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목사
1840년 9월7일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으며 런던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 부임하였다. 1866년 한국선교를 희망하여 내한 1865년에 서북해안을 찾아와 백령도를 비롯 황해와 평안도를 순회하며 전도를 했다. 이듬해 토마스 선교사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가 1866.9.2. 평양 대동강 양각도에서 순교했다. 토마스는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찾아와 순교당한 첫 번째 선교사였다. 그를 처형한 박춘권은 1899년 세례를 받아 영수가 되는 이적을 낳았다.
토마스 목사의 대동강변 순교장면,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그림
1865년에는 토마스 선교사가 서북해안을 찾아와 백령도를 비롯 황해와 평안도를 순회하며 전도를 했다. 이듬해 토마스 선교사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가 순교했다. 토마스는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찾아와 순교당한 첫 번째 선교사였다.
제너럴 셔먼호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가짜(fake) 및 ’엉터리(junk)‘ 역사’ (1)
김택규(전 감신대 객원교수, UMC원로목사)
(출처-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2423)
1.‘교역’을 위해 조선으로 향해 출항했다.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8월9일, 중국의 베이징 관문인 텐진(TianJin)에서 우선 영국의 무역회사인 메도우 회사( Meadows &Co.)와 조선 무역을 위한 계약을 맺고 그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조선에 팔 상품으로는 면직, 유리, 금속그릇 및 망원경, 자명종등 여러 가지 현대식 기구들을 배에 적재하였다, 8월 9일, 텐진항을 떠나 조선과 가까운 산동성, 체푸(Chefoo- 현재, 옌타이(煙臺)항으로 들어왔다. 거기서 선주 프레스톤은 승조원들을 확정시켰다. 한달전 텐진을 떠날때는, 선주 프레스톤, 선장 페이지(Page), 항해사 윌슨(Wilson), 그리고 선교사 토마스 목사(Rev. Robert Jeremain Thomas)를 포함해서 4명의 서양인만 타고 있었는데, 체푸에서 메도우회사 소속인 호가드(Hogarth)라는 영국인 화물관리인을 태워 서양인은 5명이 되었다, 그리고 선원으로 중국인 16명, 말레시아인 3명을 승선시켰다. 그런데 Donald Southerland 책에는 선원중에 2명의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조선과의 첫 교역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8월 9일, 체푸(Chefoo)항에서 미지의 땅 조선을 향해 출항하였다. 황해바다를 하루 이틀 항해하면서 셔먼호는 먼저 백령도 서단에 잠간 정박하여 조선의 형편을 탐문해 보기도 했다. 거기서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을 배부하며 전도를 하였다. 이어서 초도곶, 석도 등을 거처, 8월 16일경 대동강 하구 남포지역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처음 그들의 목적지는 제물포(인천)로 해서 한성으로 가는것이었다. 그러나 바람과 조류의 영향으로 북쪽으로 밀려가게 되어, 평양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3) 이 설명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셔먼호가 처음부터 평양을 목적지로 삼았다면, 평양쪽과는 방향이 다른, 남쪽에 위치해 있는 백령도로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배는 ‘급수문’을 지나 8월 17일, 항주목 삼전방 송산리(松山里) 앞에 닻을 내렸는데, 거기서 조선군이 처음 ‘셔먼’호를 발견했다. 그런데 오문환의 ‘토마스목사 전’에 중요한 얘기가 하나 들어있다. 낯선 서양배가 소식도 없이 들어온 것을 보고 여기서 한 별장이 병졸과 함께 셔먼호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조선군이 셔먼호를 향해 처음부터 사격을 한 것이다. 그후 그 조선군의 별장은 병졸을 대동하고 접근해 와서 배에 오르지는 않고, 간단한 조사를 했다.
그 지역은 황주 ‘목사’(牧使)-당시 지방관)의 관활 지역이었다. 보고를 받은 황주목사 정대식은 그의 휘하의 두 관리인, 형리(刑吏) 이기로와, 영리(營리(吏) 신몽신을 대동하고, 조사를 위해 셔먼호로 찾아갔다. 이것이 조선의 지방 수장이 셔먼호를 조사한 첫 케이스이다. 그런데 황주목사 일행이 셔먼호에 승선할 때 그들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갑판에 장중한 정복을 착용한 셔먼호의 승무원들이 모두 도열해 서서 엄숙하게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목사’ 일행이 그들앞에 오자, 그중에 한사람이 무어라고 구령을 하니까 ‘차렷’ 자세를 취하며, 그중 소총을 들고 앞쪽에 도열해 있던 몇 승조원들은 총을 앞으로 올리는 자세(현재 우리 군대에서 행하는 ‘경례 !’할 때, 총을 앞으로 올려드는 자세)를 취하는것이었다. 서구의 함선 풍습을 모르는 황주‘목사’ 일행은 그것을 셔먼호측의 자기들을 향한 무력 시위 혹은 ‘위협’으로 보았다. 사실은 셔먼호측이 최초의 조선 관리의 함선 방문에 최대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이후에 셔먼호측은 조선관리가 찾아와도, 그런 ‘예식’을 행하지는 않았다.
셔먼호에 대한 조사를 마친후, 황주 목사 정대식은 조정에 자세하게 ‘문정’(問情-문초 및 조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 내용중에 이런 것이 있다. “저사람들의 배 가까운 곳에 우리배를 정박시켰다. 그러자 그쪽 사람들 수십명이 각기 총칼을 지니고서 뱃머리에 정렬해 선 다음 비로소 우리가 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셔먼호가 ‘귀빈’영접 절차를 한 것을 그렇게 오해한 것이다. 보고내용에는 또 이런 설명이 있다. “그들은 입국목적이 통상이라고 했으나 ’조선은 외국과의 통상을 법으로 금하고 있으니 즉시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셔먼호는 계속 항행하여 평양 지역까지 올라왔다. 거기서 평양 감사가 조사를 하기도 하고, 양측간에 충돌도 있었고, 그러다가 셔먼호는 강 수위가 낮아져 모래톱에 좌초되었다. 9월 5일 드디어 조선군은 화공으로 공격을 단행하여 셔먼호는 침몰되었고, 승조원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2. 미국측의 대응과 조치
제너럴 셔먼호(이하, 셔먼호)의 ‘선적(船籍)’은 미국이다. 어느날 감쪽같이 그 종적이 사라져버린 자국(自國) 함선의 행방에 대하여 미국측은 조사를 시작했다. 미국정부측 관리로서 이 사건에 관하여, 처음 조사해 보고 그 결과를 ‘보고’를 한 사람은 셔먼호가 출항했던 체푸 주재 미국 영사 E. Sanford 였다. 그는 당시 북경주재 미국 공사 벌링게임(Arson Burlingame-전 마사추세츠출신 연방의원)에게, 그가 탐문조사한 보고서를 10월 30일에 제출했다.
그 보고서에서 쌘포드는 먼저 정보의 출처를 밝혔다. 첫 번째는 대동강 입구에서 셔먼호를 안내했던 정크선 선장 우웨타이로부터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조선에 선교사로 나갔던 프랑스인 2명이 산속에 숨어 있다가 탈출하여 그곳에 왔는데 그들을 통해, 셔먼호가 대동강으로 올라가, 평양에서 조선측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으며 승조원 전원이 살해당했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쌘포드 영사의 보고서는 북경주재 공사관을 통해 본국 정부에 전달이 되었다,
미국정부는 또 중국정부에 요청해서 조선정부에 셔먼호 실종에 대한 진상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조선정부가 중국 예부(禮部)에 회답을 한 것이 미국정부에 전달이 되었는데 조선정부는 그 문서에서 대단히 이상한 해명을 했다. “영국배 한척이 들어와 약탈을 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며 나쁜 일들을 저질렀으며 ‘배는 얕은 물에 걸려 침몰했다. 죽은자도 영국인 최난헌, 덴마크인 리비항과 오귀자 등이다. 미국배가 불에 타버렸다거나 미국인 선주와 24인이 붙잡혔다는 얘기는 영국배가 평양부에서 침몰된 것이 와전된 것이다......’. 조선정부가 무언가 ‘외교상 어떤 미스테익을 했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정부는 그것이 결국 중국정부나 조선정부가 셔먼호의 침몰과 승조원 전원의 사망을 공식화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당시 미국 정부 상황은 불안정하고 복잡했었다, 링컨대통령의 암살사건(1865년)이 생겼고, 그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앤드루 존슨은 또 탄핵당하는(1868) 등, 국내 사정이 어수선했으므로, 멀리 극동의 조선이란 작은 나라에서 발생했던 한 민간선박 실종사건에 대하여 신속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사건의 현지 조사가 필요하므로, 우선 1867년 1월, 아시아쪽을 순항하고 있던 군함 와추셋(USS Wachusett)호의 함장 슈펠트(Robert W. Schufeldt)에게 셔면호의 행적에 대해 조사해보라는 지시를 보냈다. 그러나 슈벨트 함장은 조선의 서해안쪽에 입항하여 진상을조사해 보려했으나 조선 관원들의 비협조와 또 심한 궂은 날씨 때문에 별 성과없이 조선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 후 1868년 4월, '쉐난도‘(USS. Shenandoh)함의 John C. Febiger함장이 역시 그 사건을 조사하기위해 사건 발생지역인 대동강하구에 들어왔다. 거기에서 셔먼호의 침몰과 승조원 전원 사망 사실을 조선 정부로부터 확인받고 그것을 본국정부에 보고하였다. 슈펠트 제독은 그후에도 또 부산에 들어와 조선 관리들을 만나 여러가지를 탐문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미국정부는, 비록 민간 상선 1척이지만, 자국의 함선과 국민이, 한 ’미개국‘에 의해 위해를 당한 이 사건을 그냥 덮어둘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서 더 자세한 사건 전말을 조사하고, 또 조선측에 응징도 가하고, 동시에 가능하면 통상조약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은 제너랄 셔먼호 사건이 발생한지 5년이 지난후에야 실제 실행에 옮겨졌다. 이른바 ’신미양요‘였다. 하지만 ’조선원정‘(신미양요)을 통해서도 미국측은 셔먼호 사건에 대한 어떤 결과를 얻지못하고 철수해버렸다. 그래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역사적 ’진실‘은 영원히 대동강 물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3. 제너럴 셔먼호의 선력(船歷))과 운명에 대한 세가지 설
우선 제너럴 셔먼호의 정체와 선력부터 살펴보자. 왜냐면 셔먼호에 대해 해적선이었다느니, 혹은 정체가 불분명한 배라는 주장들이 있기때문이다. 셔먼호는 처음부터 그 운명이 기구한 배였다. 건조된것은 1861년, 스카틀랜드의 글라스고우(Glassgow)에서다. 길이 약 200피트, 넓이 28피트, 187 톤의 화물, 승객 수송용 민간 상선으로 출항했다. 처음 이름은 그냥 ‘Princess Royal’이였다. 미국의 남북전쟁당시 1863년, 이배는 미,남부군쪽과의 거래로 영국에서 제작된 무기, 전쟁물자, 기타 화물을 싣고 Bermuda로 갔다가 ‘봉쇄돌파선(blockade runner)이 되어 Charleston 항으로 항해해 갔다.
하지만 미합중국(북군)쪽 해군에 나포가 되고 말았다. 미해군은 그해 3월에 돈을 지불하고 그 배를 사들여 ‘USS Princess Royal’ 이란 이름의 해군 전투함으로 개조, 5월에 취역시시켰다. 남북전쟁 마지막 2년간 걸프만에서 해상 작전시 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다. 남북전쟁이 끝난후, 1865년, 이 군함은 해군의 감축 계획에 의거 민간에 팔렸다. 그리고 배의 이름은 남북전쟁당시의 장군 이름을 따 General Sherman 으로 개명되었다. 여기까지는 미해군 함정사 자료에도 나오는 공통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그후의 이 함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설들이 있다, 대체로 세가지 서로 다른 서술들이 있다.
(a) 첫째는, 이 ‘글’에 서술된대로다. 남북전쟁 종전후, 1865년, 해군의 함정 감축 계획에 의해 민간 회사에 팔렸고, 그후 극동 아시아로 갔다, 조선에 교역을 위해 갔다가, ‘조선측의 화공에 의해 배는 대동강에 침몰되고 말았다.’ 그후 평양측은 대포, 앵커줄을 배에서 뜯어내 평양 시내에 전시하였다.
(b) 두번째설은, 남북전쟁 종전후, 1865년 공매에서 보스턴의 William F. Weld &Co.에 팔렸고 General Sherman 으로 배이름을 개명한후, 보스턴-뉴욕-뉴올리언스 라인의 승객, 화물 수송선으로 운항되다가 1874년 North Carolina 바다, Cape Fear Light 인근 바다에 사고로 침몰되었다.
(c)세번째는, 남북전쟁 종전후, 1865년 8월에 이 배는 Samuel C. Cook 가 구입하여 중국으로 보냈다. 거기서 남북전쟁 당시에 용장이었던 Henry A. Burgevine 장군과 그의 부하들이 승선, 타이완으로 갔다. Burgevine 장군은 종전후 행운과 모험을 찾아 중국에 가서, 처음에는 중국정부의 ‘용병’이 되었었는데, 불만이 누적되어 당시 타이완의 ‘반군’에 합류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나와 있던 영국 해군이 제너럴 셔먼호를 나포해서 텐진으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서 Burgevine 장군은 죽었다. 그후 이 배는 텐진의 Meadow &Co. 가 일단 인수했는데, 1866년 7월경, 보스턴 상인 W. B. Preston이 이배를 구입하여 무역선이 되었다.
1866년 8월 교역차 조선으로 들어갔다가, 대동강에서 좌초되고, 조선군의 공격으로 승무원은 다 죽고 배는 버려졌다. 그러나 그후 대동강의 수위가 높아졌을 때, 배는 물에 떠오르게 되었다. 배는 불에 일부 탔지만 전복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이배를 제물포에 있는 선박 제조소로 끌고가, 수리, 복원시켰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최초로 현대식 증기기관 엔진의 함선을 잠간 소유했었다. 그러나 미국측은 슈벨트제독 등의 추궁과 항의와 함께, 중국정부를 통해 계속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조선정부는 할수없이 이배를 미국에 돌려보냈다. 배는 1867년 일단 본래 소유주였던 Samuel Cook에게 돌아왔다가 보스턴의 William F. Weld &Co. 가 구입하여, 뉴욕- 뉴올리언즈 간의 수송선으로 운항되었다. 1874년 1월 10일, N. Carolina 앞바다에서 배에 물이 새는 사고로 1874년에 침몰됨으로 파란만장했던 14년의 과히 길지 않은 ‘일생’을 마감했다.
이 설은 Tod &Macgregot Ship List, US. Military Encyclipedia, Vic Socotra: 'Capture the Flag' Retrieved (Nov. 10, 2007) 등 여러 자료들에 수록되어 있다. 특히 ‘기업, 문화 등의 연구가’, Donald G. Southerton이, 2005년에 낸 'Interpid Americans: Bold Koreans- Early Korean Trade, Concessions, and Enterpreneurship', (iUniverse, Inc. 2005), 에 배의 선주에 대한 도표를 제시하며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Don Southerton의 책, 도표에 있는 제너럴셔먼호 소유주는 다음과 같다,(남북전쟁때부터):
1863- 1865: US Navy, 1865-1866: Samuel C. Cook, 1866년 7월경- 9월: W.S. Preston, 1866년 10월-1868년: 대원군, 1868-1874: William F. Weld &Co.
일부 편향적 시각을 가진 ‘글쓰는이’들이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배의 이력에 대해, ‘셔먼호는 미해군의 전신 'USS. Princess Royal'이 아니다. 해적선이었다’ 등의 이상한 설들을 퍼뜨리고 있으나, 그것은 다양한 자료들을 조사 연구하지 않은 ‘가짜(fake)’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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