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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장흥교회, 서기훈 목사 (감리교 동부연회 순교자)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19. 8. 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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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감리교회

 

장흥교회는 1920년 철원제일교회 한성옥 목사가 공봉기 자택에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됐다. 이후 신석구, 서기훈, 명관조, 박경룡 목사 등 감리교회 큰 목회자들이 시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서기훈 목사 순교기념비

 

해방직후 교회 청년들이 철원 애국단을 조직하여 반공투쟁을 벌이다 희생된 곳이며 순국 기념비가 있다. 교회당 왼편에 서기훈 목사 순교비가 있고 뒷동산에는 충혼탑이 있다. 이 탑이 세워진 사연은 전쟁 당시 공산당 활동에 앞장섰던 후손들이 사죄하는 뜻에서 세웠지만 이들은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도 새겨넣었던 것이다. 제막식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된 마을 사람들은 그들 이름이 새겨진 부분만 떼어내고 비문 명단을 고쳤다고 한다. 어처구니 없게도 냉전시대의 유물이 역사왜곡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건이었다. 장흥교회의 모교회는 철원제일교회라고 한다. 서기훈 목사는 장흥교회 담임자로서 반공활동의 전위대였던 대한청년단의 고문으로 70세의 나이에 공산군에 의해 순교하였다.

 

 

 

순교비 측면

 

.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죽음이 아니요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다.”

 

순교비 뒷면, 순교비를 세운 철원지방 교회 및 명단

 

순교비 측면 성경구절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12:24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양지 100주년 순교자 기념관>

 

 

서기훈 목사 순교기념비, 양지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죽음이 아니요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다.”

 

서기훈 목사 순교기념비 제막식, 양지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2005.12.1.

 

한국교회순교자 추모예배, 2005.12.1. 양지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철원 장흥교회 서기훈 목사와 삼척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에 대한 순교자 추서 예배이다.

 

서기훈 목사 순교자 추서증 수여,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2005.12.1.

 

 

서기탁 목사님의 인사 (선친의 유시와 자신이 저술한 '순교자 우리 아버지'라는 책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서기훈 목사 (장방산의 노목사)

 

한 줌 흙을 퍼 옮겨놓으면 아마 그런 모습일 것이다. 철원평야 한가운데서 長防山은 화선지에 찍힌 획 하나처럼 작고 보잘 것 없었다. 온통 낙엽송 밭이었다. 그리고 그 나무그늘 속에 마을이 소복히 앉아있었다. 마을의 돌담들은 나이가 든듯했다. 한탄강이나 대교천 강돌들일텐데 덕지덕지 세월의 때가 묻어있는 것 같았다. 장흥교회도 돌집이었다. 검고 구멍이 숭숭 뚫린 곰보둘들이었다. 철원 제일교회의 무너진 벽채와 돌계단에서 보았던 바로 그 현무암들이었다. 넌즈시 한 시대를 공유했던 두 교회의 아픔을 암시하고 있었다. 17평 벽돌집을 이어붙였지만 뒷채 곰보돌 벽엔 여전히 잔인한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기독교 감리교단의 첫 반공 희생 사건이자 장흥교회가 연루된 첫 순교 사건은 488월에 일어났다. 이시영 부통령은 멀지않아 38선이 헐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극비리에 ‘38선이북관리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통령은 김윤옥목사(당시 34)를 불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상임이사를 지낸 김병조 목사(18761947)의 아들. 김목사는 38선 이북 강원도 반공책임자가 되어 38선을 넘어 철원 제일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다. 젊은 부목사는 장흥교회를 주목했다. 이 교회는 1920년 장방산마을 고봉기씨집에서 창립한 철원교회의 자교회.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이었던 신석구 목사를 비롯해 명관조 박경룡 목사등이 담임하면서 민족교육이 단단히 착근한 교회였다. 이 교회 청년 30명을 모아 신한애국청년회를 결성했다. 463월이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그해 8월 일망타진됐다. 장흥교회 청년들은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갔다. 그리고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박성배장로는 8, 박정배(당시 36)5, 김정필(당시 37) 정창화(당시 35)는 각각 15년형을 언도받았으나 모두 옥사했다. 몇사람이 옥고를 치르고 돌아왔으나 이내 그들은 다시 함경도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다. 이 사건으로 장흥리 사람들은 시퍼런 한을 장방산에 묻었다. 장방산은 한많은 산이었다. 501010일 육군 백골부대가 철원읍에 진주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15가구중 30가구가 공산당원이었던 장흥리에는 아직도 서슬이 퍼런 그들의 시선이 마을을 감시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장방산에 터졌다 38. 만나보자 부모형제란 삐라가 뿌려졌다. 마을 봉기의 예고탄이었다. 마을 청년들은 어느새 빨갱이 30명을 공회당에 감금해 놓았다. 그들은 누구 하나 저지를 죄과를 벗어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출타중이던 徐琦勳목사(18821951)는 이 소식을 마을 밖에서 들었다. 그는 허겁지겁 마을로 달려왔다. 이미 두 사람이 처형된 뒤였다. “내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목사는 준엄하게 청년들을 꾸짖었다. 목사는 徐榮九논산군수의 장남이다.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이미 고저 구역장, 철원지방 감리사, 원산 구세병원 원목, 원산 신고산교회 담임 등을 지낸 원로목사. 475월 신한애국청년회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된 장흥교회를 수습하기 위해 파송된 그의 권위는 대단했다. “내말을 듣지않으면 내가 마을을 떠나겠다는 호령에 청년들은 원수를 풀어줬다. 그러나 목사는 바로 그 원수들의 손에 순교했다. 전세가 역전돼 마을은 다시 공산군 수중에 들어갔다. 목사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경기도 포천군 관인면 냉정리에서 첫 밤을 보내던 목사는 열 집이 마을을 떠나지 못한 사실을 알았다. 그날밤 노목사는 가족을 이끌고 장방산으로 돌아왔다. 열 집의 마을 주민들은 내무서원의 눈길을 피해 아궁이나 돌각더미속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노목사가 울리는 새벽종소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리고 한 밤중 돌담장 모퉁이에서 오늘은 약력으로 섣달 스무사흘, 음력으로 동짓달 스무하루, 30분만 있으면 자정이라고 날자와 시간을 알려주는 노인의 부르짖음을 듣고 있었다. 51년 새해 첫날, 실성한 사람처럼 어두운 마을을 순회하던 노목사의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장흥교회는 종이 울리지 않았다. 다시 장방산으로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러나 노목사는 교회에 없었다. 내무서원들은 노목사에게 처음 외아들 기택씨(현 인천 영화학교 교장)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아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요리의 빈창고로 끌려갔다. 그들은 창고에 훤히 불을 밝혀 놓았다. 등화관제를 하지 않은 건물은 B-29의 좋은 표적이었다. 그들은 목사의 아들을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포탄이 떨어지는 틈을 타 철원을 탈출했다. 그해 1213일 몰래 교회를 찾아온 권오창 장로에게 목사는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사시당사 비당사 생이구생 불시생) '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죽음이 아니오,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라')란묘한 글귀 하나를 적어줬다. 철원평야는 큰 눈으로 새해를 맞았다. 작은벌 끝 대교천변의 집사집에 기거하던 목사에게 새해 손님이 찾아왔다. 잘 아는 내무서원이었다. “갑시다.”들판을 가로 질러간 발자국은 세 개였다. 하나는 내무서원의 것이고 하나는 목사의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노목사의 길을 마지막까지 동행하던 그의 지팡이 자국이었다. 발자국은 들판을 지나 장방산으로 올랐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발자국은 오래도록 멈춰 서 있었던 것처럼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자국은 동송 사문안골로 이어졌다. 거긴 지금도 철원사람들이 그곳으로 끌려간 사람중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고 해 死不還골로 고쳐 부르는 곳이다. 15년 뒤인 67년 마을 사람들은 장흥교회 뜨락에 오석으로 된 비 하나를 세웠다. 작은 비석이었지만 이수와 비좌를 갖춘 정성을 들인 비였다. ‘서기훈 목사 순교 기념비에는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이란 그의 시구가 적혀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요(:2526)’란 성경구절은 마을 사람들이 노목사의 음성인양 가슴에 묻고 싶은 바램같은 것일 것이다. 작은 동산 장방산은 동으로 자릿벌, 서로 달챙이들, 남으로 메닷다니들, 북으로 작은벌 등 온통 철원평야를 거느리며 한탄강과 대교천을 굽어보고 있었다. 옛사람들이 둔덕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장방산이라고 멧산자 하나를 더붙인 것은 아마 그 산이 작지만 큰 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출처: http://www.dmzline.com)

 

감리교 동부연회 본부 현관 부조

 

감리교 동부연회 본부 현관 부조, 원주

 

서기훈 목사는 세상이 변해도 복음의 진리에 굳게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삶으로 보이셨던 복음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시고 떠나셨다. 하지만 그를 기억할만한 기록을 찾는일은 쉽지 않은 아쉬움이 많다. 그는 충남 논산의 서영구의 아들로 태어나 입신양면을 위해 한학을 공부했다. 그러던중 그의 나이 231904년에 육곡교회를 설립하게되었다. 당시 나라의 형편이 어려워 백성을 지켜낼수 없을 때 교회는 일본의 힘을 피할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였다. 교회가 현실적 이유로 세워졌지만 5년의 세월은 그에게 세례를 받고 목회의 소명을 깨닫게 만들었다. 190928세로 세례와 함께 공주교회의 단기 신학을 이수했다. 1916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고 27년에는 장로목사안수를 받으니 이때 46세였다. 초기는 충청지역에서 목회사역을 23년이후 순교할때까지는 강원북부 지역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조용하고 점잔은 성격이였다고 증언해준다. 그의 초기 목회여정은 연산구역, 부여구역, 대전남북구역의 활동이 있었지만 자세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1923년부터 원산에서의 18년 사역의 시작이다. 간성, 고저, 원산구세병원, 장전구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교회부흥을 이끌었다. 1940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유치장에서 여섯달을 보내기도 했다. 이때 수염을 깍지 못했던 것이 그의 상징이 되었다. 해방이되어 폐쇄되었던 교회들을 회복하지만 공산주의는 새로운 핍박자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월남하던 때에 서기훈 목사는 장흥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장흥교회는 1920년 한성옥목사에 의해 설림되었고 영생학교를 통해 민족계몽에 나섰다. 삼일 민족대표인 신석구목사는 4, 한국 개신교 수도원을 세운 박경룡은 12대 담임자였고 서기훈목사는 6대와 13대 담임목회를 했다. 서기훈목사는 감리사로 1931-33년 철원지방에서 활동했다. 그의 활동은 연약했던 교회들이 큰 부흥을 이루게 했다. 장흥교회(철원동구역)에도 엡윗청년회가 조직될 만큼 교회는 젊고 활동적이였다. 이 조직은 훗날 장흥교회를 중심한 신앙운동에 큰 활동을 하게 된다. 박경룡목사는 1940년 장흥교회에 부임하여 수도원운동을 시작했고 이것은 대한수도원의 시작이 되었다. 이성해집사, 유재헌목사, 전진전도사 등은 우리나라 기도운동의 선각자들이다. 해방은 기쁨과 함께 어려움으로 찾아왔다. 38이북은 공산주의 세상이였고 기독교는 큰 어려움에 처했다. 김윤옥목사의 지도로 반공조직이 만들어졌고 많은수가 장흥교회 성도들이였다. 신한청년회다. 19463월에 조직되지만 8월에 발각되어 지역과 교회에 큰 어려움이 찾아왔다. 50여명중 주동자 김윤옥목사와 박성배장로 7년형을 기타의 사람들이 4-1년형을 받고 여러명이 옥사하고 체포중 죽기도 했다. 이 사건 때문에 박경룡목사는 교회를 떠나야 했고 그 후임으로 서기훈목사가 부임하였다. 서기훈 목사는 교회와 공산주의가 대립된 상황에서도 단절보다는 소통을 이루고자 했다. 그의 인격은 좋은 도구였다. 핵심 공산당원 이영일의 아버지 이보연과도 수시로 바둑을두며 왕래했고 교회는 어려움중에도 새벽종이 그치지 않을수 있었다. 사랑으로 대하며 소망중에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집단적인 보복의 상황이 발생한다. 대한청년단원들이 공산당원과 가족에게 보복하려 할 때 서목사는 그들의 행위를 막아냈고 많은 이들이 피난길에 오를때도 남겨진 성도들을 돌보며 교회와 성도를 지켰다. 철원에 공산당이 다시 들어왔고 공산당에 대항했던 장흥교회 성도들을 대신하여 구금되고 195118일에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부연회 순교자열전, 출처- 장흥교회 한찬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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