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쯔빙글리, 스위스 취리히 쯔빙글리 동상

성지순례/종교개혁지(루터,칼뱅 등)

by baesungsoo 2018. 3. 27. 14:40

본문


왼쪽은 종교개혁자 쯔빙글리가 사역했던 그로스뮌스터 대성당(Grossmuenster), 오른쪽은 프라우 뮌스터 교회(Grossmunster)                 


그로스뮌스터 대성당(Grossmuenster)               (출처-http://blog.daum.net/kieury/11296285)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로마네스크 성당으로 "종교개혁의 어머니 교회"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유는 스위스의 종교 개혁가 츠빙글리가 1519년부터 1531년 숨을 거둘 때까지 이곳에서 설교를 하였다. 11세기에서 약100년에 걸쳐 세워졌으며 중간에 성당의 상징인 두개의 탑이 1763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후 재건하였다. 이러한 재건과 보수를 통하여 로마네스크, 고딕양식 등 다양한 양식들이 복합적으로 적용되어 있으며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1930년대의 아우구스 자코멧의 작품이다. 교회 앞에는 츠빙글리의동상이 자리잡고 있다정면에는 3층의 탑이 세워져 있고 남쪽 탑에는 거대한 조각이 올라가 있는데, 이 조각은 샤를르마뉴 대제 (독일어권에는 카를 대제)가 무릎에 칼을 올려놓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원본은 성당 지하에 있다. 원래 현재의 성당이 있던 자리에는 서기 9세기 초의 샤를르마뉴 대제 (독일어권에는 카를 대제 )가 세운 성당이었다.


프라우 뮌스터 교회(Grossmunster)  


취리히를 흐르는 리마트강가에 위치한 성당으로 원래는 853년 지어질 당시 원래는 독일의 황제 루드비히가 귀족 부인을 위해 선물한 양로원으로써 12~14세기에 성당으로 개조한 곳이다. 12세기 이후로는 고딕양식으로 변형되어지는데, 종교개혁 이후 시평의회로 이관되고, 종교화·성상·오르간 등을 철거한 뒤에 신교의 지구교회로 사용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2~15세기의 것이고, 높다란 뾰족탑은 1732년에 건립된 것이다. 수녀원 건물은 1898년부터 시청사의 별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우여곡절의 와중에서 한때 종교예술품들이 추방되기도 하였지만,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 샤갈이 성서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1969년에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인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가 되었다.


프라우 뮌스터 교회(Grossmunster) 


쯔빙글리 상      (출처-http://cafe.daum.net/Gotteskinder/2h64)


취리히의 바세르 교회(Wasserkirche,물의 교회라는 뜻) 앞에 있는 오른손에 성경, 왼손에 대검을 쥔 츠빙글리의 동상

   

훌리히 쯔빙글리 (Huldreich Zwingli, 1484~1531)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인다. 한 갈래는 독일을 중심으로 루터와 멜랑히톤이 이끌어 간 루터파운동이고, 다른 한 갈래는 스위스를 중심으로 쯔빙글리와 칼빈이 주도해 간 개혁파운동이다. 개혁파 중에 쯔빙글리는 취리히에서 독일어권 주민들을 상대로 개혁운동을 전개했고, 칼빈은 제네바에서 프랑스어권 주민을 상대로 개혁운동을 전개했다쯔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는 루터보다 7주 늦은 148411일 스위스 빌트하우스에서 7명의 형제 중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 촌장이었고, 어머니는 사제의 누나였으며, 삼촌은 참사회장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님과 그의 삼촌에 의해 가톨릭교육을 받았다. 10살 때 바젤의 라틴어 학당에서 라틴어 문법과 음악, 그리고 변증법 등을 배우고, 149814살 되던 해에 베른의 대학에 진학했다가 1500년에 빈 대학에서 2년간 공부하고 1502년 바젤로 돌아와 성 마르티누스 학당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며 고전학을 연구하여 1506년 인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쯔빙글리는 그해 콘스탄츠의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어 1506년에서 1516년까지 10년간 글라루스에서 목회자로 사역하였다. 그는 그 기간동안 글라루스의 청년들이 교황의 용병으로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에 군목으로 세차례(1512, 1513, 1515) 참전하였다. 그는 이때 용병제도의 타락성을 발견하고 이후 공개적으로 이러한 관습을 공격하였다. 쯔빙글리가 취리히 그로스뮌스터교회의 주임 목회자로 청빙을 받은 것은 151812월 아인지델른에서 였다. 이때 이미 루터의 사상은 널리 퍼져서 스위스에서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우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쯔빙글리도 루터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쯔빙글리는 헌신적인 목회자이자, 친절하고 활기차며, 친구와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었다. 뿐만 아니라, 체격이 크고, 외모가 준수했으며, 음성 또한 듣기 좋아 그의 설교는 청중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또한 열렬한 애국자요 민족주의자였다. 쯔빙글리가 취리히에 부임하기 직전인 15188월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책 삼손(Bernhardin Samson)이 스위스로 들어와 죄의 용서와 연옥에서의 해방을 미끼로 면죄부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동전 몇푼을 받고 종이로 된 면죄부를 팔고, 부자들에게는 비싼 값에 양파지로 만든 면죄부를 팔았다. 쯔빙글리는 바젤에서 공부할 때 바텐바흐 교수로부터 면죄부가 오류라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아인지텔른에서 목회할 때도 삼손을 믿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경고한 바 있었다. 삼손은 쯔빙글리의 방해로 취리히에서는 큰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 이듬해 여름 취리히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인구의 31에 해당하는 2500여명이 죽었다. 쯔빙글리도 전염병에 감염되어 목숨이 지극히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회복되었으나 그의 기억력은 예전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역병을 앓고 난 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커다란 사명을 부여하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1520년부터 복음을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순절 기간동안 육식을 금하는 일이나, 성직자의 독신제가 성경에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판단, 스위스 의회에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 청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사제들 가운데는 결혼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쯔빙글리 역시 152445일 안나 나인하르트라는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안나는 당시 세 아이의 어머니였다.

 

쯔빙글리의 67개 조항과 논쟁

1523년초 쯔빙그리는 67개 조의 논제를 걸고 가톨릭측에 논쟁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교황의 지상권, 미사, 성자 숭배, 인간의 선행과 효력, 금식, 순례, 성직자 독신제, 연옥 등의 비성경적인 계율들을 거부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가톨릭측과 개혁측의 제1차 논쟁은 1523129일 시청에서 성직자와 대소 의회의 의원 등 6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논쟁 결과 시당국은 쯔빙글리의 주장에 찬성하고 모든 설교자들에게 신성한 복음과 거룩한 성경에 의거하여 확증할 수 없는 것은 어떤 것이든 설교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2차 논쟁도 9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026일부터 시청에서 사흘간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350명의 성직자들과 10명의 박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미사와 성상숭배의 폐지가 강력히 제기되었다. 그러나 시의회는 미사와 성상을 즉각 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3차 논쟁은 1524120일 이루어졌다. 쯔빙글리는 교황주의자들은 세련된 우상숭배자들이고 우상숭배야말로 교회의 오류와 부패의 뿌리라고 거듭 비판하며, 우상숭배적이고 미신적인 의식들을 철저하게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미사 옹호론자들은 논박을 당했다. 시의회는 자기들이 믿는 바를 고수할 수는 있으나 행정당국의 결정에 더이상 저항하지는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15246월 교회와 국가의 권력자들이 파견한 대표단들이 건축가, 석공, 목수를 대동하고 시내의 교회들에서 성화, 유물, 십자가 고상, 제단, 초 등의 모든 장식물들을 제거하고, 프레스코 화법으로 그려진 그림들은 하얀칠로 덧입혀졌다.

미사는 폐지되고, 개혁파 예식에 따른 복음 설교와 성찬예배가 이루어졌다. 쯔빙글리는 루터와 달리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그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며, 성만찬은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1525년에 종결되었다. 세속권력과 교회지도자들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취리히가 속한 콘스탄츠 교구의 주교는 종교개혁을 반대하였다. 스위스의 다른 주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스위스의 삼림지역의 몇몇 주들은 계속 가톨릭으로 충실하게 남아 있고자 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와 동맹을 맺고 가톨릭 추종 세력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켜 15316월에 취리히를 공격해 왔다. 이에 취리히의 개혁파들로 구성된 크리스챤 민간연맹이 맞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1차 전투는 가펠에서 벌어졌으나 곧 평화협상이 이루어져 중지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양측은 다시 카펠에서 맞붙었다. 이 전쟁에 쯔빙글리도 칼을 들고 참전했다. 거기서 그는 47세의 나이로 그의 의붓 아들 게롤트와 그의 사위 그리고 동서도 함께 전사했다. 카펠은 취리히 시에서 마주보는 호수 건너편의 언덕을 일컫는다. 취리히 호수와 접한 림마트 강변에는 쯔빙글리의 동상이 오른 손에 성경을, 왼손에는 칼을 들고 그가 전사한 카펠언덕을 응시하고 있다. (출처-교회연합신문(www.ecumenicalpress.co.kr)






쯔빙글리 동상과 그로스뮌스터 대성당


쯔빙글리의 67개 조항   (출처-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21c0001b)

 

쯔빙글리는 영감되어진 것(theopneustos:즉 하나님에 의해 감동되어진)으로 불리는 성경의 근본(ground)에 대해서, 훌륭한 도시 쮜리히에서 이러한 67개의 조항내지 의견을 설교해 왔음을 고백한다. 나는 성경을 통해 이 조항에 대한 변호와 증거를 제시한다. 만약 내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면, 나는 수정될 준비가 되어있으나, 그것 역시 오직 동일한 성경으로부터 뿐이다.

1. 복음이 교회의 견진성사(confirm‎‎!ation of the church)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모두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2. 복음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의 뜻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자신의 무죄하심으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속하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셨다.

3.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사람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다.

4. 하나님께로 향하는 다른 길을 추구하거나 지시하는 자는 누구든지 영혼의 살인자이며 도둑이다.

5. 그래서 복음 외의 어떤 다른 가르침에, 복음에 부여하는 영예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을 부여하는 자들 모두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며 복음이 무엇인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 이는 예수님만이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에 의해 약속되어지고 주어진 선구자(Pioneer)시며 대장(Captain)이시기 때문이다.

7. 그분은 영원한 구원자시며 그분의 몸인 모든 신자들의 머리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분 없이는 그 몸은 죽은 것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8. 이러한 것들을 통해, 첫째로 이 머리 안에 거하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지체(members)이며 자녀이다. 이것이 교회이며 성도들의 공회이며,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우주적 교회(ecclesia catholica)인 것이다.

9. 둘째로, 마치 몸의 일부가 머리의 지시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자는 어느 누구도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10. 몸의 일부가 머리없이 무언가-눈물을 흘리는 것, 상처를 입는 것, 자신에게 자해를 가하는 것-를 할 때처럼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머리되신 예수없이 교만하게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할 때, 저들은 감각을 잃고 자신을 공격하며 어리석은 율법으로 서로를 짐 지우게 된다.

11.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그들의 허식(pomp), 출판 승인(imperiousness), 사회적 지위, 직함 그리고 법으로 구성된, 소위 교회적 전승(ecclesiastical traditions)들은, 저들이 머리를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광기(madness)의 근원임을 안다.

12. 그래므로, 미쳐 날뛰지만(rage on) 그것이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시대에, 이러한 사실에 주의가 기울여져 왔다. 저들은 영원히 발광하도록 허락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머리되신 분에게 귀를 기울여 듣도록 의식이 회복되어질 것이다.

13.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곳에서, 그들은 쉽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배우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분께 인도되며, 그분께로 개종convert)할 것이다.

14.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나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설교되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 최대한의 근면함을 나타내야 한다.

15.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함을 얻고, 믿지 않음으로 저주를 받는다. 이는 명백하게 진리가 복음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16. 복음 안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가르침과 전승이 구원을 위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배운다.

로마교황과 저들이 따르는 바에 대한 주의에 대하여(Notice, Pope What follow!)   

17.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라는 것이 자신들을 대제사장으로 받아 넘기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예와 권능을 반대하고 심지어 거절한다는 사실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미사에 대하여(Of the Mass)

18. 단번에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들의 죄를 위하여 드려진, 영원히 지속되며 효과있는 희생제물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미사(Mass)가 희생제가 아니라 한 희생제의 기념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선하게 행하신 구속의 인(seal)치심이라고 결론짓는다.

성인들의 중재에 대해서(Intercession of the Saints)

19.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시다.

20.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신다. 이점에서, 지금부터 영원히 그분의 중보외에는 다른 어떤 중재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

21. 땅에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이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짐을 확신하는 방식으로 기도한다.

선행에 대하여(Good Works)

22.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이시다. 그래서 행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한 선한 것이지만, 우리 자신들로 말미암는 행위가 되는 한 그것은 의롭지도 선하지도 않다.

성직자들의 부()에 대하여(How the Prosperity of the Clergy Should Be Christ)

23.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부와 호화로움을 책망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위해서 부를 축적한 자들은 그들이 자신의 탐욕과 사치를 위해 그분을 구실 삼을 때, 심각하게 그분을 중상하는 것이다.

음식을 금함에 대하여(Prohibition of Foods)

24.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행할 의무가 없다. 그들은 아무 때나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다. 그러므로 치즈와 빵에 대한 로마 교황의 교서는 로마주의자들의 협잡(froud)임을 배운다.

축제와 순례에 대하여(Of Festivals and Pilgrimages)

25. 절기와 장소가 그리스도에게 묶여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들에 속박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점으로 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절기와 장소에 속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합법적인 자유를 강탈하는 것임을 우리는 배운다.

두건 달린 수도복과 뱃지와 그와 같은 것들에 대하여(Cowls, Badge, and the Like)

26. 위선보다 더욱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점으로부터, 인간들에게 그것 자체로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커다란 위선이며 파렴치한 것임을 결론짓게 된다. 따라서 수도승들의 외투, 뱃지, 바지, 그리고 그와같은 것들은 더욱 위선적이며 파렴치 한 것이다.

성직계급과 당파에 대하여(Order and Sects)

27.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서로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며 이 땅에서 어느 누구도 신부(神父)(father)라고 불리워 질 수 없다. 하물며 성직계급(orders), 당파(sects), 도당(cliques),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은 더욱 그러하다.

성직자의 결혼에 대하여(The Marriage of Clergy)

28.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거나 금하시지 않은 모든 것은 (행함에 있어-역자주) 적절한(proper)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결혼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절한 것임을 배운다. 거룩하지 않은 설교자는 반드시 부인을 얻는가 대해서 (The Impure Priest Should Take a Wife)

29. 그들이 하나님께서 순결을 위해 결혼제도를 주셨음을 이해하였지만 결혼을 통해서 자신들을 성결하게 지키기 않는다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인 셈이다. 하나님께서는 순결을 위해 그들에게 결혼제도를 주셨다.

순결(독신(獨身)-역자 주)에 대한 맹세에 대하여(Vows of Purity)

30. 순결의 맹세를 행한 자들은 매우 미친 짓이며 유치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러한 맹세를 행한 자들이 경건한 사람들을 음탕한 자들로 간주한다는 것을 우리는 배우게 된다.

출회에 대하여(fo Excommunication)

31. 어떤 개인이 성도를 출교시킬 수 없으나, 규칙에 따라서 교회-, 출회당할 개인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무리들의 공회-가 감독으로 시행할 수 있다.

32. 출회당해야 하는 경우는 공적인 추문(public scandal)을 일으킨 사람의 경우에만 해당한다.

소유주 불명의 물품에 대하여(Of unclaimed Goods)

33. 소유주 불명의 물품의 경우 만약 그것이 정당한 소유주에게로 돌려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성전, 수도원, 수도승, 사제, 또는 수녀에게 주어질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권위자에 대하여(Of Authorities)

34. 소위 정신적 재능(spiritual estate)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영예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일은 정당화 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세속 권위자에 대하여(Secural Authority from God)

35. 그러나 세속적 권위자는 정당한 권력을 마땅히 가질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위들에 의해 이러한 점이 지지된다.

36. 소위 정신적 재능을 가진 자들이 권리를 가지고 또는 그 권리의 보호를 위해서 주장하는 모든 것들은, 만약 저들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세속적인 권위자에게 합당한 것이다.

37. 이러한 권위자들에 대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38. 권위자들이 하나님과 상반되는 어떤 것들을 명령하지 않는 한에서 그러한 의무가 있다.

39. 그래서 모든 세속적 법률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conformed) 제정되어야 하는데, 이는 심지어 압제받는 자들이 불평하지 않더라도 권위자들은 저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40. 오직 이러한 세속 권위자들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키지 않고서 사람을 사형집행할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직 공적인 추문을 범한 자들에게만 시행되어야 하며 이는, 그 추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른 판결을 (이미 기록되어진 성경을 통해서-역자주)주시지 않은 조건 하에서이다.

41. 만약 세상 통치자들이 하나님께서 책임감을 부여하신 모사들과 참모들과 함께 합당하게 임무를 수행한다면 통치자들은 그들에게 육신적인 생계를 제공해 줄 의무가 있다.

42. 그러나 만약 통치자들이 불신앙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원리에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하나님에 의해 대치될 것이다.

43. 요지는 이것이다. 가장 최고의 그리고 최상의 세속 정부는 통치자가 하나님에 의해 지배받는 곳에 존재하며, 반대로 자신의 마음에 따라 다스리는 통치자가 있는 곳은 가장 사악하며 위태로운 정부이다.

기도에 대하여(Of Prayer)

44. 참된 예배자는 사람들 앞에서의 커다란 소란함(fuss)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자이다.

45. 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도록 행하며, 현세에 자신들의 상급을 받는다.

46. 따라서 교회에서 헌신함 없이, 그리고 오직 자신을 위한 찬양으로 노래하고 외치는 것은 인간으로부터의 명성을 얻기 위한 것이거나 이익을 얻기 위해 행해진다는 사실이 뒤따른다.

실족에 대하여(Of Offense)

47. 그리스도인을 실족시키거나 치욕스러움을 주기에 앞서 그리스도인은 육신적 죽음의 고통을 선택해야 한다.

48. 이유없이, 우둔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타인을) 실족시키는 사람은 무엇이 참으로 죄악이며 또한 무엇이 죄악이 아닌지를 깨닫도록 가르쳐야 한다.

49. 사제에게 합법적인 아내를 갖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며 오히려 내연의 처를 갖는 것이 허용되는 것보다 더욱 죄된 것은 없다. 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죄의 용서에 대하여(Of the Forgiveness of Sins)

50. 오직 하나님만이, 오직 그분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하신다.

51. 이러한 권세를 피조물에게 돌리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강탈하여 하나님이 아닌 그 무엇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우상숭배인 것이다.

52. 그래서 죄악을 용서받기 위해서 사제나 이웃에게 고백을 행해서는 안되며 단지 상담(counsel)을 목적으로 할 수 있다.

53. (출회를 제외한) 보속(assigned work of satisfaction)은 인간 상담의 산물이며 그것으로 죄를 없이 할 수 없으며 그들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에게 부과되어진 것들이다.

죄를 속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The Sorrow of Christ Atones For Sins)

54.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난과 곤고함를 당하셨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고행의 사역을 (성도에게-역자주)부과하는 자는 누구나 그릇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보류된 용서에 대하여(Withholding of Forgiveness)

55. 참회하는 자에게 죄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이나 베드로의 입장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며 악마적이다.

56. 돈 때문에 죄를 용서해주는 자는 누구든지 시몬과 발람의 동류들이며 사탄의 진정한 선지자이다.

연옥에 대하여(Of Purgatory)

57. 참된 성경은 연옥에 대해 아무 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58.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한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59.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알도록 하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알아내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

60. 만약 죽은 자들과 상관이 있는 자가 죽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한다면 그것에 대해 나는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 시간을 정하는 것(사망의 죄를 위해 7년동안 기도하는 것)(그로 인한-역자주) 이익을 위해서 그 일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인간적이 아니라 악마적인 것이다.

성직와 서품에 대하여(Of the Priesthood and Ordination)

61. 최근에 고안되어진(invented) 성직 임명의 종류에 관하여 성경은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6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 외에 어떠한 사제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는다.

63.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영예가 주어져야 함을 성경은 요구하며 이는 저들에게 육체적인 생계가 주어져야 함을 말한다.

악한 행실을 다루는 것에 대하여(Of Dealing with Misdeed)

64. 자신의 악한 행실을 의식하고 있는 자들에게 뭔가를 위해 고통을 주는 것이 요구되어서는 안되며 평안이 죽을 수 있도록 허락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저들이 교회에 남기게 되는 재산들은 그리스도인의 방식대로 관리되어야 한다.

65.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자신들의 악한 행실을 깨닫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다루실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여 그 일이 무시되어질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저들에게 신체적인 상해를 가해서는 안된다.

66. 모든 영적인 지도자들은 겸손해야 하며 자신들의 돈주머니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높이기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멸망받을 것이다. 그 예가 십자가 위에 있다.

67. 만약 어떤 이가 나와 더불어 세금, 십일조, 세례받지 못한 아이들, 또는 견진성사(confirm‎‎!ation)에 대해 토론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에 대한 답변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궤변과 인간적인 지혜로 논쟁하도록 하지 말며, 성경으로 그 판단자를 삼으라(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살아 숨쉰다). 그러므로 그대가 진리를 찾을 수 있으며, 또는 만약 진리를 이미 발견했다면, 그것을 붙들 수 있게 된다. 아멘.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길...

 

논쟁

1525년부터 쯔빙글리의 활동은 스위스 국내에서는 물론 국외의 루터파들과도 불화를 일으켜 난관에 부딪혔다. 취리히에서도 급진파가 생겨나 츠빙글리의 계획과 마찰을 빚었는데, 그들은 십일조의 폐지, 교회와 국가의 분리, 진실한 신자들(신약성서의 가르침과 도덕적 신념에 따라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의 순수한 교회 설립, 유아세례의 폐지 등을 요구했다. 15251, 3월에 재세례파의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였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최초의 재세례는 이미 2월에 행해졌으며, 폭넓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협의회 당국은 자신들이 우롱당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 지도자들을 감금했으며, 152511월 무익한 논쟁을 좀더 계속한 후 결국 그들을 사형에 처했다. 이 운동에 대한 신학적 반론으로 츠빙글리는 특별저서인 세례에 관하여 On Baptism(1525)를 썼는데, 거기에서 그는 서약의 표시로 물세례가 매우 중요함을 강조했다. 다음 몇 해에 걸쳐서도 그는 그 주제에 관해 다른 많은 소책자들을 발행했는데, 재세례파들의 책략 Tricks of the Catabaptists(1527)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루터와의 관계

한편 미사에 관련된 쯔빙글리의 사고와 의식은 마르틴 루터와 현저히 달랐다. 두 사람은 성찬식을 희생제사로 간주하지 않는 데 일치했고, 또한 성례전에서 실체의 변화라는 중세적 개념을 거부하는 데도 일치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구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 안에(혹은 함께) 실제로 현림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반면 쯔빙글리는 '……이다'라는 단어의 참뜻은 '의미하다'이며, '실제로' 현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성한 임재, 즉 성령의 힘에 의해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이런 견해를 2권의 라틴어 소책자(1525)와 더 대중적인 작품 성찬에 관하여 On the Lord's Supper(1526)에 피력했다.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은 스위스의 운동을 진실된 복음적인 개혁 작업으로 보기를 거부하면서 신랄하게 대응했다. 헤센의 백작영주인 필리프의 적극적인 알선으로 마르부르크 회담(1529)이 열렸으며, 화해할 수 있도록 의견을 조정했다. 이 회담에는 루터, 쯔빙글리, 마르틴 부처 모두 참석했다.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진심어린 일치를 보았지만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차이를 보였다. 루터는 쯔빙글리와 마르틴 부처가 내민 우정의 손을 거절했다(화체설). 쯔빙글리는 신학적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도 루터와 화해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혁에 가담한 주()들이 고립될 위험이 점차 증대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삼림 주들은 개혁파연맹에 대항해 자체적으로 있었으며, 황제가 개입할 실제적인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1529년 연맹은 방어를 위한 수단으로서 취리히에서 남쪽으로 16떨어진 카펠의 삼림 주들을 공격했고, 이들을 제압했다. 슈트라스부르크 및 개혁에 가담한 시들과 손을 잡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이런 시도들은 처음에는 헤센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이지 못했다. 분열의 결과는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1530)에서 논의되었고, 그 가운데 복음주의적인 그룹들은 츠빙글리의 이성적인 신앙의 이치 Fidei Ratio를 포함한 3개의 신앙고백을 제시했다. 츠빙글리는 동지가 없자 베네치아와 프랑스로 눈을 돌렸는데, 한편으로는 그들이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통치자들을 설득해 복음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쯔빙글리는 자신의 신앙해설 Exposition of the Faith(1531)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게 보냈는데, 그것은 그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공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계획은 빗나갔고, 1531년 츠빙글리는 연맹에 대해 삼림 주들을 공격하도록 촉구했다. 대신 베른은 무익한 경제제재 정책을 시도함으로써 삼림 주들이 153110월 취리히를 공격하는 결과만을 낳았다. 카펠의 2번째 전쟁에서 쯔빙글리는 취리히 군대에 종군목사로 동행했고, 그 전투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장소는 지금도 비석으로 표시가 되어 있다(카펠 전쟁).

 

공헌

후기에 쯔빙글리가 교회정책에 몰두했다고 해서 신앙과 성직위계에 대한 그의 소중한 공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그는 성서를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모든 교리와 의식에 엄격히 적용시켰다. 원죄에 대한 온건한 관점과 광범위한 구원에 대한 기대로 인해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그는 신의 주권을 특히 강조했다. 그가 성례전을 은총을 얻는 수단으로나,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개입하는 형태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불링거, 피에트로 마르티레 베르미글리, 장 칼뱅 등의 다른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심오한 사상의 근저가 되었다. 만약 쯔빙글리가 교회정치에서 평신도의 권위를 협의회를 통해 행사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그는 에라스투스주의(교회 문제에서 평신도의 권위를 중시하는 국가권력지상주의) 및 제네바에서처럼 소모적인 싸움을 막을 수 있었다. 그의 저술은 확실히 지리멸렬하고 주지주의적이지만, 그들 이면에는 개방적이고 따뜻하고 우호적인 경향이 숨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모든 그리스도교 교리를 성서입각하여 대담하게 다시 생각하고자하는 시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쯔빙글리 살던 집


쯔빙글리 살던 집


쯔빙글리의 후계자요 사위 볼링거(Henny Bullinger) 사택


취리히 대학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