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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칠사당, 임영관지 객사문 등 (강릉시 용강동)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2. 27.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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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칠사당                     (이하 출처- http://info.catholic.or.kr/)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인 칠사당은 대도호 부윤(大都護府尹)이 주재하던 조선시대 관공서로 호적(戶籍), 농사(農事), 병무(兵務), 교육(敎育), 세금(稅金), 재판(裁判), 풍속(風俗)에 관한 일곱 가지 정사(政社)를 베풀던 곳이다. 따라서 '칠사당'이란 현판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고 실제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인조 10년(1632년)에 중건하고, 영조2년(1726년)에 중수했으며, 고종 3년(1866년)에는 진위병(鎭衛兵)의 영으로 쓰이다가 이듬해 화재로 타 버린 것을 강릉 부사 조명하가 중건했다고 한다. 교회 사학자들은 여러 순교자 증언록을 인용, 이곳 칠사당에서 병인박해 때 심문도 없이 목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다고 말하고 있다. 칠사당 동헌 마당 한가운데에는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묶어 갖은 고문을 가하며 심문했던 것으로 전하는 고목이  남아 있다. 현재 강릉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 관청 건물인 칠사당은 한쪽이 다락 형식으로 된 '가'(기역)자 형태의 건조물로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단아한 조선 시대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강릉 칠사당과 객사문, 동헌


고구려 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돼 '하시랑', '하슬라(何瑟羅)'로 불려 왔던 고도 강릉도 순교지가 있다. 강릉시 용강동의 “칠사당(七事堂)”과 “임영관 객사문(臨瀛館客舍門)” 이다. 강원도 지방, 특히 춘천 교구내 영동 지역의 순교 기록을 찾기란 문헌상 애로점이 많다. 강릉 지역의 순교자로 교회 공식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분은 "치명 일기"에 기록돼 있는 심 스테파노 한 분뿐이다. "치명일기"에 나타나는 심 스테파노에 관한 내용을 보면 "본디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 5월에 경포(포도청 포졸)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최 바오로와 함께 갇히었다. 치명하니 나이는 29세 된 줄은 알되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교회 전통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지금까지 구전으로 전해 오는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강릉 칠사당과 임영관에서 심문을 받고 순교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강릉 칠사당

 

강릉 칠사당

 

강릉 칠사당

 

 강릉 칠사당 

 

칠사당 내부             (이하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칠사당 내부   

 

 칠사당 내부   

 

칠사당 내부   

 

칠사당 내부    

 

칠사당 측면

 

칠사당 측면

 

<강릉임영관지>

 

 강릉 임영관지 관아 복원공사(2007-2010)              (출처- http://info.catholic.or.kr/) 

 

강릉 임영관지 관아 복원공사 

 

강릉 임영관지 관아 복원공사 

 

강릉 임영관지 관아 복원공사 

 

임영관지 안내도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임영관지 아문

 

아문

  

아문

 

아문

 

아문

 

아문 

 

의운루(좌) 별당(중앙) 동헌(우)

 

임영관지 별당(좌) 동헌(우)

 

임영관지 별당(좌) 동헌(우)  

 

의운루 

 

임영관지 동헌

 

동헌

 

임영관지 객사문 입구 

 

국보 제51호로 지정된 객사문 (임영관 삼문) 

 

임영관 객사문(임영관 삼문)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글이라고 한다.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남산의 오성정·금산의 월화정·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  

 

객사문

 

객사문 (임영관 삼문)          (출처- http://info.catholic.or.kr/)

 

객사문 (임영관 삼문) 

 

객사문 

 

객사문 

 

객사문 

 

객사문              (객사문 자세한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kysin31)

 

객사문 

 

객사문 

 

객사문 

 

객사문 

 

객사문 

 

객사문 기둥

 

임영관지 중대청

 

임영관지 중대청

 

서현(뒤 좌), 중대청(앞 우)

 

서헌

 

서헌 (좌)

 

전대청

 

전대청

 

고려 태조가 재위 19년(936년)에 총 83간의 건물로 창건했다는 임영관 현판이다.  공민왕이 직접 쓴 글이라고 한다.   

 

중대청(좌) ,전대청(중앙), 동대청(우)

 

동대청(우)

 

동대청

 

동대청

 

집경전 터

 

집경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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