898년 11월 6일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목포선교부에 부임하였다. 1899년 목포진료소를 개설하여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 의료 진료소를 운영했다. 1900년 12월 12일 미국 북장로회 화이팅(Georgiana Whitting) 의료선교사와 서울에서 결혼하고 목포에 합류하여 호남지역 선교사업에 힘썼다. 목포선교부는 당초(1896) 선교사 연례회에서 전라남도의 선교 거점으로 나주에 설치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나주는 육로가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 영산강 하구에 연하여 수운(水運)을 통한 각종 산물의 집하장으로 서남 해안 교통의 중심지 기능을 담당하였다. 나주는 풍요로운 농촌으로 인근에 영산창(榮山倉)이 있어 이곳에서 세곡을 서울까지 운송하였다. 그러나 1897년 10월 1일 목포항(港)이 개설되면서 나주의 교통 입지가 달라졌다. 목포는 해상과 육지를 연결하는 중요 관문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부의 중심 위치를 목포로 변경하여 부지를 매입하고 1898년 가을, 벨(Bell, Eugene, 裵裕祉) 선교사가 서울에서 목포로 이주하고 뒤이어 오웬 선교사가 부임하므로 목포선교부가 조직되었다. 오웬은 선교 초기 의사와 목사로서 의료사업과 전도 사업을 병행하였다. 그 후 병원에서 자유로운 복음전파가 가능하게 되자 의료 활동을 중단하고 전도 사업에 치중하였다. 그는 복음전도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였다. 그의 한국 선교 업적은 의사로서 보다는 목사로서 더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생명의 빛으로 영적인 어두움을 밝혀야 한다.”는 그의 열망을 표현한 1899년 가을에 쓴 편지 하나가 있다. 이 무렵 호남지방에는 미국산 석유가 처음으로 보급되어 “등불‘을 키게 되었는데 오웬은 이 등불과 비유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리 빛의 나라(미국)가 이 어둠의 나라(한국)를 비추고 있다. 밤이 밀려 들 때 밤 그림자를 통해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면 불빛들이 별들처럼 어둠을 비추고 있다. 이 불빛의 출처는 우리의 모국이다. 왜냐하면 등불을 밝히고 있는 것은 미국산 석유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가 한국의 어둠을 밝히는 것처럼 생명의 빛으로 영적인 어둠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1904년 봄,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열린 연례회의는 광주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오웬 선교사는 벨 선교사와 함께 1904년 12월 19일 광주로 이사하여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양림동 언덕에 선교 기지를 개척하였다. 그는 호남지방 전도 사업에 헌신하면서 1900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9회 선교사공의회 회장으로 선임(언더우드 후임)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합동공의회시대(1901~1906)에는 광주, 해남, 완도, 보성, 나주, 고흥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예를 들면 1901년 광주 송정리(松汀里)교회를 벨과 협력하여 설립하고, 1902년 해남 선두(先頭)교회를 설립하였다. 1904년 12월 19일 목포에서 광주로 이주하였으며 12월 25일 광주 양림(楊林)교회 설립에 벨과 협력하였다. 그리고 완도 관산(冠山)교회도 설립했다. 1905년 나주 방산(芳山)교회, 보성 무만(武萬), 신천(新泉)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06년 고흥 옥하(玉下)교회를 설립했다. 이밖에 전남 각 지역을 순회하며 프레스톤(Preston, J. F., 邊約翰), 맥컬리(McCallie, H. D., 孟顯理), 코잇(Coit, R. T., 高羅福) 등과 나주 광암(廣岩), 장흥 진목(眞木), 순천 평촌(平村)교회에서 상계(相繼)하여 시무하였다. 독노회(獨老會) 기간에 해당하는 1907년부터 그가 순직한 1909년까지에는 화순, 보성, 광양, 나주 지방 등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여러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7년 화순읍(和順邑)교회 설립을 비롯하여 보성 운림(雲林)교회도 설립하였다. 1908년 광양읍(光陽邑)교회, 보성 양동(陽洞)교회와, 나주 내산(內山)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전남지역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광주 중흥(中興)교회에서 벨 선교사와, 장흥 삭금(朔金)교회에서 니스벳(Nisbet, 柳西伯)과, 나주 서문(西門)교회에서 탈마지(Talmage, J. V., 打馬子)와, 나주 상재(上材)교회에서 뉴랜드(Newland, L. T., 南大理)선교사 등과 각각 상계하여 시무한바 있다. (자료출처- http://www.yanghwajin.co.kr, 호남신학대학교 차종순 총장)

오웬 선교사 가족 (1902년, 오웬 부부와 첫째 딸 메리)
오웬 선교사는 목사이자 의사로서 1898년 11월 6일에 목포 선교 스테이션에서 간이 진료소 및 약방을 열고 전인적인 의료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미 북장로교 소속의 조지아나 엠마 휘팅(Georgiana Emma Whiting) 의사 선교사와 교제를 시작하였다. 이 둘은 1900년 여름에 군산 선교 스테이션을 방문하여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형님 드류(유대모) 선교사의 가족과 캠핑도 하고, 드류 선교사의 배를 타고 선상 크루즈도 즐기고, 드류의 집에서 약혼식을 가졌다. 1900년 12월 12일 결혼한 오웬 선교사 부부는 1901년 10월 3일에 첫째 딸인 메리 버지니아 오웬(Mary Virginia Owen)을 목포에서 낳았다. 위의 사진은 1902년에 촬영한 것으로 필자가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오웬 선교사는 메리에 이어, 루스(Ruth, 1903년 12월 20일 목포), 도로시(Dorothy, 1905년 11월 4일 광주), 프랜체스 캐링턴(Frances Carrington, 1909년 5월 13일 광주) 등 4명의 딸을 두었다. 막내딸은 오웬 선교사의 사망 이후 유복자로 태어났다. (출처 : 교회와신앙(https://www.amennews.com)

오웬 선교사의 첫째 딸인 메리 버지니아 오웬
메리 버지니아 오웬은 부친인 오웬 선교사가 1909년 4월 3일에 급성 폐렴으로 죽음을 맞이하던 전후 상황을 가장 또렷이 기억했다. 그만큼 상실의 충격과 아픔이 평생 고통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메리 버지니아 오웬은 1995년 3월 9일에 93세의 나이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으며, 사우스 다코타주 레피드 시티에 있는 마운틴 뷰 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교회와신앙(https://www.amennews.com)
< 오웬 기념각(1911년)>

오웬 기념각
오웬 기념각 건립은 오웬이 죽기 전부터 계획했던 것이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여동생과 숙부(Mr. Bailey Owen)에게 보낸 편지에 “할아버지의 기념 병원”을 지으려 했으나 지금은 병원보다도 성경을 가르칠 큰 건물을 “할아버지 기념관”으로 짓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오웬 의사는 생각한 것이다. 성경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교회는 비좁고 더욱이 200리, 300리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 유숙할 방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돈이 넉넉히 준비된다면 지하실에 기숙사를 갖고 있는 훌륭한 벽돌 건물로서 많은 교실과 강당을 갖춘 집을 짓는 것이고, 여의치 못하면 목조 건물에 흙벽으로라도 기필코 짓겠다는 호소의 편지였다. 그러나 이 편지를 보낸 지 두 달도 채 못 되어 답장도 받아보지 못한 채 그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후 미국의 가족들과 친지들이 그의 한국 선교에서의 눈부신 활동과 성경공부를 가르칠 건물을 짓겠다던 그의 뜻을 기념하여 「오웬 기념각」을 세운 것이다. 기념관 입구 문지방에 '윌리암 오웬과 클레멘트 오웬을 기념하여'라는 표찰이 붙어 있는데 윌리암은 그의 할아버지이다. 이 기념각이 지어진 것은 1911년 경으로 추정되나 확실한 고증 자료를 아직은 얻지 못했다고한다. 오원(吳元)은 오웬의 한국식 이름이다.
(출처 : 크리스찬저널(https://www.kcjlogos.org)
오웬기념각
광주기독병원 기독간호대학 안에 있는 오웬기념각은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전라남도 최초 선교사였던 클레먼트 C.오웬(한국명 오기원)과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을 기념하기 위해 1914년에 세운 2층 건물이다. 회색 벽돌로 지은 이 건물은 객석에서 설교단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1층 바닥과 2층 발코니를 모서리의 설교단을 향해 경사지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 건물은 주로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크고 작은 문화행사가 열려 문화운동을 파급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는 광주광역시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웬기념각은 광주양림교회(통합) 옆에 위치해있다.

오웬기념각 (출처 : 고신뉴스 KNC(http://www.kosinnews.com)

기독간호대학
오웬 선교사의 뒤를 이은 쉐핑(서서평) 선교사가 이 건물에서 조선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이일성경학교를 시작했고 간호인을 양성하는 전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이곳은 한국 의료선교역사의 큰 꿈이 시작된 요람이기도 하다. 그 건물을 지금은 기독간호대학교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 : 고신뉴스 KNC(http://www.kosinnews.com)
1915년 오웬기념각(기념각교회) (출처- 광주제일교회 100년사)
오웬기념각에서 주일예배를 마친 배유지 목사와 금정교인들
오웬기념각에 모인 주일학생들
1921년 오웬기념각 미 남장로교 선교사 연례대회
오웬기념각 설계자 서로득 선교사 부부
기독간호대학 정원안에 위치한 오웬각
정문
오웬기념각 대리석 기념비
오웬기념각 대리석 기념비
오웬각(우)와 광주양림교회(통합, 좌)
기독간호대학 안의 오웬각
광주양림교회(통합) 편에서 본 오웬각
오웬각 후문
후문 기념비
광주양림교회 교육관 편에서 본 오웬각
오웬각 내부, 현재는 간호대학 예배 장소(입학식 등)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 후면
객석에서 설교단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1층 바닥과 2층 발코니를 모서리의 설교단을 향해 경사지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오웬 선교사 묘원>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광주 호남신학교)

오웬 선교사 (1867- 1909)

오웬 선교사(앞), 유진벨 선교사(뒤)
오웬과 유진벨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광주 지역에서 함께 사역하였다. 광주 최초의 교회인 현 광주제일교회의 연혁에 보면 1904년 12월 25일 광주 양림동 벨 선교사 주택에서 오웬 선교사 가족과 한국인들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광주선교부와 광주교회(현 광주제일교회)가 설립됐다. 전남 내륙지방 선교의 거점이었던 이 교회는 그 후 교인이 증가하자 북문안으로 이동하여 예배를 드렸다. 1909년 4월 오웬선교사는 장흥의 한 시골에서 선교활동 중 갑자기 고혈로 쓰러져 급거 광주에 도착하였으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양림동산에 안장됐다. 또한 벨 선교사 부인 마가렛트 선교사가 1919년 3월 26일 경기도 병점 건널목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양림동산에 안장했으며, 벨 선교사도 노환으로 1925년 9월 삶을 마감하고 양림동산에 안장됐다. 양림동산에는 22명의 선교사들이 영면하고 있다.

오웬 선교사(앞), 유진벨 선교사(뒤)

광주 선교사 묘지에 최초로 안장된 오웬 선교사
광주 외국인선교사 묘지는 남구 양림동 108번지 호남신학대학 교내 언덕에 위치하여 있다. 여기에는 1909년 광주에서 최초로 순직한 오웬 선교사를 비롯하여 모두 26기의 외국인 선교사 또는 그 가족들의 묘가 있다. 미국 남장로회 동료 선교사 니스벳(Nisbet, Anabel M.)은 오웬 선교사의 역동적인 선교 활동의 시작에 대하여 “그의 목포선교는 오웬이 미국 북장로희 의료선교사로 제일 경험이 많고 유능한 화이팅과 1900년 결혼함으로 인하여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의사이면서 목사로 지칠 줄 모르는 순회설교자였다. 그는 삶의 마지막 해에도 13개 군의 선교지역을 담당하여 순회 전도하면서 한 달 이상을 집을 떠나 전도여행을 계속했다.”라고 하였다. 그는 200명 이상에게 세례를 베풀고, 430명의 학습교인을 세웠다. 그가 별세하기 몇 일전 그의 어린 딸은 아빠는 왜? 우리 집에 계시지 않느냐고 물을 정도였다.”라고 하였다. 오웬은 1909년 3월 22일 광주를 출발하여 화순, 남평을 지나 장흥에 도착했다. 그러나 주일날 아침부터 뜻하지 않게 격렬한 오한으로 떨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장흥의 교우들은 가마를 준비하여 급히 광주로 향했다. 오한과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그는 신음했다. 가마꾼들은 빠른 걸음을 재촉하였으나 광주까지 이송하는 기간이 3일이나 걸려 수요일 새벽 2시에 광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윌슨(Wilson, R. M., 禹越淳) 의사의 치료와, 목포 포사이드(Forsythe, W. H., 保衛廉) 의사에게 전보(電報)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그가 도착하기 전 4월 3일 밤 10시 45분 급성 폐렴으로 별세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장례예배는 1909년 4월 6일 광주선교부 묘지에서 프레스톤(Preston, 邊約翰)목사 집례로 거행되었으며 광주선교사 묘지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남편과 사별한 부인(Georgiana W.)은 네 딸을 데리고 귀국하였으며 1952년 1월 24일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Denver)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하였다. 양림동 67-1번지에는 현재 광주 유형 문화재 26호로 지정되어있는 오웬 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은 그 가족과 친지들이 낸 성금으로 예배당 및 집회실 형태로 1914년 지은 건물이다. 정방형의 르네상스식 2층 건물로 당시에는 광주 숭일학교 예배당 겸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기독간호대학 강당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출처- http://www.yanghwajin.co.kr, 호남신학대학교 차종순 총장)

목포에 전라남도 최초의 진료소를 개설한 C. C. 오웬
오웬의 장례식은 4월 6일 화요일에 프레스톤의 집례 아래 치러졌으며, 그는 광주 양림산 언덕 선교사 묘원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오웬을 ‘오 목사’라 불렀고, 그의 묘비에도‘님’이란 존칭 없이 ‘오목사’라고만 새겨져 있다. 이처럼 그는 인생의 황금기에 조선에 와서 이 땅 백성들에게 친숙하고 가깝게 다가서며 예수의 좋은 친구가 되어 섬기다 42세라는 너무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이후 양림산 언덕에는 23인의 선교사가 잠들어 있다. 그의 부인 휘팅 선교사는 광주에 남아 네 딸을 키우면서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신입 선교사들의 정착을 도우며 한국어를 가르쳤다고 하니 이 가문의 한국 사랑이 대단하다.
(출처 : 고신뉴스 KNC(http://www.kosinnews.com)

오웬 선교사
<광주제일교회, 옛 광주북문안교회, 1922년> 1916년- 1918년 이기풍 목사 시무
광주양림교회(기장, 1924), 양림교회(통합, 1953년), 양림교회(합동,1954년) 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광주제일교회 (옛 광주북문안교회)
1904년 12월 25일 광주 양림동 유진 벨 선교사(배유지 선교사) 주택에서 오웬 선교사 가족과 한국인들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광주선교부와 광주교회(현 광주제일교회)가 설립됐다. 전남 내륙지방 선교의 거점이었던 이 교회는 그 후 교인이 증가하자 북문안으로 이동하여 예배를 드렸다. 1909년 4월 오웬선교사는 장흥의 한 시골에서 선교활동 중 갑자기 고혈로 쓰러져 급거 광주에 도착하였으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양림동산에 안장됐다. 또한 벨 선교사 부인 마가렛트 선교사가 1919년 3월 26일 경기도 병점 건널목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양림동산에 안장했으며, 벨 선교사도 노환으로 1925년 9월 삶을 마감하고 양림동산에 안장됐다. 양림동산에는 22명의 선교사들이 영면하고 있다. 광주교회는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주동했던 관계로 북문안교회 자리를 일제에 내어주고 금동으로 이동하면서 금정교회라 불렀다. 계속 교인이 증가하자 1922년 북문밖교회(광주중앙교회)와 1924년 양림교회(기장)로 각각 분립했다. 광주 3․1운동은 재일 유학생 최원순, 정광호 등이 귀국하여 광주에서 최흥종, 김철 등을 만나 일본 동경 2․8독립운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광주에서 거사 준비에 임하였다. 이들은 금정교회 장로이며 숭일학교 학감인 남궁혁 가정에 모여 인원동원, 독립선언서, 태극기 등을 분담하여 준비한 후 3월 10일 금정교회 교인을 비롯해서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일반 시민 1천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이기풍 목사는 1916년 제2대 목사로 취임하고, 1919년 사임했으며 ,1921년 전남노회 제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글 출처-http://blog.naver.com/kjyoun24/60030255504)
(광주제일교회 연혁 (출처- http://www.first.or.kr/, 교회 홈페이지)
1904년 12월 25일 ;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배유지(Rev.Eugene Bell) 목사가 양림리 자택에서 오원(Dr.C.C.Owen)선교사, 김윤수 집사 등과 함게 광주교회를 시작하다.
1906년 가을 ; 북문 안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초대 당회장으로 배유지 목사가 취임하다(초기에는 광주교회라고 부르다가 후에 광주북문안교회로 부르다)
1912년 봄 ; 김윤수, 최흥종 두 분이 초대 장로로 장립을 받다.
1914년 9월 6일 ; 본교회 당회장 배유지 목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회총회장으로 선출되다.
1916년 8월25일 ; 이기풍 목사가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하다.
1919년 3월 10일 ; 본교회 교인들이 광주의 3.1독립운동을 주도아혀 많은 성도들이 옥고를 치르다. 그 결과로 국유지이던 교회 부지를 몰수당하다.
1919년 11월 ; 당시 남문 밖인 금정 101번지에 부지를 구입하여 북문안에 있던 예배당을 옮겨 짓다.(이 때부터 남문밖교회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공식 명칭은 금정교회였다.
1920년 9월4일 ; 제6회 전남노회에서 북문밖교회(현,광주중앙교회) 분립을 허락하다.(1917년부터 교인 일부가 기도처로 모였음)
1921년 6월 29일 ; 남궁혁 목사가 제3대 담임 목사로 취임하다.
1921년 9월 4일 ; 본교회 당회장 이기풍목사가 제10회 총회장으로 피선되다. (순천교회 시무 때,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피선)
1922년 4월 20일 ; 김창국 목사가 제4대 담임목사로 취임하다.
1922년 10월3일 ; 본 교회에서 부인조력회를 창립하다.(서서평 선교사 주도)
1924년 9월 30일 ; 최흥종 목사가 제5대 담임목사로 취임하다.
제14회 임시 전남노회에서 현 광주양림교회(기장)의 분립을 허락하다.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비 (1904년- 2004년)

광주제일교회 100년사 (1904년- 2004년)

100년사, 제2대 담임목사 이기풍

100년사, 배유지 목사, 오웬 선교사(1904년)

100년사, 제2대 담임목사 이기풍(1916년)

이기풍 목사 취임과 사역

최초의 한국인 7인 목사 (제2대 담임자 이기풍 목사, 아래 좌에서 2번째)

광주제일교회 제일동산의 이기품 목사, 윤함애 사모 부부 묘
<광주 양림교회, 기장, 1924년>
광주 양림교회(1904년)는 광주제일교회(1922년), 기장 양림교회(1924년), 통합 양림교회(1953년),
합동 양림교회(1954년) 4분립 되어있다. 4 교회 모두 제2대 담임자는 이기풍 목사(1916년- 1919년)이다.>

광주 양림교회 (기장 측, 1924년)
(교회연혁)
1904년 12월 21일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과 오웬 가족이 광주 선교부로 이사하다.
1904년 12월 25일 오전 11시 크리스마스 축하예배에 광주 시민 200여명이 참석하였고 방안에 40여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다. 이 날이 양림교회의 최초의 예배였다. 유진 벨 목사는 양림교회의 설립자이며 동시에 제1대 당회장이다.
1905년 03월 예배참석 인원이 20명에서 200명 사이였고 4명이 세례 신청(특별반에서 공부)하다.
1905년 10월 스트레퍼 여선교사는 주일 오전 여자 성경공부반 가르쳤다.
1905년 10월 주일 아침 예배에 250명 참석하였다.(평균 50명 출석) 35명이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표명하다.
1905년 11월 20일 놀란도 역시 광주의 양림리 교회 근처로 와서 벨 목사의 임시주택을 진료소로 개조하여 첫 진료를 시작하였는데 광주의 의료구원의 산실인 광주기독병원의 시작이 되었다.
1906년 가을 벨 목사 임시사택에서 드리던 예배에서 광주읍 북문안 사창터(억만고)에 북문안교회를 신축하다. 그러나 "북문안교 회"로 불리우게 된 시점은 1912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1928)"에는 "양림리교회"로 부르고있다.
1907년 01월 예배당을 확장하고 2월 신앙사경회 개최하였고(W. F. Swallen이 주 강사로 설교하다). 4월 성례식 개최하였다. (세례교인 5명. 이 가운데 여자가 2명이다) 놀란 의사가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평안도 운산 금광회사 부속 병원으로 옮기고 10월 프레스톤 목사부부는 목포로 옮겨가고 11월 그라함(Ella I. Graham) 독신 여 선교사가 도착하였다
(여성과 아동 선교가 시작하다) 교인은 약 60명정도
1908년 01월 집사 김윤수, 최흥종의 집사 임직식을 거행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해 3월 광주 남학교 시작되는데 평균 20명 출석하였고 양림리교회에서 남학교 심상과를 지원한다 의사 선교사 윌슨(Dr. Robert M. Wilson)이 부임하여 의료선교를 재개하고 주일학교를 재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주중에 교사반을 운영하였다.
1908년 09월 교인의 숫자가 125명이다
1908년 04월 광주 여학교 시작하였는데 평균 17명 출석하였으며 이것이 수피아 여학교이다. 세례교인 4명, 학습교인 18명에 대해 성례전을 실시하였으며 곽(우영) 전도사를 선출하여 인근에서 전도사역에 전념토록 지원하기로 하였고 양림리교회 교우가 곽 전도사의 급여를 담당하였다.
1916년 이기풍 목사가 제2대 당회장으로 부임하였다.
1919년4월 3.1운동으로 교회 터를 몰수 당한 후 오웬기념각에서 임시 예배를 드리다.
1919년10월 녹스 목사가 오웬기념각에서 남문밖에 남문밖교회를 신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리다.
1921년6월 남궁혁 목사가 제4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다.
1924년9월 전남노회 결의로 남문밖교회를 양림교회(선교사와 대다수 교인이 양림리에 거주하였으므로 교회를 이전)와 금정교회 (남문밖교회, 황상호 장로와 잔류를 원하는 교인 중심)로 분립시켰다.
(## 현재 논의가 되고있는 예민한 시점이다. 금정교회(남문밖교회)는 후에 남부교회(1948년), 광주제일교회(1952년)가 되었는데 광주제일교회는 자신들이 광주 최초의 교회이며 양림교회는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53년6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분열로 중립을 선언하다 김재준 목사 지지하는 사람들은 기존 교회에 남아 "한국기독교장로회 양림교회(현 기장 양림교회)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오웬기념각에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현 양림교회 통합측)가 분리 설립 되었다. 여기까지가 "양림 100년사"이고 이 후 각 교회별로 100년사를 이어 나가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 (합동 측)은 1954년에 분립 되었다.



<광주양림교회- 통합 측, 1953년>

광주 양림교회 (통합 측)
1916년 이기풍 목사가 제2대 당회장으로 부임하였다.
1919년4월 3.1운동으로 교회 터를 몰수 당한 후 오웬기념각에서 임시 예배를 드리다.
1919년10월 녹스 목사가 오웬기념각에서 남문밖에 남문밖교회를 신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리다.
1921년6월 남궁혁 목사가 제4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다.
1924년9월 전남노회 결의로 남문밖교회를 양림교회(선교사와 대다수 교인이 양림리에 거주하였으므로 교회를 이전)와 금정교회 (남문밖교회, 황상호 장로와 잔류를 원하는 교인 중심)로 분립시켰다.
(## 현재 논의가 되고있는 예민한 시점이다. 금정교회(남문밖교회)는 후에 남부교회(1948년), 광주제일교회(1952년)가 되었는데 광주제일교회는 자신들이 광주 최초의 교회이며 양림교회는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53년6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분열로 중립을 선언하다 김재준 목사 지지하는 사람들은 기존 교회에 남아 "한국기독교장로회 양림교회(현 기장 양림교회)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오웬기념각에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현 양림교회 통합측)가 분리 설립 되었다. 여기까지가 "양림 100년사"이고 이 후 각 교회별로 100년사를 이어 나가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 (합동 측)은 1954년에 분립 되었다.
<광주양림교회- 합동, 개혁 측, 1954년>

광주 양림교회 (합동, 개혁 측)
1916년 이기풍 목사가 제2대 당회장으로 부임하였다.
1919년4월 3.1운동으로 교회 터를 몰수 당한 후 오웬기념각에서 임시 예배를 드리다.
1919년10월 녹스 목사가 오웬기념각에서 남문밖에 남문밖교회를 신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리다.
1921년6월 남궁혁 목사가 제4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다.
1924년9월 전남노회 결의로 남문밖교회를 양림교회(선교사와 대다수 교인이 양림리에 거주하였으므로 교회를 이전)와 금정교회 (남문밖교회, 황상호 장로와 잔류를 원하는 교인 중심)로 분립시켰다.
(## 현재 논의가 되고있는 예민한 시점이다. 금정교회(남문밖교회)는 후에 남부교회(1948년), 광주제일교회(1952년)가 되었는데 광주제일교회는 자신들이 광주 최초의 교회이며 양림교회는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53년6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분열로 중립을 선언하다 김재준 목사 지지하는 사람들은 기존 교회에 남아 "한국기독교장로회 양림교회(현 기장 양림교회)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오웬기념각에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현 양림교회 통합측)가 분리 설립 되었다. 여기까지가 "양림 100년사"이고 이 후 각 교회별로 100년사를 이어 나가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합동 측)은 1954년 5월 4일에 분립 되었다.

교회 창립일은 1904년 12월 25일이다. (4 교회 모두 똑같다)
<완도 약산제일교회> 1905년 오웬 선교사 시무

완도 약산제일교회
완도 약산제일교회(옛 관산리교회)는 1904년 오웬 선교사(Clement Carrington Owen· 1867~1952)의 전도인 노학구에 의해 복음이 처음 전파되고, 1905년 오웬이 직접 섬에 들어가 돌보면서 정식교회로 세워졌다. 당시 당회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1904년 10월 16일 본도인 정만일씨가 전도인 노학구씨를 청하여 처음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전파하다. 1905년 6월 8일 미국 선교사 오목사(오웬)가 예수의 복음을 전하므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 사오명이 있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지라.”(약산제일교회 교회력) 오늘날 약산제일교회 옛 예배당 모습은 사라지고, 새로 지은 예배당 건물과 100주년 기념비가 남아 있다. 현재 약산제일교회를 담임하는 박형서 목사가 이런 말을 들려준다. “110년 전에 미국 선교사들이 이곳까지 와 복음을 전하고 섬교회 담임을 했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사람들이 믿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가끔 칠십, 팔십 먹은 어른들이 예수 믿겠다고 교회로 옵니다. 그들은 자신이 60~70년 전에 주일학교를 다녔다는 고백을 합니다.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이 여전히 지속적으로 열매 맺는다는 것을 노인들이 다시 교회 등록할 때마다 확인하게 됩니다.” 약산제일교회 100주년 기념비에는 낯익은 선교사들의 한국식 이름이 있다. 류서백, 맹현리, 조하파 등등. 오웬 이후에도 이 선교사들은 지속적으로 조약도를 중심으로 일대의 섬들에 배를 타고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조하파, ‘한국에서의 섬지역전도’, <더 미셔너리> 1922년 1월) 이후 약산제일교회는 꾸준히 성장해 고금도에 분리개척을 했고, 이웃의 금일도 생일도 등에도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생겨났다. 오웬은 장흥에서 복음을 전하는 중에 약산도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강진 마량항에서 약산도로 건너가 복음을 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속해서 1906년에는 다시 마량항에서 배를 타고 완도 원동항으로 이동해, 주변의 신학리에 복음을 전하여 신학교회를 설립했다. 신학교회 입구에는 작은 전시함이 있는데, 그 안에는 <생명록>이라 부르는 당시 교인들의 교적부가 전시되어 있다. 오웬이 뿌린 복음의 씨앗들이 작은 섬교회 명부 안에 적혀있는 것이다. ‘나를 오목사로 부르시오’ 오웬은 1897년 조선 선교사로 임명받고, 1898년 11월 5일에 입국했다. 목포에서 선교를 하다 병환이 심해져 미국으로 갔다가, 1904년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 광주에서 사역했다. 그의 선교지역은 화순, 보성, 장흥, 순천 등 13개 군이었다. 진도, 완도, 해남 등의 섬으로도 들어갔다. 광주 양림동 선교사묘역에 마련된 오웬 선교사의 묘소. 묘비명이 ‘오목사’로 되어있다. 오웬의 순례선교는 한 번 나가면 보통 한 달씩이나 걸렸다. 그래서 그의 자녀들은 오웬이 순례선교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누군지 몰라보기도 했다고 전한다. 때로는 말을 타고, 때로는 배를 타고, 때로는 뚜벅이처럼 걸어서 전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순례전도를 통해 오웬 선교사는 200명 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430명에게 학습(교리교육)을 실시했다. 그의 순례전도는 전남 일대의 복음화를 가속시켰다. 그러던 중 1909년 3월~4월 초에 광주에서 남쪽으로 280리 떨어진 장흥지역에서 순례전도를 하다가 급성 폐렴에 걸렸다. 급히 광주로 옮겼으나 결국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마흔 둘이었다. 아내의 복중에는 한 달 뒤에 태어날 아이가 있었다. 오웬 선교사의 무덤을 광주 양림동 호남신학교 경내의 외국인선교사 묘역에서 만났다. 묘비에는 한문으로 ‘오목사’라고 쓰여 있었다. 본래 오웬의 한국식 이름은 오기원(혹은 오원)이다. 그런데 오웬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양반에게만 이름이 있고 평민이나 천민들에게는 이름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웬은 평민들과 친구가 되고자 자신의 이름과 ‘님’이라는 존칭을 지우고 그냥 ‘오목사’라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죽어서도 ‘오목사’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묘비명이 ‘오목사’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현 약산제일교회
(출처- 광주기독병원, 전남 완도 약산에서 의료봉사 실시 < 병원 < 의원·병원 < 기사본문 - 의학신문)

약산제일교회 (출처- [완도의 문화유산] 113년 역사, 완도 기독교 성지 '약산제일교회' : 네이버 블로그)

약산제일교회 (1970년 재건축 교회)
(출처- [완도의 문화유산] 113년 역사, 완도 기독교 성지 '약산제일교회' : 네이버 블로그)

구한말 오웬 선교사와 인연으로 설립된 113년 역사를 지닌 완도군 약산면 관산리에 있는 '약산제일교회(관산리교회)' 최초의 교회는 지금은 없어진 초가집이었고, 사진의 교회는 1970년대에 재건축됐으며, 지금의 교회는 길 건너편에 새롭게 자리잡았다.

오웬 선교사가 세운 약산제일교회의 100주년 기념비.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오웬 선교사가 세운 약산제일교회의 100주년 기념비 후면
(출처- 오웬 선교사와 인연, 완도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 - 오마이뉴스)

오웬 선교사가 세운 약산제일교회의 100주년 기념비 옆면
(출처- 오웬 선교사와 인연, 완도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 - 오마이뉴스)
<완도 신학교회>

신학교회의 (생명록)을 살펴보면 오웬이 뿌린 복음의 씨앗들이 지금까지 열매 맺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
<완도 신학교회>

신학교회
(출처- 완도 신학교회 '목사 위임 및 장로 은퇴, 장로.권사 임직식' < 광주/전남 < 전국 < 기사본문 - 투데이N)

신학교회
(출처- 완도 신학교회 '목사 위임 및 장로 은퇴, 장로.권사 임직식' < 광주/전남 < 전국 < 기사본문 - 투데이N)
| 선교사 로버트 M. 윌슨(Robert M. Wilson, 우월순) (0) | 2026.02.08 |
|---|---|
| 선교사 유진 벨(배유지) (0) | 2026.02.08 |
| 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Mrs. Eaton Josephine Peel Campbell) (0) | 2026.02.06 |
|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 ( Horace Newton Allen) (0) | 2026.02.05 |
| 선교사 존 W. 헤론 (John W. Heron, 惠論) (0) | 2026.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