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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존 W. 헤론 (John W. Heron, 惠論)

성지순례/선교사

by baesungsoo 2026. 2. 4.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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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 헤론 선교사(John W. Heron, 惠論, 1858.6.15.- 1890.7.26.)

 

 W. 헤론 선교사(John W. Heron, 惠論) 1858년 6월 15 영국에서 출생하여 미국으로 이민하였으며, 동테네시주 메리빌대학과 뉴욕종합대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884 4, 미국에서 한국으로 파송하는 최초 선교사(장로교파)로 정식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해티 깁슨(Hattie)과 결혼했다. 헤론 부부는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일본에서 1894 4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머물다가 1885 6 21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입국하여 알렌(H. N. Allen)의 후임으로 광혜원(제중원) 원장과, 고종 임금의 시의(侍醫)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하여 혜참판(惠參判)이라 불렸다. 그의 업적은 우리 나라에서 병원사업과 성서번역사업을 비롯하여 기독교 문서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서 출판을 위하여 1887년에 조직된 성서번역 상림위원 4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890 6 25일 창설한 기독교서회 창설자였다. 그는 1889년 언더우드의 압록강 세례문제와 관련하여 언더우드와 헤론 간에 불화도 있었다고 한다. 헤론의 인간성에 대하여 기포드 선교사는 1897년 코리안 레포지트리에 "헤론의 성격은 오래 사귄 뒤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의지적인 사람이며 자기 책임은 철저히 지켰다. 그는 의사로서 강한 희생정신과 사랑의 정신과 인술로써 모든 어려운 의료사업을 담당해 냈다. 절대로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몸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그는 과로와 정신적 긴장 때문에 기진 맥진하여 질병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헤론은 1890년 7월 26 결국 한국에 온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헤론이 별세한 뒤 그의 미망인 해티는 헤론과 가까웠던 친구 게일(Gale) 선교사와 1892 4 7일 재혼하였다. 이때 게일은 노총각으로 30세였고, 해티는 33세의 미망인으로 헤론의 아이가 둘(1885년에 출생한 큰딸, Sarah Anne 1887년에 출생한 딸Jessie Elizabeth)이 있었다. 게일과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으며 해티는 1907 8월 두 딸과 한국을 떠났다가 스위스에서 다시 돌아 왔다. 결핵으로 1908 3 28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의 전 남편 헤론이 묻혀있는 뒷자리에 안장하였다. 양화진이 외국인 선교사 묘지로 결정되기까지는 헤론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긴 사연이 담겨 있다. 헤론이 별세하자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와 논의 끝에 양화진을 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한국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묘지로 허락되지 않았다. 양화진은 본래 언더우드 선교사 등이 자기네 주거지로 삼으려고 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정동 미국공사관 안에 임시로 묘를 설치하니, 시민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외교적인 차원에서 미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 5개국 공사의 공동 명의로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청원하여, 1890년 10월 24 정부의 허락을 받아 그후 헤론의 시신을 이장하게 되었다. 이때 헤론 묘지의 관리인은 최봉인(후에 서교동교회 설립교인과 초대장로로 임직)이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제중원 2대 원장 헤론 선교사

 

헤론은 한국의 첫 근대병원인 제중원의 2대 원장으로서 구리개 제중원을 본 궤도에 올려놓았다. 백내장 수술, 4.5㎏의 혹 제거 수술 등 외과 수술을 도입했고, 콜레라 예방 조치와 천연두 예방접종 등 위생 사업을 실시했다. 여자 간호사와 여자 의사로 부인과를 운영했고 한국인의 질병을 근대적 질병 체계에 따라 분류하고 명명했다. 의학교를 개설해 한국인 의생을 교육했다. 그의 이런 노력이 3대 원장 빈턴에 의해 잠시 위기를 맞았으나, 4대 원장 에비슨에 의해 계승되면서 1904년 남대문밖 제중원(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했다. 병상에서 헤론과 언더우드는 화해하고 우정을 회복했다. 언더우드 부부는 20일간 정성을 다해 간호했고 임종을 지켜보았다. 후임인 빈턴 의사는 구리개 제중원에 복음 전도 기능이 없는 것을 비판하고, 재정적 지원이 불규칙하고 타락한 정부 관리들이 많은 정부 병원인 제중원을 포기하고 남대문 밖에 순수 선교 병원을 건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언더우드와 알렌, 뉴욕 선교부의 엘린우드 총무는 빈턴의 돌발적인 행동을 비판했다. 이들은 각국 공사관이 노리는 제중원 원장 자리가 가지는 선교적 가치를 중시하고, 캐나다에서 에비슨 의사를 초청했다. 에비슨과 언더우드는 헤론의 기독교문명론(장기적인 기독교 국가 설립을 위한 기독교 기관 운영)과 네비어스정책(직접 전도와 토착교회 설립)이 함께 가는 통합 노선을 발전시켜, 1897년 기독교 종합 교양지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했고, 1904년 세브란스병원을 건립했다. 해리어트 헤론 부인은 1891년 여름 남한산성 수어장대에 오를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당시 총각인 마페트와 게일이 부인을 흠모했다. 부인(32세)은 문학적이고 다정다감한 게일(29세)과 1892년 4월 7일 결혼하고, 알렌과의 감정이 남아 있는 서울을 떠나 새 선교 지부인 원산으로 가 두 딸(새라 앤 6세, 제시 4세)을 함께 키우며,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했다. 게일은 앤과 제시의 성을 바꾸지 않고 헤론의 딸로 키웠다. 게일 부부는 1899년 9월 9일 서울 연동으로 돌아왔다. 부인은 다시 건강이 나빠 스위스에서 휴양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년 서울에서 결핵으로 사망하고 양화진 남편 곁에 묻혔다. 앞서 첫째 딸 새라 앤은 첫 2세 선교사로 서울에 파송됐으나 양화진에 어머니를 묻은 후 외교관과 결혼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옥성득 교수(美 UCLA) 

(출처-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10·끝) 헤론의 사망과 그의 유산)

존 헤론의 묘비  (출처- [내한선교사] Heron, John W.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부인 해티 깁슨(Hattie) 선교사

(출처- [내한선교사] Heron, John W.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떨잠(족두리), 19세기 초 명성황후가 제중원 의사인 헤론 선교사의 부인에게 하사한 족두리 장식 

부인 해티 깁슨(Hattie) 선교사 (가운데 흰 양장), 남한산성 휴가 북장로회 선교사들

(출처- [내한선교사] Heron, John W.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1891년 미국 북장로회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남한산성 수어장대 앞에서 촬영한 사진. 번호별로 새라 앤 헤론(1), 헤론 부인(2), 제시 헤론(3), 빈턴 부부(4·7), 마페트(5), 도티(6), 기퍼드 부부(8·9), 게일(10), 베어드 부부(11·12). 옥성득 교수 제공  (출처-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10·끝) 헤론의 사망과 그의 유산)

서울 정동 헤론 선교사 가족 거주 사택

(출처- [내한선교사] Heron, John W.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1888년 이화학당에서 내려본 서울 정동의 풍경. 뒷쪽으로 헤론 선교사의 집이 있었다(왼쪽 사진). 1887년 당시 서울의 개신교 선교사들. 왼쪽 뒤가 헤론 부부. 옥성득 교수 제공

(출처-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7) 선교사의 일상 - 의식주와 육아·생활비 문제)

의사 존 헤론 선교사에게 고종이 내린 교지

 

<존 헤론 기념관, 연세대학교>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헤론기념관 개관식.(2019.5.9.) 

(출처- 의료 선교 힘쓰다 조선 땅에 잠든 존 헤론 선교사 기념관 개관 - 노컷뉴스)

 

제중원 2대 원장으로서 평생을 의료 선교에 힘쓰다 조선 땅에서 숨을 거둔 존 W. 헤론 선교사를 기리는 헤론기념관이 연세대학교에 개관했다. 존 헤론은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가 공식적으로 임명한 최초의 조선 선교사다. 영국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나간 헤론은 테네시대학교 의학부와 뉴욕대학교 의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5년 동안 의료선교에 힘썼다. 같은 교단 소속으로 중국에 파견된 호레이스 알렌이 선교지를 조선으로 바꾸면서 실제로 조선에 들어온 것은 알렌보다 늦은 1885년 6월이다.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돌봤으며, 알렌이 미국으로 떠난 1887년부턴 제중원 운영을 맡았다.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며 한글 성경번역에도 힘쓴 것으로 알려진 헤론은 안타깝게도 내한한 지 5년만인 1890년, 의료활동 중 이질에 걸려 조선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동료들이 조정에 묘지 마련을 강력히 요청하면서 양화진에 외국인 묘소가 마련됐고, 헤론은 지금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에 처음 묻힌 외국인 선교사가 됐다. 헤론기념관은 지난 2010년, 폭풍우로 인해 연세대 교정 안에 있던 헤론 묘비석이 쓰러지며 출발하게 됐다. 당시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누구의 것인지도 몰랐던 비석이 쓰러지는 바람에 비석에 새겨진 JOHN W. HERON, M.D.란 글자가 발견됐고 헤론의 묘비란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묘비의 한쪽 면에는 중국어로 성경의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말씀이 새겨져있고, 헤론의 이름과 부인의 이름이 각각 다른 면에 새겨져 있었다. 현재 양화진 묘소에 있는 비석은 1959년 외국인 선교사 자녀들이 새롭게 세운 것이다. 이후 헤론의 묘비를 보관·관리해온 연세대 측은 헤론의 삶과 정신을 기리고자 연세대 의과대학 임상의학연구센터 1층에 헤론기념관을 설치했다. 기념관엔 헤론의 묘비석과 일대기, 조선정부로부터 종2품 가선대부에 임명될 때 받은 교지 등이 전시돼 있다. 2019.5.9일 열린 개관식엔 이병석 세브란스 병원장과 장양수 의과대학장 등이 참석해 개관을 축하했다. 연세대 의과대학 박형우 교수는 "헤론 선교사는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자기희생의 모범"이라며 "기념관을 통해 헤론의 숭고한 자기희생 정신을 되새겨 보길 바란다"고 전했다.  

존 헤론 선교사의 옛 묘비석(사진=연세대 제공)

 

< 존 W. 헤론 선교사,  양화진외국인묘지>

최초 매장자 헤론 선교사

 존 W. 헤론 선교사 

최초로 묻힌 의료선교사 존 W. 헤론 선교사

헤론 선교사 양화진 묘지 

 존 W. 헤론 선교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존 헤론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병풍

존 헤론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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