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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부끌리에교회(피난민교회)

성지순례/종교개혁지(루터,칼뱅 등)

by baesungsoo 2018. 3. 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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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라스부르  부끌리에교회            (출처-http://blog.naver.com/binggogo1/220893473329)


칼빈이 처음 목회자가 되었던 부끌리에 교회이다.  부끌리에 교회는 칼빈이 죽고 난 다음 1750년 칼빈의 추종자들에 의해 지어졌다. 지금 건물은 1905년에 지어진 건물이다그러면서도, 최초의 목회자로 존 칼빈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칼빈이 설교한 교회는 성 마들렌교회인데, 이 교회가 카톨릭교회로 넘어가면서 칼빈의 추종자들이 후에 다른 곳에 부끌리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시작은 성 마들렌 교회였지만, 그의 뜻을 이어간 사람들이 그들의 첫 목회자로 칼빈을 인정한 것이다.


스트라스부르  부끌리에교회           (출처-http://blog.naver.com/binggogo1/220893473329)


칼뱅 목회 기념 돌판           (출처-http://blog.naver.com/labornjoy/220810675322)

"프랑스 피난민 교회 최초의 목회자들을 기념함" (칼뱅 1538-1541)


칼뱅 후예들의 예배처소였던 부클리에 교회 옆 칼뱅이 거주했던 집. 지금은 교회 참사회 소속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599860&code=23111638&cp=nv


칼뱅 (프랑스)의 종교개혁 이야기 (출처-http://blog.daum.net/namk46/366)

 

칼뱅은 프랑스 누아용 출신이다. 그러나 스위스(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하여 꽃을 피웠다.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바로 칼뱅(Jean Calvin:1509-1564)이다.

. 제네바에 도착하기 까지(1509-1596)

칼뱅은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 누아용(Noyon)에서 1509년 태어났다. 1523년 파리의 마르슈 대학에 입학하여 라틴 문법과 수사학을 배우다가 얼마후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다. 1528년초 오를레앙 대학으로 가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1529년 여름에는 부르주 대학으로 옮겨서 법학과 인문학을 배웠다. 칼뱅은 1533년 회심한 것으로 보이며 스위스 바젤에 머물면서 프랑스의 박해받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변호하고자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기 시작해 15363월 초판을 출판하였다. 당시 칼뱅은 스트라스부르로 가던 중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와의 전쟁으로 인해 길이 막히자 우회하기 위해 제네바에 들렀다. 그때 제네바는 막 가톨릭 신앙을 떠나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받아들이려고 하던 차였다. 당시 그곳에서 종교개혁운동을 펼치고 있던 기욤 파렐은 <기독교 강요>의 저자가 제네바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밤중에 찾아가 칼뱅에게 제네바의 종교개혁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강권하여 사역을 시작하였다.

. 제네바에서 1차사역 (1536-1538)

칼뱅은 제네바 생.피에르(St.Pierre)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 시작하여 얼마 뒤에는 목회자로 사역하였다. 칼뱅과 제네바의 목회자들은 제네바 교회의 개혁을 위해 <신앙고백과 규율><요리문답>을 작성하였고 이 문서들은 1537116일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칼뱅과 파렐은 정치적 이유 (제네바 토착세력의 방해 등)로 제네바에서 15384월 쫓겨나게 되었다.

. 스트라스부르 사역 (1538-1541)

제네바를 떠나 얼마간 바젤에 머물던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Martin Bucer)의 초청으로 1538년초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거기서 칼뱅은 프랑스 피난민들이 모인 부끌리에교회(피난민교회)의 목회자로 일하면서 스트라스부르 아카데미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았다. 1540년에는 부처의 중매로 이들레트 드뷔르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지만 1541년 다시 제네바 교회로부터 칼뱅이 꼭 필요하다며 강권하자, 결국 칼뱅은 만일 나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면 제네바로 돌아오라는 당신의 요구만은 정말 거절하고 싶지만,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님을 돌이켜 생각하여 주님께 제물로 바치듯 내 마음을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 드립니다.” 라고 말하며 제네바로 다시 들어갔다.


  @@칼뱅의 스트라스부르 사역

칼뱅은 1534년, 쫓기는 몸으로 프랑스 종교 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며칠간 이곳에 들렀다. 그리고 4년 뒤인 1538년 제네바에서 일시 추방당했을 때에도 3년간 이곳에 머물며 목회를 했다. 프랑스 동북부 알자스 지방의 이 아름다운 도시는 지리적으로 당시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로마 가톨릭교의 박해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가까운 국경지대였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뱅이 첫 설교를 했던 생니콜라 교회와 칼뱅 후예들의 예배처인 부클리에 교회를 찾았다. ‘가난했으나 가장 행복한 목회시절’을 보냈다는 칼뱅을 그려보았다. “제가 제네바에 두고 온 책을 팔면 다음 겨울까지는 집세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후에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라며 파렐에게 보낸 그의 편지가 생각나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제네바 시민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생활비조차 받지 못한 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칼뱅은 오히려 피난 성도들의 생활을 걱정하며 미래를 오직 하나님께 맡겼다. 특히 스트라스부르에 먼저 도착해 목회를 하고 있던 마르틴 부처가 칼뱅이 방문할 때마다 환대하며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복음을 위한 동역자 간의 섬김이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한지를 배웠다. 하나님은 칼뱅이 가는 곳마다 예비해 두신 동역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큰일을 이루어 가셨다. 바울을 위해 바나바를 예비하신(행 9:27) 하나님께서는 칼뱅을 위해 스트라스부르에는 부처를, 제네바에는 파렐을 예비하신 것이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599860&code=23111638&cp=nv

. 제네바에서 2차사역 (1541-1564)

제네바가 개혁교회의 요람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541년부터 1555년까지 적어도 14년 동안 칼뱅은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과 같은 험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교회법령]을 마련하여 예배의식과 교회의 제반 관습을 개혁하고 목회자와 평신도로 구성된 치리기구인 컨시스토리(consistory)를 만들어 도덕을 바로 세우고 신학적 논쟁들을 통해 올바른 사상을 수립하고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해 교육을 개혁하고 종합구빈원과 프랑스기금을 통해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등의 활동을 함으로써 제네바를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도시로 만들어 나갔다. 그 결과, 1556년 제네바를 방문한 스코틀란드의 종교개혁가 존 낙스(John Knox)는 제네바를 보고 사도시대 이후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며 감탄하였다.


<스트라스부르 성 토마스교회- 마틴 부처>


 

성 토마스교회         (출처-http://blog.naver.com/binggogo1/220893473329)


성 토마스 교회는 마틴 부처가 목회했던 곳이다.(1524-1540년간) 이 교회에서 슈바이쳐가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했다.마틴 부처는 칼빈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칼빈이 스트라스부스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성심성의것 섬겼다.

   

성 토마스교회         (출처-http://blog.naver.com/binggogo1/220893473329)


성 토마스교회         (출처-http://blog.naver.com/binggogo1/220893473329)


성 토마스교회         (출처-http://blog.naver.com/binggogo1/220893473329)


성 토마스교회         (출처-http://blog.naver.com/binggogo1/220893473329)


성 토마스교회         (출처-http://blog.naver.com/binggogo1/22089347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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