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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 (광양시 진상면 황죽리)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09. 3. 17.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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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     (이하 사진출처- http://cafe.daum.net/freepig08/CG0J/29)

 

선교사가 아닌 일반인들에 의해 전남 동부지역 최초로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광양시 진상면 황죽리에 2008.5.28 건립된 기념관이다.  “광양시 기독교 선교 백주년 기념관”은 2002년 12월 (사)광양시기독교선교1백주년기념사업위원회 구성을 시작으로 2006년 8월10일 신축공사 착공예배를 드린 이후 2008.5.28일 오후 2시 광양시 진상면 황죽리 웅동마을에서 개관식이 있었다. 광양시가 총 사업비 39억 원을 들여 건설한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은 연면적 2,823.19㎡, 건축면적 1,069.03㎡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다. 기념관에는 각 층별로 한국선교역사, 광양지역선교역사,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순교자기념관에는 순교자 214명의 영정과 유물이 안치되어 있어 한국 기독교 선교역사의 애국정신과 순교정신을 고증하고 있다. 기념관은 전시실을 비롯해 대예배실, 숙소, 휴게실 등을 갖추고 있어 교계행사와 문화행사, 수련회 장소로도 사용되고 있다.

 

광양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

 

광양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게 된 유래를 보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일본으로 도망치려던 일본난인을 인천까지 뒤쫓아가 죽이고 웅동마을로 숨어든 한태원씨를 잡기 위해 광주에서 한 관리가 웅동마을에 파견된다. 어느 날 관리가 도박을 일삼는 주민들을 보고 “광주에 가면 ‘야소교(예수교의 음역어)’가 새로 들어왔는데 이를 믿으면 도박을 끊을 수 있다”며 광주 양림동 책방에서 일하는 조상학 목사(1877∼1950·공산당에 순교당함)를 소개한다. 이에 동갑내기(당시 40세)였던 박희원, 서병준, 장기용이 1904년 광주까지 3일 길을 걸어가 조 목사로부터 복음을 듣게 된다. 광주에서 복음을 접한 3명은 웅동으로 돌아와 집 한 칸을 빌려서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복음의 시작이다. 이곳이 광양지역 첫 예배당인 웅동교회다. (그러나 현지 신황교회는 2005년 선교100주년기념관을 세우고 신황교회가 광양 최초의 교회라는 자료를 전시하며 역사 왜곡을 주장하고 있다) 사랑방 예배는 교인 수가 점차 늘어나고 웅동마을에 사는 19가구 전부가 예수를 믿게 되는 기적적인 일이 벌어진다. 이에 1905년 3월 인근 신황리에 한옥 8칸 목조건물로 신황교회를 지어 이사했다. 이후 웅동교회는 2차례, 신황교회는 3차례 각각 증·개축되어 각각 예배를 드리고 등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양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 

 

 

 

 

 광양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탑, 순교기념비

 

광양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탑, 순교기념비    

 

기념관 앞에는 일제 강점기 뿐만 아니라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순교한 광양출신 순교자 안덕윤과 양용근, 조상학 목사의 순교 기념비가 건립돼 순교정신을 기념하고있다

 

광양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탑

 

순교추모비

 

순교자 안덕윤 목사 추모비

 

순교자 安德允(안덕윤 또는 德潤·53) 목사 순교기념비

 

안덕윤 목사  (출처- http://kcmma.org


1897년 11월 22일 전남 광양군 진상면 원당리에서 태어났다. 성경학교 신학교 시절에 광양의 농촌교회, 평양의 여러교회 전도사로 시무 1939년 평양신학교를 34회로 졸업하고 1940년에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광양중앙교회 담임으로 시무하였다. 말씀의 능력과 신유의 은사가 있어 부흥사협회에 가입하고 부흥사로 파송받았다. 1943년 목포지방에서 부흥회하든중 "천황은 신이 아니다, 2-3년내에 일본이 망하고 조선도 해방을 맞는다"고 한 설교가 일경의 귀에 들어가 2년 6개월 옥살이하던중 해방을 맞았다. 안목사의 예견은 정확했던 것이다. 출옥한 안목사는 고성읍교회 죽산교회를 거쳐 6.25 한해 전에 대창교회로 옮겨 시무하다가 6.25를 맞은 것이다. 아내가 피하기를 권했지만 "살면 충성이요 죽으면 순교자의 면류관을 받는 것인데 무엇을 염려합니까."? 하며 담대하게 교회를 지켰다. 물밀듯이 밀어닦친 공산군은 대창교회를 접수해 인민군 임시본부로 사용했고 교회 사택도 쓸만한 물건은 모조리 가지고 갔다. 1950년 9.28 수복으로 서울을 탈환하는 등 전세가 180도 바뀌었는데도 김제는 여전히 인민군이 동리를 장악하고 철통같은 수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남포에서는 동리 청년들이 성급하게도 라디오 방송을 듣고 태극기를 만들어 흔들며 농악대를 앞세우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다가 졸지에 40여명의 청년들이 인민군에 의해 체포당해 교회당에 감금되었다. 이때 안목사도 배후조정 가능자라고 하여 함께 연행돼 함께 교회 당에 감금되었다가 40명 청년들과 함께 총살당하고 인민군들은 퇴각하고 말았다. 1950년 9.28 수복시에 농악대를 앞세우고 "대한민국만세"를 부르는 청년들의 배후조정 기능자라고 하여 함께 연행하여 교회당에 감금당했다가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40여명의 청년들과 함께 안목사를 끌고 가다가 총살하고 퇴각했다.

 

순교자 양용근 목사 추모비

 

순교자 양용근 목사(1905 - 1943) 순교기념비

 

양용근 목사   (출처- http://kcmma.org


전남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 출생으로 신사참배 반대로 광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 순교한 장로교 목사요 교육자이다.

1. 목회에 투신 결심

양용근 목사는 전남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에서 출생하였다. 호적상의 이름은 용환이라고 되어있으나 교회에서 용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양용근은 새 시대를 열어갈 열망에 부푼 꿈을 안고 신학문에 대한 동경에 순천에 나가서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다짐하고 매산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는 이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게 되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으로 유학의 길에 올라 일본의 니혼에서 법률을 전공하였다. 그런데 그가 법률 계통에서 꿈을 실현하리라는 본래의 의도를 꺽고 신학을 공부하게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일본에 유학하고 있을 때 소위 관동 대지진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1923년의 일이었다. 일본 현지 토오쿄오(동경)와 요코하마 일원에 걸쳐 대지진이 일어났다. 간악하기가 이를데 없는 일본 위정자들은 이 큰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을 수습할 계책을 꾸미는데 한국인을 그 제물로 사용하기로 하는 끔직스러운 대사건을 일크키게 된다. 일본인들은 이곳에 6천여명의 우리 교포에게 무차별 대학살을 자행하는 소름끼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대폭동을 일으켜 방화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와 같은 참변을 당하게 만든 것이다. 마치 네로 황제가 로마의 대화재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방화범의 허물을 씌워 기독교를 박해하던 일이 금세기 일본에서 일어났는데 이 화를 우리 민족이 당하게 되었다. 여기서 지진 사건 자체도 자체려니와 여기에다 교포 대학살 사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된 양용근은 내 생명을 구해 주신 하나님께 남은 생을 주께 바치기로 서약하고 여기서 일생을 목회에 투신하기로 결심한것이 동기가 되었다.

2. 교육과 목회에 헌신

이리하여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다. 곧장 고향인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로 돌아온다. 돌아오자마자 가산을 있는대로 모두 정리하여 고향 마을에다가 배울 수도 없고 배우지 못한 가난과 불운에 빠져있는 후진을 양육하기 위하여 오사학원이라고 간판을 걸고 학교의 문을 열었다. 교과목은 민족혼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한국사와 자존이란 없다는 신념으로 한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 인격양성이니 이를 위해 성경을 주요 과목으로 공부시켰다. 1930년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고향에서 이같이 헌신 봉직하다가 이미 계획하고 있었던, 하나님과의 서약을 지키기 위하여 평양에 있는 장로회 신학교에 1933년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아마 학교도 교회도 열심으로 돌보기 되자니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어쨌든 신학을 졸업하기까지는 만 6년이나 걸려서 1939년에야 졸업을 하게 되었다. 장로회신학교 제34회의 졸업생이 되어 졸업하던 그해 순천노회에서 나덕환, 안덕윤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목사가 되면서 그의 고향인 광양읍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첫 목회의 짐을 풀었다. 그후에 여수에 있는 해양원교회로 옮겨 시무하였다.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복음인 이 사랑을 가난한자와 약한 자들을 위하여 재산을 털어 오사학원을 열고 교육에 투신한 바가 있었는가 하면, 이번에는 병들고 소외된 불쌍한 자들을 위하여 애양원교회에서 성역을 감당하다가 다시 고흥에 있는 길두교회에 거쳐서 구례읍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3. 일제에 항거하다 순교

이때에 일제는 그 말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민족교회들을 들볶고 못살게 굴었다. 이러는 중에 제일 못할 일은 제1,2,3계명을 모두 범할 이른바 신사참배 강요였다. 우리 교회가 일본의 잔인한 박해를 받아온 역사는 일본의 이 신사참배 강요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것은 일본 저희 왕이나 무사들의 영을 섬기는 신사에 전국민을 참배하게 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그 충성을 시험했고 이같은 국민의례를 통하여 저들 군국주의의 정신적 단결을 도모하려는 간악한 야심의 소행이었다. 물론 이것은 장로교회에서는 전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 철저했다. 1931년 9월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이 통과되고 이를 부산일보가 보도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1936년 초에 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기독교 학교의 폐쇄를 원칙으로 삼고 절대반대운동을 펴다가 1938년에야 평양 내외 학교와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 및 정신학교들이 자진 폐교하면서 결사 반대의 뜻을 굳히고 일부 선교사들은 출국 명령을 받기도하는가 하면 1938년 전국의 노회가 모이기 시작하자 일본의 조직적 파괴공작으로 각 노회는 개회벽두에 우선 신사에 몰려가 참배를 솔선수범하도록 강압을 가했다. 순천노회가 여기 첫 희명을 울렸다. 이로써 순천노회는 1941년에 2차에 걸쳐 목사,장로를 구속하였고 또 거기에 순천 중앙교회를 중심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모임인 원탁회 사건이 발생하게 되자 순천노회 소속 목사와 장로들이 모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뜨거운 신앙심과 민족의식이 남달리 투철했던 양목사는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의 인면수심의 극악한 만행을 목격한 그로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가는 곳마다 이를 역설하던 중에 1940년에 고흥 지방의 연합 도사경회에서 이 신사참배 반대를 주장하였다. 이것이 결국 반일사상과 불경죄로 체포되어 광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1943년 차가운 12월 5일에 신절을 끝까지 지키면서 영광스럽게 생의 최후를 마쳤다. (출처- http://www.westsc.org)

 

순교자 조상학 목사 추모비

 

순교자 조상학 목사 순교기념비

 

조상학(趙尙學) 목사 (1877-1950) (출처- http://kcmma.org


전남 승주군 송광면 출생으로 일제에 투옥되고 공산당에 순교당한 장로교 목사이다.

1. 도도한 유학도인 조상학과 전도인 지원근과 선교사 오웬의 만남.

조상학목사는 1877년에 전남 승주군 송광면에서 양반집 조형섭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생활정도도 풍요롭고 행세하는 양반의 가문에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별 어려움없이 순탄하게 살아왔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한문을 수학하면서 유교적 인생수업을 훈육받아 아직 젊기는 했지만 당시로 보아서 또 그렇게 어리지만도 않은 나이였다. 또 타고난 세도집 가문에서 고고ㅓ학게 전통적 선비로서 다른 학문이나 사상에 젖어들거나 수용할 만한 데라고 바늘끝 꽂을 만큼도 없는 인품에 꼿꼿한 이 젊은이에게 당시 감히 누가 "예수"소리를 할 수 없었고 또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따로 있지 그에게는 어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믿음의 저력과 끈질진 한 사람, 붙잡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 전도인이요 조사였던 지원근이 있었다. 이지 조사와 함께 물러설 줄 모르는 한 사람 서양인 선교사로 오웬(Owen,Clement Carrington)이 있었다. 오웬은 물론 하나님의 뜻하신 바이나 개인적으로 말하면 사람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도에 관록이 있었다. 벨 선교사와 함께 개척한 교회를 보면, 목포의 양동교회를 비롯, 송정리교회,해남군 선두리교회, 보성군 신천리교회,육곡교회,양동교회,운림리교회,양주 양림교회,완도군 관산리교회, 나주군 내산교회,방산리교회,장흥군 진목리교회,고흥군 옥하리교회,화순군 화순읍교회, 광양군 광양읍교회 그 밖에도 15개처 교회를 세운바 있는 이런 사람이다.

2. 끈질긴 전도에 무릎을 꿇어

조상학이 아무리 고집센 젊은 선비라고도 해도 오웬이나 지원근 같은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도 없었다. 또한 오웬은 1898년 11월에 한국선교사로 내한한 이래 벨9Eugene,Bell:배우지)선교사와 함께 목포 선교를 시작하는 한편 목포진료소를 개설했고 의사이기도 한 그는 광주선교부를 시작하여 순천,광주,목포 등지를 순회하며, 의료 및 복음선교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람으로 그 때만 해도 그 신기하기만 한 그 서양 의학의 기술이었다. 이런 헤택을 주는 이 선교사가 비록 이국적인 외인이기는 하지만 무척이나 유식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조상학은 그래도, 이쯤은 되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양반 유학도의 입장에서 예수를 받아들일 만한 취지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학력과 인격에 끈질긴 전도에 드디어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3. 성령의 인도, 전도에 열심다해

그는 광주에서 학습을 받고 2년 후엔 1909년 벨(Bell Eugen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완전히 거듭난 사람으로 이제는 성령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깊이 있는 성경을 배우면서 연구하는 중에 그토록 힘들여 복음을 받아들인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나도 전도인이 되어야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때 이천만 동포를 다 전도할 만한 부푼 마음과 성령의 인도로 뜨거워진 마음이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자기가 그렇게 어렵게 받아들였던 것은 두분의 전도자들에게 고마움과 함께 끝낸 인내와 성실로 그 전도를 자신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큰 덕이 아닐 수가 없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그는 개인적으로 전도에 열심을 다했다. 이같은 결과가 열매를 맺어 여천군 율촌면 장천리의 조의한이 예수를 믿던 날로부터 또 그런 열성이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동네에다가 장천리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또 다시 조의환과 함께 또 힘을 합해 한태원에 전도하자 그도 예수를 받아들여 광양군 신황리에 신황교회를 세웠다. 조상학의 전도열심은 더욱 그 열기를 더해 이번에는 보성지방의 최초의 교회인 무만동교회도 정태인과 김일현 그에게 전도받아 세운 교회였다. 이 중에 정태인은 목사가 되어 순천 삼미교회를 설립하고 1917년 평양장로교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노회에서 안수를 받아 보성군 벌교지방 목사로 무만교회를 비롯 낙안 평촌교회, 고흥읍교회 등을 순회 인도하다가 순천읍교회, 무만교회를 두루 시무하면서 제주노회로 옮겨 모슬포교회,삼양교회,월막교회, 고산교회를 시무하면서 목회에 큰 공을 세운바 있는 분이었다.

4. 목사안수를 받음

그리고 순천읍교회도 조의환과 함께 전도하여 최집사님과 최정의가 믿고 세운 교회로서 이와 같이 조상학은 전도받은 자가 일대에 머문 자가 하나도 없이 전도받아 믿으면 더 많은 전도를 하는 사람들이 되곤 하였다. 이 와 같은 업적은 그로 하여금 1911년에는 광주의 숭일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학원전도를 쉬지 않았다. 1916년에 순회전도사로 부름을 받아 각 지방을 순회전도하는 중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입학하여 1923년에 제16회로 졸업을 하고 바로 그 해 순천노회가 전남노회로부터 분립하면서 최초의 목사로 안수를 받아 광양읍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또 순천노회의 최초의 총대가 되어 제12회 총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율촌교회,1940년에는 경남하동읍교회, 1946년에는 여천 덕양교회에 시무하였다.

5. 신사참배 거부로 연행됨

조목사는 1940년 순천노회 청년 조직 단체인 원탁회 사건으로 여러 목사 장로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는 순천중앙교회에서 청년들이 신사참배에 불참하고 항거할 것을 뜻하고 애국적 신앙사수의 목적으로 힘으로 모아 조직적으로 반대할 것을 결의한 조직체였는데, 황두연 장로를 비롯하여 목사로는 조상학, 양용근,김정복, 김상두,오석주,김형제,나덕환, 선재련,김순배,김형모등과 장로로는 박창귀,선춘근,김원식 장로등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때에는 조 목사는 청력이 약해 취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자 그대로 석방시킨 일도 있었다. 그때 벌써 연세가 70고개에 달한 노구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나날을 보내던 중에 이 민족에게도 일제의 패망으로 그 굴욕적이고도 치욕스러운 결박에서 해방이 되는 날은 왔다.

6. 교회를 사수하다 순교

그러나 북한 땅은 공산정권으로 인하여 수난을 겪었지만 이제 우리 세상인가 하는 날들은 꿈결같이 사라지고 민족적 사상이 좌우로 갈려 편할 날이 없는 나날이 계속되던 중에 6.25가 터졌다. 남단 이곳에도 공산침략의 태풍이 거세게 소용돌이 쳤다. 제직들의 강한 권유로 피신을 종용했으나 강권을 뿌리친 채 막무가내로 교회를 사수하겠다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대신 희생할 테니 나의 시체는 저 산에다가 묻어주시오" 굳은 결의로 주의 피에 참례하는 성찬을 베풀고 난 그후 얼마 안되어 여수 내무서에서 보낸 3명의 서원에게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예수 전하는 일을 인지 않았다. 70일을 감방생활을 하고 그 해 9월 28일 10리 밖에 이는 미평공동묘지로 끌려갔다. 이 날 함께 동역하던 손양원 목사의 뒤를 따라 그 날 같은 곳에서 손 목사의 순교를 보면서 그 뒤를 따라 살해되니 73세를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썼다. (출처: http://kcm.co.kr/person/person_k013.htm)

 

 

<1층 전시실- 한국 기독교 역사관>

 

1층 전시관 입구 

 

한국기독교역사관

 

 

기독교수용과정

 

1층 전시실

 

1층 전시실

 

 

 

 

 

 

진도군

 

소외된자를 위한 기독교

 

 

 

 

전시실 천장         (이하 사진출처- http://cafe.daum.net/freepig08/CG0J/29)

 

 

<2층 전시실- 광양 기독교 역사관>

 

전시실 입구 

 

  

전시실

 

웅동교회 두 이야기 

 

 

신황교회 설립

 

광양의 복음 전래 역사

 

 

 

 

 

 

 

 

 

 

 

전시실

 

 

 

3층에서 내려다본 2층 전시실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소래교회 사진

 

 

 

 

 

<3층 전시실-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입구 

 

전시실 입구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한국 기독교 순교자 명단

 

 

순교자 사진

 

 

 

 

 

 

 

 

 

 

 

  

순교자 명예의 전당, 조상학 목사

 

순교자 명예의 전당, 조상학 목사

 

순교자 명예의 전당, 조상학 목사

 

순교자 명예의 전당, 조상학 목사

 

 

 

 

 

순교자 조상학 목사 유품

 

순교자 조상학 목사 유품 

 

순교자 조상학 목사 유품  

 

명예의 전당, 양용근 목사

 

명예의 전당, 양용근 목사

 

명예의 전당, 양용근 목사

 

 

 

순교자 양용근 목사 유품

 

순교자 양용근 목사 졸업증서

 

순교자 양용근 목사 졸업증서

 

순교자 양용근 목사 졸업증서

 

명예의 전당, 안덕윤 목사

 

명예의 전당, 안덕윤 목사

 

명예의 전당, 안덕윤 목사

 

명예의 전당, 안덕윤 목사

 

명예의 전당, 안덕윤 목사

 

 

 

순교자 안덕윤 목사 유품

 

순교자 안덕윤 목사 유품

 

순교자 안덕윤 목사 유품

 

 

 

영상시설

 

3층에서 내려다본 1층 십자가 조형물

 

 

<기타 시설>

 

1층 대강당

 

대강당           (이하 사진출처- http://cafe.daum.net/freepig08/CG0J/29)

 

대강당

 

숙소

 

숙소 

 

식당

 

식당

 

식당

 

<웅동교회, 웅동마을>

 

광양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 이정표    (출처- http://blog.naver.com/choipress/90034530285)

 

주변 경치  

 

주변 경치  

 

선교기념관 뒤로 보이는 웅동교회

 

웅동교회

 

웅동교회, 광양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 입구에서 오른쪽 뒤로 있다.  

 

웅동교회

 

교회 입구

 

웅동교회

 

웅동교회

 

교회 내부

 

교회 내부

 

내부 전시사진, 서현식 목사 학창시절

 

장기용 장로 가족사진

 

웅동교회 출신 교역자들

 

1960년대 교회학교 봄소풍

 

웅동교회 교인

 

교인

 

과거 웅동마을

 

교회 집회

 

서병준 장로 묘소앞

 

 

2003년

 

신황교회 입구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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