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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리 성지성당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지순례/한국 성지(카톨릭,기타)

by baesungsoo 2009. 6. 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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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 재 방문시 찍은 사진을 업로드, 코로나 시대 야외 미사처도 찍었습니다.

 

성당 후편 십자가의 길 14처

 

박물관 후면

 

박물관 전면

 

32 순교자 현양비 장소에 텐트를 치고 코로나 야외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박물관 

 

32 현양비 측면

 

32 현양비 후면

 

피정의집

 

성당 오르는 길

공세리성당     

 

아산만에 인접한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조 때 아산·서산·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문의·옥천·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곡 창고지(貢稅穀 倉庫地) 있던 곳이다. 이 창고 건물은 1523년(중종 18년)에 개설됐다가 고종 때 폐지됨으로써 80간짜리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1897년 구(舊)본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공세리 성당은 대전교구에서 두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다. 현재 성당이 위치한 8000여 평의 부지는 이같이 세곡을 임시 보관하던 자리가 가톨릭 신앙 전교의 전진기지로 바뀌었다.   (글 출처-  http://www.paxkorea.co.kr) 

 

공세리성당 

1895년 당시에는 동네 한가운데 있는 가정집을 성당으로 사용했었으나 1897년 창고 건물을 헐고 구 성당 건물(현 사제관)과 구 사제관 건물(현 회합실, 창고)을 짓게 되었다. 초대 본당 신부이었던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성당을 설계하고 지휘 감독하여 1922년 10월 8일 현 성당을 완공하였다. 공세리 본당의 오늘이 있기까지 초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드비즈 신부는 2대 기낭 신부가 1년 만에 전임하면서 초대에 이어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해 1930년까지 34년간 공세리 본당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발전의 터를 닦았다. 그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로 멀리서까지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던 현재의 성당 건물은 그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면서 지은 성당이다. 그는 지역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의술을 활용, 한약을 조제하였으며 이명래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요한)씨에게 고약을 비법을 전수시켰다.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는 한국명인 '成一論 고약'으로 불렸었다. 드비즈 신부는 1930년까지 공세리에서 사목하였다.

 

 

 

공세리성당

 

 

공세리성당

 

 

 

 

공세리성당

 

 

 

 

공세리성당

 

 

 

 

성당 오르는 길

 

 

 

 

성당 내부

 

 

내부

 

 

 

 

제대

 

 

제대

 

 

 

 

제대

 

 

제대 

 

 

우측 옛 제대

 

 

좌측 옛 제대

 

 

강단 보2

 

 

 

 

독서대 강단보1 

 

 

 

 

제대 위 베네딕토 성인상

 

 

 

 

예수성심상

 

 

 

 

성모상

 

 

 

 

옛 제대와 성모상

 

 

성모상

 

 

내부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내부 출입구

 

 

 

 

성지 성당 박물관

 

 

 

2008년 9월에 개관한 공세리 성지 성당 박물관은 한국 교회의 태동과 박해사, 순교자들의 모습을 간직한 박물관이다.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44호인 옛 사제관을 개,보수해 문을 연 박물관은 교구 최초의 감실을 비롯해 교회의 역사를 담은 1500여점의 유물과 본당에서 일생 동안 사목한 에밀 드비즈 신부의 유물, 신유,병인박해 당시 이 지역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 (이하 글 참조- 이승환 기자/ 2008.9.11 카톨릭신문) 

 

 

 

 

 

 1900년에 촬영한 공세리 본당 옛 사제관 사진입니다. 출처 : 교구청 문서고

 

 

 

 

 

1900년에 촬영한 공세리 본당 옛 사제관   (출처-http://www.djhistory.org)

 

 

 

 

 

 

 

 

 

 

 

성 가정상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비

 

 

 

 

성 에밀리오 신부 공덕비

 

 

 

 

성 에밀리오 신부 공덕비

 

 

 

 

성모상

 

 

 

 

성모상

 

 

 

 

성모상

 

 

 

 

성체조배실

 

 

 

 

성체조배실

 

 

 

 

성체조배실

 

 

 

 

성체조배실

 

 

 

 

성체조배실

 

 

 

 

32위 순교자 현양비, 순교자 현양탑

 

 

32위 순교자 현양비

 

 

 

2008년까지는 28위 순교자였으나 박물관 작업중에 4위의 순교자가 더 발견되어 2009년 현재 32위 순교자 현양비가 세워졌다

 

 

28위 순교자 납골묘      

 

 

 

2007.8.26일 새로 세운 순교자 납골묘로 공세리본당 출신 순교자 28위의 유해와 묘석이 탑 아래에 봉안됐고 탑 위쪽에는 도자기 테라코타 부조 작품인 '28위 순교자'가 설치됐다.  

추가로 발견된 4위 순교자는 아직 봉안되지 않았다.

 

 

 

 

 

 

 

 

 

 

 

 

 

 

 

<순교자 명단> 

(출처-  http://gongseri.yesumam.org)

 

 

 

추가된 4인 순교자 (2008년)

 

1. 하 발바라 (1835.3 아산 반대마을 거주, 해미에서 투옥, 석방 후 아산에서 병사)

 

26. 함 요한 (45세, 아산 뒷내 거주, 공주에서 순교)

 

31. 장 요한 (50세, 아산 등골 거주, 서울에서 순교)

 

32. 김 바오로 (52세, 수원 밀머리, 현 밀두리 거주, 수원에서 순교)

 

 

 

 

28위 순교자 납골묘

 

 

 

 

도자기 테라코타 부조 작품 "28위 순교자"

 

 

 

 

28위 순교자들의 납골묘

 

 

 

 

맹고개 박씨 3형제 납골묘

 

 

 

1988년 9월 20일 성당에서 서남쪽으로 5km 떨어진 해암리 맹고개 3형제 순교자 묘를 성당 구내로 모셨다. 이분들은 공세리 성당 출신들로서 박의서(사바), 원서(마르코), 익서(세레명 미상)이며 1867년 정묘년에 순교했다. '병인치명사적' 제 11권에 "병인풍파를 당하여 3형제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며 원서 말하되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노라'하며 즐거워... '동생 들어보소. 우리 3형제 함께 올라가 위주 치명하자'하고 조금도 변함없이 3형제 수원으로 올라가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 박의서 사바스

 

 

 

후덕한 인품과 굳은 신앙심으로 죽음이 두려워 신앙심이 흔들리거나 배교하려는 마음없이 깨끗하게 주를 증거하고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다. 박의서 3형제가 수원 걸매리에 살았으며, 그 후손들이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에서 살고있는 밀양 박씨 집안임을 알수 있다. 이 후손들은 박해를 피해 일부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으로, 일부는 충남 강경으로, 또 일부는 평택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 후손들 중에서 박상래, 박성팔, 박노헌, 박중신 신부 등 네 분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 박원서 마르코

 

 

 

한국교회사 연구소에서 정리 중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제3부]에 의하면 그는 본디 태중 교우로되 마음이 우람하기로 수계를 잘못하고, 노름도 약간하고, 서털구털 지내므로 그 형님이 항상 걱정하며 살다가 병인년에 3형제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갈 때 말하기를, “내 평생에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하고 즐거워하며, 장차(將差)더러 “나를 이번에 올려 가거든 갑작스럽게 하지 말고 바로 죽여주면 우리 주님께로 가서 살겠다.“하며, 오히려 그 형님과 아우를 권면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교하였다.

 

 

 

◆ 박익서 (세례명 미상)

 

 

 

(비문) 천성이 곱고 순결하여 오로지 한 마음으로 천주를 공경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들 삼형제와 이 마리아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가 1867년 3월 8일 순교하였다. 시체는 그 당질 웅진씨 바오로와 양성우씨가 거두어 아산시 인주면 맹고개 선영에 안장하였다가 1988년 9월 20일에 맹고개 묘지에서 공세리 본당으로 이장하였다. 박상래 신부의 증조부이시다. 이곳에 안장돼 있는 박씨 3형제는 겨우 그 이름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몇 가지 행적이 있지만 어떻게 살다가 죽어 갔는지 그리 상세하게 전해 내려오지는 않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다른 많은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2. 밀양 박씨 집안의 순교자들 (7명)

 

- 이 마리아 (박원서의 부인)

 

- 박인서 (박의서의 사촌동생)

 

- 박제환 기천 베드로

 

- 박홍갑 (박의서의 아들)

 

- 조 모니카 (박덕여의 부인)

 

- 박화진 알렉산데르 (박덕여의 아들)

 

- 이씨부인 (박의서의 종제수)

 

 

 

3. 박씨 외의 걸매리 지방 순교자들

 

- 김중백

 

- 김지득

 

- 이학습

 

- 김장복 (박덕여의 생질)

 

- 김씨 (김장복의 아내)

 

- 오인악

 

- 장원심과 그의 아들 장팔보

 

- 김흥서 토마 - 지금의 수원교구 남양성당에 성지화

 

- 김 필립보(비리버)와 그의 아내 박 마리아 - 남양에서 순교

 

- 최사도 요한

 

 

 

출처 : [무명 순교자의 뿌리를 찾아서, 걸매리 밀양박씨 순교자연구] 하성래 지음,

 

가톨릭 출판사 1995년 9월 25일 초판인쇄

 

 

 

 

박씨 순교자 삼형제 추모비

 

 

 

 

박씨 순교자 삼형제 추모비 

 

 

피정의집

 

 

 

 

피정의집

 

 

 

 

피정의집 예수성심상 

 

 

 

 

피정의 집

 

 

 

<야외 십자가의 길>

 

 

 

 

1처

 

 

 

 

2처

 

 

 

 

3처

 

 

 

 

4처

 

 

 

 

5처

 

 

 

 

6처

 

 

 

 

7처

 

 

 

 

8처

 

  

 

 

9처

 

 

 

 

10처

 

 

 

 

11처

 

 

 

 

12처

 

 

 

 

13처

 

 

 

 

14처

 

 

 

 

공세곳창지 터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조 때 아산·서산·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문의·옥천·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곡 창고지(貢稅穀 倉庫地) 있던 곳이다. 이 창고 건물은 1523년(중종 18년)에 개설됐다가 고종 때 폐지됨으로써 80간짜리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1897년 구(舊)본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공세곳창지 터 

 

 

 

 

군 지정 보호수

 

 

군 지정 보호수

 

 

군 지정 보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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