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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학 목사 (감리교 동부연회 순교자,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2묘역 2-580)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19. 11. 2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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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김영학 목사의 묘, 대전 국립현충원 안장 묘역, 애국지사 2묘역 2-580

 

애지제 2-580: 순교자, 순국선열, 애국지사 김영학(1877-1932)의 대전 국립현충원 안장 묘역 표기이다. 감리교회 순교자 김영학 목사는 19321216일 시베리아선교 활동을 하다 공산당에 체포,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시베리아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원주 감리교 동부연회 본부 부조

 

김영학 목사 (1877-1932 권서인, 감리교 목사, 시베리아선교 순교자)

 

김영학 목사 (1877-1932 권서인, 감리교 목사, 시베리아선교 순교자)

(출처-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2993)

 

1. 방탕한 젊은 시절과 전도대와의 시비 (글 출처- http://blog.daum.net/parkland/15714891)

김영학 목사는 황해도 금천군 금천읍 조포리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향리 한문사숙에서 글공부를 시작하여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모두 읽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 양반 가문에서 익힌 양반수업이 그가 청년기에 접어들어 바깥 물정에 눈을 뜨면서 체면도 헌신짝처럼 벗어버리고 숨어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담배로부터 정도 이상의 주색잡기, 난봉꾼으로 고을에서는 이름이 나 있을 정도였다. 그의 방탕한 생활을 억제시킬 만한 힘이나 방법이 없었다. 30살이 되던 어느날 토산장이 서는 날이었다. 영학은 아직 낮인데도 술에 만취되어 거리를 휩쓸었다. 아는 이들은 미리 비켜가고 상대를 하려 들지를 않았다. 그러나. 이 날만은 달랐다. 어떤 일단 무리들이 종이 조각을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무엇인가 부탁하고 권면하는 듯이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교회의 전도대원이었고, "예수를 믿으세요, 믿고 구원 얻읍시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 믿으시요"하면서 전도지를 건네주며 전도를 하고 있었다. 영학이가 나타나면 으례껏 비켜서든가 우루루 달아나서 흩어지든지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았다. 취기어린 눈을 부비고 그는 딱버텨셨다. 그리고 그는 벽력 같은 소리로 고함을 한껏 질렀다 '이 멍청이 새끼들아! 저리 꺼져, 이 병신들아! 썩 거지지 못해 ' 그래도, 이 사람들은 여전히 겁을 내는 기색이 없었다. "형님! 예수 믿으시오.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술김에도 잔뜩 자존심이 상하였다. 이쯤 되면 알아서 피해갈 일인데, 시장터에는 공동 우물이 하나 있었다. 거기 있는 대야로 물을 퍼서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웃으면서 자애로운 어머니가 어린 애기를 다루듯 하는 것 같아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오늘은 운좋게도 그냥 지나갈 줄 알았는데 본색을 들어 냈다. 전도지를 마구 뺏아 찢고, 발길로 걷어찼다. 그러나 대꾸없는 이들에게 이런 짓은 망난이 같은 자신에게 흥미거리도 못 되었고, 더 이상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2. 전도집회에서 회개하고 권서인이 됨.

이튿날에야 정신을 차리고 어제의 일을 생각해 본다. 차츰 후회하는 쪽으로 생각은 기울었고 그는 쪽지에 적힌 글을 읽고 그곳으로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에 벌떡 일어나 단숨에 달려가 본즉 그곳은 전도집회 장소였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고 또 지금까지 이런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점점 그 분위기에 빨려 들었고 목사님의 설교는 젊은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고 또 감동으로 달아 올랐다. 그는 한없이 울었다. 그 집회를 끝까지 참예하였고 이날부터 믿기로 결심하였다. 어떤 이에게서 성경을 권해 받았다. "이 성경을 보고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님은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고 하였거니와 한 사람을 목사로 애국자로 목숨을 바치게 하고도 남는 힘이 있었다. 그 길로 그는 한해를 수일을 보내듯 이 신앙에 깊이 들어가 온갖 열심을 쏟아 바쳤다. 그는 난봉꾼으로 부랑하기 그지없었던 것 만큼이나 새 사람이 되어서 신앙의 열심 또한 그랬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정신이상자 취급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그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처음에 이상하게 보던 사람들이 그의 엄청난 변화에 감동을 받아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그리고 믿게 된 다음해에 권서인이 되어서 성서공회에서 공급하는 성경, 찬송가, 쪽복음을 등에 지고 전도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3. 독립운동으로 체포 옥고를 치름.

1911년 정식으로 전도사의 직분을 맡아서 충성을 다하기 시작했다. 1914년 감리교 연회에서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에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1919년까지 평산,금천,장연,철원,서울종교,수표교,양양교회를 담임 목회하였다. 양양에서 19193.1운동을 맞았다. 이 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열망, 가혹한 총독정치가 채택하고 있는 헌병군사통치의 비인도적 횡포, 그리고 일제의 조선민족성 박멸기도, 조선인 차별대우와 기회불균등, 언론이나 신앙,그리고 결사의 자유박탈, 기독교에 대한 근절정책, 농전토의 수탉,그리고 살벌한 만주 벌판에의 강제 이거 이민 정책 이런 것들은 이대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민족적 분노를 자아내게 했고, 김 목사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성경을 통해 바른 민족정신을 신앙으로 설교하던 중에 만세운동이 서울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자 대열의 선봉에 섰고 교인을 비롯한 국민들을 지도하였다. 이로 인해서 일본 관헌들은 그를 체포했고 그는 4년간이나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것만 보아도 그의 애국 운동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극비문서에는 그에 대하여 '민족절대독립주의,배일사상 포지자"로 규정하고 있듯이 그는 민족독립운동가였다.

 

4. 시베리아선교 활동, 공산당에 체포,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

19225월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하여 가평읍교회를 시무하면서 당시 남감리회가 펼친 선교백년기념사업에 가담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교세확장과 선교사명에 전력 경주하였다. 1921년 감리교연회는 양주삼 목사를 중심으로 만주 및 시베리아 선교를 시작하였다. 시베리아의 한 도시 블라디보스톡은 우리나라 두만강 바로 건너, 동해에 면한 항구로서 러시아의 동양 진출을 위한 중요 요지이다. 한일 합방으로 나라 잃은 동포들은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하였다. 우국지사들이 모여 들었고 혁명투사들이 반일항거의 근건지로 삼고 후일을 이곳에서 도모하였다. 여기서 한인촌(신한촌)이 이루어지고 한국인을 위한 해조신문(海朝新聞) 등이 발간되기도 했다.

(-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신민학교를 세우고,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했을 뿐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지도자 : 최관흘, 김현찬, 김영제)가 있었고, 한국감리교회(지도자 : 도인권, 김영학목사)가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도인권이 연해주에 왔고, 양양, 춘천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김영학 목사 또한 이곳에 왔다. 연해주에는 장로교회가 약 100, 감리교회가 약 90여개, 침례교회가 약 10여개 있었는데 교회가 독립운동과 군자금 확보에 큰 역할을 했다. 연해주는 한국의 지도급 망명객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주변에 모여 살았다. 이곳이 바로 "신한촌"이다. (출처- http://www.anewsa.com/detail.php?number=870612&thread=04r02)

 

해조신문 (출처- http://www.anewsa.com/detail.php?number=870612&thread=04r02)

 

이런 곳에 동포를 위한 선교사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지사요 또한 시기적으로 적절하였다. 시베리아는 당시 러시아 공산혁명이 일어난 지 6년 밖에 안된 때였다. 과격파들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 하여 교회를 핍박하고 괴롭히던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따라서 시베리아 선교를 지원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시피하던 때였다. 그러나 김목사는 혹심한 옥고를 치렀던 뒤라서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자원하여 그는 이곳에 왔고 나라 없이 외롭게 사는 교포들을 위로하는 한편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교포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때문에 교회는 곤경중에서도 견고히 발전하였다. 9년간 목회에 전념했으나 ,1930년 공산당들은 소위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김목사를 구금하였고 근 1년간을 공갈, 협박 또는 회유책을 써가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단연코 거절하자 19313월에 가장 악질적인 반동이라는 죄목으로 10년 중노동형을 받고 임지에서 약 100리 떨어진 곳에서 복역을 하였다. 이곳은 보통 영하 40-50도 오르내리는 추운 지대였다. 어느날 눈과 얼음이 쌓인 곳에서 이날도 중노등에 시달리던 중에 있었는데 갈라진 얼음 사이에(노동현장) 수십명이 떼죽음을 하던 중에 김영학 목사 그도 여기 함께 희생당하니(옥중에서 순교했다는 두 가지 순교설이 있다) 공산당의 배교의 강요를 배격하고 신절을 지켜 영광스러운 순교 대열의 참가하였다. 최양섭 목사는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1997, “일제하 양양지방 독립운동과 기독교인의 역할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양양지역에서 목회하면서 그 지역의 초기 기독교 인사들의 독립운동 참여와 주도적 역할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오랜 시간 자료를 추적하며 연구하여 발표한 그의 소중한 논문이다. 1919년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의 국권침탈에 비폭력, 무저항 만세 운동을 통해 나라의 독립과 자주를 부르짖었다. 이 역사적인 항거와 분리할 수 없는 현실은 기독교 인사들의 집단적인 참여와 주도적 영향이다. 유관순, 신석구, 제암리 교회 등이 그 증거이다. 이러한 대표적 맥락 외에 전국 각처에 밝혀지지 않고 조명되지 못한 인물과 순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는 듯, 최 목사의 논문은 양양지역의 만세운동에서 기독교 인사들의 역할을 집중하여 연구한다. 이러한 양양 만세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1919년 양양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김영학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상세히 논술한다. 논문은 김영학에 대하여 양양지역의 교회와 교인들에게 가장 큰 지도력과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최 목사의 초기 한국 감리교 지도자들의 사역과 민족운동 연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20125월 중순 양양의 현산문화제에 강사로 초청되어 양양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한 특별강연을 하여 뜨거운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는 순교자 김영학 목사와 같은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후대의 교회에 대해 참으로 안타까워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영학 목사의 후손을 만나면 감리교회를 대신하여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다는 말도 하였다. 숭고한 신앙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한 이 시대 우리 신앙인들의 처절하고 비참한 자화상에 대한 통렬한 자기부인이었다. 순교자 김영학 목사의 후손을 만났다. 음악을 전공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손녀 김지영 선생(탁사 최병헌 목사의 외손녀이기도 함)과 할아버지와 같이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사가 된 손자 김00(선교지역과 실명을 밝힐 수 없음)이다. 그들과 함께 서 있는 순교자 김영학 목사의 묘비가 차가운 시베리아의 얼음을 뚫고 80년을 지난 오늘날 우리의 교회를 향하여 외치는 듯하다. ‘나는 죽은 사람’, ‘주님을 바로 믿고 나라 사랑을 생활화하라’, ‘수 십 명의 교인이 있는데 어찌 목사로서 그를 버리고 나만 살려고 가겠느냐’, ‘목사는 교회를 위하여 순교하는 것이 마지막 사명이라.’ (출처- http://www.kmc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34004)

 

19331031일자 조선일보. <김영학 목사의 순사> (출처- http://www.kmc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34004)

 

<로령서 선교하든 김영학목사 순교>, 19331031일자 조선일보. <김영학 목사의 순사>, 19331025일자 4면 기독신보. 기독신보의 보도 내용을 인용한다. “기자는 다시 그의 부인인 안원정씨를 사직동 자택으로 방문하매 그 부인은 비통 중에 차있어 상복을 만드시다가 이 소식은 참으로 꿈같습니다. 주를 위하여 교인을 위하여 가진 고생과 고초를 다 겪으시다가 마침내 이렇게 무참히도 세상을 떠나신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최선을 다하여 그의 소식을 각 방면으로 알아보았으나 일 년 넘어 소식이 없었습니다. 아마 북쪽으로 전감가신 뒤부터는 소식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에게는 영광의 죽음이 되겠습니다. 그는 평소에 늘 하시는 말씀이 <목사는 교회를 위하여 순교하는 것이 마지막 사명이라> 하시면서 가족을 그 위험지대에 두고도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20여일 40여일씩을 늘 위험한 가운데로 순회하셨답니다. 이번 나올 때에도 같이 돌아오자 한 즉 책망하고 거절하였습니다. 수 십 명의 교인이 있는데 어찌 목사로서 그를 버리고 나만 살려고 가겠느냐 하시고 계시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김영학 목사 가족

(출처-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2993)

 

김영학 목사(중앙(출처-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2993)

 

<기독교대한 감리교회 김영학 선교사 기념사업위원회, 2019.11.28. 본부 선교국>

(출처-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2993)

 

한국감리교회가 해외로 파송한 선교사로서 최초의 순교자이자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등재 된 애국지사인 김영학 목사의 순교정신을 알리고 후대에 계승하기 위한 기념사업이 기념사업위원회를 중심으로 내년도에 본격적으로 추진될 예정이다. 감리회본부 선교국(오일영 총무)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선교국 역점사업으로 삼는다는 방침이다. 2019.11.26일 오전 감리회본부 16층 회의실에서 모인 김영학 선교사 기념사업위원회는 현재 회장인 최종호 목사(중앙연회 광주교회)를 위원장으로 선임하고 최양섭 목사를 서기로 선출하는 등 조직을 재정비 하고 내년도 사업을 결정했다. 위원회는 그동안 김영학 목사 추모예배를 드리며 그를 기려왔다. 위원회에는 최종호 위원장과 최양섭 서기, 김상철 영화감독, 김홍선 박광진 이상묵 송광섭 공성진 목사, 그리고 유족위원으로 김지영 교수(김영학 선교사 손녀), 교회협력위원에 차재일(광희문) 김진홍(수표교) 조선석(양양) 목사, 학술자문위원으로 김흥수, 서영석, 소요한 교수가 참여했다.

 

우선 20201월에 김영학 선교사를 알리는 브로셔 3만부를 제작하여 배포하고 기념세미나와 88주기 추모예배, 전기책자 발행 및 김영학 목사가 순교한 블라디보스톡 일대를 찾는 비전트립, 그가 국내에서 목회한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국내 성지 탐방 등을 계획했다.

 

현재 파이오니아 21’의 김상철 다큐멘터리 감독과 기념사업회가 2015년 김영학 선교사의 순교여정 일대기를 다룬 <순교>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 개봉한 상태이며 이것을 감리교회 버전으로 편집해서 원하는 교회별로 상영하는 계획도 세웠다. 특히 내년 4월경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실행부위원회의 결의로 기념사업을 감리회의 역점 사업으로 추진할 뿐 아니라 감리교 해외선교연회인 만주서비리아(시베리아-현 연해주)선교연회조직 100주년이 되는 2021년을 기해 연해주선교지 회복을 위한 사업을 교단 사업으로 진행할 것을 건의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김영학 선교사는 19321216일 시베리아에서 선교활동 및 항일운동을 전개 하다가 공산당에 체포되어 10년의 중노동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33년 옥중 순교했다. 정부는 3·1독립운동 당시 양양교회 목사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대한독립애국단 양양군단을 결성, 군단장으로 활약하는 등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아래 사진과 글은 김영학 선교사 기념사업위원회서기인 최양섭 목사(대죽교회)의 자료를 토대로 윤홍식( jesuspointer@naver.com) 목사가 작성한 글이다. 김영학 목사 연구가인 최양섭 목사는 김영학 목사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중이며 김영학 목사를 알리기 위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올해 연해주 일대로 비전트립을 3회 다녀왔으며 내년도에도 3회를 기획중이다.

 

나의 블라디보스토크 순례기 (3) ‘, 김영학 목사

 

필자의 <나의 블라디보스토크 순례기(3)> ‘, 김영학 목사의 본 기사는 잊힐 뻔한 김영학 목사의 일대기를 발굴하기 위해 김영학 목사의 유족을 수소문 끝내 찾아 만나 생생한 증언을 얻어내고, 그분의 블라디보스토크 선교지를 수 없이 왕래하며 역사적인 현장들을 밝혀냈으며, 더 나아가 고() 김영학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순교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한국교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최양섭 목사(기감, 대죽교회 담임, 김영학 목사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연구 자료를 토대로 정리하였음을 미리 밝힌다. - 윤홍준

 

대한민국의 기온보다 10도 이상은 차이가 날 거라고 생각하며 준비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의 칠월은 대한민국의 칠월만큼 더웠다. 약간의 기온의 차이는 있었지만 하늘이 더 맑은 탓인지, 햇살은 더욱 따가웠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흥단의 여정은 항일 독립투쟁의 발자취와 러시아 정교회를 탐방하는 일정을 지나 그토록 사모하던 고() 김영학 목사의 삶에 모아졌다. 사실 우리를 안내하던 C 선교사는 김영학 목사의 후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가 지난해 7월 발효한 신종교법에 의해 모든 개신교 활동을 금하고 교회로 지어진 건물 외에는 종교 활동을 금지하였다. 이 일로 많은 선교단체 및 선교사들이 러시아에서 추방당했다. 하지만 C 선교사는 약 100여 년 전 김영학 목사의 블라디보스토크 선교지 및 선교 활동을 근거로 정식 교회로 인정을 받아 선교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영학 목사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세운 교회는 지금은 아파트 촌에 덮였다. 하지만 김영학 선교사의 정신은 더욱 오롯이 남아있다. ‘동방을 정복하라는 이름의 뜻인 블라디보스토크’. 그들의 적극적인 개척 정신보다 더 강한 것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사명 아닌가?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들에게는 유럽의 관문이다. 하나님이 바울을 유럽의 관문인 마케도니아로 이끄신 것처럼 우리들에게 블라디보스토크는 유럽 선교의 관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 운동가이며 감리교 해외 파송 최초 순교자인 김영학 목사의 발자취를 발굴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선교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응답한 목사 김영학

 

1877210일 황해도 금천군 조포리에서 만석꾼의 집안의 아들로 출생한 김영학은 어려서는 한자를 공부했고, 17세 이른 나이에 신학문을 배우며 세상 물정을 접하였다. 하지만 그가 접한 조국의 현실은 을사늑약과 한일합방 체결로 암울하기만 했다. 김영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반의 체통과 체면을 내던지고 기울어가는 조선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젊은이들에게 애국정신을 선양하는 노력을 하였으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미력한 한계를 체감하고 자포자기 듯 광인(狂人)이 되어 주색잡기와 난봉꾼의 세월을 보낸다. 1906년 토산장이 서는 날 예수님을 믿고 새롭게 살아보라는 노방 전도대의 전도로 복음을 수용하고 복음의 능력으로 회심하고 1907년 세례를 받고, 1908년 권서인이 되어 성경과 찬송, 쪽복음, 전도지, 신앙서적을 가지고 지역을 순회하며 본격적인 전도인이 되었다. 191115회 남 감리교회 선교 연회에서 전도사 직첩을 받고, 1914년 제18회 선교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5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정회원에 허입(장로목사)하였다. 1909-1910년 평산구역장. 1910-1911년 금천구역장, 1911-1914년 장단구역장, 1914-1915년 철원구역장, 1915-1917년 광희문교회 담임, 1917-1918년 수표교교회 담임, 1918년 간선구역장으로 양양교회 부임하게 된다. 양양교회로 부임 후 김영학 목사는 지역의 청년들을 모아 예수를 믿고 나라 사랑을 생활화하라는 훈련을 시키게 된다. 그 날에 대해 최양섭 목사는 김영학 목사의 아내인 안원정 사모에게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듣게 된다. “강원도 간성교구를 맡게 되어 그곳에서 지내던 중 많은 청장년들을 모아 주님 바로 믿고 나라사랑을 생활화하라는 말은 언제나 입버릇처럼 했어요. 또 순회강연과 전도를 위해 바쁜 일정으로 집을 비울 때도 빈번했지요.” 김영학 목사의 영향으로 양양지역의 젊은이들과 교인들은 투철한 신앙과 독립정신으로 무장되어 갔다. 김영학 목사는 구역장으로 양양교회에 주재하며 광정교회, 낙산교회, 물치교회를 순회하며 목회했다. 그러던 중 1919. 3. 3일 조영순 장로의 딸 조화벽이 호수돈 여고 졸업반으로 개성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양양에 오면서 버선목 솜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겨 대포항을 통해 가져오고, 개성의 만세운동에 관해 전해 들은 양양교회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4.4일 장날에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며 양양공립보통학교 선후배인 그들이 동문들에게도 알리며 세력을 규합해 갔으며, 뜻을 같이하는 지역 유림들과 힘을 합해 같은 해 4. 4일 양양읍 장날에 촉발하고 4. 9일 현북면 기사문리 만세운동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안원정 사모는 이어 말하기를 기미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인산인해를 이룬 민중들 앞에서 김영학 목사가 연설하고 시위행진을 주도하다가 순경에 잡혀가 무수히 매를 맞고 서대문 감옥에서 6개월 간 보내고 출옥하셨어요. 그 당시 저는 그 해 22일에 쌍둥이 딸을 낳았는데 지금도 잊을 수 없이 눈물겹도록 고생했지요

 

당시 양양지역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상황보고 전문을 살피면 “45030 접수 / 本日(본일) ()襄陽郡(양양군) 邑內(읍내) 部落(부락)으로부터 耶蘇敎徒(야소교도)中心(중심)으로 한 數百名(수백명)一團(일단)邑內(읍내)進入(진입)하려 함을 阻止 (조지)함에 邑內(읍내) 徘徊者(배회자) 數百名(수백명) 呼應(호응)하여 萬歲(만세)() 하다. 主謀者(주모자)檢擧(검거)하고 解散(해산) 시켰으나 尙不穩(상불온)狀態(상태)이다.” 그러다가 이어서 “45일 오전 10시 접수 / 昨夜(작야) 다시 襄陽郡(양양군) 邑內(읍내) 附近(부근) 人民(인민) 約六百(약육백) 邑內(읍내)來襲(내습) 邑內民(읍내민) 約五百(약오백) ()()하여 소요를 ()하며 특히 留置人脫監(유치인탈감)을 위하여 警察署(경찰서)侵入(침입) 狼籍(랑적)()함으로서 武器(무기)使用(사용)하여 一旦(일단) 鎭壓(진압)하였으나 形勢不穩(형세불온). 暴民(폭민)死傷(사상) 있었다.”라고 기록됐다. 45일 물치장날(강현면) 만세 피검자 명단에 다수의 교인을 볼 수 있다. 나흘 뒤 보고문은 다음과 같다. “49일 접수 / “襄陽郡(양양군) 縣北面(현북면) 下光丁理(하광정리) 耶蘇敎徒(야소교도)中心(중심)으로 한 六百名(육백명) 49日 午前(오전) 10() 棍棒(곤봉)()하고 萬歲(만세)高唱(고창)하면서 其士門(기사문) 警察官駐在所(경찰관주재소)()하여 暴行(폭행)하다. 때마침 江陵(강릉) 守備隊(수비대)로부터 步兵(보병) 5()共力(공력)하여 發泡(발포) 鎭壓(진압)努力(노력) 暴民死傷(폭민사상) 9負傷者(부상자) 若干(약간)있는 모양이나 不明(불명).” 주목할 것은 양양지역의 독립운동은 耶蘇敎徒(야소교도) , 기독교인들이 주동했으며 그 중심에 김영학 목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김영학 목사는 대한독립애국단(국내 비밀독립결사단체)에도 깊이 관여하여 191910월에 <대한독립애국단 양양군단> 군단장을 맡게 된다. 하지만 이듬해 3월에 양양에서 체포된 김영학 목사는 192012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범죄처벌령 위반”,“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6월의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후 19224월에 만기 출소한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극비문서에 김영학 목사에 대해서 [민족절대독립주의, 배일사상포지자]로 규정하였으니 김영학 목사의 예수 잘 믿고 나라사랑하라는 실천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섣불리 나설 수 없던 그곳, 블라디보스토크에 서다.

 

앞서 <나의 블라디보스토크 순례기 (1)에서 밝힌 것처럼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로의 이주는 19세기 중엽 빈곤으로 인해 시작되었다가 1919년 이후는 정치적인 이유로 본격적인 이주가 이어졌으며 1927년에는 적어도 25만 명에 이르는 한인들이 정착했다19209월 조선남감리교회 선교연회에서 시베리아와 만주 지역의 한인들과 러시아인, 중국인들을 선교하기로 결의한 후 1923년에 간도일부, 하르빈, 시베리아(연해주)를 남감리교회 선교구역으로 확정했다. 김영학 목사는 감옥에서 출소 후 가평교회에서 5개월 목회하고 러시아 공산혁명으로 몹시 불안하여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러시아에 누구도 가지 않는다면 나라도 가겠다고 결심한 후 19229월 열린 남감리교회 조선매연회에서 시베리아선교사로 자원하여 블라디보스톡(당시 명, 해삼위) 신한촌에 해삼위구역관리자로 파송 받아 10월에 이주했다. 안원정 사모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곳에서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한인들을 찾아다니며 전도 강연과 동포들에게 애국 사상고취에 전심전력하는 한편 독립투사들과 연락하여 많은 분들과 왕래가 있었으며 교회에 들어온 헌금으로 많은 독립투사를 원조하는데 무한한 애를 썼어요당시 선교사들은 불신자를 전도하여 학습, 세례를 베풀고, 성찬을 집례하고, 교우가정을 심방하고, 교회를 순행하며 예배, 사경회, 계삭회, 부흥회를 인도했으며, 전도사 양성학교와 여자성경학교를 운영했다. 1924년 연회록에 기록된 김영학 목사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교회를 순행하며 복음을 들고 십에 팔구는 有神(유신)을 증명하였고 각 교회 신자들은 핍박을 감수하며 믿음을 장려하여 성경의 모든 예언을 소중히 여겨 그리스도의 강림을 사모하는 자 많고 겸하여 신자도 가끔 가끔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으며 예수님 말씀의 맺힌 열매로 나무를 안다하신 것이 우부우부까지라도 밝히 양해되는 날이 멀지 아니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광대한 문이 크게 열려 아무나 감히 닫을 수 없을 줄 믿습니다

 

단 한 명의 성도라도 있기에 떠날 수 없었던 블라디보스토크

 

192210월 소비에트 혁명군이 시베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11<극동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종교는 대중의 아편이라며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1924년경부터 공산당원과 공산청년들이 대중을 모아 놓고 하나님은 없다는 無神論(무신론)을 증거 하려고 종교인들을 불러다 놓고 어려운 질문 29개를 준비해 놓고 공산당원들이 돌아가며 질문하는 형식의 변증토론회를 개최했다. 김영학 목사는 이 변증토론회에서 무려 8시간 동안이나 핍박을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 앞에서 홀로 담대하게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고 토론했고, 결국 무신변증(無神辨證)有神辨證(유신변증)이 되고 말았다. 김영학 목사는 수많은 위협에도 유신의 신앙을 지켜냈고, 주일학교 활성화를 통해 더욱 담대히 신앙 수호에 앞장섰다. 하지만 공산당의 핍박은 더욱 치밀하고 가중되었다. 그들은 시베리아연회도 해삼위예배당을 비롯한 교회의 재산을 압수하고 기독교 학교를 폐교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선교 확장을 제한할 뿐 아니라 비자를 다시 발급해 주지 않아 강제출국시키거나 출국했다가는 다시 돌아올 수 없게 했으며, 종교 제한법(예배 신고 및 허가제)을 통해 기독교 활동을 극도로 통제했다. 또한 소비에트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사람들과 교역자들은 생필품들을 배급받을 수 없게 했다. 공산당은 국적 취득 조건으로는 기독교 배교 및 정교회로의 개종을 강요했다. 결국 배급권을 얻지 못한 목사와 선교사들의 고통은 날마다 심해졌다. 이런 정책으로 1926년 러시아 한인 인구의 절반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다. 그러나 김영학 목사는 교인들을 위로하며 신앙을 지도하고 공산당에 끝까지 협력하지 않았다. 1927년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부는 시베리아와 간도 지역에서 선교를 중단하기로 결의하고 선교사들에게 선교기지를 처분하고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이미 1924년부터 연해주에는 미국인 선교사들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1929년 시베리아 한인선교사들과 300명의 신자들이 북간도 동홍진으로 탈출했지만 김영학 목사는 고난 속에서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를 탈출할 수 없는 교인들과 함께 남았다. 급박해진 감리교총리원은 김영학 목사에게 급히 철수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김영학 목사는 양주삼 총리사에게 답장을 하여 뜻을 밝혔다. “형님께서도 이곳 형편을 듣고 다 자세히 아실 줄 압니다. 교제도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지 아니하나 나의 본 양심을 가지고는 차마 떠날 수 없습니다. 날마다 곤란한 일이 많지만 이곳 교인들과 같이 당하기로 생각합니다...... 시베리아교회를 위하여 기도 많이 하여 주심을 바랍니다.” 김영학 목사가 교인들과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며 선한목자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헌신적 모습에 교인들과 한인들이 위로와 힘을 얻어 모든 핍박을 견디어 가자 193013일 러시아 관헌들은 김영학 목사를 <악질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체포하여, 블라디보스톡 감옥에 구금한 채 1년 동안 공갈. 협박. 회유책을 써가며 背敎(배교)를 강요했다. 체포되어 가실 때 마지막으로 내가 기어이 이 놈들에게 잡혀가니 만약 살아나오지 못하면 너희들은 내가 어떻게 죽었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피맺힌 말을 전하고 끌려가셨다. 이 광경을 목격한 큰 아들(7)은 공포에 떨다가 쇼크로 사망했다. 공산당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뜻을 굽히지 않자 1931310<10년 중노동형>을 선고하고 배를 이용하여 영하4-50도 되는 콜리마지역 나가예바(나강) 굴락(강제노동감옥)으로 전감(7일간 이송)되었다. 블라디보스톡 감옥에 구금 되었을 때 아내 안원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로 표현하며 순교할 것을 예시하고 있으며, 자녀들에게 옥중의 아비가 마지막으로 내리는 사랑의 교훈은 큰 감동을 주고 있다. 특히 큰아들의 죽음을 모르고 내리는 이 훈계는 너무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나를 위하여 아무 염려도 하지 말며 슬퍼하지도 마시오. ()님을 위하여 犧牲(희생)의 몸이 되었으니 元貞(원정)子女(자녀)와 나의 영광으로 생각할 것으로 압니다. 이제 내가 자여들에게 敎訓(교훈)하는 것을 이 아래 기록하니 兒孫(아손)들에게 그대로 가르치시오. ......昶洙(창수)는 사자의 새끼라 凡事(범사)勝利者(승리자)가 되어서 위로는 ()님과 아래로는 人類(인류)에게 부끄럽지 않고 영원히 썩지 아니할 봉사자 되기를 바라며, 暎洙(영수)는 어린 양 같이 양순하고 깨끗하여 예수님의 남은 자취를 밟아 萬人(만인)에게 ()을 끼치기를 바란다고 교훈하시오.” 1930. 12. 17. 囚禁 中에 있는 金永鶴 永鶴(영학)의 몸은 ()께 바친 犧牲(희생)()인즉 ()引導(인도)를 기다릴 것뿐이나 내가 十年(십년)의 징역을 받은 것은 낸 사랑하는 元貞(원정)兒孫(아손)들이 받은 줄로 생각합니다” 1931. 8. 31. 金永鶴 書

 

그 후 2년이 지났을 무렵 시베리아선교처 니콜스크구역 담임자였던 도인권 목사 명의 訃音(부음)이 가족과 감리교회에 알려진다.

 

金永鶴(김영학) 牧師(목사) ()님은 昨年(작년) () 十二月(日字未詳(일자미상))別世(별세)하셨습니다. 昨年(작년) 九月(구월)에 감챠스카에셔도 三晝三夜(삼주삼야)를 더 가는 나강 이라는 곧으로 실녀 들어가서 그 곧셔 눈()치는 일을 하시다가 농가름에 빠져 世上(세상)을 떠나셨답니다.” 一九三三年 十月 一日 都寅權 上

 

김영학 목사의 일대기를 발굴한 최양섭 목사는 알 수 생소한 용어인 나강농가름에 대해 추적 한 결과 나강은 마가단(옛 이름 나가예바)인 것을 밝혀냈다. 특히농가름을 이렇게 말한다. “농가름은 영하 4-50도 혹한으로 얼어버린 바다에서 생기는 현상인데, 이 지역은 겨울 바다의 얼음 두께가 4m 나 됩니다. 김영학 목사는 이 얼음 위에서 눈을 치우는 노역을 하다가 그만 그 틈에 빠져 순국하신 겁니다.” 이 후 기독신보(1933. 10.25일자). 동아일보(1933.10.31일자) 조선일보(1933.10.31.일자) 감리회보(1933.11. 1일자)는 김영학 목사의 순교를 보도했으며, 순교 사실을 전해들은 경성지방 교역자회는 1933. 10.29 오후 3시 종교예배당에서 <재 노령 김영학 목사 순교추도회>로 예배드리고, 1933.12.7. 3회 기독교조선감리회 만주선교회시 첫 날 <고 김영학 목사 추도회>로 예배했고, 간도 훈춘현 동홍진교회에서 <고 김영학 목사 봉도식>이 드려졌다. 감리회 총리원에서는 양주삼총리사가 193310.31 김영학목사 시베리아 선교를 하다 순교하다라는 제목으로 미망인과 어린 사남매를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한글. 영문 호소문을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양주삼 목사는 김영학 목사로부터 받은 답신을 소개하였다. “선교부에서 신변이 위험하니 철수하라는 권고를 받았음에도 답장하기를 <여기에 단 한 사람의 성도라도 남아 있다면 어떤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더라도 떠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무리들에게 <참 목자> 였습니다. ..... 그는 그의 소명에 죽음으로까지 성실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교회에 참다운 사역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이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김영학 목사는 감리교회 해외파송 선교사로 첫 번째 순교자인 것이다.    (출처-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2993)

 

 

<양양감리교회 추모예배>

 

80년만의 추도예배, 잊혀진 순교자 김영학 목사, 2012.10.29, 김영학 목사 80주기 추도예배 열려(영동CBS 최진성 아나운서)  (출처-http://cafe.daum.net/4missioncenter/eoE)

 

양양감리교회 100주년 기념교회 (출처-http://sejinarchi.com/wordpress/)

 

 

감리회 목회자이자 잊혀진 독립운동가, 그리고 해외파송 선교사 중 첫 번째로 순교한 김영학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순교’가 제작된다. ‘순교자 김영학 목사 기념사업회(회장 최양섭 목사)’가 제작지원에 나선 이 영화는 ‘제자 옥한흠’, ‘잊혀진 가방’을 만든 ‘파이오니아 21’의 김상철 감독이 제작한다. 기념사업회장 최양섭 목사는 “현재 영화는 제작 중에 있으며 개봉은 2016년 4월 예정”이라며 “감리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신앙의 롤모델이 될 김영학 목사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순교’에 감리교회의 많은 기도와 후원을 바란다”고 당부했다.

 

영화 '순교자' 포스터 20158월 개봉

(출처-http://kmc.or.kr/news-kmc?uid=50204&mod=document, 2850, 유충일)

 

황해 금천(金川)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당시 양양(襄陽)의 기독교회 목사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동년 10월초 일찍부터 친분을 가져왔던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조종대(趙鍾大)로부터 동단의 설립취지를 듣고 이에 찬동하여 그 지부(支部)로서 양양군단(襄陽郡團)을 결성하고 군단장(郡團長)으로 활약했다. 19195월 서울에서 신현구(申鉉九) 등이 주도·결성한 대한독립애국단은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 지단(支團)을 설치했는데, 양양군단은 이러한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산하조직이었다. 동단에서는 주로 임시정부의 선전 및 재정자금의 모집, 그리고 국내의 조직망을 통해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던 임시정부 지원단체였다. 양양군단 결성 직후 그는 김형석(金亨錫)을 비롯해 이근옥(李根玉이석규(李錫圭김연수(金延洙) 등을 동단에 가입케 하며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1920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피체되어 동년 12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그는 국외로 나아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19229월에 노령(露領) 해삼위(海蔘威) 방면의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그리하여 노령 지역에서 선교사업 및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가 1929년 소련 공산당에 피체되어 10년의 중노동형을 언도받고 시베리아에 복역 중 1933년 옥중에서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판결문(1920. 12. 23 경성지방법원)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118·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6·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5·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457·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991

(출처http://kmc.or.kr/news-kmc?uid=50269&mod=document, 민관기 목사)

 

영화 '순교자' 포스터 20158월 개봉

(출처-http://kmc.or.kr/news-kmc?uid=50204&mod=document, 2850, 유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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