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성 어거스틴의 회심 정원((Parco S. Agostino, Milano Cassago)

성지순례/서유럽(이탈리아,로마)

by baesungsoo 2015. 8. 7. 18:55

본문


성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기독교 역사에서 5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사람이다. 하버드대 철학교수인 화이트헤드(Whitedhead)현대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고, 현대의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의 주석이라고 할 정도이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전기에는 자신이 회심한 장소를 밀라노의 정원이라고 했다. 그곳이 카싸고(Cassago)이다. 차가 들어갈 수 없기에 걸어서 가야 하는 그곳은 왼쪽으로 아담한 성당이 있고 그 앞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광장(Piazza)이 있다. 건너편에는 카싸고 브리안자 시청(Commune di Cassago Brianza) 있다. 간판 아래에는 왼쪽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함께, 갈색으로 어거스틴의 공원’(Parco S. Agostino)이라고 쓰여 있다. 성당의 오른편이 어거스틴이 1,600년 전에 회심한 장소이다. 그곳에는 로마 시대의 유적들이 있고, 담벼락에 어거스틴에 대한 세 장면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정원은 경사이다. 어거스틴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거스틴은 오랫동안 마니교에 심취했는데, 마니교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엄격한 금욕주의를 지향했다. 영혼이 육체의 속박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고기나 술을 멀리하고 식사를 절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어거스틴이 밀란으로 오게 된 것은 이교 세력의 대표자 원로원의 시마쿠스에게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마쿠스는 어거스틴이 기독교와 사상적으로, 또는 문필로 싸우게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곳에서 어거스틴은 영적 거성 암브로시우스를 만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극심한 영적 갈등 중에 밀란의 시 대변인직을 사임하고 친구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났다. 거기서도 영적 갈등으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던 중, 마침 담 너머에서 아이들의 동요가 들려 왔다. “들어서 읽어 봐”(Tolle lege)라는 노랫말이었다. 성령께서 노랫말을 통해 어거스틴의 마음을 사로 잡으셨다. 어거스틴은 곧 바로 성경을 들고 폈더니 로마서 13장 말씀이 들어 왔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13:13). 이 말씀을 통해 어거스틴은 회심하게 되었다. 밤낮으로 눈물로 기도했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밀란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40-397)에게 세례를 받도록 주선했다. 당시 데살로카 주민이 로마의 수비대장을 죽인 사건에 때문에, 황제 데오도시우스(Deodosius, 347-395)가 진노하여 7천 명의 주민을 죽였는데,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그런 잔인한 행동을 엄히 징계했다. 그는 황제를 부활주일부터 성탄절에 이르기까지 성찬을 금하고 교회 출입을 불허했다. 황제는 왕관을 벗고 베옷을 입고 눈물로 회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탄절에 이르러서야 징계를 철회했다. 당시 어거스틴이 가장 존경하던 주교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회심 후 어거스틴은 동거하던 아내와 결별하고 고향으로 가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로마의 오스티아 항구로 왔는데 마침 로마는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출항을 금지하던 상황이었다. 배편을 기다리던 중, 어머니는 말라리아에 걸려 8일 만에 56세로(어거스틴은 33) 소천했다. 그는 [고백록]에서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어머니의 눈을 감겨드렸다. 큰 슬픔이 가슴 속에서 북받쳐 올라 눈물이 쏟아졌다. . . . 하지만 어린애처럼 슬피 울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슬픔과 탄식으로 치루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이를 위해 슬퍼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실상 어머님은 그 죽음으로 불행을 당하시거나 또 그 죽음이 그의 마지막이 되어버린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생각했고, 어머니의 선한 말씀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떠올리며 울지 않으려 애썼다.” 어머니 장례식을 마친 후 어거스틴은 고향 튀니지로 돌아가 수도원을 세웠고, 또한 히포의 감독으로 성도를 돌보며 평생을 학문 연구에 전력을 다했다. 고백록에서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나님과 세상 앞에 선언한다. 바울의 신학과 신앙의 영향을 받은 그의 깊은 학문은 마틴 루터나 칼빈, 그리고 존 웨슬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84190)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그가 태어난 북 아프리카 도시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그가 죽던 430년까지 그는 온 마음과 뜻을 다해 교회를 섬겼다. 그는 북 아프리카에 첫 번째 수도원(수도승들을 위한 집)을 설립하였다. 그는 이단을 대항하는 공개 논쟁에서 글을 사용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변론하였고 교회 내에서 교회 분리를 야기하는 자들을 대항해서도 강력한 글을 썼다. 어거스틴은 그의 인생 대부분을 마니교도들, 도나투스파 사람들, 그리고 펠라기우스파 사람들과 다투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도나투스파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도나투스를 추종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이단은 아니었다. 교리에 있어서 그들은 철저하게 정통보수였다. 하지만 그들은 분리주의자들이었다. , 그들은 교회 내에 분리를 일으켰다. 디아클레티우누스 황제가 심각한 박해를 가하는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져버렸다. 도나투스파 사람들은 그들을 다시 교회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몇몇 감독들은 성경 사본들을 정부 관료들에게 내주면서 불에 태우도록 했었다. 도나투스파 사람들은 그러한 감독들은 성례를 행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감독으로 세우는데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함께 물러나 자신들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에 많은 도나투스파 교회들이 북 아프리카에 생겨났다. 북 아프리카의 히포 도시에는 보편 교회 교인들보다 도나투스파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다. 어거스틴은 그들을 대항하여 교회 및 성례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는 보편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라고 가르쳤다. 그는 보편 교회에 커다란 권위를 돌렸다. 그는 보편 교회의 권위에 의해 감동받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어거스틴은 인간과 구원의 방법에 대한 바른 교리를 세웠다. 펠라기우스 사상은 그 사상의 창시자인 브리티시 수도승 펠라기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는 원죄를 부인하였으며, 인간의 전적 타락과 예정론을 부인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사람은 날 때 부패한 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는 아기들은 순전하다고 말하였다. 아기들은 자라나면서 다른 사람들의 악한 행위들을 보고 배우면서 악해진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가르침에 대항하며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잉태되어 죄 가운데 태어난다고 가르쳤다. 사람은 누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을 수 있으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른다고 하였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으로 인해 에베소 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서기 431년에 열린 에베소 총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서기 529년에 열린 오렌지 종교 회의에서는 세미-펠라기우스 사상을 정죄하였다. 세미-필라기우스 사상은 하나님의 은혜의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은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주장이었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주로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은 가장 위대한 교부들로부터 루터와 여러 개혁자들 역시 영향을 받았다. 어거스틴의 가장 유명한 두 작품은 그의 참회록(Confessions)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그의 젊은 시절의 비밀들을 다 털어놓으며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던 것들을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도성에는 그의 역사관이 잘 나타나 있다.

 (출처-http://blog.naver.com/calvianus/140209206677)


어거스틴의 정원 (출처-http://blog.daum.net/jonghojang/8684979)



어거스틴의 정원 (출처-http://blog.daum.net/jonghojang/8684979)


밀란의 정원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들.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향하는 모습. 베레콘도 별장에서의 모습.

압브로시우스에게 세례받는 모습. 한평우 목사  (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84190)


모니카와 성 어거스틴    (출처-http://blog.naver.com/rsg861/80131212099)


히포(알제리아의 아바나)     (출처-http://blog.naver.com/rsg861/80131212099)



암브로시우스 성당. 어거스틴이 이곳에서 세례를 받음.

(출처-http://blog.daum.net/eveningsong/8939751)


암브로시우스   (출처-http://blog.naver.com/rsg861/80131212099)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서방 교회에서는 세 명의 위대한 지도자가 생겨났다. 그들은 바로 암브로시우스, 제롬, 그리고 어거스틴이다. 이 세 사람은 교회를 강화하는데 대단히 중대한 역할을 하였던 라틴 교부들(Latin Church Fathers)로 잘 알려져 있다. 암브로시우스(340-397)는 독일의 서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로마 정부의 고급 관료였다.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고 어릴 때부터 뛰어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북부 이탈리아의 큰 지방을 담당하는 총독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밀라노 도시에 거주하였다. 암브로시우스가 활동하던 당시 밀라노 교회에는 여전히 아리우스 주의를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밀로노의 감독이 죽자, 아리우스를 따르는 자들과 정통 교리를 따르는 자들은 각각 자기들에게 속한 자를 그 후계자로 세우고자 했다. 새로운 감독을 뽑는 공동회의가 열렸지만 난장판이었다. 이때 그 도시의 새로운 총독이었던 암브로시우스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그 교회에 들어섰다. 그런데 아우성치는 그 무리 가운데 갑자기 어린 소년의 음성이 암브로시우스의 귀에 들렸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이다!” 이때 암브로시우스는 아직 교회 회원도 아니었고 세례를 받은 상태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그 사건을 하나님의 부름으로 여기고 모든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 후에 세례를 받고 374년에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니케아 신조를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그는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으며 교회의 박사(Doctors) 또는 위대한 선생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그는 또한 기독교 찬송을 증진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는 매우 유능한 관리자였고, 담대하게 기독교 삶의 높은 기준을 부르짖었다. 그의 진실함은 로마 황제를 징계한 사건에서 잘 나타난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혈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데살로니카 도시의 백성들이 로마 총독을 살해하자 그는 그곳 주민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황제가 공적으로 그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를 선포할 때까지 성만찬에 참여를 금하였다. 황제는 결국 교회의 징계에 굴복하였다. 이 사건의 멋진 결말로 인해 감독과 황제는 교회와 백성들로부터 큰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출처-http://blog.naver.com/calvianus/140209206677)


암브로시우스 성당. 어거스틴이 이곳에서 세례를 받음.

(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84190)


암브로시우스 성당    (출처-http://blog.naver.com/rsg861/801312120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