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해장국 건물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있다 (아래 사진출처- http://info.catholic.or.kr/)
의정부교구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표지판
의정부교구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표지판
의정부교구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표지판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되었다. 양박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 형을 받은 그의 시신은 어렵게 황씨 문중 선산에 안장되었고, 집안에서조차 잊혀 왔던 묘를 황씨 집안의 후손이 족보 등 사료를 검토하고 사계의 고증을 받아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했다.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토시)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로 1791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면서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그는 부귀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런 일생을 선택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령이 내려지자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옹기가마 토굴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박해 상황을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작은 붓으로 명주 천에 적었는데, 옷 속에 이 비밀문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가 발각되어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그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아래 사진출처- http://info.catholic.or.kr/)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의 아들 황경환의 묘>
추자도 지도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추자도 지도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상추자도 추자공소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상추자도 추자공소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상추자도 추자공소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상추자도 추자공소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상추자도 추자공소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상추자도 추자공소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모정의 쉼터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모정의 쉼터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모정의 쉼터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모정의 쉼터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환의 눈물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환의 눈물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환의 눈물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한 묘 안내비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한 묘 안내비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한 묘 안내비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한 묘 안내비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한 묘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한 묘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한 묘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제주교구 하추자도 황경한 묘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하추자도에는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의 묘소가 있다. 백서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은 1790년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인 정난주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1800년에 아들 경한을 낳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황사영이 체포되어 순교한 후 부인은 제주도에 관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젖먹이 아들마저 평생을 죄인의 자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어머니 정난주는 유배 길에 호송선의 뱃사공과 나졸을 매수하여 경한을 하추자도 예초리의 갯바위에 내려놓았다. 하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의해 거두어져 그의 아들로 키워졌다.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그 후손이 지금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다한 황경한은 사망한 후 예초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혔다. 황경한이 살던 오씨 집은 1965년 불타 없어졌고, 그때 그 집안에서 간직해온 경한의 젖먹이 때 옷이나 가첩 등도 모두 소실되었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하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묘소 주변 부지를 매입하여 소공원을 조성하는 성역화를 추진했고, 상추자도에 있는 추자 공소 신자들이 묘소를 돌보고 있다.
황경한 묘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한 묘 안내판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한 묘 안내판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한 묘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한 묘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황경한 묘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제주교구 하추자도 황경한 묘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제주교구 하추자도 황경한 묘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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