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보름스 종교개혁자 공원에 있는 존 위클리프 동상 (왼쪽 성경을 펼친 사람)
독일 보름스 종교개혁자 공원에 있는 존 위클리프 동상
종교재판
존 위클리프 (John Wyciliff 1324 - 1384) (출처-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7a0892b)
영국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360년 메일리얼 칼리지 교양학부 학생감이 되 뒤 학장에 임명되었으나 1361년 사임하고 필링엄 주교대리가 되었다. 1374년 에드워드 3세로부터 루터워스의 주임사제로 임명받았고, 이 무렵부터 신학자로서 정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374년 교황이 납세 문제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를 불러들였을 때 위클리프도 사절단으로 따라갔다. 그 후 교구장이 되어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교황의 권력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공격을 가하였다. 후에 종교 개혁 운동의 여러 원리는 모두 그의 교설 가운데서 싹텄다고 여겨지기도 하며 위클리프의 교설은 롤라드 즉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각지에 퍼졌다. 민중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마침내 1382년에 완성하였다. 위클리프의 가장 큰 업적은 라틴어로 쓰여져 있던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당시에는 성경 번역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소수의 가톨릭 사제들만의 전유물 이었다. 위클리프가 내건 유명한 구호 가운데 하나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사람들이 성경에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확인해 준다. 순교자 윌리암 틴데일에게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화체설을 반대하고(transubstantiation), 수도원제도를 비판하고 교황의 권위를 반대하였다. 얀 후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382년 5월에 열린 교회회의에서 위클리프의 많은 저서가 정죄 받았고, 그의 모든 글들은 금서로 공포되었다. 1384년 12월 중풍이 악화되어 죽었다.' 그가 죽은후 31년이 지난 1415년, 독일의 보덴호수 에서 개최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그는 이단으로 판결하고 그의 저작을 불태우고 그의 무덤을 파헤칠 것을 결정한다. 그의 죄는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위클리프가 죽은지 44년이 지난 1428년 그에 대한 형을 집행하도록 명령했다. 마르티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된 교황이었다. 새로운 교황의 명에 따라 부관참시와 함께 그의 뼈를 태운 후 남은 재를 에이번(Avon) 강의 지류인 스위프트(Swift) 강에 쏟아부었다
교회에 대한 비판
위클리프는 루터워스로 돌아와 연구를 위해 은둔한 채 교회의 신조와 의식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로마 가톨릭교, 실재론). 그가 신학적으로 과감하게 교회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보이는' 교회(그당시 조직되고 제도화된 교회)보다는 선택받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교회(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를 믿을 수 있게 해준 강력한 예정설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주로 비판한 대상은 화체설(성찬식에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이었다(화체설). 보편개념들이 실재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실재론자였던 그는 만일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없어진다면 존재도 없어진다는 이유에서 화체설을 비판했다. 그런 다음 더욱 노골적으로 화체설이 우상숭배이며 비성서적이라고 단죄했다. 그는 화체설을 '빵은 축성을 받은 다음에도 그대로 빵이다'라는 잔류교리로 대체하고, 물체의 형태를 지니지 않는 실재임재의 이론을 덧붙이려고 시도했다.
교회법에 대해서도 비판
교황·추기경·성직자들에 대해서는 보수가 높은 세속 직업이라고 혹평했고, 수사들과 탁발수사들에 대해서도 14세기 종교논쟁에서 사용된 것보다 훨씬 더 신랄한 용어로 비판했다. 위클리프는 이런 일을 하기에 적절한 사람이었다. 꼼꼼하고 정력적인 정신에다 성격이 급했으며, 독설을 쏟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반대자들의 견해에 대해 유례 없는 혹평을 가했으며, 때로는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위클리프가 고결한 인물이었다는 데에 동의한다. 때로 교만하고 실수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성실했다는 인상을 준다. 자기가 바라던 성직을 받지 못해서 실망하기도 했겠지만, 그가 교회를 비판한 것은 단순히 감정상의 분노만 가지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도덕적인 진지함과 개혁을 바라는 진정한 마음이 있었다. 그당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조직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교회 조직이 잘못되어 있었고, 이를 비판하는 데 독설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진정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순진한 인물이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앞뒤를 재지 않고 성찬식에 대한 자기 견해를 글로 발표했으며, 계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옥스퍼드의 몇몇 친구들을 지지하지 않고 유약자 존을 지지했다
성서번역
1380년 8월부터 1381년 여름까지 위클리프는 퀸스 칼리지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성서번역 계획과 성서의 진리를 민중에게 전할 청빈설교자회 설립계획을 세우기에 바빴다(위클리프 성서, 성서 번역). 그러나 그의 정신은 중세 지식체계인 스콜라주의에 너무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후자의 계획을 직접 세울 수 없었다. 그의 지시로 2종류의 번역성서가 나왔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관용어들을 많이 썼다. 그는 왜 성서번역에 그렇게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을까? 교회의 손상된 권위를 대치하고, 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알게 하려면 영어 성서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가장 타당한 설명일 것이다. 영역 성서는 설교의 효력에 대한 신념과 어우러져 마침내 롤라드파를 형성시켰다. 위클리프가 롤라드파의 형성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롤라드파가 논란이 많은 위클리프의 견해를 선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위클리프가 마지막으로 루터워스에 돌아간 1381년에는 노동 계층의 불만이 농민반란으로 터져나왔다. 위클리프의 사회 사상은 지식인들에게만 알려졌기 때문에 이 반란에 중대한 원인이 되지 않았지만, 그가 이 반란에 공감을 표시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노동의 대가를 현재보다 더 많이 받아야 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애정을 갖고 있었다. 이 반란 과정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인 서드베리의 시몬이 살해당했고, 열정적인 인물인 윌리엄 코트니(1347~96)가 그를 계승하여 위클리프를 공격했다. 1382년 5월 런던 블랙프라이어스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위클리프의 많은 저서가 정죄받았고, 옥스퍼드에서는 그의 추종자들이 이에 굴복했다. 그뒤 그의 모든 글들이 금서로 공포되었다. 그해에 위클리프는 루터워스에서 최초의 중풍으로 쓰러졌으며, 계속해서 많은 글을 쓰다가 마침내 1384년 12월 중풍이 악화되어 죽었다
세계 성경번역 선교회
세계 성경번역 선교회, 또는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s)는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에 본부를 둔 개신교 계통 비영리기구 및 선교단체이다. 주요 목표는 성경을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으로서 개신교의 영향이 약한 국가의 언어/민족의 언어에 치중하고 있다. 이 선교회의 이름은 중세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14세기 존 위클리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42년 윌리암 카메론 타운센드에 의해 시작된 선교회는 현재 50개국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국가지부 단체인 성경번역 선교회(Global Bible Translators, GBT)가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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