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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 스위스 제네바 종교개혁기념비(바스티옹 공원)

성지순례/종교개혁지(루터,칼뱅 등)

by baesungsoo 2018. 3. 27.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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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네바 종교개혁기념비(바스티옹 공원)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맞서서 일어났던 종교 개혁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제네바에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바스티옹 공원에 있으며 높이 10m, 100m의 커다란 기념비다. 이 기념비에는 당시 제네바의 종교 개혁을 이끈 중심 인물인 파렐, 칼뱅, 베즈, 녹스의 전신상이 새겨져 있다.



제네바 종교개혁기념비(바스티옹 공원)


 제네바 종교개혁기념비(바스티옹 공원)


15367월 어느 날,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했다. 2년 전 교황의 체포령을 피해 창문을 빠져나와 지붕을 타고 파리를 탈출한 장 칼뱅이었다. 역사가들은 이를 바울이 유대인의 추적을 피해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탈출한(9:23∼25) 사건에 비견하기도 한다. 그는 프랑스 접경 지역인 스트라스부르(당시 독일령)를 거쳐 바젤에서 1년 간 기독교강요를 집필한 후 제네바를 찾았다. 때는 제네바가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직후였다.  필자는 칼뱅의 생가와 학업의 현장 답사를 마치고, 종교개혁기에 피로 얼룩진 위그노(Huguenot)의 순교 현장을 확인한 후 그들의 피난처이자 칼뱅의 사역지였던 스트라스부르를 찾았다. 이곳은 당시 추방당한 형제들의 안식처, 후일 종교개혁의 안디옥이라 불린 곳이다. 칼뱅에게는 특별한 인연의 땅이다. 칼뱅은 1534, 쫓기는 몸으로 프랑스 종교 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며칠간 이곳에 들렀다. 그리고 4년 뒤인 1538년 제네바에서 일시 추방당했을 때에도 3년간 이곳에 머물며 목회를 했다. 프랑스 동북부 알자스 지방의 이 아름다운 도시는 지리적으로 당시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로마 가톨릭교의 박해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가까운 국경지대였다스트라스부르에서 칼뱅이 첫 설교를 했던 생니콜라 교회와 칼뱅 후예들의 예배처인 부클리에 교회를 찾았다. 가난했으나 가장 행복한 목회시절을 보냈다는 칼뱅을 그려보았다. 제가 제네바에 두고 온 책을 팔면 다음 겨울까지는 집세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후에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라며 파렐에게 보낸 그의 편지가 생각나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제네바 시민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생활비조차 받지 못한 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칼뱅은 오히려 피난 성도들의 생활을 걱정하며 미래를 오직 하나님께 맡겼다. 특히 스트라스부르에 먼저 도착해 목회를 하고 있던 마르틴 부처가 칼뱅이 방문할 때마다 환대하며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복음을 위한 동역자 간의 섬김이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한지를 배웠다. 하나님은 칼뱅이 가는 곳마다 예비해 두신 동역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큰일을 이루어 가셨다. 바울을 위해 바나바를 예비하신(9:27) 하나님께서는 칼뱅을 위해 스트라스부르에는 부처를, 제네바에는 파렐을 예비하신 것이다. 제네바는 당시 부패한 가톨릭교회로부터 막 벗어나 새롭게 개혁된 교회를 꿈꾸는 시민들의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이 중요한 시점에 칼뱅이 제네바를 방문한 것이다. 원래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하기 위해 가려 했으나 전쟁이 길을 막아 예정에 없던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 것이다이 소식을 들은 제네바 교회지도자 파렐은 즉시 칼뱅을 만나게 되었고, 이는 종교개혁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확신하고 그에게 제네바를 위해 헌신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칼뱅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계속 사양하자 파렐은 마침내 만일 자신의 일을 그리스도보다 앞세운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위협하기에 이른다. 순간 영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칼뱅은 파렐의 요청에 순종해 제네바 교회 개혁에 참여하게 된다. 후일 칼뱅은 마치 하나님의 손이 내 머리 위해 펼쳐지는 것 같았다고 이 때를 회상했다필자는 제네바 시내의 종교개혁자의 동상에 나란히 부조(浮彫)되어 있는 칼뱅과 파렐을 바라보며 그날의 순간을 상상했다. 후일 칼뱅의 후계자가 된 베즈와, 스코틀랜드로부터 제네바까지 달려와 칼뱅의 영성을 배워 조국을 변화시킨 존 녹스가 함께 새겨진 자리에 하나님은 이 시대의 개혁자로 누구를 세우실 것인가를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날 밤의 결단이 인간적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하나님의 부름에 즉각 순종한 칼뱅은 15367월부터 1538년 부활주일까지 2년 가까이 제네바 교회개혁을 위해 불철주야 헌신했다. 그러나 그의 신정정치 이상과 엄격한 규율에 저항하는 시민들에 의해 파렐과 함께 제네바로부터 추방당하게 된다. 그가 추방당하기 전 마지막 부활절 예배를 인도한 생피에르성당을 답사하면서 필자는 그 날 칼뱅이 전한 설교의 내용이 자못 궁금해졌다. 성난 군중들에 의해 성찬식도 베풀지 못한 데다가 심지어 칼로 위협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제네바를 떠나기 전에 칼뱅이 남긴 글을 통해 그의 메시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1:10; 살전 2:4)라는 것이다. 그것은 생피에르성당에서 듣게 된 영음(靈音)이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낫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면 그들에게서 분명 배반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며 기쁘시게 한 일이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합당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역사가 필립 샤프가 스위스 종교개혁사에서 인용한 칼뱅의 결의에 찬 음성이었다.  칼뱅은 제네바가 자신을 배척하자 지체 없이 떠난다. 이어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해 만 3년 동안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목회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제네바로부터 재청빙을 받는다. 칼뱅이 떠난 후 제네바는 이전보다 더 큰 영적 혼란에 빠졌고, 칼뱅의 개혁적 리더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배척한 제네바를 위해 늘 기도해온 칼뱅은 이를 하나님 뜻으로 알고 즉각 순종하게 된다.
1541913, 제네바로 귀환한 칼뱅은 5년 전 자신을 붙잡았던 파렐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에 나의 심장을 주님께 제물로 바칩니다.하나님께 자신을 제물(12:1)로 바치기 위해 심장(heart)을 손에 든 순종의 칼뱅 문장(紋章)은 이때 만들어졌다 한다[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599860&code=23111638&cp=nv


종교개혁기념비


왼쪽부터 종교개혁가 파렐(칼빈의 종교개혁 동료), 칼빈, 베자(칼빈의 후계자 제네바 대학을 설립한 인물), 녹스(칼빈의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 종교 개혁 기념비 맞은편에는 제네바 신학 대학이 있다. 칼빈은 하나님께 바쳐진 희생제물처럼 내 심장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다.


쟝 칼뱅(오른쪽 큰 키), 파렐과 칼빈


프랑스 노와용 출신 존 칼빈(1509~64)은 종교개혁 2세대다. 1517년 루터는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그때 칼뱅은 9살이었다. 그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를 계승하였다. 칼빈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14살 때 공부를 위해 파리로 갔다. 이후에 프랑스 국왕이 신교를 박해하자 스위스로 피신했다. 그리고 파렐의 요청으로 스위스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했다. 제네바는 이미 개신교 도시였다. 그러나 칼빈은 제네바를 더 경건하고 엄격한 종교생활의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칼빈에겐 2의 종교개혁이었다. 일명 성시화(聖市化) 운동이다. 칼뱅이 추진했던 신정정치에 대한 반발과 충돌도 많았다. 제네바 목사였던 칼빈은 춤과 도박을 금지했다. 간음죄와 칼뱅 모독죄로 처형된 이도 있고, 삼위일체를 부인해 화형을 당한 이도 있었다. 심지어 칼빈은 종교개혁적 신앙고백에 참여하지 않는 시민은 누구든지 도시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칼빈은 제네바 시내의 성 피에르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교회 옆에는 칼빈이 머물렀던 사택도 있었다. 칼빈의 열정은 뜨거웠다. 그는 예배의 중심을 미사에서 설교로 바꾸었다. 흑사병이 돌 때도 병자들을 찾아갔다. 날마다 심방도 했다. 평소 갖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건강보다 교회를 중시했다. 칼빈은 평생 경건한 신앙, 엄격한 신앙을 좇았다. 그의 잣대는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유익이었다.나를 제네바 공동묘지에 묻되, 어떤 묘비도 만들지 마라.마지막까지 그는 신앙에 철저했다. (출처-http://cafe.daum.net/jujaegun/)


파렐과 칼빈


종교개혁기념비, 베자와 녹스


종교개혁기념비, (가운데 큰 조각의 왼쪽)

William the Silent (1533 – 1584), Gaspard de Coligny (1519–1572), Frederick William of Brandenburg (1620 – 1688)






종교개혁기념비


종교개혁기념비


종교개혁기념비, (가운데 큰 조각의 오른쪽)
Roger Williams (1603–1684), Oliver Cromwell (1599–1658), Stephen Bocskay (1557–1607)




루터


쯔빙글리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 체스게임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 장 피아제 상


공원 의 제네바 대학


칼뱅은 평소 진정한 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훌륭한 복음 사역자를 양성하는 신앙교육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는 개혁운동이 가톨릭교회로부터 거센 탄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말씀으로 무장된 순교적 목회자 양성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기독교 교육기관이 필요했다. 칼뱅이 1559년에 설립한 제네바아카데미는 그런 시대적 요구의 결과였다. 칼뱅의 기독교 교육에 대한 구상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해 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를 했던 1538년부터 시작됐으며, 1541년 재청빙을 받은 후 오랜 준비 끝에 마침내 1559년 6월 5일 제네바아카데미를 설립함으로써 구체화됐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 시절, 그곳에 세워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네바에 이상적인 기독교학교를 세우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칼뱅이 이처럼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학교에서 다양한 학문을 깨우친 왕성한 학구열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예비 성직자들과 귀족의 자제 등 특수 계층에만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던 중세 암흑기 상황을 감안하면 칼뱅이 어려서부터 다양한 학문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요 인도하심이었다.  필자는 초창기의 제네바아카데미와 지금의 제네바대학교를 답사하면서 개교 당시의 교육자 칼뱅을 회상해 봤다. 특히 초대 학장에 후계자인 베즈를 지명해 세웠다는 사실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학교의 설립자로서 당대 최고의 석학인 칼뱅이 당연히 학장을 맡아야 했지만 제자에게 수장의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칼뱅은 개교식에서 사회만 보았으며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평교수를 자임했다. 그의 인품은 제네바 공동묘지 프랑 팔레에 이름 없이 묻힌 검소한 무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칼뱅의 교육은 이내 큰 성과를 거두어 개교 5년 만에 대학 준비과정인 ‘스콜라 프리바타’에 1000명이 넘는 학생이 입학해 공부했으며 대학 과정인 ‘스콜라 푸블리카’에서는 300명이 공부했다고 한다. 이처럼 제네바아카데미는 제네바 시민들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 등 인근 국가에서도 학생들이 몰려와 짧은 시간에 국제적인 프로테스탄트 학교의 요람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학생 중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존 낙스(John Knox)도 있었는데, 그는 칼뱅에게서 배우고 돌아가 조국의 교회를 개혁하게 된다. 초기에는 신학을 중심으로 교육하다가 1872년 의학부가 설치되면서 현대적 종합대학으로 발전했다. 교수진도 초기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국 등지에서 찾아왔는데 그 중에는 카트라이트와 위텐보가르트 등 당대의 석학들도 있었다. 개교 초기부터 유럽 전역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몰려왔을 뿐 아니라 450년을 훌쩍 넘어선 오늘날까지도 세계적 기독교 명문으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제네바아카데미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필자는 제네바아카데미 현관 위 종석(宗石)에 새겨진 잠언 9장 10절의 요약에 마음이 끌렸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바탕 위에 학문의 집을 세우고자 한 칼뱅의 교육 사상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원로교육자인 손봉호 박사는 최근 ‘종교개혁과 인간교육’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개혁이 인류 역사에 공헌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민주주의, 기본인권 사상, 자본주의, 현대과학 등 현대문명의 근간이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현대교육이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시행하고 있는 의무교육제도는 사실상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서 시작됐다.” 칼뱅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국가는 시민이 의무적으로 교육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칼뱅의 교육사상은 당시 소수 귀족에게만 교육의 기회를 준 가톨릭의 제도를 거부한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루터와 멜랑히톤도 칼뱅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교황권에 의해 사제들에게만 제한된 성경이 만인에게 읽혀지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개혁자들은 모든 아동은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뱅이 건강을 해칠 정도로 바쁜 사역 중에도 거의 매일 성도들과 시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던 것도 바로 이런 성경적인 교육철학 때문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칼뱅은 조국 프랑스에서 박해받는 위그노와 개혁교회를 위한 신학교를 제네바에 세워 지원했다고 한다.  오늘날 한국의 교육은 종교개혁 이전의 교육으로 전락하고 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성경적인 참 인간교육이 아니라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을 얻고 세상적인 힘을 획득하기 위한 전문 직업교육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조차 이런 풍조에 휩쓸리고 있다. 이는 종교개혁의 정신에 어긋날 뿐더러 자녀들과 우리 사회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손 박사는 “종교개혁을 제대로 기념하려면 교육이 직업이나 얻고 경쟁에서 이길 힘을 갖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영화롭게 하며 이웃을 섬기기 위한 것임을 인식하고 그 위대한 전통을 다시 살려 한국 교육을 성경적인 인간 교육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필자는 이 점에 철저히 동의한다.  한국교회 초기 역사를 살펴볼 때 130년 전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전도의 방법 또한 칼뱅의 모델과 일맥상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 아침 제물포에 첫 발을 내디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교회개척과 동시에 학교를 세웠다. 정확히 말하면 교회보다 학교를 먼저 세웠다. 당시 선교사들은 조선 조정(朝廷)의 전도활동 금지령에 따라 우선 학교와 병원을 통한 선교를 시작했다. 공식 선교사가 내한하기 전 해에 들어온 의료 선교사 알렌에 의해 1885년 2월 29일 의료기관으로 광혜원(廣惠院)이 먼저 세워졌으며, 6개월 후인 1885년 8월 3일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이 세워진다. 2년 뒤인 1857년 9월 27일엔 언더우드 사랑채에서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세워졌다. 이처럼 한국교회 성장의 뿌리에는 칼뱅이 보여준 제네바 모델의 기독교 교육이 자리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준비하는 한국교회는 기독교 교육기관을 성경 위에 다시금 굳건히 세워야 하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글- 서대천 목사 (홀리씨즈교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607555&code=23111638&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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