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 동상
얀 후스(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는 체코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존 위클리프의 예정구원설을 기반으로 성서를 그리스도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할 것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을 보였으며, 교황 등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교회로부터 파문당했으며,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의 처형 뒤 후스의 신학사상과 뜻을 이어받은 강력한 개신교 공동체인 보헤미안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후대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동상을 세웠으나 화형 당할 때 그의 얼굴이 그려진 모든 그림들이 다 태워졌기에 동상의 얼굴은 상상의 얼굴이라고 한다.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순교 500주년 기념해인 1915년 구 시가지 광장에 청동으로 세웠는데 앞에 보이는 글은 "서로 사랑하라, 모두에게 진리를 베풀라!" 는 글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얀 후스 박준서 <연세대 교수> (출처: http://bibletour.tistory.com/749 [BibleTour]
1520년 루터가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의 위협에 직면해 있을 때 루터를 지지하던 독일 사람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꼭 100 년전 보헤미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불행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교회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얀 후스가 화형(火刑)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얀 후스(Jan Hus)는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보헤미아 지역 출신이었다(1993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분리됐다). 보헤미아는 우리에게 조금 생소하게 들리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교향곡 ‘신세계’를 작곡한 안톤 드보르자크도 보헤미아 출신이다. 후스는 1372년께 보헤미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그 지역의 최고 명문 프라하 대학에서 수학했다. 이 대학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황제가 세운 대학이었고 따라서 ‘카를 대학’ 이라고도 불린다. 당시 프라하 대학은 유럽 굴지의 대학이었고 프라하를 중부 유럽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다.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얀 후스는 그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고 약관 29세에 철학부의 학장이 되었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후스는 그만큼 인정 받았던 출중한 학자였다. 그가 37세가 되었을 때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학자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후스 생애의 큰 전환점은 그가 존 위클리프의 글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성을 떨치던 교수였던 위클리프는 당시 중세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점,고쳐야 할 점을 지적하는 많은 글들을 썼다. 그는 종교개혁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위클리프의 글을 읽고 후스는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글들을 체코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후스는 당시 중세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의 모습과는 큰 거리가 있다는 위클리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후스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진리의 추구’였다. 그는 이렇게 역설했다. “크리스천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에 귀를 기울여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고,죽음을 두려워말고,진리를 사수하라.” 그에게 진리의 근원과 진리의 표준은 성경 말씀이었다. 그는 당시 교회의 도덕적 해이를 책망했고 교황이 갖고 있던 교황권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명설교가였다. 보헤미아 지역에서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로마교황청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고 그의 입을 막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1414년 가톨릭교회의 종교회의가 독일 남단에 위치한 콘스탄츠에서 개최되었다. 후스는 이 종교회의에 참석,자기의 입장을 알리고 교회개혁을 설득하기로 마음 먹었다. 독일 황제로부터 신변 안전을 보장받은 그는 콘스탄츠를 향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콘스탄츠에 도착한 후스는 즉시 체포돼 투옥되고 말았다. 그는 당대 명문대학 총장이었고 최고 지성인이요 유럽의 유명인사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 볼 때 그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자’였고 ‘이단자’에게는 관용이 허락되지 않았다. 후스는 투옥된 상태에서 그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고 강요 당했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츠 종교회의가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지적해주지 않는 한 생각을 바꿀 수 없다고 맞섰다. 독일 황제가 중재에 나섰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결국 1415년 7월 당시 로마교회는 후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화형에 처하고 말았다. 그가 화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이 보헤미아 지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의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프라하 대학은 총장의 죽음을 ‘순교자’의 죽음으로 선포했고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오늘날도 후스는 체코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역사적 인물이며 “주님의 진리가 승리하리라!”고 하는 그의 삶의 모토는 현재 체코 공화국의 모토로 채택되었다. 후스는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가였다. 그런데 후스의 최후에 관해서 한 가지 흥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화형대에서 뜨거운 불길이 후스의 몸을 삼키려 할 때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이제 ‘거위’와 같이 불에 타 죽지만 앞으로 ‘백조’와 같은 인물이 내 뒤를 이으리라.” 마르틴 루터가 역사의 무대에 출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100년전 후스가 말했던 ‘백조’가 드디어 나타났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루터를 ‘백조’로 표현했다. 그러나 ‘백조’를 바라보는 당시 독일 사람들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했다. 후스가 당했던 운명을 루터가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얀 후스 동상
베들레헴교회(Betlemska Kaple) - 후스 설교교회 (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kdwns2_&logNo=220862748253)
1391년에서 1394년까지 진보적인 설교자인 얀 밀리츠 크로메리체의 추종자들이 공회당을 개축하여 지은 예배당이다. 이곳은 주로 설교장으로 쓰였는데, 1402년에서 1413년 사이에 얀 후스가 이 교회당에서 설교하여 많은 추종자를 끌어모았다. 영국인 종교 개혁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은 후스는 교회의 부패한 관행을 비난하여 성서만이 교리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산전투(Battle of the White Mountain)로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불법으로 규정된 후 이 건물은 예수교파로 넘어갔다. 예수교파는 이를 여섯개의 본당 회중석을 갖춘 건물로 완전 개축했다. 1786년에는 건물이 거의 철거되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후에야 옛 그림에 따라 재건축 사업이 시도되었다. 매년 7월 5일 후스가 화형에 처해지기 전날에는 그를 추모하는 기념행사가 열린다. 보헤미안(체코) 지역의 기존 캐톨릭교회 의 화려한 양식에서 탈피한 검소한 양식으로 이루어진 교회로서의 개혁의지를 갖고 있는 교회, 교회안에 우물이 있는데 우물은 지역 사회에 대한 배려로서의 교회의 개혁의미를 담고 있다.
베들레헴교회(Betlemska Kaple) - 후스 설교교회 (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kdwns2_&logNo=220862748253)
베들레헴교회(Betlemska Kaple) - 후스 설교교회 (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kdwns2_&logNo=220862748253)
베들레헴교회(Betlemska Kaple) - 후스 설교교회 (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kdwns2_&logNo=220862748253)
내부 (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kdwns2_&logNo=220862748253)
내부 (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kdwns2_&logNo=220862748253)
얀 후스가 설교했던 설교단
얀 후스가 화형당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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