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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아더 웰번 (Welbon, Arthur Garner, 오월번)

성지순례/선교사

by baesungsoo 2026. 2. 4.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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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웰번 (Welbon, Arthur Garner, 한국명: 吳越番, 1866.8.4- 1928.4.6)

1900년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졸업 당시 사진

아더 웰번 선교사(오월번, 1866~1928)는 경북 안동지역 복음화에 기여하고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는 선교사이다. 그는 1866년 8월 미국 미시간 주에서 태어나, 1897년 맥칼스터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1900년 성 안셀모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1900년 10월 북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서울에서 한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1901년 새디 선교사 (당시 대구에서 사역)를 만나 서울에서 결혼했다. 그리고 1909년까지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07년 제1회 독노회 때 전도위원으로 참여하였고, 1909년 제3회 독노회에는 경기노회 총대로 참가했다. 그 후 원주로 선교지를 이동하였으나, 예양 협정으로 원주 지역이 감리회 구역으로 조정되면서 1909년 9월 안동으로 이동하였다. 안동은 선교 초기 단계였는데 웰번 선교사가 합류하면서 사역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원주에서 그와 동역하던 김영옥 조사가 안동으로 함께 오게 되어 큰 힘이 되었다. 김영옥 조사는 안동에서 웰번 선교사를 도우다가 191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후 안수받았다. 경북 북부지역 최초의 한국인 목사가 되어, 안동교회 초대 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안동 선교부 주임 선교사로서 선교사 사택 건립, 안동 교회 건축에 기여하였다. 1910년 10월 안동 금곡동 산기슭에 선교 부지를 조성하고 네 채의 선교사 사택을 건축하였고, 안동교회를 약 30평 규모로 건축했다. 성도가 계속 증가하면서 1914년 2월 오백 명 규모의 예배당을 준공하였다. 현재 안동 100주년 기념관이 두 번째 예배당 위치에 건립되어 있다. 그는 한국인 사역자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1911년 가을 김영옥 목사를 안동교회 초대 목사로 만들었다.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안동읍에서 세워진 안동의 최초 교회이고, 복음을 수용한 한국인 성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1911년 웰번(안동교회 동사목사)의 추대로 김영옥 목사가 초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교회는 설립 1년 만에 성도가 75명으로 성장하여 선교사 주택에서 예배드리다가 건물을 건축했다. 웰번 부부의 주된 사역은 성경 공부를 통한 제자 양육이었다. 1910년 6월에는 여자 성도를 위한 첫 번째 성경공부 모임을 가졌다. 현재 안동 지역의 교회가 말씀에 기초해 든든히 세워지는데 웰번 선교사 부부가 기여한 것이다. 그는 안동 외에도 지역 교회를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안동의 지곡 교회(1907년), 내외 교회, 소호리 교회 (1921년), 영주 풍기 교회(1909), 영주제일교회(1907년)에도 시무했다. 1912년부터는 영양, 봉화, 순흥. 풍기, 예천, 문경, 함창, 상주, 영주 등 경북 북부지역 전역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이 지역 동사 목사로 사역하면서 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그의 성격은 과묵했고, 얼굴은 검은 수염으로 뒤 덥혀 야성적인 인상을 주었지만 동네에 우물을 파서 식수 문제를 해결하는 인정을 베풀었다. 또한 안동에 사과나무를 보급했다고 전한다. 그는 1917년 평양으로 전임되어 순회 전도와 계몽 교육에 힘쓰다가 1919년 부인 새디의 건강 악화로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1922년 다시 안동으로 돌아와 경안 노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28년 4월 장티푸스에 걸려 61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국에서 어릴 때 사망한 장남 토마스(1903년 소천)와 딸 앨리스(1912년 소천)가 묻혀있는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복음이 척박한 안동 땅에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세 번째 선교사가 되었다. 안동에서 순교한 첫 번째 선교사는 소텔(1908년 순교), 두 번째 선교사는 로저 윈(인노절, 1922년 순교)이다. 

부인 새디 웰번대구 최초의 간호 선교사로서 1899년 9월 내한하였다. 1901년 9월 웰번 목사와 결혼 후 서울로 전임되어 여성 성경 반을 지도하며 순회 선교를 했다. 남편 웰번을 따라 안동에 와서 젊은 여성과 노년층 2개의 성경 반과 을 새 신자 성경 반을 운영하였다. 1914년 5월에는 15일간 6백여 리를 걸어서 12개 교회를 순방하고, 사백여 명을 전도한 기록이 있다.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어 1919년 미국으로 돌아갔고, 1925년 7월 테네시에서 53세로 소천하였다.  (출처- 웰번, 안동 지역 복음화에 초석이 된 선교사) 

 웰번 가족 (1909.3)  (출처- Welbon 가족 < 양화진, 그 신앙의 물줄기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아더 웰번과 부인 새디 웰번 결혼 사진 (1901년)

(출처- Welbon 가족 < 양화진, 그 신앙의 물줄기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1906년 보모와 아들 헨리, 딸 바바라

(출처- Welbon 가족 < 양화진, 그 신앙의 물줄기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1901년 장로교선교사공의회 (맨윗줄 왼쪽에서 5번째가 아더 웰번)

(출처- Welbon 가족 < 양화진, 그 신앙의 물줄기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1. 안동장로교회 (1909년)>

안동장로교회   (출처- 소속교회 > 소속교회 > 안동교회 )

유교의 본고장인 안동시 한복판에 미국북장로교회 '아서 웰번(오월번)부부' 선교사의 전도로 1909년8월 8명이 첫예배를 드리며 시작된 '안동장로교회'는 지금까지 분열이나 갈등없이 지내온 안동지역의 어머니같은 교회로 인근에 유교문화회관, 사찰(대원사), 천주교(목성동성당)가 도로하나로 이웃하고 있는 대표적인 종교타운으로 1914년 현재의 자리에 정착합니다. 1919년 전국으로 퍼진 만세운동을 3월18일 안동장날에 지도자(목사, 장로)주도하여 옥고를 치루었으며 지금의 장로교회의 남선교회와 청년회로 이어지는 '기독청년면려회'를 앤더슨(안대선)선교사의 노력으로 1921년 조직하여 일제시대 기독청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지금까지 사용하는 담쟁이로 덮힌 석조(화강암) 2층예배당은 1937년 준공하였지만 일제강점기말 육군기지로 강제점령당한 아픔과 6.25전쟁때는 병원으로 이용된 애환이 있는 예배당을 1959년 증축하여 계속사용중에 2015년 12월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습니다. 예배당 우측건물은 2009년 설립100주년 기념으로 완공하였으며 기념관내에 2011년 안동교회의 역사를 알아보는 '역사전시실'을 개관했으며 지금까지 약 20여개의 교회를 분쟁없이 분립개척하였고 6.25전쟁때는 안동제일감리교회와 안동성결교회를 후원설립하였으며 구세군교회의 정착과 이웃인 천주교성당을 건축시 협력한 아름다운 이야기와 교인중 '김수만장로'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시골의 외진곳에 10개교회를 개척한 감동의 이야기가 있는곳입니다.

안동장로교회   (출처- ★교회탐방 12(안동 안동 장로교회)★ : 네이버 블로그)

 

1909년 북장로교 선교사 웰번(Arthur G. Welbon)과 김영옥에 의해 세워진 안동교회는 경상북도 북부지역 개신교의 효시이며 안동에 최초로 설립된 장로교회이다. 안동지역의 선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개척했다. 1890년대 중반 부산의 베어드(William M. Baird), 1902년 대구의 아담스(James E. Adams) 등이 지방을 순회하면서 안동을 방문했었고, 1903년부터 대구의 선교사들이 안동을 순회하면서 전도하였다. 1908년 11월 김병우 등이 안동에 파송되어 서문밖(대석동)에 5칸짜리 초가집을 구입하고 ‘기독서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당시 양반문화의 본고장에서 서원 간판을 건 책방은 효과적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1909년 8월 8일 일요일부터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안동교회의 출발이다. 김병우의 뒤를 이어 1909년 11월 황해도 소래교회 출신 김영옥이 웰번(Arthur G. Welbon)과 함께 들어와 전도하였다. 김영옥은 안동교회 초대 목사가 되었고, 교회는 안동진영 터(안동시 광석동)의 초가 예배당을 거쳐, 1913년 현재 위치에 50칸 함석예배당을 짓게 되었다. 안동선교의 개척자인 웰번 후임으로 안동에 들어온 선교사들로는 의료선교사 플레처(Archibald G. Fletcher)와 크로더스(John Y. Crothers)가 있다. 플레처는 성소병원을 시작했고, 크로더스는 그 후 40여 년간 안동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안동교회를 위시하여 성소병원과 계명학교를 설립하여 지역근대화에 앞장섰다.

(출처- 안동교회(安東敎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동장로교회   (출처- ★교회탐방 12(안동 안동 장로교회)★ : 네이버 블로그)

안동교회 내부   

안동장로교회   (출처- ★교회탐방 12(안동 안동 장로교회)★ : 네이버 블로그)

1909년 설립

1912년에 지어진 안동교회 옛예배당.중국인 건축사인 모문서가 건축하였고 1979년 지금의 새예배당을 지을 때 철거되었다     (출처- 안동 역사관 - 안동교회)

 

<풍기장로교회(1909)>

풍기교회(기장)   (출처- 풍기교회 – PROK_GB)

 

(교회연혁)

1907년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 안대성, 권찬영, 권서인, 장치산, 심치명의 전도로 풍기지역 복음전파

1909년3 김용휘, 김창립을 중심으로 서부1115번지 초가 15간 구입, 이를 예배처소로 하여 풍기교회가 시작되다.

 

<영주제일교회> 1907년 웰번 선교사 설립 

영주제일교회  (출처- 인쇄하기)

 

영주 제일교회는 1907. 3. 봄부터 선교사 오월번씨와 강제원장로님의 전도에의하여 정석주씨 외 수인이 믿기 시작하다. 1909년 4월 구성공원 아래쪽 초가 3칸을 매입하여 경북노회에 가입하고 영주교회가 설립되었다. 1938년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목사와 장로‧전도사들이 구금 또는 옥고를 치렀고, 한국전쟁중에 소실되었다가 1954년 5월 1일 기공 후 신도들의 노역봉사로 1958년 7월 25일 준공된 역사를 지닌 영주지역에서는 유일한 서양의 고딕식 건축양식을 차용한 절충양식의 예배당 근대건축물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근대산업시기를 거치면서 영주시의 근현대사에서 영주시민이자 신도들인 지역 주민들의 삶과 역사적 흔적들이 남아있어 전승 보전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다.

교회연혁  (출처- 영주제일교회)

 

1907. 3. 봄부터 선교사 오월번씨와 강제원장로님의 전도에의하여 정석주씨 외 수인이 믿기 시작하다.

1908. 1. 성저동 정석주씨 사택에서 10여인의 신자가 모여 예배보며 지내오다.

1909. 4. 초가3칸을 예배당으로 매입하고 경북노회에 가입하고 교회명을 영주교회로 허락받다. (교인 30여명 교역자 엄응삼 전도사)

1916. 2. 초가6칸 예배당으로 매입하였으며 교인은 40여명 교역자 서하선전도사

1920. 5. 현 예배당 기지 270평을 매입하고 4020칸 예배당을 건축하다. 교인80여명 교역자 강병주 전도사

1924. 5. 교인이 월증하여 70평 목조도당 2층 예배당을 건축하다. 교인수 300여명 교역자 강석진목사 장로 3인 제직30명에 달하다.

1940. 8. 일제의 탄압으로 강석진 김진호 강병철 오승연 김금선 박충락 강석지 김사렵 강경봉 김용필 신진균 제씨가 검거 되었다.

1947. 3. 현 석조전 예배당 건축 기성회 발족

1950. 11. 영주교회를 영주제일교회로 명칭 변경

 

<안동 지곡장로교회(1907)>

지곡교회  (출처- 지곡교회 - 디지털영주문화대전)

 

안동군 와룡면 나소리에 있던 방잠교회(芳岑敎會)를 출석하던 강두수(姜斗秀)·임재봉(林在鳳)·장영홍(張永弘) 등이 1907년 7월 지금의 영주시 평은면 지곡리에 초가를 매입하여 지곡교회를 설립하였다. 개척 당시 선교사는 체이스 크랜포드 소텔(Chase Cranford Sawtell), 로저 얼 윈(Roger E. Winn)[한국명 인노절], 오월번, 권찬영 등이다. 1912년 토지를 매입하여 초가 10칸을 신축하였다. 문맹 퇴치와 구국의 집념으로 1915년 경신학교를 개교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23년 2월 10일 임재봉을 초대 장로로 장립하면서 당회를 구성하였다. 1935년 예배당을 신축하였으나, 1949년 공비의 방화로 전소되었다. 1951년 예배당을 준공하고, 2006년 현 교회당을 착공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지곡교회 (출처- 소속교회 > 소속교회 > 지곡교회)

1936년 예배당  (출처- 소속교회 > 소속교회 > 지곡교회)

 

(교회연혁)

1906.03.강두수, 임재봉, 장영흥씨 등 4,5인이 복음을 받고 방잠교회에 출석.

1907.02.지곡리 586번지 초가 4간 매입 수리하여 지곡교회로 명칭. 신도40여명

1912.08.지곡리 573번지에 대지 100평 매입, 초가10간 신축. 교인80여명

안동군 북후면 옹천교회 분립

 

<안동 소호리 장로교회(1921)>

소호리교회  (출처- 소속교회 > 소속교회 > 소호리교회)

 

소호리교회는 장사리교회를 다니던 오정수씨가족이 먼저 믿기 시작하여 19214월에 이대영목사를 청하여 소호헌에서 전도강연을 실시하므로 이시복씨 등 신종하는 자가 늘어나 주일은 장사리교회에서 예배하고 주일 저녁과 수요기도회는 오정수씨 집에서 모여 예배하기 시작하다. 1921년 한산 이씨의 종손 이시복씨가 종택을 예배당으로 봉헌하였다. (조선예수교 장로회 사기 하권 p228 )

 

<아더 G. 웰번, 양화진외국인묘지> 

아더 G. 웰번(Welbon, Arthur Garner, 한국명: 吳越番)선교사와 두 자녀 묘

아더 G. 웰번(Welbon, Arthur Garner, 한국명: 吳越番)

 

미국 북장로회 안동 선교사 아더 G. 웰번(Welbon, Arthur Garner, 한국명: 吳越番) 1866 8 4일 미국 미시간(Eastmanville)에서 출생하여 1897년 마가레타(Macalester)대학을 졸업했다. 1900년 샌 안젤모(San Anselmo)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1900 10 17일 내한했다. 1901 9 24일 대구선교사 새디(Sarah Harvey)와 서울에서 결혼하였으며 1909년까지 서울선교부 소속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1회 독노회(1907. 9. 17)때에 전도위원으로 참여하고 제3회 독노회(1909.9.3)에는 경기노회 총대로 참가했다. 선교구역의 분활로 원주가 감리교 구역으로 편입되고 안동에 새로운 선교부가 개설되어 1909 2월 플래처(Fletcher, 한국명: 鷲義湫, 성소병원 설립자)와 안동선교부로 전임 되면서 선임선교사(Senior missionary)로 안동의 선교 기지(基地)와 가옥을 매입했다. 1909 8월 안동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고, 10월 소오텔(Sawtell, 한국명: 史佑大)선교사와 안동 주변지역 전도여행을 계속했다. 이때 그는 안동의 서쪽을 담당하여 순회했다. 안동선교부 주석(主席)으로 안동군 부내면 옥리동(府內面 玉里洞)에 거주하며 안동 지역 교회의 공동관리, 한국어연구 감독, 보조교역자(助師)와 성서판매원 감독 업무 등을 수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과묵한 성격에 안면이 검은 수염으로 뒤 덥혀 야성적인 인상을 주었고, 교인들과 인간적인 접촉은 별로 없었으나 금곡동에 우물을 파주어 주민들의 식수(食水) 해결을 해 주었다. 안동교회 동사목사(同使牧師)로서 초대 당회장을 역임하였고 지곡, 내매교회에도 사역했으며, 1921년에는 안동지역이 7천여명 교인으로 늘어나 130여 교회로 확장되어 경안노회가 분립되었을 때 임원으로 참여하여 노회발전에 기여하였다. 한편 1909년 안동 장사리(長沙里)교회가 흥왕(興旺)하여 소호리(蘇湖里) 교회가 분립 될 때 동사목사와, 1910년 설립된 영주 풍기(豊基)교회에서도 시무한바 있다. 1917년 평양으로 전임되어 1919까지 순회전도와 계몽 교육에 힘쓰다가 부인의 건강 악화로 가족들과 미국에 일시 귀국했으며, 그 자신은 1922년 다시 돌아와 안동지역 선교사업을 계속하다가 1928 4 6 61세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15)에 안장되었다.

 

대구 최초의 간호 선교사 새디 웰번( -1925)

 

아더 G. 웰번의 아내 새디 웰번(Mrs. Welbon, Sadie 일명: Sarah)은 미국 북장로회 간호선교사로 1899 9 29일 내한하였다. 대구에서 최초 독신 간호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01 9월 웰번 목사와 결혼했다. 그 후 서울로 전임되어 여성 성경반을 지도하며 순회 선교를 했다. 남편 웰번이 안동에 부임 한 뒤에는 1910 6월 합류하여, 젊은 여성층과 노년층으로 2개의 성경반을 조직 운영하고 많은 새 신자들이 성경반을 통하여 교회에 나오도록 했다. 1914 5월에는 안동지역을 15일간 6백여리(150마일)를 걸어서 전도하며 12개 교회를 순방하고, 400여명을 전도한 기록이 있다. 건강이 악화되어 1919년 미국으로 돌아가 1925 7 20일 테네시(Maryville)에서 53세로 별세하였지만 양화진에 묻히지는 못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웰번의 장남 토마스의 묘

 

웰번(Welbon, A. G.) 부부에게는 6남매의 자녀가 있었다. 장남 토마스(Thomas Harvey) 1903 5 17일 출생하여 같은 달 27일 서울에서 열흘 만에 사망하였으며, 딸 앨리스(Alice) 1912 5 30일 출생하여 1914 2 9일 디프테리아(Diphtheria) 2살의 나이에 서울에서 사망했다. 이들은 양화진 아버지와 함께 묻혀있다. 한편 차남 헨리(Henry G.) 1904년 출생하여 1919년까지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뒤 목사가 되었다. 1932년 결혼(Dorothy Klein)하였으며, 한국에서 미 군정청 통역관으로 봉직(1946-1947)하였다. 바바라(Barbara B.) 1962년 한국에 돌아와 영어교사로 봉직하고, 매리(Mary F.)는 미국 아이오와(Davenport)에서 여배우로 활동했다. 찰스(Charles P.) L.A.에서 미국 우편사업에 종사했다.

웰번의 딸 엘리스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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