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성당
춘천교구 소속 본당으로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성내리에 소재해 있다. 1921년 5월 5일 내평(內坪)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이다. 관할 구역은 양양읍, 서면, 손양면, 현북면 전 지역과 현남면, 강현면 일부 지역이며, 관할 공소는 현북 1개소이다. 양양 지방의 전승에 따르면, 병인박해 때 충북 제천의 배론[舟論] 교우촌에 거주하던 이 베드로가 양양면 화일리(禾日里)의 범뱅이골로 피신해 오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베드로의 동생 이 바오로와 김덕수, 그리고 김덕수의 숙부가 범뱅이골로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또 다른 전승은 양양 인근에 있는 속초의 싸리재(上道文里)에 관한 것으로, 충청도 청주에 살던 오광선이 병인박해를 피해 강릉 홍제동으로 이주하였고, 이어 맏아들 오춘영(바오로)이 속초 도문동으로 이주하여 ‘싸리재 옹기점’을 일구었다고 한다. 범뱅이골과 싸리재는 영동 지역에서 최초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였다. (글 출처- 김성희,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디모테오 어린이집 (출처- http://info.catholic.or.kr/)
디모테오 어린이집
양양성당 입구 디모테오 순례길 (출처- http://info.catholic.or.kr/) 디모테오 순례길 디모테오 순례길 디모테오 순례길
이광재 신부는 양양성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40년 2월 28일 성당(65평)과 교육회관(25평)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나,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련군의 주둔으로 성당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1948년부터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와 수도자들, 그리고 신자들이 양양 본당을 거쳐 남하하게 되자, 이광재 신부는 이들이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러던 중 이광재 신부는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9일 총살당하였다.
이광재(디모테오)신부 순교각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이광재(디모테오)신부 순교기념비
이광재(디모테오)신부 순교기념비
이광재(디모테오)신부 약력
이광재 신부(1909-1950)의 묘, 춘천 죽림동성당 성직자묘역
이광재 신부(1909-1950)의 묘, 춘천 죽림동성당 성직자묘역
성당 오르는 길
양양성당 (이하 출처- http://info.catholic.or.kr/이광재 신부상)
영동 지역에는 1882년 가을 뮈텔(G. Mutel, 閔德孝) 신부가 처음으로 파견되어 이듬해 봄까지 순방하면서 양양 최초의 공소인 쉬일(양양읍 파일리) 공소를 비롯하여 8개의 공소를 설립하였었다. 그리고 1887년 싸리재 공소에 이어 장승골 공소, 한재 공소, 정바위 공소, 장두골 공소, 명지골 공소, 이목동 공소, 신흥 공소 등이 설립되어 양양 · 속초 지역에만 9개 공소가 되었다. 이 지역은 1883년 4월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신부가 설립한 ‘섭가지 본당’(이천군 산내면 龍浦里 섭골) 소속이었다. 그 후 함경도 안변에 있던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1888년 가을에 강원도 풍수원으로 거처를 옮겨 풍수원 본당을 설립하면서 잠시 이 본당 관할이 되었으나, 1890년부터는 다시 원산 본당으로 이관되었다. 1891년부터는 안변 본당 샤르즈뵈프(E. Chargeboeuf, 宋德望) 신부의 순방을 받았으며, 1896년 2월에는 안변 본당의 4대 주임 불라두(T. Bouladoux, 羅亨黙) 신부가 거처를 안변의 내평으로 이전하여 내평 본당을 설립하면서 이때부터 1921년까지 내평 본당 관할이 되었다.
사무실
본당 설립과 변모
영동 지역의 신자수는 점차 늘어났지만, 내평 본당과 멀리 떨어져 있어 본당 신부가 공소를 순방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이에 뮈텔 주교는 1921년 5월 5일 양양 본당을 설립하고 북간도 조양하(朝陽河) 본당에 있던 최문식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처음에 최문식 신부는 속초 상도문리의 싸리재에 거주하였으나, 성담 겸 사제관으로 지은 초가집이 허술하였고, 전교 면에서도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성당 이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22년 2월 17일 양양읍 서문리 282번지로 성당을 옮긴 뒤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성당 공사에 착수하여 12월 22일 완공하였다. 2대 주임 유재옥 신부는 공소 회장 피정을 연 4회 이상 실시하였고, 청년회 · 부인회 등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1936년 여름 수해로 성당이 완전 침수되자 성당 재신축 계획을 포기하고 시내 중심지로 이전하기로 결정한 뒤 현 성당 소재지의 부지 1,140평을 매입하였다. 이어 3대 주임으로 이광재 신부가 부임하여 1940년 2월 28일 성당(65평)과 교육회관(25평)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나,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련군의 주둔으로 성당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1948년부터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와 수도자들, 그리고 신자들이 양양 본당을 거쳐 남하하게 되자, 이광재 신부는 이들이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러던 중 이광재 신부는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9일 총살당하였다.
양양성당
전란 중 성당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본당 신부가 공석이 되면서 신자 공동체 역시 혼란에 빠졌다. 이에 주문진(注文津) 본당에 이어 동명동(東明洞) 본당에서 사목하던 맥고완(P. McGowan, 元) 신부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양양 지역을 맡아 사목하면서 성당(65평)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설리반(T. Sullivan, 서) 신부는 부임한 지 얼마 안된 1954년 11월 30일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고, 1956년에는 강현 공소(강현면 정암리 2구)를 설립하여 12월 25일에 강당을 신축하였으며, 1958년 1월 10일에는 현북면 상광정리에 460평의 부지를 매입한 뒤 11월 8일 32평의 현북 공소 강당을 신축했다. 또 1960년 4월 1일 수녀원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7월 12일 2층으로 된 수녀원을 완공하였다. 한편 1960년대에 접어들어 한때 냉담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본당 재정 상태가 매우 약화되기도 하였다. 1972년 7대 주임으로 머레이(B. Murray, 함) 신부가 부임하여 학생회와 주일학교 육성에 힘을 쏟았으며, 9대 주임으로 부임한 린치(J. Lynch, 임) 신부는 가정 성화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사목하였다. 그리고 10대 주임 스미스(M. Smyth, 천) 신부는 이광재 신부의 깊은 신앙심과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3년 10월 1일 경당 내에 이광재 신부 기념관을 건립하고 순교 기념각을 세웠다. 그 후 1988년 4월 6일 현재의 수녀원(55평)을 신축하였고, 성당이 협소하여 많은 불편이 따르자 1995년 10월 1일 성당을 증축(75평)하였으며, 이듬해 10월 4일 농어촌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현북 가정 간호의 집을 개원하여 서울 성가 소비녀회에 운영을 위탁하였다. 14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동주(李東周, 시몬) 신부는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교회상을 정립하기 위해 부임 직후 ‘디모테오 어린이 집’을 개원하였다. 한편 본당에서는 2000년 10월 8일 이광재 신부 순교 5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는 등 이광재 신부가 시복 · 시성될 수 있도록 끊임없는 기도와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상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상 (출처- http://info.catholic.or.kr/이광재 신부상)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상
성모상과 수녀관
성모상
정원
식수대
성당내부
성당내부
성당내부
제대
십자고상
감실
제대 청동화
청동화
김대건 신부
성녀 데레사
성녀 데레사 (출처- http://info.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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