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명례성당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209 상촌)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13. 2. 27. 19:11

본문

 

명례성당 연혁       (이하 사진출처- http://info.catholic.or.kr/)


1784년   :  한국천주교회 창립

1785년   :  을사 추조 적발사건-김범우(토마스) 밀양 단장으로 귀양 첫 복음전파

1801년   :  신유년 박해 이후 명례, 백산에 신자촌 형성

1828년   :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 명례에서 출생

1866년   :  신 석복 마르코 대구감영에서 3월 31일 치명

1870년   :  명례공소 재건

1885년   :  영남 전교거점으로 대구본당 설립

1887년   :  명례공소 성사집행 (로베로 신부)  (신자수-27명 사규고백-15명 사규영성체-14명, 성인세례자-5명) 

1890년   :  부산본당설립 (남쪽 지방선교)

1897년   :  명례 본당승격(명례부근 신자200여명)

1898년   :  1월 강성삼(라우렌시오)신부 부임

               (강 신부님은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한국인 세 번 째 신부이며 한국  땅에서 서품된 첫 사제) 

1903년   :  9월 9일 38세 젊은 나이로 명례에서 지병으로 선종

1903년   :  1926년까지  공소시대

1926년   :  5월 30일 권영조(마르코)신부 부임

1928년   :  기와집 성전 설립

1930년   :  6월경 본당을 교통이 좋은 삼랑진으로 이전(1904년 경부선)

1935년   :  태풍으로 성전 전파 <진영본당 소속 공소>

1938년   :  현 위치에 축소복원

1996년   :  수산성당에 편입 (10월 21일)

2008년   :  9월 마산교구 명례성지조성 추진위원회 교구 승인 

 

명례성당

 

마산교구는 2008년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 인근에 있는 명례 성당을 성역화하기 위해 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명례는 오래된 교우촌으로 1897년 현 마산교구 관내에 처음 설립된 본당입니다. 한국의 세 번째 사제인 강성삼 신부가 초대주임으로 부임해서 사목하다가 1903년 명례에서 선종했습니다. 현 성당은 강성삼 신부가 1898년에 처음 지은 후 1928년 권영조 신부 때 기와로 다시 지어 축복식을 가진 성당이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된 후 1938년에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한 것입니다. 위원회는 2008년 8월부터 매주 토요일 미사를 봉헌하며, 2010년 생가 터와 성당 주변을 매입해 돌제대를 설치하고 향후 신석복 기념성당을 건립하는 등 성역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명례성당

 

명례성당        (이하 사진출처- http://rijemin.com/)


마산 교구 첫 번째 본당이었던 명례 성당은 현재 한국교회가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124위 가운데 한 분인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1935년  태풍으로 성전 전파 <진영본당 소속 공소> 되어 1938년 현 위치에 축소복원되었다.  

 

명례본당과 강성삼 신부


로베르(Robert 김보록)신부가 1897년 6월 9일 뮈텔주교에게 올린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저는 낙동강 가에 위치한 밀양군의 명례마을이 신부님(강성삼 라우렌시오)의 사제관을 두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이 부산 절영도(영도)에 자리를 잡으신 것은 임시 방편이며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성공이 없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미온적인 신자들로 하여금 신자로서의 의무를 실천하도록 인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신부님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사도직 수행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섬에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명례와 같은 큰 마을은 다릅니다 그곳에는 고백성사를 받을 신자들이 100명 정도되는 데다 신자들도 열심히 편하게 삽니다 이 마을에서 매년 많은 수의 성인영세자가 나온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곳에는 전 주민들을 교회의 품으로 인도하는 일을 기대할 만합니다 110리 라는 거리도 유리합니다 현재처럼 건강하고 힘이 넘치는 우도(Oudot 부산 본당신부)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곳은 이틀이면 어렵지 않게 왕복할 수 있습니다 거의 매일 부산으로 가는 배편이 있으며 돌아올 때에는 만조를 이용하여 90리를 배편으로 올 수 있는데 매일 나룻배가 운행되고 있습니다. 주교님께 경의를 표하며 주님안에서 주교님께 충성 할 것을 다짐합니다”  같은 해(1897년) 6월 23일자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님도 뮈텔주교에게 비슷한 내용의 서한을 보낸다. “저희 인사문제 다시 말해서 제가 갈 곳에 대해서 우(도)신부님과 상의했습니다 우(도)신부님은 제가 밀양으로 가기를 바라십니다 명례도 좋고 웁실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확실히 지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명례쪽으로 잡고 있습니다 (거리로 말하자면 명례나 웁실이나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이듬해(1898년) 1월에 셋칸 짜리 집을 사서 강성삼(라우렌시오)신부님이 이곳 명례공소에 오심으로 명례공소는 경상도 남쪽 지방의 두 번째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서 강 라우렌시오 신부는 네칸짜리 집을 한 채 더 지어서 본격적으로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강 신부님은 1898년 1월 13일 뮈텔주교에게 서한을 올린다 “지극히 존경하올 주교님, 절영도에서 밀양으로 이사 온 다음 곧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비록 늦게나마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은 120냥에 삿습니다  방이 셋 뿐이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장 새로 집을 한 채 짓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네칸 짜리 집입니다마는 아직 착수는 하지 않았습니다 땅이 풀린(추위가 풀린)다음에 시작 할 예정입니다”  초대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는 1896년 4월 26일 강도영(마르코 신부),정규하(아우구스티노)신부와 함께 한국땅에서는 최초로 뮈텔주교에게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신품성사를 받기 1년전에 사목 실습차 부산에 파견되어 10일 동안 초량성당에 머문 다음 영도(절영도)에 파견되었다 본래 건강이 약했기 때문에 바다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심한 두통을 앓았다 그 후 이듬해 1897년 6월 9일에 정식으로 부산지방으로 부임한 강신부는 처음엔 절영도에 몇일간 있다가 로베르(Robert 김보록)신부, 우도(Oudot)신부와 상의 하고서 하남읍 명례리 지방으로 오셨다 이 때 임시 본당의 후보지로 거론된 곳은 밀양,명례,웁실 등 세 곳이었다 그러나 이미 명례에는 이 지방교우들이 120냥을 주고 세 칸짜리 집을 구해 놓았다 또한 이곳이 한적한 시골 이면서도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므로 병 요양을 겸하여 임시로 임지로 결정하여 부임하였다 그런데 이곳 이곳에 즉시 부임하려 했으나 새로 구입한 집의 전 주인이 집을 비우지 않아서 이듬해(1898년)1월에 이곳 명례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즉시 네칸짜리 집을 새로 지을 계획을 하고서 공소 순방에 나섰다 즉 밀양,언양,경주,기장,양산,동래 등이었다 강신부님은 건강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전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입교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새로운 공소를 3~4군데 세웠다

강 신부님이 명례로 부임한 이듬해인 즉 1899년 초에 자인(경상북도 경산군 자인면)고을에 살던 정 그레고리오 라는 신자가 밀양고을 양반인 손참봉으로부터 누이의 딸을 되찾으려고 하는데서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애를 먹었다 즉 양반인  손참봉이 흉년이 들었을때 그 여자아이를 200냥을 주고 샀었다 손 참봉이 이 여자아이를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정 그레고리오는 밀양관장에 고소하였다 그리고 그는 강신부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강신부는 당시 자인고을이 로베르 신부의 관할지역 이므로 그 사건을 로베르 신부에게 위임하였다 이에 로베르 신부가 즉시 밀양관장에게 편지를 보이자 밀양군수는 오히려 서양신부에게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들어 정 그레고리오를 매질 한 후 투옥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건이 크게 확대되는 듯 했다 그러나  강 신부가 용기있게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로 찾아가서 재판을 신청하겠다고 군수에게 통보하였다 그제서야 밀양군수는 겁이 났는지 용서를 빌어왔고 그 결과 화해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여 고통을 겪게 되었다 즉 그간 명례에서 구입 한 땅이 이중매매가 된 것이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 땅은 의붓아들을 데리고 살던 한 과부의 땅 이였는데 그 아들이 안성지라는 사람에게 몰래 팔았던 토지의 일부를  강 신부가 고부로부터 매입한 것이었다 물론 매매문서가 있는 공식적인 땅이었다 이것 또한 소송이 제기되어 매매중인 두 사람과 과부와 아들이 투옥되는 등 골치가 아팠으나 강 신부가 엄 다케(Taqute 엄택기)신부에게 도움을 청하여 정당한 판결을 받고서 결국 밀양군수와 선교사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강신부는 이렇게 열심히 본당사목 뿐 아니라 지역발전을 위해서도 낙동강 제방 쌓는 사업을 해서 농토를 늘이는 문제 등 에도 크게 관심을 갖고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본래 병으로 몸이 약한데다가 본당 사목의 과로로 말미암아 점점 건강이 악화되어 1990년 초에는 죽을 지경으로 앓았다 그 결과 이듬해 여름에는 기운이 쇠약하여 공소 순회도 할수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03년 9월 19일 38세의 젊은 나이에 명례에서 선종하였다 이 때 대구본당의 로베르신부는 뮈텔주교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올렸다. “주교님, 9월 19일 저녁에 저는 밀양 명례로부터 라우렌시오 신부의 병세가 몹시 약화되었으며 신부님이 죽기 전에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날 주일미사를 드린 뒤 세를 낸 말을 타고 대구를 출발하였습니다 저의 당나귀가 아직 병중이기 때문에 정오에 신부님 댁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이  모든 문이 잠겨져 있어서 너무 놀랐습니다 라우렌시오 신부님은 19일 토요일 저녁 5시경에 Mousset신부님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사람들은 다음날인 9월 20일 아침8시에 신부님의 시신을 매장했던 것입니다 저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신자들이 이에 놀랐습니다  모두들 다음 날까지는 제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 데다가 죽은 지 48시간을 기다렸다가 매장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저도 장례식에 참석 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Mousset신부님은 시신이 부패하여서 그랬다고 주장하는 데 신자들은 그렇치 않다고 주장합니다 오줌을 누지 않은 상태에서 4-5일이 지난 뒤에야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부님이 잘못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시신에서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Mousset신부님은 죽기 하루 전에 입관하도록 지시 하였는데 이것이 신자들에게 물의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하기야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더 말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20리 떨어진 대미(Taimi)신자 마을의 무덤으로 찾아 갔으며 심란한 마음으로 돌아 왔습니다 병과 매장에 관해서는 고인이 된 신부님의 임종을 지킨 Mousset신부님이 주교님께 보고 드릴 것입니다 당장으로서는 그곳으로 보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강(江) 이쪽 편에 있는 3-4군데의 공소신자들에게 제가 곧 주교님을 모시고 명례로 오게 될텐데 그때 올해의 성사를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강 전편의 3-4군데의 공소에 대해서는  Mousset신부님이나 Legendre신부님이  그들을 찾아가는 편이 쉬울 것입니다 주교님이 그곳을 방문하시면 사람들이 다소 불확실한 후임자 문제를 폭 넓게 상의 드릴 것입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주교님이 지시하신 대로 조만간에 문경의 보수골까지 주교님을 안내 할 사람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서울에서 보수골까지 안내할 사람을 뜻합니다 주교님을 다시 뵙는 기쁨을 누릴 날을 기다리면서 주님 안에서 주교님의 겸손한 종임을 맹세합니다.    (글 출처- http://rijemin.com/)

 

명례성당 종탑

 

명례성당  

 

명례성당

 

명례성당

 

명례성당

 

명례성당

 

명례성당 성모상

 

명례성당 내부

 

명례성당 내부

 

명례성당 내부

 

명례성당 내부 제대 

 

마산교구 명례 성당에서 바라본 낙동강 모습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 생가

 

 

1828년 밀양의 명례에서 태어나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며 살았다. 낙동강을 건너는 명례 나루터에는 일찍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정착했고, 그들로부터 신앙을 전해 받은 듯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장사하러 갔다 오던 중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밀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를 안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한 푼도 주지 말라.”며 대구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형을 받으면서도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했다. 결국 1866년 3월 31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 후 순교자의 아들인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왔지만 지방 유지들과 신씨 문중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고, 1975년 12월 진영 본당 신자들에 의해 본당 공원묘역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신석복 마르코는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시성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 생가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 생가

 

 

 

 

마산교구 진영 성당 공원묘지 야외제대, 옆에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의 묘가 있다.

 

마산교구 진영 성당 공원묘지 입구

 

마산교구 진영 성당 공원묘지 야외제대 옆에 있는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의 묘

[출처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홈페이지]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의 묘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의 묘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의 묘

 

약도  (출처- http://paxkorea.kr/)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