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칼뱅, 로마 바시 대학살, 바시박물관

성지순례/종교개혁지(루터,칼뱅 등)

by baesungsoo 2018. 3. 27. 10:00

본문


바시는 기즈의 모친 앙뚜와네뜨가 조성하여 손녀인 마리(Marie Stuart)에게 주었고, 성당은 기즈 추기경의 관할 지역

(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05632/2009121)


프랑수와 기즈가 영주인 주앙빌(Joinville)에서 가까운 바시 마을은 그의 어머니 앙뚜와네뜨가 지주로 마을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최근 미망인이 된 프랑스 왕후였으며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손녀 마리 스튜어트(Marie Stuart)에게 이곳을 유산으로 주었다. 또한 마을의 작은 규모에 비해 거대한 대성당이 세워진 것은 기즈가 로렌 지역의 추기경 집안이기 때문이다. 바시는 이처럼 정치, 종교적으로 기즈 가문에 중요한 지역임에도 지역의 많은 주민들이 개혁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기즈 가문의 치욕이며 위기였다. 그 이유는 1229년 뚤루즈 종교회의를 통해 영주 가운데 그의 영토 내에서 이단자를 제거하지 않은 사람은 파문하고, 1년 내로 이단자를 제거치 않으면 모든 영토를 박탈하여 교회 재산으로 환수한다는 결정이 아니더라도 가톨릭 당수로서 체면이 구겨진 것이다. 또한 왕권을 차지할 뿐 아니라 위그노들에게 자유를 허락한 까뜨린에 대한 분노를 위그노 응징을 통해 보복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1562년 대학살의 장소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현장 주소

(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05632/2009121)


1561년 파리 개혁교회의 지교회인 뜨와(Troyes) 교회는 바시 지역에 교회를 세울 것을 결의하고 목사 장(Jean Gravelle)으로 하여금 이곳을 방문하도록 한다. 장이 첫 방문했던 10월 14일에 120명의 위그노들이 대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상인 Drapier의 집에 모였다. 다음날에도 500~600명의 사람들이 설교를 듣기 위해 모였다. 성공적으로 첫 모임을 마친 장은 바시 교회에서 목회할 목회자를 파송해 줄 것을 쥬네브 교회에 요청한다. 그리고 새로운 목회자 파송 결정에 관한 대답을 기다리던 중, 장은 12월 16일에 세례식 집례를 위해 바시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 이 소식을 접한 기즈와 동생 로렌 추기경은 주교를 보내어 위그노들의 모임을 갖지 못하게 하지만, 예배를 사모하던 위그노들의 열기를 꺾을 수가 없었다. 주교는 그 다음 주일에 다시 검사와 무장 군대를 동원하여 예배 장소인 곡식 창고로 가서 예배 인도 중인 목사 장에게 아주 심한 말을 던진다. 그러나 장은 별 반응도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옆자리에 앉기를 권하자, 주교는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런 위협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바시 위그노 교회는 성탄절에 3천명의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참석자 가운데 삼분의 일이 개신교의 새로운 성찬식에 참여하였다. 1562년 2월 18일, 기즈 형제는 반(反) 합스부르크 동맹을 위하여 독일 루터교 제후들과의 협상을 위해 알사스의 Saverne로 간다. 권력 유지를 위해 누구와도 손을 잡으려는 그의 자세를 볼 수 있다.  기즈는 루터파들이 모여 있는 Wurtemberg 공작에게 깔뱅주의자들을 제거하도록 요구하지만 거부당한다. 그 이유는 기즈 형제가 1526년에 이곳 Wurtemberg에서 발생한 한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그들의 조카 앙뚜완(Antoine)이 루터파로서 북 알사스 지방에서 개혁을 시도하다가 개신교인 16,000명과 함께 학살당한 곳이다. 이런 개혁의 시도로 결국 신성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루터교의 신앙을 허용하게 하는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을 이끌어 내었던 그곳에서 깔뱅주의자들을 대적하라는 요구는 수용될 리가 없었다  기즈의 두 형제는 Wurtemberg 공작에게 오히려 위그노들을 억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런데 기즈 형제가 독일 제후들과 만나는 동안, 2월 20일에 바시 교회에 마침내 새로운 목사 레오나흐(Léonard Morel)가 쥬네브로부터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으로 힘들어 하는 바시 성당의 주교 제롬 부르주아(Jerome Bourgeois)의 탄원이 들어온다. 그러자 기즈 형제는 이 참에 위그노들을 제거할 것을 결심하고 천명의 기병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용병들을 데리고 바시로 곧장 가게 된다. 위그노 제거를 통해 위그노를 인정하는 왕의 칙령에 저항함으로, 아직도 자신들의 권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다분히 있었다. 주일 아침인 3월 1일에 기즈는 2백명의 군대 가운데 기마병과 총을 가진 60여명의 군사를 위그노의 예배처인 바시 곡식 창고로 보낸다. 이 때 기즈의 명령을 받은 사람은 Brosse 라는 군대 지휘관이었으다. 그들은 곧바로 1,200명의 교인들이 예배드리던 곳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회중들을 향하여 불을 질렀다. 불이 나자 다수는 지붕으로 올라 탈주를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군인들이 발포한 총과 칼에 남자와 여자 심지어 어린아이조차 피를 흘리며 내동이쳐졌고 피가 낭자하였다. 학살 당시 바시 교인들은 끌레망 마로(Clément Marot)의 시편 88편 고난의 찬송을 찬양하고 있었다. 가톨릭의 기록에 “기즈 가의 사람들은 결코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위그노들의 소란을 진정시키려는 시도 뿐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왕의 허락을 받고 드린 위그노들의 예배가 소란이었다면, 예배를 허락한 왕은 소란의 주동자란 말인가? 백 번 양보해서 그들의 주된 임무가 소란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는 궁색한 변명에도 비무장한 위그노들을 공격하여 250여명의 사상자를 발생했다는 것은 직무를 벗어난 학살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때린 사람은 그 사건을 왜곡시키고 발뺌을 할지 몰라도, 맞은 사람들은 그 사건을 결코 잊지 않고 당시 군대를 끌고 갔던 책임자의 이름과 기록해 놓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결코 우연히 지나가다가 발생한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준비된 학살임이 확실하다.


학살 현장을 복원해 놓은 건물. 뒤편 건물이 원래 학살 현장였으며, 앞 건물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05632/2009121)


곡식 창고에서 깔뱅주의자들이 예배를 드리다가 기즈 군대에 의해 2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을 알리는 표지판

(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05632/2009121)


바시 교회는 1561년에 시작되어 학살 사건으로 폐쇄되었다가, 1889년에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1903년에 20킬로 떨어진 Saint Dizier로 옮겨진다. 바시 교회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복원된 학살 현장 건물은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건물 뒤편에 위치하였다


왼쪽 건물이 학살 현장을 재현해 놓은 곳이며, 오른쪽 건물이 당시 교회로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05632/2009121)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시 교회. 뒤쪽 건물이 실제 학살 현장이다

(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05632/2009121)


기독교 박물관은 Saint Dizier 교회 교인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입장은 무료이다. 박물관 입구에는 교회가 시작되었던 1561과 1889라는 숫자가 오랜 세월로 바랬지만, 역사적 사실만큼은 보관하려는 교인들의 열의를 찾아볼 수 있었다. 박물관은 과거 예배드렸던 예배 장소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박물관에는 깔뱅을 비롯한 개혁자들에 관한 자료와 바시 대학살과 관련된 자료 그리고 바시 학살로 발생하게 되는 종교 전쟁과 관련된 자료와 기사들을 전시하고 있다.


바시 교회에서 바라본 바시 대성당. 박물관 입구에는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던 연도인 1561과 1889라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05632/2009121)


깔뱅의 사진과 성경 및 각종 자료들을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 내부 모습.

(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05632/2009121)


종교 개혁 과정을 보여주는 박물관 내부벽. 사진 오른쪽에 대형 위그노의 십자가가 보인다

(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05632/2009121)


학살 당시 건물 잔해에서 나온 목재

(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05632/2009121)




1562년 3월 로마 가톨릭주의자인 기즈 가문이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들을 총과 칼로 죽이며 화형을 시켰던 곳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바시의 노르트담 성당   (출처-http://v.media.daum.net/v/20160911212159130)


당시 위그노들을 처형했던 바시의 곡물창고   (출처-http://v.media.daum.net/v/20160911212159130)

위그노의 순교 현장은 만일 종교개혁을 탄압한 재앙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월등한 개신교 국가가 됐을 것이라고 한 프랑스의 신학자 새뮤얼 무르의 말을 실감나게 했다. 프로테스탄트 수난의 역사 중 프랑스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른 나라가 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기독교 박해사에 대한 성도들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게 사실이다위그노라는 말은 동맹자라는 뜻으로 프랑스 칼뱅주의 개혁파에 대한 칭호이다. 원래 개신교도를 핍박한 자들이 사용한 명칭인데, 필자는 그들의 수난사를 확인하면서 차라리 순교의 신앙동지라고 부르고 싶었다. 프랑스 종교개혁의 연원을 가톨릭교회의 외적 예배 형식과 화체설(성찬식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설)을 배격한 쟈크 르페브르의 1512년 개혁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독일의 루터 개혁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선다고 할 수 있다(르페브르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한 기욤 파렐의 스승이다).  16세기 개혁운동은 각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일종의 시대적 도미노현상으로 예술계에서 르네상스 운동과 학문계의 인문주의 운동, 정신계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와 시골, 가정과 직장, 귀족과 농부, 노동자와 자본가 등 삶의 전 영역과 사회 모든 계층에서 공감되게 나타났다. 위그노 활동은 영적 카이로스(하나님의 특별한 시간) 속에서 칼뱅의 제네바 개혁사상에 자극받아 시작됐다. 당시 위그노들은 칼뱅의 사상을 적극 수용하며 기독교강요36∼10장에 명시된 크리스천의 생활규범을 따랐다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고(고전 6:19) 주님의 것이라면 생활의 모든 행위를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살고 그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14:8).”  이러한 칼뱅의 권유와 가르침에 영향 받은 위그노들은 교황 중심의 가톨릭교회를 거부하며 당국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비밀집회를 열어 모이기 시작했다. 1555년에는 5개에 불과했던 교회 조직이 4년 후에는 100여 개로 늘어났으며, 종교전쟁(위그노 전쟁)이 시작된 1562년에는 무려 2150개의 교회공동체로 급증했다고 한다. 세계교회 역사상 불과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처럼 폭발적으로 교회가 급증한 사례가 또 있었던가. 필자는 이것을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생하는 가정교회나 오늘날 우리가 관심을 갖는 셀 교회의 모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처럼 큰 부흥을 이룬 위그노는 1559년 파리에서 전국 대회를 개최하고 프랑스 신앙고백을 채택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교회로서의 입장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1560년대로 접어들면서 로마 가톨릭주의자인 기즈(Guises) 가문과 심각한 충돌을 빚게 됐다. 특히 15623월에는 바시 노트르담 성당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서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들을 기즈 가문이 무력으로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부터 프랑스 내에 긴 종교전쟁이 시작됐다. 무려 30년 이상 지속된 내전으로 3만명 이상의 위그노들이 학살당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됐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200m 떨어진 광장에서는 시민들이 매일 화형 당하는 위그노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육신이 타는 냄새를 맡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칼뱅은 순교자와 투옥돼 고문당하는 성도들이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키도록 그가 성경적으로 확고히 믿은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교리를 조국의 성도들에게 서신으로 전하며 비상 기도를 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심어 놓으신 능력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동요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싸움에 대해 이미 오랫동안 숙고해 왔습니다. 그 싸움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진대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분은 세상보다 강하십니다.”   대학살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파리 근교와 모, 바시 등 위그노의 예배처소가 있는 곳이면 끔찍한 살해와 폭력이 가해졌다. 1598년 낭트칙령이 발표돼 위그노에게 종교·정치적 권리가 부여됐으나 이 칙령은 1685년 루이 14세에 의해 폐기되고 위그노는 또다시 박해를 받게 된다. 이로써 30만명이 넘는 위그노들이 네덜란드와 스위스 독일 영국, 심지어는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칼뱅은 위그노들에게 끝까지 시련을 참고 견디며 절대로 폭동은 삼가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저는 여러분에게 위대하신 주님께서 주신 인내의 가르침을 실천할 것을 호소합니다.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허용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시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을 폭동이나 반란을 위해 무장시켰다는 비난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모두가 전멸당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과격한 행동과 폭력은 단지 헛된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그 후 위그노가 정부의 인정을 받은 것은 1802년으로, 30년 전쟁이 끝나고 200년이 지난 후였다. 1907년에는 공식적인 프랑스 개혁교회로 위상을 확립했다. 위그노들이 프로테스탄트 박해사 중 가장 혹독한 시기에 보여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한 정직성, 근면성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의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우리는 프랑스 위그노 수난사를 통해 칼뱅의 비폭력 평화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하신 사랑의 가르침이다(5:39, 6:27∼29). 많은 사람들이 칼뱅의 엄격한 이미지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오해한다. 그러나 실상은 칼뱅이 사랑과 관용의 사도임을 위그노 수난사를 통해 알게 됐다. 19193·1운동 당시 우리의 선조들이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비폭력으로 일관했던 것은 민족대표 33인 중 상당수의 기독교지도자들이 가졌던 성경적인 평화사상 때문이었다. 미국의 인권운동가인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의 인권회복을 위해 보여준 투쟁방법도 비폭력 무저항운동이었다. 우리는 위그노의 삶을 통해 순교신앙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사진 서대천 목사 (홀리씨즈교회)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