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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리와 봉인, 두루마리 성경

성지순례/이스라엘

by baesungsoo 2017. 11. 1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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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리와 봉인  (출처-http://biblia.co.il/%eb%91%90%eb%a3%a8%eb%a7%88%eb%a6%ac%ec%99%80-%eb%b4%89%ec%9d%b8/)

 

성경에 나오는 왕의 이름이 나온 인장이 발 견된 것은 2015년입니다. 인장이 새겨진 점토 조각은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의 도시 (City of David) 사이의 오벨 (Ophel) 이라고 불리 는 지역에서 에일랏 마잘 (Eilat Mazar) 이 발견 하였습니다. 1cm가 조금 넘는 크기의 인장은 가운데 에 태양을 상징하는 원과 그 양쪽에 날개가 날려있는 모양입니다. 인장에는 [] 의 왕 아[]스의 (아들) 히스기야의 것(인 장)”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과거에는 문서나 편지들을 원통형으로 말 아서 끈으로 묶은 다음에 끈 위에 점도 높은 진흙을 올리고 인장을 눌러서 서명을 대신 하는 용도로, 그리고 그 문서가 중간에 배달 사고 없이 제대로 전달되는 것임을 확인시 켜주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인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아래의 그림 으로 확인해 보세요. “오벨은 히브리어로 오펠이라고 읽는다. “언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특별히 성경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남동쪽 다윗 성 (City of David) 사이의 언덕을 가리키는 말 로 사용된다.


<7 봉인된 두루마리 성경- 요한계시록 5:1-7>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두루마리 성경>


법궤안의 두루마리 성경   (출처-협성대 한경수 목사 기증 전시실)


지금도 유대교에선모세오경토라를 가장 중요시한다. 그래서 유대회당의 중요한 특징은 동쪽 벽 맞은쪽에 예루살렘을 향해서 법궤가 놓여 있다. 궤 안에는 양피지에 히브리어로 쓰인 오경의 두루마리가 있다. 토요일 아침 예배는 먼저 회중이 일어나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드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뒤 법궤의 두루마리는 높이 들려서 회당 좌석 사이를 돌아간다. 그리고 성경이 낭독된다. 그들은 귀한 성경에 직접 손가락을 대고 읽지 않는다. 읽기가 끝나면 성경두루마리는 다시 회중석을 도는데, 이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성경이나 숄의 끝으로 두루마리 성경에 댄 후에 그 숄 끝에 키스를 하는데, 이것은 신의 말씀에 대한 헌신과 경외를 나타내는 것이다.토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신앙은 놀랍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토라는 대부분 필사 토라. 최근에는 인쇄된 토라가 나오기도 하지만, 직접 손으로 쓴 것을 선호한다. 특히 회당에서 읽는 토라는 반드시 손으로 쓴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토라를 옮겨 쓰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다. 토라의 내용 중에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반드시 쓰기를 멈추고 목욕을 한다. 몸과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직접 손가락을 대지 않고 읽는다. (출처-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22XX39100019)


협성대 한경수 목사 기증 전시실


협성대 한경수 목사 기증 전시실


협성대 한경수 목사 기증 전시실


협성대 한경수 목사 기증 전시실


협성대 한경수 목사 기증 전시실


(출처-http://cafe.daum.net/kansuk4/7s2X/111?q=%B5%CE%B7%E7%B8%B6%B8%AE%BC%BA%B0%E6&re=1)


<쿰란 사해사본>


에니메이션 상영장 내부에 진열된 쿰란 두루마리가 들었던 항아리 모형     (출처- http://blog.daum.net/namvianny/17171271)


쿰란 두루마리가 들었던 항아리 모형


쿰란 두루마리가 들었던 항아리 모형


두루마리 사해사본           (출처- http://blog.daum.net/namvianny/17171271)


두루마리 사해사본           (출처- http://blog.daum.net/andreah4/2131446)


【서울=뉴시스】이스라엘 국립박물관에 소장돼있는 '사해문서'의 일부. 1947년 이스라엘 사해 지역 쿰란의 동굴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초기 성서의 일부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출처:디지털사해문서 사이트(http://dss.collections.imj.org.il)> 2017.11.22


11번째 동굴   (출처-http://wed1204.blog.me/130140348541)


쿰란 11번 동굴은 1번, 4번 동굴들처럼 중요한데 이곳에서 고대 히브리어 문자로 기록된 레위기(11QpaleoLev)와 시편 두루마리(11QPsa), 욥의 탈굼역(11QtgJob), 모든 사해 사본 중에서 가장 긴 두루마리인 성전 두루마리(8.14m)로, 또 여러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문서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7-10번 동굴이 발견된 1년 후인, 1956년에 베드윈에 의해서 마지막으로 발견된 동굴로 3번 동굴(쿰란에서 가장 멀리 있음)의 남쪽에 위치하며 쿰란 공동체에서 북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다. 1956년에 11번 동굴이 발견된 이후로 더 이상 사해 사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1번째 동굴     (출처-http://wed1204.blog.me/130140348541)


쿰란 문서(사해 두루마리)     출처-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꿈란 제1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가 보관되었던 항아리(높이 65.7-47.5cm, 직경 25-26.5cm) 1947∼1956년까지 사해 연안에 있는 유대 광야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 고대 유대 문서들을 넓은 의미의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라고 하며 특별히 사해 북서 연안에 위치한 키르베트 쿰란 주변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850여 종류의 문서가 좁은 의미의 사해 두루마리 즉 쿰란 문서이다.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이라 불리는 쿰란문서는 1947년 봄 베두인 목동인 무하마드 아드-디브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쿰란 근처에서 가축 떼를 돌보던 중 잃어버린 염소를 찾다가 동굴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에서 두루마리들이 발견되었다. 이 쿰란 첫째 동굴에서는 이사야서, 공동체 규칙서, 전쟁 규칙서, 찬양시편, 하바쿡 주해, 창세기 외경 등 7개문서가 발된 되었는데 이 문서들은 아마포에 싸여 항아리에 넣어졌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였다. 현재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 소장되어 있고, 이 문서들의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2-1세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제4 동굴에서는 판독이 가능한 것만도 382개의 사본 군에 속하는 수천 개의 단편이 발견되었다. 예루살렘의 고고학 박물관에는 쿰란동굴의 것만도 대소 400개 이상의 사본 또는 그 일부, 4만 개 이상의 사본단편이 소장되어 있다. 쿰란의 11개 동굴은 발견된 순서대로 번호가 붙여졌고 각 문서들이 발견된 동굴의 번호(1∼11)와 동굴의 위치(Q), 문서 이름의 첫 글자가 붙여져 각 문서의 약호가 되었다.


쿰란 사해사본 특징

쿰란 문서는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쓰여졌다. 대부분의 문서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쓰여졌으며, 소수의 그리스어 문서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서들은 정방형의 히브리어로 쓰여졌고, 고대 히브리어로 쓰여진 것들도 있다. 쿰란 문서는 제2차 성전 시대에 유행하던 필사 규칙과 기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대부분의 쿰란 문서는 기원전 3세기 혹은 2세기 초에서 서기 1세기 초반 사이에 필사된 것임이 밝혀졌다. 쿰란 유적지에 대한 고고학적 연대 추정과 쿰란 문서의 연대 추정이 근접하다는 사실은 쿰란 공동체가 이 문서들을 제작하고 필사하였다는 뜻이다.


어떻게 사해사본의 기록연대를 알았을까 ?

사본과 함께 발견되어진 토기와 동전들을 통한 연대 결정과 더불어 서체를 비교 연구하는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이 사해사본의 기록연대를 결정하는데 사용되어졌다. W. F. Albright, N. Avigad, S. A. Birnbaum, F. M. Cross, R. S. Hanson 과 J. T. Milik 등이 이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의 전문가들이다. 이들에 의해서 사해사본의 서체들이 4가지 부류로 분류되었다. ① 고어체; 250 B.C. 부터 150 B.C. 까지, ② 하스모니안 서체; 150 - 30 B.C. 까지, ③ 헤롯시대 서체; 30 B.C. 부터 A.D. 70 까지, ④ 헤롯시대 이후 또는 장식서체; A.D. 70-135 까지 등의 구분이다. 이러한 구분 속에서 고딕체와 필기체 등으로 세분화하기도 한다. 고문서체 비교 연구 방식에 의해서 얻어지는 연대 결정은 + 50년의 오차 범위 한도내에서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문서체에 대한 비교 연구와 함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이용하여 연대를 결정 짓는다. 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C14)를 이용하여 산화되고 남아있는 방사능 물질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얻어지는 연대는 + 200 년 또는 + 80 년 정도의 오차를 보여 고문서체 연구와 함께 연대 결정의 중요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진다. 1951년 시카고 대학의 과학자 W. F. Libby 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둘러쌌던 천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1917, + 200년 또는 A.D. 33, + 200년. 즉, A.D. 233 년과 168 B.C. 무렵이라는 결정을 얻었다(O.R. Sellers, BASOR 123[1951] 24-26 참조). 또한 1956년 런던의 한 연구소(Laboratory of the Royal Institution)에서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종려나무 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940 + 80 년, 즉, A.D. 16 + 80 년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마지막으로 사본 자체 내에 연대 산출의 근거를 제공하는 단서들에 근거한다. 예를들면 제 4번 동굴에서 발견된 나훔 주석서(4QpNah)에 [ Dmy ]trws 는 Demetrius III Eucerus 라는 주전 2세기 경의 셀류커드 통치자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며, 알렉산드라 여왕의 히브리식 이름 "샬롬찌온",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후계자 "히르카누스", 그리고 첫 번째 시리아의 로마 총독 Aemilius Scaurus(ca 63 B.C.)에 의하여 일어난 "'Emilyos 학살 사건"등과 같은 내부 기록들은 연대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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