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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 누아용(Noyon) 장 칼뱅 생가(박물관)

성지순례/종교개혁지(루터,칼뱅 등)

by baesungsoo 2018. 3. 27.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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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의 생가 


칼뱅이 1509년 7월 10일 태어나 생후 수개월간 살았던  생가이다. 지금은 칼뱅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칼뱅의 주석과 ‘기독교강요’, 여러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비롯해 다양한 그의 저술을 보관하고 있다. 박물관의 후원회가 결성되어 이를 지원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에 의해 파손되어 1954년에 복원되었고, 1983년에는 현대식 설비를 갖추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칼뱅의 성장과정


칼뱅의 고장인 피카르디는 종교개혁을 위해 예비된 땅이었다. 루터에게도 영향을 끼친 쟈크 르페브르와 제라르 루셀 등 당시 종교개혁자 중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가 태어난 유서 깊은 느와용은 도시의 규모는 작았지만 참사원의 숫자가 파리 노트르담보다도 많았던 곳으로, 반가톨릭 개혁가들이 일어난 저항의 땅이기도 했다. 칼뱅은 조상 대대로 가톨릭교회의 충실한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제라르 코뱅은 느와용 주교의 비서이자 성당의 재무관리를 하는 로테즈(회계사)로, 시청 건축에도 깊이 관여할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저항적인 사상을 지녔다고 한다. 어머니 쟌느 르프랑은 경건한 신앙심을 지닌 미모의 여성으로 칼뱅이 다섯 살 무렵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어린 칼뱅을 데리고 인근 지역의 욱스캉(ourscamps) 수도원을 찾아 성모 마리아의 모친인 안느의 유골을 참배할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만일 칼뱅이 어려서 어머니가 죽지 않았다면 분명히 가톨릭교회의 고위 성직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슬픔은 컸겠지만 칼뱅을 장차 교회개혁의 지도자로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일찍부터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칼뱅은 어린 시절, 초급 과정 콜레주(학당)인 콜레주 드 카페트를 다녔다. 그 시기는 1523년 칼뱅이 파리의 콜레주 드 라 마르쉬와 콜레주 드 몽테규에서 공부하기 전으로 그의 나이 12세(1521)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귀족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미래의 종교개혁자는 어려서부터 특별한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칼뱅이 교육을 중시해 훗날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운 것도 어려서부터 철저한 교육으로 탁월한 학자의 자질을 갖춘 데서 연유한다.  칼뱅은 종교개혁자 중 공부를 많이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에 파리로 유학해 두 곳의 콜레주에서 공부했으며, 오를레앙대와 부르쥬대, 그리고 파리 포르테대 등에서 계속 공부하게 된다. 그는 학창 시절에 강의할 만큼 출중한 지식을 갖추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교사로 알려진 멜키오 볼마르에게서 헬라어와 헬라어 성경강독을 배웠고, 권위 있는 법률가 오를레앙 데스투알에게서 법학을 배워 약관의 나이에 수사학과 법학, 인문학과 신학에 정통했으며 22세의 나이로 법학 박사가 되었다. 특히 하나님을 깊이 알고자 파리 왕립학교인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히브리어 성경 연구에 몰두했다. 칼뱅의 학업 과정을 유의해서 보면 처음에는 ‘아버지를 위하여(법학)’,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자신을 위하여(인문학)’,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위하여(성경)’로 변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칼뱅에게 종교개혁을 위한 거친 광야의 시간이 찾아왔다. 1532년에 쓴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이 파문을 일으켰고, 이듬해 절친인 니콜라 콥을 위해 대필한 총장 취임 연설문 내용이 문제가 되어 체포 직전 파리를 탈출하게 된다. 평소 가톨릭 교리에 회의를 품었던 칼뱅은 1528년 회심을 경험했다. 그는 그때의 심경을 “하나님이 변화를 주셨다. 그분은 나로 순종하게 하셨다”라고 고백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대대로 믿어온 로마가톨릭과 1532년 절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주의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칼뱅은 12세 때부터 받아온 성직록을 반환했으며 아버지가 바라던 사제직을 포기하고 1536년 제네바에서 프로테스탄트 목회 사역을 시작했다. 후일 칼뱅은 이때의 심경을 ‘시편 주석’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다윗이 목동의 신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지위로 높여졌듯이, 하나님은 보잘 것 없고 비천한 나를 택하사 복음의 설교자이자 목회자라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주셨다.”  종교개혁자들의 모토인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은 오늘의 교회개혁이 다음세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595941&code=23111638&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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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

원어명 : Jean Calvin

출생-사망 : 1509.7.10 ~ 1564.5.27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종교

출생지 :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

주요저서 : 그리스도교 강요(綱要)(1536)

주요작품 : 로마서 주해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 출생.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 ·경리 등으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1523~15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註解)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533년 에라스뮈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등을 통해 개신교 신학을 집대성했고, 개혁교회와 장로교를 통해 그의 신학은 많은 부분 계승되고 있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에게 영향을 끼쳐 오늘날 장로교회 교리에 있어 그의 신학이 중요하다. 또한 영국 청교도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청교도들은 성공회의 온건한 종교개혁에 반대한 칼뱅주의 개신교도들로서, 그리스도의 새언약 아래 순종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칼뱅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주장하여 신앙의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지, 교회에 있지 않음을 선언한 종교 개혁자이기도 하다. 장 칼뱅은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한 에큐메니컬(교회일치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개신교 신학이 존중된 성격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간의 일치와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그리고 각 개신교 종파들을 단결시키고자 하였다. 세르베투스가 사형을 선고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삼위일체의 부정 때문이었는데, 위에서 언급 되었듯이 삼위일체의 부정은 신성모독으로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이 신성로마제국법(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었으며, 여전히 유럽 전역의 사법 제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칼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그 시대의 문화와 정서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가 교회에 미친 훌륭한 영향이 그의 단점을 뛰어 넘는다고 생각한다.

칼뱅에 대한 평가 - 인성에 대한 평가

1509년 프랑스 북부에서 장 코뱅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한 칼뱅은 당시 프랑스 내 가톨릭 세력의 박해를 피해 인접한 제네바로 이주한 인물이다. 제네바 주민들은 칼뱅에 대해 제네바에 위선적인 도덕성을 부여한 따분한 방랑자쯤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헤럴드 트리뷴은 보도에서 칼뱅은 제네바 학교 교육과정에서 검소하나 도덕을 강제하기 위해 신체적 억압을 동원한 강압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고 전한바 있다.

교리에 대한 평가

칼뱅은 장로교의 뿌리다. 그는 목사·교사·장로·집사로 구성된 교회직제의 기초를 세웠다. 칼뱅은 하나님이 구원과 멸망을 이미 예정해 놓았다. 그걸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은 단지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는 예정설을 주창했다. 그의 예정설을 놓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격한 논쟁이 일었다. 제네바 소재 종교개혁박물관의 이사벨 그래슬레 소장은 칼뱅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신화와 폭군사이에서 아직도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역사적 진실은 이들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한바 있다. [출처]ko.wikipedia.org/wiki/_칼뱅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친필 사인


‘성경의 무게’ 판화, 그 어떠한 것도 성경보다 의미 있고 무거운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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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이곳에 초판이 전시되어 있다. 


많은 학자들은 기독교강요를 칼뱅의 조직신학이라고도 하고 성경교리서라고도 한다. 물론 이런 평가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칼뱅이 이 책을 쓰게 된 궁극적인 목적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이 책은 당시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박해 받는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필자는 기독교강요 초판을 집필한 바젤과 증보판을 집필한 스트라스부르를 답사하면서 이를 확인했다. 이는 초판 서문과 그의 시편 주석서 서문에서 발견한 내용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칼뱅은 그의 시편 주석서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내가 바젤에 숨어있는 동안 프랑스에서는 수많은 성도들이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이 화형의 소식이 외국에도 알려지자 당국은 무고히 피를 흘린 순교자들을 이단으로 선동하며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 것으로 중상과 비난을 하고 있는데 만약 내가 모든 능력을 다해 그들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나의 침묵은 비겁한 것이고 배반자란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나로 하여금 ‘기독교강요’를 집필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칼뱅은 이 책을 당시 기독교 박해의 장본인인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하면서 학정(虐政)을 멈출 것을 강력히 촉구했던 것이다. 기독교강요가 완성된 지 24년 후인 1560년부터 칼뱅의 개혁신앙을 따르는 프로테스탄트들을 ‘위그노(Huguenots)’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과 후에 위그노만큼 혹독한 박해 속에서 순교한 신앙공동체는 유럽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칼뱅은 조국에서 박해 받는 신앙 동지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자주 위로의 글을 보냈다. 가령 어떤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절대로 폭력은 삼가라는 권면 등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칼뱅은 고난 받는 성도의 신앙 수호를 위해 그리스도 변호론이자 개혁주의 영성의 교범으로 기독교강요를 쓴 것이다. 이 책은 유럽 전체를 놀라게 했으며 무엇보다 로마 가톨릭을 충격에 빠뜨렸다. 로마 가톨릭 당국은 기독교강요를 이단의 ‘꾸란’이자 ‘탈무드’라고 규정하고 출판된 책을 수거해 불태우기에 급급했다. 반면 복음주의자들은 사도시대 이후에 가장 성경적인 교리서가 나왔다고 극찬했으며 마르틴 부처는 “주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가장 풍성하게 축복하시기 위해 칼뱅을 거룩한 도구로 택하신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기독교강요는 기독교 불후의 명저일 뿐만 아니라 탁월한 문장으로 세계문학의 고전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칼뱅은 말라리아의 일종인 사일열(四日熱)에 걸려 몸을 가누기 어려운 상태에서도 붓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불러 가시기 전에 개정 작업을 마쳐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그는 총 6장의 작은 소책자였던 초판을 계속 보완했고, 1559년 총 80장의 방대한 최종판을 완성하기까지 무려 23년간 혼신을 다했다. 19세기 교회사가이자 선구적 에큐메니컬 운동가였던 필립 샤프는 기독교강요에 대해 “이 책은 복음주의 신앙을 변증하고 있으며 당시 박해받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변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영감을 받아 쓴 책”이라고 평가했다. 성경이 사제들의 전유물로 취급됐던 오랜 영적 암흑기를 거부하고 만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열려진 그 감격의 새 시대를 상상해 보면 칼뱅이 기독교강요를 쓰게 된 위의 동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글·-서대천 목사(홀리씨즈교회)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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