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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다니니의 피에타 상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스포르체스코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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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다니니의 피에타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같은 만년기 작품의 <피에타>, 특히 피렌체의 <피에타 > 같은 경우에서처럼 여러 인물의 군상이 아니고 단지 마리아 혼자서 그리스도를 앞으로 떠받들고 있는 형태이다. 두 인물이 겹쳐져 있는 이 상은 이미 하나님 아들의 시신을 안고 지키고 있는 마리아의 인상으로서도 박약하고, 또 마리아에 안긴 그리스도의 인상도 박약하리만치 특이한 자태의 미완성 상이다. 초벌작업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조각을 막 시작하는 단계에서 멈춰진 [론다니니의 피에타] 미완의 대작 <론다니니의 피에타>가 있는 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 은 두오모 광장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밀라노의 영주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명령에 의해 다빈치, 브라만테 등의 참여로 1450년에 완공되었다. 비스콘티가의 거성으로 지어졌으며 성의 내부는 고고 미술관과 고고학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미켈란젤로가 임종하기 3일 전까지 작업을 했고 지금은 미완성으로 남겨져 있는 대작 <론다니니의 피에타>가 보관되어 있다. 이곳에는 중세예술품 공예품과 가구,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벨리니의 "성모자", 만티냐의 "마리아와 성인들" 등도 유명하며, 1층에는 박물관과, 2층에는 회화관, 3층에는 민속, 공예품 등으로 전시되어 있다. 성 안에는 영국식 정원인 셈피오네 공원이 있으며, 나폴레옹이 밀라노를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평화의 문'도 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주도한 불세출의 조각가이자 화가,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Micheloangelo Buonarroti, 1475~1564)에게 역시 ‘피에타’는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되는 일종의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거의 일 세기에 달하는 생애를 통해 여러 점의 ‘피에타’를 제작했으며 그에게 최초로 로마에서의 세속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작품이나 파란과 곡절로 점철된 삶을 마감하기 며칠 전까지도 정과 끌을 놓지 못하고 매달렸던 최후의 작품 역시 ‘피에타’였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미켈란젤로는 성 베드로 성당에 안치된 피에타(중간 사진 오른쪽), 두오모 성당에 안치된 피에타(아래 사진 왼쪽).산타 크로체 성당의 팔레스티나 피에타(아래 사진 오른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포르체스코성에 있는 론다니니 피에타(아래 사진 가운데) 총 4개의 피에타를 남겼다. ‘죽은 예수와 이를 애통해하는 성모’라는 주제의 ‘피에타(pieta)’는 중세 이후 기독교 문화의 예술가들에게는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이었다. 장인들의 손을 통해 이 주제는 때로는 극도의 슬픔으로, 혹은 슬픔을 초극한 신성의 상징으로, 때로는 세족적인 우화로 또 때로는 경건한 신앙의 대상으로 새롭게 번안되어 왔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1475.3.6 ~ 1564.2.18)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산치오와 함께 르네상스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인체해부학에 대한 지식과 뛰어난 소묘 솜씨로 강렬하고 역동적인 인물을 그려냈으며, 남성적이고 박력있는 형상의 걸작을 여럿 남겼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바티칸의 교황에 봉사하며 조각과 건축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피에타], [다비드],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정화 중 [최후의 심판], [천지장조] 등이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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