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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벨라 동굴 (Cave of Machpelah, Hebron,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무덤)

성지순례/이스라엘

by baesungsoo 2015. 6. 1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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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브론                     (이하 사진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현대 이스라엘에서 중앙 산맥을 따라 나자렛에서부터 브에르 세바까지는 60번 국도가 이어지는데 이곳은 이스라엘 족장시대 즉, 창세기 설화로 이어지는 구원 역사의 핵심 지역에 속한다. 헤브론(Hebron 또는 Hevron)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유대 산악지역의 족장도로인 60번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베들레헴에서 브에르 세바 사이에 있다. 헤브론은 200,000명(2017년 자료, 유대인 약 800명)의 아랍인들이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요르단 강 서안(West Bank)에 있는 도시로 해발 930m에 위치해 있다. 해발 900m-1000m 지대인 헤브론은 현재도 포도의 특산지이며 농산물 거래 시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유리세공과 토기, 가죽 제조업이 발달 했고 팔레스타인 경제의 중심지이다. 헤브론은 족장들의 무덤이 있는 “막펠라 무덤”과 아브라함의 상수리 나무가 있던 “마므레”(Mamre)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곳이다.

 

아랍마을

 

아랍마을

 

십자군들이 만든 성벽

 

십자군들이 만든 성벽

 

헤브론 시장

 

헤브론 시장

 

 시장 안쪽, 막펠라 동굴과 가까운 곳 (사진 왼쪽부분)

 

위장막으로 쳐진 곳은 유대인 정통파가 사는 집으로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 군이 주둔하고있다. 인근 상가는 폐가가 되었다.

 

이슬람 지역에서 막펠라 동굴쪽으로 나가는 출구

 

이슬람 지역을 통과하여 나오는 곳(오른쪽 검문소)

 

막펠라 동굴의 회교사원 종탑(미나렛)


이슬람 지역을 통과 하여 나오면 바로 이슬람 사원을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다. 막펠라 동굴의 회교사원 종탑(미나렛) 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 거룩한 곳으로 공경하다 보니 처음에는 유대교 회당과 성당 그리고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는 다툼의 장소가 되었다. 현재 막펠라 동굴의 출입구는 유대인 지역과 이슬람 지역의 출입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사악의 홀이라고 부르는 곳은 이슬람의 아브라함 사원이 들어서 있는데 막펠라 동굴에서 가장 큰 방으로 이사악과 레베카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고 이슬람 사원 입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이슬람 사원과 유대교 회당을 경계로 중간에는 작은 방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아브라함의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의 무덤이다. 이슬람 사원 쪽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무덤을 보면 좀 더 개방된 형태로 볼 수 있지만 유대교 사원 쪽에서는 철조망 창살을 통해서 들여다 볼 수 있다. 

 

이슬람 사원으로 들어가는 검문소. 막펠라 동굴에 대한 치안은 유대인 군인들이 관할하고 있다.  

 

헤브론 막벨라 동굴


헤브론은 성경에 나오는 도시 중 가장 오래된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이집트의 초안보다 7년 먼저 건설되었다고 언급되며,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리고 다윗과 관련되어 있어 유대인들에게는 4대 성지[예루살렘, 헤브론, 티베리아스, 제파트(사페드)] 중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성지이며 조상들의 영원한 고향이다. (민수 13,22) 창세기에서 헤브론은 아브라함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언급되는데 아내 ‘사라’가 죽음을 맞이하면서이다. 헤브론은 처음에는 가나안 땅 ‘키르얏 아르바’라고 불렀다. (창 23:2)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75살의 나이에 정든 교향을 떠난 아브람이 떠돌이 유목민의 삶을 청산하고 헤브론에 정착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내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그를 위한 무덤을 장만하면서부터 이다.(창23:16) 헤브론의 옛 이름인 ‘키르얏 아르바’(Kiryat Arba)는 ‘아낙 사람 아르바’의 동네라는 뜻이라고 여호수아기는 설명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넷’이라는 ‘아르바’와 ‘동네’를 의미하는 ‘키르얏’의 합성어로 전승에서는 막펠라 동굴에 묻힌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아담의 무덤 네 쌍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다른 설명으로는 성경 시대에 동맹을 맺은 이 지역의 4개 정착지나 또는 언덕 위에 세워진 4개의 도시에서 유래 된 것으로 본다.

현재 헤브론은 팔레스타인 서안에 있는 아랍인 도시의 공식 지명이며, 반면 ‘키르얏 아르바’는 1968년부터 유대교 정통파들이 유입되면서 막펠라 동굴에서 약 1km 북서쪽에 1970년대 초에 건설된 유대인 정착촌을 이르는 지명이다. ‘헤브론’이라는 이름은 서부 셈족어에서 유래하는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헤브론의 철자 “Hebron'에서 각 음절 ‘hbr'은 ‘동료’, ‘결합’, ‘친구’ 또는 ‘떠들썩한 것’이라는 뜻의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는 ‘동맹체’라는 뜻이 더 적합하다. 아랍인들은 헤브론을 ‘아브라함 알-칼리’(Ibrahim al-Khalil)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친구 아브라함’을 의미한다. 한국어로 번역된 이슬람 경전인 ‘꾸란’ 제4장 니싸아 125절은 “가장 훌륭한 믿음이란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며 아브라함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반려자로 택하셨노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슬람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의 친구로 선택하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헤브론은 족장들의 동굴 위에 지어진 대단히 유명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는 모두 경전에서 아브라함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세 종교에게 모두 거룩한 장소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를 위하여 히타이트 사람들에게 초하르의 아들 에프론을 설득하여 막펠라 동굴을 양도해 주길 간청하여 사백 세켈을 주고 막펠라에 있는 아프론의 밭을 산다(참조 창세 23,1-20). 아브라함에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와 죽은 사라를 안장하기 위하여 자신의 소유로 산 땅이 헤브론에 있는 막펠라의 동굴인 것이다. 그 후 이 동굴에는 사라(창세 23,19)와 아브라함(창세 25,9) 이사악(창세 35,29)과 그의 아내 레베카(공동번역에서는 리브가로 번역; 창세 49,31), 야곱의 첫 부인 레아(창세 49,31)와 야곱(창세 50,13)이 순서대로 묻혔다. 참고로 야곱이 사랑하던 둘째 부인인 라헬의 무덤은 베들레헴 외곽에 있는 검문소 근처에 있다.

 

 

헤브론 막벨라 동굴


성벽 모서리 아래에 흰 옷을 입고 있는 정통파 유대인이 서 있는 곳에 출입 계단이있었고, 유대인들은 계단 7번째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슬람이 통치하던 시기부터 1967년 6일전쟁 이전까지는 유대인은 성전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 되었었다.

 

헤로데가 세운 성곽 위에 이슬람 종탑인 미나렛을 세워 이슬람 사원처럼 보이게 했다.


 (출처-https://biblia.co.il/%ed%97%a4%eb%b8%8c%eb%a1%a0-%eb%a7%89%eb%b2%a8%eb%9d%bc/)


헤롯 대왕이 헤브론에 건설한 웅장한 건물은 2,0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거룩한 땅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로 61m, 세로 36m, 높이 15m의 육면체의 건물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라를 매장할 무덤으로,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사용할 무덤으로 에브론으로부터 구입한 막벨라 굴 위에 서있습니다(23). 지금도 그 건물에는 막벨라 굴에 장사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 야곱과 그의 아내 레아를 기념하는 큰 돌들이 나란히 누워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적인 매장의 방식은 가족묘입니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세마포에 잘 싸서 동굴 무덤에 안치하고 나면 2-3년 뒤에는 세마포와 함께 시신은 모두 썩고 뼈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그 뼈들을 잘 수습해서 동굴 무덤의 한쪽에 쌓아 놓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아버지의 뼈와 아들의 뼈가, 아버지의 뼈와 어머니의 뼈가, 그리고 손자들의 뼈가 함께 뒤엉켜 쌓이게 되겠지요.  

이런 매장 방식은 유목 방식의 생활 풍습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날씨가 더운 광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의 부패가 빠르기 때문에 해가 떨어지기 전에 매장을 합니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경우는 집 주변에 가족들의 매장지로 사용하는 동굴 무덤에 매장할 수 있지만, 집을 떠나 하루 거리 이상의 장소에서 목축을 하던 중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 가족의 동굴무덤에 매장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맞이한 장소에 급하게 임시로 매장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급하게 매장을 한다고 해서 성의 없이 대충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내 가족의 시신이 광야의 동물들에게 훼손되지 않게 해야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주변에서 시신을 안전하게 보호할 만한 동굴을 찾는 것입니다. 일단 바위 굴이나, 그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곳에 안치하고 그 입구를 돌로 막아서 동물들이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게 합니다. 동굴이 없는 평지에서는 시신 위에 돌을 차곡차곡 쌓아 놓습니다. 동물들이 부패하는 시신의 냄새를 맡고 돌을 흩어버지리 못하도록 꼼꼼하고 튼튼하게 잘 쌓는 것입니다. 이렇게 급하게 매장된 시신 역시 2-3년 뒤면 뼈만 남고 모두 흙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면 양을 치러 나갔다가 그 유골들을 수습해서 가족 묘로 사용되는 동굴로 옮기는 것입니다. 결국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해서 급하게 매장되었으나, 시간이 지나 다시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죽음 뒤에 그 주검이 선조들이나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가는 가족 무덤의 매장 방식에 근거해서 왕들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에 열조와 함께 자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열왕기 27, 역대기 11). 선조들과 함께 한 동굴 무덤에 누웠다는 표현입니다. 

헤브론은 1900년대 초까지 다수의 이슬람 사람들과 상대적으로 소수인 유대인들 약 1만명이 평화롭게 섞여살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다가 1917년에 영국이 이스라엘 땅을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점차 이 조용한 도시가 거룩한 도시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헤브론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이슬람 사람들도 있었고,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유대교인들의 성장세가 이슬람의 성장세보다 더 급격히 많아지자, 이들 간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수는 아직까지도 이슬람 사람들의 수에 비해서는 비교할만한 수가 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에게는 늘어나는 유대인들의 수가 매우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급기야 1929년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67명의 유대인들을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 학살을 하면서 헤브론에서 지켜지던 아랍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을 실효지배하던 영국은 회당이 있던 마을에 살던 750여명의 유대인들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이들 모두를 헤브론 밖의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 시켰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헤브론 전역에 살던 유대인들을 강제이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800년 넘게 그 땅을 지키며 살아왔던 유대인들은 식민통치 시대에는 영국군에 의해서, 그리고 1950년 이후에는 헤브론을 실효 지배하던 요르단에 의해서 헤브론에서 강제 추방을 당했습니다.

헤브론에 다시 유대인들이 정착하게 된 것은 19676일 전쟁 이후입니다. 이스라엘이 헤브론을 실효 지배하던 요르단을 몰아내고 헤브론을 수복하면서, 헤브론에 살았던 옛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강제 추방 당하면서 땅과 건물을 몰수 당했던 지역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겁니다. 현재 20만명의 거대 도시가 된 헤브론에는 약 800여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무장을 한 채 그 땅을 지켜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곳에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장사된 막벨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막벨라는 단지 오래된 무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유산이자,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땅인 가나안에 정착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를 아브라함에게서 찾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인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복의 증거가 헤브론의 막벨라 굴입니다. 나라를 잃고 떠돌아다니던 유대인들이 시온에 대한 꿈을 그릴 때, 그 희망의 토대가 바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막벨라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입장에서의 옳고 그름을 떠나 죽음을 무릎쓰고서라도 그 곳을 지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단 한명이 살아남더라도, 그 한명이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어가리라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면,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믿음의 토대를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순교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던 신앙의 선배가 남겨놓은 그 거룩한 토대 위에 한국 교회가 서 있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교회는 장래의 세대를 위해서 어떤 기초를 다지고 있는지 진심으로 곰곰히 되새겨 보아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헤로데가 세운 성벽. 이 성벽은 예루살렘 대성전 성벽과 똑같이 만들었다.

 

이슬람 종탑인 미나렛

 

이슬람 종탑인 미나렛. 이곳에서 매일 다섯번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울려 퍼진다.  

  

막펠라 동굴로 들어가는 계단

 

성벽 중앙 아래, 보호막이 되어 있는곳은 물 저장소가 있던 자리

 

물 저장소 자리


1967년 6일 전쟁에서 막펠라 동굴을 손에 넣은 후 유대인들이 발굴 작업을 했다.

 

유대인 회당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이슬람 사원쪽으로 들어가는 입구 

 

이슬람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본 유대인들 출입구, 회교사원 종탑 아래 하얀 옷을 입은 정통파 유대인들이 들어가고 있다.

 

이슬람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유대인 군인들이 검문검색

 

검문소를 통과 하여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쪽 

 

검문소를 통과 하여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쪽 


막벨라 구조 (출처-https://biblia.co.il/%ed%97%a4%eb%b8%8c%eb%a1%a0-%eb%a7%89%eb%b2%a8%eb%9d%bc/)

 

막벨라 동굴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묘지)


1번을 따라 들어 가면 이사악과 레베카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2번이 이사악과(C) 레베카(D)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비잔틴 시대의 성당 자리 위에 십자군들이 아브라함에게 봉헌한 대성전을 지었다. 입구쪽의 A는 6개의 기둥으로 지탱하여 만든 코란을 해설하는 연단이 있다. B는 기도할때 메카의 방향을 알려 주는 벽감인 미흐랍( mihrab). E는 십자군 시대까지만 해도 지하 동굴로 내려가는 입구였으나 그 이후 모든 입구는 봉하여졌다. F는 작은 구멍을 통하여 지하 동굴을 볼 수 있도록 한 곳. 3번 위쪽은 사라, 아래쪽은 아브라함의 무덤. 3번을 경계로 2번쪽은 현재 이슬람 사원이고, 3번 왼쪽 부분은 유대인들이 소유하고 있다. 4번은 유대인들이 회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며, 5번은 작은 기도방이면서 위쪽은 레아의 무덤, 아래쪽은 야곱의 무덤이다. 유대인 출입구를 통과하여 6번으로 들어가면 유대인들이 기도방으로 이용하고 있는 곳이며, 그 오른쪽 7번은 이름이 없는 빈 무덤인데 아담의 무덤 또는 요셉의 무덤이라고 한다. 성경에 따르면 요셉의 무덤은 스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H는 유대인들의 기도와 식사와 도서실 등 다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방. G는 1260년 헤브론을 점령한 맘루크 이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성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대신 그 입구 7번째 계단까지 올라와서 기도할 수 있도록 했는데, 1967년 6일 전쟁에서 헤브론을 장학하고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 1969년에 파괴 되었다.


(출처-https://biblia.co.il/%ed%97%a4%eb%b8%8c%eb%a1%a0-%eb%a7%89%eb%b2%a8%eb%9d%bc/)


이슬람 사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자들은 머리를 가려야 한다. 그리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막펠라 이슬람 사원으로 들어가는 곳(왼쪽)

 

막펠라 동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 오른쪽 삼각형저럼 되어 있는것이 이사악, 왼쪽은 레베카의 무덤이다. 

 

사원 안에 메카의 방향을 알려 주는 벽감인 미흐랍( mihrab)

 

미흐랍과 민바르(설교대)

 

설교대 민바르 측면

 

 민바르의 측면 상세 모습, 삼나무를 세공하여 결합시켜 만들었다

 

설교대 민바르

 

전례를이끄는 이맘(이슬람 사제)은 쿠란을 낭송할때만 민바르에 올라간다. 이 민바르는 11세기에 만들어진것으로 솔로몬이 예루살렘 대성전을 지을때 사용했던 삼나무로 아주 정교하게 만든 걸작품이다.

 

설교대 민바르

 

설교대 민바르

 

설교대 민바르

 

여섯개기둥 위에 만든 연단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 설교 하는 곳이다. 중앙 파란 문은 유대교 회당과 이슬람 사원의 경계 문이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막펠라 사원을 점령하기 전에는 모두 이슬람 사원이었으나 사원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이사악과 레베카의 무덤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유대교 회당을 만들었다.

 

이슬람사원 천장

 

이슬람사원 천장

 

이슬람사원 내부

 

막펠라 동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 오른쪽 삼각형저럼 되어 있는것이 이사악, 왼쪽은 레베카의 무덤이다. 

 

막펠라 동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 오른쪽 삼각형저럼 되어 있는것이 이사악, 왼쪽은 레베카의 무덤이다. 

 

이삭과 레베카 무덤을 볼 수 있는 창살

 

기도하는 유대인들

 

이삭의 무덤

 

레베카(리브가) 무덤

 

이삭과 레베카의 무덤 옆에 있는 비잔틴 교회 흔적

 

이사악과(C) 레베카(D)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비잔틴 시대의 성당 자리 위에 십자군들이 아브라함에게 봉헌한 대성전을 지었다.

 

중앙 사진 아래 동그란 부분을 통하여 지하 동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왼쪽 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아브라함의 무덤을 볼 수 있다.

 

 지하 동굴을 볼 수 있는 곳

 

이슬람 사원쪽에서는 아브라함의 무덤을 개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반면 유대인 쪽에서는 창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무덤

 

아브라함의 무덤 측면  

 

오른쪽에 창살이 있는곳이 아브라함의 무덤, 왼쪽 부분은 유대교 회당

 

아브라함의 무덤 창살,   유대인 쪽에서는 창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이슬람 사원쪽에서는 아브라함의 무덤을 개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반면 유대인 쪽에서는 창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무덤, 유대인 쪽에서는 창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무덤, 유대인 쪽에서는 창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무덤 옆에 있는 작은 미흐랍 

 

아브라함 맞은편에 있는 아내 사라의 무덤

 

창살 철문 안쪽에 보이는 사라의 무덤 

 

창살 철문 안쪽에 보이는 사라의 무덤 

 

야곱의 무덤

 

다른쪽 창살에서 바라본 야곱의 무덤

 

야곱의 무덤

 

야곱의 첫 부인 레아의 무덤, 야곱 무덤 맞은편에 있다.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의 무덤은 베들레헴 근처에 있다. 

 

레아의 무덤

 

레아의 무덤 

 

레아의 무덤

 

아담의 무덤? 요셉의 무덤?


유대인 지역으로 들어갔을 때 들어가는 출입구 가까이에 있는, 오른쪽에 홀로 떨어져 있는 이름이 붙어 있지 않는 한 개의 무덤은 전승에 의하면 아담의 무덤 혹은 요셉의 무덤이라고 부른다.(현재 요셉의 무덤은 스켐에 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이곳에서 살다가 죽어 막펠라 동굴에 묻혔다고 한다. 유대인 지역에서는 아브라함의 무덤과 사라의 무덤 그리고 야곱과 레아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고, 유대인 회당이 있다. 

 

유대교 사원과 이슬람 사원의 경계

 

유대인 지역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두번째 검문소

 

두번째 검문소 오른쪽에 있는 다목적 방, 토라를 보관하는 곳

 

유대인 회당

 

유대인 회당

 

유대인 회당

 

유대인 회당

 

유대인 회당

 

이스라엘 관광성 상징 마크  

 

<헤브론의 역사>              (사진, 글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1. 모세의 가나안 정찰

성경에서는 헤브론에 이스라엘이 정착하기 이전의 다양한 갈등 상황을 보여준다. 한때 헤브론에는 아모리족과 히타이트족(창세 23장; 민수 13,29)이 살았으며 가나안족의 중심 도시였다. 고고학 발굴 작업 결과 이른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 민족이 파란광야에 머물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12지파의 수장을 한사람씩 뽑아 가나안을 정찰하라고 하였다. 이때 여호수아와 칼렙은 헤브론의 에스콜 골짜기에서 포도송이와 석류와 무화과를 따다 바치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고 보고하였다(민수 13,23-27 참조). 이렇게 두 사람이 막대기에 포도송이를 꿰어 메고 가는 그림은 이스라엘 관광성의 상징물이 되었다.

2. 여호수아의 헤브론 점령

아모리족의 다섯 임금이 동맹을 맺고 기브온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길갈에 있던 여호수아에게 전갈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자 여호수아는 주님께 아뢰어 해가 멈추고 달이 멈추게 한 후 아모리족의 연합군을 전멸시켰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남부 성읍들을 점령하였고(여호 10,36), 헤브론은 여푼네의 아들 칼렙의 몫으로 주었다(여호 15,13; 21,10-12).

3. 도피성

헤브론은 유다 부족의 주요한 도시로 살인자가 피할 수 있는 여섯 개의 도피성 중 한 곳이었다.

4. 다윗과 헤브론

헤브론은 아브라함과 족장들뿐만 아니라 다윗에게도 중요한 곳이다. 사울이 죽은 후 기원전 1000년경 다윗은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원로들과 계약을 맺었고, 원로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2사무 5,3; 1역대 11,3참조). 다윗은 헤브론에서 이렇게 유다의 왕이 되어 7년 6개월을 다스렸다. 그리고 다윗의 왕국은 예루살렘의 다윗도성으로 옮겨 서른 세 해 동안 다스렸다(2사무 5,5). 헤브론은 다윗이 그의 왕국을 건설한 곳이면서도 뼈아픈 곳이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고(2사무 15,1-12참조),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요르단으로 달아나야만 했다.

5. 르하브암 시대의 헤브론

남과 북이 갈라진 후 르하브암은 예루살렘에 살면서 헤브론을 포함하여 유다에 15 요새 성읍들을 세워 모든 성읍에 큰 방패와 창을 갖추어 놓고 그곳들에 지휘관을 배치하고 양식과 기름과 포도주를 저장해 두었다.(2역대 11,5-12 참조)  

6. 유다 마카베오 시대

기원전 166년경 예루살렘 성전이 이교 제사로 더럽혀지고 유다인들이 박해를 받기 시작하자 유다 마카베오가 항쟁을 계승하여 헤브론을 점령하고 파괴 하였다.

7. 신약시대

신약성경에서 헤브론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헤로데 대왕(BC 37―4)은 막펠라 동굴 위에 거대한 성벽을 건축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성벽은 강하면서도 단순한 인상을 주는데 둘러싸여진 건축물은 제2차 성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2000년 동안 파괴되지 않고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성곽의 건축 양식은 예루살렘 대성전과 동일하게 건축 되었다. 헤로데가 만든 장방형 돌담의 규모는 길이 59m, 넓이 34m, 높이 18-20m 그리고 두께 2.65m이고 가장 큰 돌은 가로 세로 7.5m × 1.4m이다. 성벽의 아래층은 가장자리를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들었고, 그 위에는 돌출되게 했다. 헤브론 돌은 매우 튼튼하고 비에 내구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원래의 성벽 높이는 약 20m 정도였는데 맘루크시대와 오트만 시대에 더 높여졌다.

8. 비잔틴-아랍-십자군-오트만 시대

 

로마군에 파괴된 헤브론은 그 후 천천히 복구되기 시작하여 4세기에는 큰 도시가 되었다. 페르시아에게 점령되었던 634년에는 전성기를 누렸으며 900년경에는 ‘하느님의 친구인 아브라함의 고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슬람이 헤브론을 점령 하면서 이 건물은 회교사원으로 변했고, 그 후 십자군이 점령하여 다시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1099년 헤브론을 점령한 십자군(Godfrey de Bouillon)은 헤브론은 ‘아브라함의 성’으로 개명하였다. 1187년 다시 이슬람 살라딘에게 점령되어 1917년 12월 4일까지 이슬람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1260년 헤브론을 점령한 맘루크는 성곽 안에 이슬람 사원을 지었고, 성벽 북동쪽과 북서쪽에 높은 이슬람 첨탑(minaret, 하루 다섯 번 이슬람 기도 시간을 알리기 곳)을 만들어 외부에서 볼 때 이슬람 사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성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다만 성곽 동쪽 벽에 있는 입구 일곱 번째 계단까지만 올라가 기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트만과 영국 그리고 요르단의 통치 하에서 약 700년간 유대인들은 일곱 번째 계단에 서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1967년에 헤브론을 점령한 장군인 랍비(Shlomo Goren)는 유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문을 넘어 들어가 기도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 후 1969년 이 계단은 파괴 되었고, 봉하여졌다. 오트만 터키 제국의 시기 동안 헤브론은 경제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9. 현대의 헤브론

헤브론은 635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1100-1260년까지 잠시 십자군에게 정복된 것을 빼고는 계속 이슬람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20세기 들어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고 1948년 요르단으로 편입 되었다. 헤브론은 1967년 6일 전쟁이후 이스라엘에 점령된 팔레스타인 요르단 강 서안(West Bank)지역에 속한다. 작은 유대인 공동체는 이슬람 사회와 공존하고 있었으나 1929년부터 몇 차례 일어난 아랍인 폭동으로 대부분 학살 되었고, 그 후 1968년 유대교 정통파들이 유입되면서 다시 유대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1967년 6일 전쟁 뒤 이 동굴 무덤들은 1267년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가 비이슬람교도에 대한 참배금지령을 내린 지 700년 만에 처음으로 모든 이들에게 공개되었다. 1972년 막펠라 동굴에서 북서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키르얏 아르바’라고 부르고 있다. 헤브론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수립되고 1997년 1월부터 팔레스타인 관할로 이관되었다. 예루살렘을 놓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툼을 하고 있듯이 헤브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1994년 2월 25일 정통 유대인인 골드스타인은 막펠라 동굴의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 기도를 하고 있던 이슬람 신자들에게 총기를 난사하여 29명을 살해하고 그 자신은 현장에서 구타당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사람을 살리는 직업인 의사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던 마지막 총알까지 아랍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발사하고 그 자신은 맞아 죽었다는 것은 이슬람과 팔레스타인의 풀 수 없는 애증의 관계를 대변하는 사건이었다. ‘동료’, ‘결합’, ‘친구’라는 어원을 가진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히타이트족으로부터 땅을 구입하면서 이스라엘 족장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첫 인연은 사라의 무덤, 즉 영원을 위한 것이었다. 죽음 앞에서, 영원을 향한 여정에서 서로 양보하며 평화롭게 공존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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