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 전 유적지>
철원제일감리교회(구명, 철원읍교회) 역사
철원감리교회는 1905년 장로교인 웰번(E.A.Welbon) 선교사에 의해 장로교회로 설립되었다.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외가 선교 구역을 분할할 때 이 교회는 남 감리교회로 분리 이관케 되었으며, 초기에 Rer.C.T.Coller 선교사가 관리하여 강원도 북부지역인 남 감리교회 선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구한말인 1909년 김철회가 이 교회부지에 사립 배영학교와 교회를 건립하고 주민들에게 신문화교육, 육영사업, 군사훈련, 민족정신 함양에 주력해 왔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 강점이후 보호정치, 통감정치를 거치는 동안 조선 정치의 가장 큰 장애물이 기독교라 공언하고 항일집단이라고 매도하였다. 1914년도 배영학교 자리에 철원감리교회를 재신축하면서 배영학교는 교회시설인 정의학교로 개칭 이관되었고, 또한 영동야간학교도 이 교회에서 운영하였다. 1919년 3.1운동시 서문거리의 전도회와 더불어 시위운동의 저력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교회의 학생, 교사, 전도사들이 시국에 대한 정보 등을 적시에 제공하여 철원읍 만세운동을 추진, 연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감리교회의 수사와 신도들이었다. 철원지역에서의 선교활동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1920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해 5월에 철원지방에서는 최초로 붉은 벽돌 건물로 철원읍교회가 낙성되었으며, 7월에 선교사 주재소가 신설되고 의료선교사 앤더슨(E.W. Anderson, 安烈) 부부와 여선교사 어윈(Cordelia Erwin, 魚源)이 상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철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3월 10‧11‧18일에 일어난 철원읍 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10일 철원읍교회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 해 8월에는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김상덕과 박연서 목사가 주축이 되어 항일단체인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국내 독립운동 상황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고했고 임시정부에서 전달된 문서를 반포하는 활동을 하다가 1920년에 23명이 일경에게 체포됨으로써 해산되고 말았다. 1930년대 들어 철원읍교회는 부흥 일로에 있었다. 철원동구역(장흥교회)에서 사경회를 할 때 서기훈, 문우형 목사 등이 교수했는데 새신자가 36명에 달하였다. 1933년 들어서 철원읍교회에는 새신자가 50명이 늘었고 주일학교는 매주일 300여 명이 모이게 되었다. 이렇게 교세가 더욱 신장되고 철원지방에는 지방 중심지에 감리교회를 대표할 이렇다 할 교회가 없어 철원에 예배당 세우는 일이 시급해졌다. 1936년에 드디어 지방회원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철원읍교회 예배당 기공식이 있었다. 철원읍교회의 설계는 당시 유명한 설계사인 보리스(W.M. Voris)가 맡았다. 총공사비는 27,200원으로 선교부에서 15,850원을 보조하였고 나머지는 교인들이 헌금하였다. 대지면적은 1,200평, 건평은 198평으로 갤러리가 있는 준 3층 석조건물이었다. 공사기간은 만 1년이 걸려 1937년 9월 30일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철원제일감리교회 터
철원제일교회 교세 (사진은 당시 주일학교 학생들)
철원제일교회 교세 (사진은 당시 주일학교 학생들)
건축당시 교회의 담임목사는 이기연 목사였고, 교인은 337명, 주일학교 학생은 275명, 직원은 27명이었고, 엡윗청년회가 50명, 여선교회가 66명으로 각각 2개 지회가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6.25당시 폭격으로 인해 이 신앙의 요람은 잔해만 남게 되었다. 공산 치하에서 철원제일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청년학생들의 반공투쟁이 전개되기도 했지만 전쟁으로 대부분 건물이 파괴돼 현재 전면 출입구 등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6.25 당시 인민군 병영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기도처이던 지하실은 양민학살의 만행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해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장소이다. 한편 이 지역 장흥교회 이금성 장로는 일본 오사카예술대학 박물관에서 철원제일감리교회를 설계한 보리스씨의 설계도면을 찾게 되었고 철원제일교회를 실물 그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철원 노동당사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철원제일교회는 근대문화유산 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철원제일교회의 목회자들
교회가 세워질 당시는 일제강점기로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지고 있던 시기였다. 강원도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강원도에서는 철원이 가장 먼저 일어났고, 그 중심에 철원제일교회(당시 철원읍교회) 박연서 목사가 있었고,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후 항일단체인 ‘철원애국단’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또한 강종근 목사는 1939년 철원제일교회에 부임하여 열심히 사역을 감당하면서 교인들은 물론 지역주민들로부터 존경과 신임을 받자 일본경찰의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았고, 모진 고문으로 1942년 세브란스 병원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순교자 강종근 목사(1904.9.26-1942.6.3)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태어났다. 1910년 부모의 신앙을 따라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으며 1925년 배재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윤희성과 결혼하였다. 1933년 4월 중부연회에 허입한 후 첫 목회지로 경성지방의 창동교회에 파송 받아 목회하였고, 1935년에 창동교회가 동부연회로 편입됨에 따라 그의 소속도 동부연회로 옮겨지게 되었다. 1937년에는 철원지방 연천교회를 이듬해인 1938년에는 창도교회를 그리고 1939년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정회원에 허입한 후 철원지방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한 그는 열심히 봉직하였고 그로 인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매 교인은 물론 일반 불신자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따라서 일본 경찰은 교회 행사에 일일이 간섭하고 방해하며 강종근 목사를 호출하여 방해하곤 하였다. 1940년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은 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받은 고문으로 신병이 약해지자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아내 윤희성 사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주를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가 1942년 6월 3일 이었다.
강종근 목사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으로 순교자가 된 첫 번째 목회자이다. 감리교회는 신사참배에대해 순응하는 입장이였으나 강종근목사 등 소수의 신앙인들은 신앙과 민족을 지키며 수난과 죽음을 당했다. 강종근목사는 평남 강서군의 강영동과 박형옥의 4형제중 막내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그가 2살 때 돌아가시고 가난한 집안을 어머니가 책임지셨다. 그는 어머니를따라 예수를 믿게된다. 그의 가족은 한일합방과 함께 만주 봉천의 유하현으로 이주하여 삼광학교와 철영 육영학교에서 공부하며 민족교육을 받았으며 이동교회를 다니며 최학규전도사로부터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최학규의 추천으로 강종근은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이 더욱 굳어졌으며 졸업후 1925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29년 졸업한다. 재학중이던 26년 윤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그는 1933년 경성지방 창동구역에 파송받아 목회를 시작하였고 그의 사역기간 크게 부흥하였다. 37년에는 철원지방 연천구역에 파송되어 목회했고 38년에는 창도교회, 39년에는 목사안수를 받고 철원제일교회에서 목회했다. 철원제일교회는 강원도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때 박연서목사를 중심으로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관계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교회로 이런 발자취는 선교적으로도 큰 부흥을 이룰수 있었다. 36년에 기공해서 지었던 예배당은 한강이북에 최고로 아름다운 교회로 알려지기도 했다. 일본은 30년대 후반부터 교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갔고 신사참배는 교회에게 큰 어려움이였다. 감리교회는 38년 이후로는 공개적으로 신사참배를 했으며 39년 정춘수목사가 감독이 되면서 혁신교단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예속되었다. 이런 시대배경에도 불구하고 강종근목사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강조하며 민족을 향해 손을 펴야한다는 설교 행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출애굽기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민족도 해방의 때가 올것임 선포하며 이겨내기를 선포했다. 연천교회에서도 창도교회에서도 철원제일교회에서도 그의 외침은 약해지지 않았다. 신사참배에 대해서도 그는 끝까지 거부하여 일본 경찰의 표적이 되었다. 1940년 9월 30일 신사참배 거부항쟁자 193명이 검거되었고 강종근목사도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다. 일본은 강목사를 조용히 서울로 이송하고자 했지만 성도들은 새벽녘에 철원역에서 찬송으로 떠나는 목사를 배웅했다고 전한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중 건강이 악화되었고 1942년 6월 3일에 06시 “나는 기뻐” 라는 말을 아내 윤희성에게 남기고 순교하셨다. 강종근목사의 유족은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아들의 친구인 이창건박사가 강목사의 재판기록을 찾아내어 2003년 애국장을 추서받았고 2006년에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동부연회 순교자열전, 출처- 장흥교회 한찬희 목사)
동부연회 순교자, 원주 감리교 동부연회 부조
동부연회 순교자, 원주 감리교 동부연회 부조
방문현수막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입구
철원감리교회 재건 투시도
철원감리교회 재건 투시도
철원감리교회의 규모 (사진은 조감도)
철원감리교회의 규모 (사진은 조감도) (출처-http://blog.daum.net/kjpark/938)
철원제일교회의 크기는 가로 24m, 세로 12.2m의 현무암과 화강암을 쌓아 만든 석조건물이었다. 1층은 소예배실(교육관)과 10개의 분반공부방, 2층은 대예배실로 이루어진 웅장한 교회였다. 철원제일교회는 이화여대 캠퍼스를 설계 건축한 보리스에 의해 건립되었다. 1880년 미국에서 태어난 보리스는 대학 졸업 후 해외선교를 위해 1905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는 일본서 영어교사를 거쳐 오미미션을 조직해 일본과 한국에서 왕성한 미션건축 활동을 했다. 보리스가 어떤 경로로 한국내 미션건축에 참여하게 됐는지 명확하게 밝혀주는 자료는 없다. 단지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감신대 석사과정 중인 이정선은 논문 <건축선교사 보리스의 한국내 건축활동>에서 ‘보리스가 주로 방문했던 지역이 서울과 평양, 부산, 개성 등 한국내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그의 한국 방문이 미션건축사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실제로 보리스는 1905년부터 1964년까지 60년 가까이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한국내 건축사업과 관련 1908년부터 1938년까지 총 17회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다. 보리스의 초기 한국내 건축물은 서울에 건립된 협성여자신학교와 피어슨기념성경학원의 기숙사를 들 수 있다. 협성여자신학교는 1917년 설계돼 1918년 완공됐으며, 이 해에 피어슨기념성경학원의 기숙사도 완공됐다. 이듬해인 1919년 5월과 1920년 1월 한국을 방문한 보리스는 미국감리교 해외선교 1백주년을 기념하는 ‘백주년 기념운동’건축사업 관련해 감리교의 많은 미션건축물을 설계ㆍ건축했다. 감리교 계통의 공주영명학교, 해주남학교, 평양여학교, 송도(개성)학교 등이 이때 건립됐다. 이후 보리스는 1932년부터 1941년에 이르기까지 이화여대 캠퍼스 건립사업에 참여해 본관, 체육관, 음악관 등 총 10여 개의 건물을 설계 및 건축했다. 또한 그는 이 기간 중에 원산중앙교회(1935~37), 철원제일교회(1936~37), 태화사회복지관(1937~1939), 평양요한학교(1939~40) 등을 건립했다. 이 중 이화여대 캠퍼스는 보리스 자신이 각별한 애착을 갖는 작품이었으며, 당시 한강 이북지역에 있는 교회들 중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손꼽혔던 철원제일교회는 보리스를 대표하는 한국내 건축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야외 예배실
옛 철원제일감리교회 유적지 비
옛 철원제일감리교회 유적지 비
야외 예배실
야외 예배실, 유적비
야외 예배실
야외 예배실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전경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정문 측면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정문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전면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전면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전면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전면
철원감리교회 유적지 전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 23호
입구 계단
입구 바닥
정문 좌측 벽
정문에서 안쪽을
안쪽에서 바라본 정문쪽
허물어진 벽
허물어진 벽
입구 쪽
유적지 잔해
유적지 벽
강단 쪽 유적
강단 쪽 유적
강단 쪽 유적
강단 쪽 유적
강단 쪽 유적 측면
유적지
어느 교회에서 만들어 놓은 십자가 모래무덤
어느 교회에서 만들어 놓은 십자가 모래무덤
교회학교 아이들의 이름이 쓰여있다
철원제일교회 터에서 기도하는 미연합감리교회 북일리노이주연회 정희수 감독과 대표들 (2006.5.)
미선교부의 지원으로 건축됐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구 철원제일교회(본지 419호 소개) 현장에 미연합감리교회 북일리노이주연회(정희수 감독)의 대표들이 방문했다. 모두 9명으로 구성된 방문단은 서울남연회(김충식 감독)와 자매결연을 맺기 위해 내한했다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이곳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이들은 지난 21일 본부 비서실과 철원서지방(방 현 감리사)의 안내로 한국전쟁과 선교의 역사를 간직한 이곳에 대한 전반적 설명을 듣고 기도회를 진행했다. 특히 이 자리에선 3년간의 법정투쟁을 통해 망실된 철원제일교회의 토지를 본부 유지재단에 편입시켰던 이금성 장로(장흥교회)가 전반적 설명을 진행했다. 이 장로는 “초기 미군 폭격이 시작돼 철원지역이 초토화돼도 이곳은 무사했는데, 인민군 병영으로 쓰이는 바람에 파괴되고 말았다”며 교회와 지역의 전반적 역사를 설명했다. 그는 또 “미 선교사들에 의해 종교부지로 쓰이다 망실된 재산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면서 “이를 통해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된 신앙의 역사를 회복하는 것이 희망”이라고 덧붙였다. 북일리노이주연회의 자매결연위원회대표로 이 자리에 참석했던 로버트(Rev. Robert B. Campbell) 목사는 교회를 복원하고자 하는 감리교회의 노력을 전해 듣고, “파괴된 이 곳의 회복은 부활의 상징과 같다”며 “복원을 위해 일정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출처- 기독교타임즈 이준협 기자, 200605)
폭격의 흔적인 외벽을 붙잡고 기도하는 UMC 및 철원제일교회 복원추진 관계자들
2006.3.26 철원제일교회 복원을 준비하기위해 기도하고있다.
철원제일교회 복원기공예배 (2008.10.24)
철원제일교회 복원기공예배가 2008.10.24 오후 2시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102번지 철원제일교회 유적지에서 열렸다. 김남철 감독(동부연회)의 사회로 진행된 기공예배에서 신경하 감독회장은 ‘눈물로 다시 세워야 할 교회’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신 감독회장은 “역사적인 꿈은 모든 간절한 기도와 소망 속에서 이루어짐을 감사하며, 이 일을 통해 역사의 회복, 평화의 기원과 초석을 새롭게 놓는 일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철원제일교회 복원건축위원장인 이규학 감독은 복원공사계획을 설명하면서, “철원제일교회의 복원을 통해 북한 선교의 문이 열리고 평화통일의 교육장으로 활용되길 바라며, 이 일에 한국 감리교회가 함께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복원시설 규모와 예산확보방법
총규모1322㎡로 예배당 495.8㎡(300석 기준), 역사자료실 및 세미나실 식당 및 부대시설, 목사관을 갖출 예정이다. 총공사비 30억 원을 총회와 각 연회, 문화재 복원에 대한 문화재청, 강원도청, 철원군청 지원 및 기타지원 등으로 재원을 확보해 나갈 계획이다.
철원제일교회 복원의 의의
일제치하의 수난, 공산치하의 고난, 6.25의 아픔을 간직한 철원제일교회를 복원함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철원제일교회는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협력의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한 교회이다. 둘째, 독립운동을 통한 애국애족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며, 일제치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강종근 목사의 순교의 피와 신앙전통을 간직한 교회이다. 셋째, 철원제일교회가 강원도 영서지역의 선교중심지였던 것처럼 통일시대에 한국선교와 북한선교의 중심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국내 성지코스의 하나에서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 남과 북의 화해의 장으로,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화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8.10.24. 복원기공식
<복원 후>
2013.10.29 복원기념교회 봉헌식 (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lysium0824&logNo=221058557757)
복원기념교회 봉헌식 (출처-http://www.dangdangnews.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2109)
일제시대 영서북부지역 선교의 중추적 역할은 물론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철원제일교회의 복원사업이 지난 2011년 11월 복원현장에서 착공감사예배를 가진 이후 2년 만에 역사적인 봉헌식을 가짐으로 북녘선교의 새로운 교두보 역할을 감당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게 됐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철원제일교회복원건축위원회(위원장 이규학 감독)는 지난 10월 29일 철원제일교회 복원기념예배당 봉헌식을 갖고 통일 대비 북한선교와 청소년들을 위한 신앙교육의 장으로 활용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감독회장 직무대행 임준택 감독을 비롯해 복원위원 및 교역자와 평신도 등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철원서지방 정호연 감리사의 사회로 열린 1부 봉헌감사예배는 남선교회전국연합회 회장 한재룡 장로의 기도, 여선교회전국연합회 회장 이효정 장로의 성경봉독, 철원서지방 교역자 부부의 찬양, 권오서 감독(춘천중앙교회)의 설교 순으로 진행됐다. 권 감독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후 밤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성전에서 기도하면 하늘에서 듣고 백성들의 죄를 사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말하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있게 하시며, 솔로몬이 하는 기도에 눈을 열고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약속하셨다”라고 말했다. 권 감독은 “오늘 봉헌식을 갖는 철원제일교회복원기념예배당은 솔로몬의 성전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 귀한 교회”라며 “철원제일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워진 만큼 앞으로 영서북부지역 선교는 물론 후대에게도 아름다운 신앙유산을 전수하는 귀한 곳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복원건축위원 임선재 장로의 헌금기도에 이어 동부연회 이 철 감독의 집례로 시작된 성전봉헌예식에서 이 철 감독의 예식사와 철원제일교회 복원선언에 이어 복원건축위원장 이규학 감독은 인사말씀과 경과보고를 통해 “복원을 위한 첫 삽을 뜬 지 2년만에 많은 분들의 기도와 헌금을 통해 이처럼 아름답고 역사적인 예배당을 건축하게 됨을 감사드린다”며 “앞으로도 자랑스런 신앙의 산실인 철원제일교회가 영서북부지역 선교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다. 복원건축위원 김광용 장로의 공사보고와 복원건축위원 박경진 장로의 봉헌위임, 복원건축위원장 이규학 감독의 공로패와 감사패 증정에 이어 감독회장 직무대행 임준택 감독의 축사와 복원건축위원 김진산 목사의 광고 후 김남철 감독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이날 봉헌식을 가진 철원제일교회 복원기념예배당은 총 1,333,10㎡의 규모의 2층 건물로 2층에 예배당을 비롯해 강사실, 식당과 1층에는 사무실과 역사자료실 등이 구비돼 있으며, 총 공사비 29억 2천만원의 예산이 소요됐다. 한편 철원제일교회는 1905년 장로교 선교사 웰번에 의해 시작돼, 1907년 강원도가 감리교회 선교지역으로 됨으로 감리교회가 되었다. 제일교회는 1937년 당시 교인 수가 600여명이 달해 영서북부 지역 선교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으며, 1919년 강원도지역 최초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등 항일운동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6.25동란 때 파괴되었다. 현재는 몇 개의 기둥과 돌무더기로 남아있지만 그 가치가 인정되어 한국근대문화유산 23호로 지정됐다.
(글 출처-http://www.ycnnews.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7725)
<2019.8.20일 방문 촬영>
<1층 역사전시실>
강화 석모도 삼남감리교회 (0) | 2021.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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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학 목사 (감리교 동부연회 순교자,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2묘역 2-580) (0) | 2019.11.29 |
철원 장흥교회, 서기훈 목사 (감리교 동부연회 순교자) (0) | 2019.0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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