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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와 죤스 남부순행 선교여행기(1889년 8월)

성지순례/한국 성지(개신교)

by baesungsoo 2022. 8. 2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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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죤스 남부순행 선교여행기(정리:노종해)

(출처-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010)

 

존스의 남부 순행 여행기(1889년)

(출처-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010)

존스 선교사(George Heber Jones, 조원시趙元時, 1867.8~1919.5)는, 만 20세 때인 1888년 5월 17일 한국에 도착해 배재학당에서 수학을 가르치며 아펜젤러 선교사를 도왔다. 1890년 9월 제물포에 혼자 입국한 미 북감리교회 파송 마가렛 벵겔 선교사(Margaret Bengel), 둘은 1892년 제물포 주재 선교사로 함께 파송되어 사역하였다. 이들은 1893년 5월 결혼했고, 벵겔 선교사 역시 1897년 인천 영화여학교를 설립한 후 근대 여성교육에 힘썼다. 존스가 1891년에 쓴 저널을 노블 선교사가 1928년 코리아 미션 필드 11월호에 발췌해, 죤스의 “1889년 한국 남부 순행 여행기”(A Journey Through Southern Korea in 1889”, By George Heber Jones)로 소개했다. 이 여행기를 보면, 강원감영이 소재한 원주(原州)에 도착한 날짜는 1889년 8월 19일 월요일 오후였다. 1889년 당시 만 21세였던 청년 존스 선교사는, 조선 후기 통리기무아문에서 외국인에게 발급하던 여행허가증인 ‘호조’(護照) 발급 받아, 1889년 8월 서울→양평→지평→원주→충주→문경→상주→안동→대구→청도→부산까지 이어지는 감리교 선교사의 첫 번째 남부순행을 아펜젤러와 함께하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 133년 전 서울에서 출발한 존스의 남부 순행 여행기는 날짜별로 기술 되었다.. 

 

1889년 8월 16일 존스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함께 남부순행을 떠났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친필로 기록한 순행기 표지(좌)와 8월 19일 강원도 원주로 출발했다는 기록(우).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정보자료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5467#share

 

1888년 5월 17일 한국에 첫발을 디딘 존스 선교사가 이틀 후인 19일 미 북감리교회 선교본부 총무 리드 목사(Dr. Reid)에게 보낸 편지.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정보자료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5467#share

 

존스 선교사가 1891년에 쓴 저널을 노블 선교사가 1928년 코리아 미션 필드 11월호에 발췌해 소개한 글 A Journey Through Southern Korea in 1889.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정보자료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5467#share

 

존스 선교사는 1893년 제물포에서 한국 최초 신학교육인 신학반을 개설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존스 선교사(가운데)와 신학생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5467#share

 

존스 선교사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5467#share

 

죤스의 “아펜젤러와 죤스 선교사의 남부 순행선교 여행기,1889년“
“A Journey Through Southern Korea in 1889”, By George Heber Jones

1889년 8월 14일, 약품이 필요할 것 같아 스크랜턴 의사에게 요청했고, 그는 다음 약품들을 상세한 용법과 함께 보내줬다. 성경과 필기도구, 그리고 찬송가 이외에는 칵커의 ‘그리스도론(Cocker’s Christianity)과 그리스 철학’, 프리센(De Pressene’s)의 ‘초기 기독교 시대의 순교자와 옹호자’뿐이었다. 그 책들을 읽는 것은 정말 재미있었다.

“드디어 1889년 8월 16일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나는 새벽 4시에 깨어나 출발준비를 했다. 그러나 마지막 짐을 꾸리고 여행 인사를 하느라 7시가 되어야 출발했고 우리가 동대문을 지날 때 시각은 정각 오전 8시였다. 아펜젤러 형제는 아주 힘 좋은 졸린 듯한 흰색 몽골말에 나는 조선 사람들이 말하는 회색 야생마에 올랐다. 산뜻한 아침 공기는 나에게는 모든 것이 장밋빛 이었고, 무한한 자유로움에 충만했으며, 내가 인식한 것은 나의 일상의 경험이었고, 내가 나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이 나라가 나에게 맡겨진 것처럼 느꼈다.” “가끔 우리가 말 위에 오래 앉아 피로할 때는 말에서 내려 묘한 매력이 있는 길에서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그러한 여행은 두 영혼을 아주 가깝게 해주었으며, 어떤 힘에 의해 동일한 나라로 묶어주는 어떠한 힘을 느꼈으며 그 목표를 가졌다. 오후 6시 30분에 강을 건너 기다란 섬을 지나 나뉘는 부근에서 우리는 마을을 만나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관대한 마을의 대표자들이 우리가 먹는 모습을 보고, 또 우리가 자는 모습까지 보려고 남았다. 너무나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집에 가서 주무시고 다음 날 우리가 먹는 모습을 보라고 했더니 다 돌아가 조용해졌다.

문을 닫고 한국 집 방 안에서 잠을 자기는 너무나 더워서 우리는 현관 앞마당에 간이침대를 펴놓고 바깥 공기를 맡으며 잠을 잤다. 믿을만한 시골 사람들의 심성 때문에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마당에서 잠을 잤다. 20년 전 이 땅은 수많은 기독교인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으며 외국 사람들은 잡히는 족족 무참히 참수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는 한 가지 문제점은 우리가 전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 버려진 그들의 영혼에 다가가 구원의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우리는 이 나라의 향후 정책을 고려해야 한다.


존스의 남부 선교여행기-원주, 충주 부분!

(출처-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010)

우리는 75리(25마일)를 이동했는데 점심을 먹기 위해 양근군(楊根郡)을 지나며 쉬었고 저녁에 지평현(砥平縣)에 도달했다..., 지평현에 주재하고 있는 젊은 관리로부터 지휘를 받고 있고 이 현에 적은 수입을 가져다준다. 현감의 숙소는 황폐해 비어 있었고, 주일 아침 나는 우리의 말들이 그곳으로 가는 커다란 문에 매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주일은 참 평화로웠다. 몇몇 촌로들이 우리를 방문해 그들과 잠시 환담을 했다. 마을로 잠시 걸어가 보니 우리는 이 마을의 범위와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 자유롭게 되기 위해 주님께서 그날을 재촉하시기를 기도한다...

 

1889년 8월 19일 월요일, 오전 5시 15분이고 이제 원주까지는 90리를 더 가야 한다. 중간 쉼터까지는 60리를 가서 도착했는데 말이나 사람 모두에게 길고 힘든 길이었다. 무더위? 왜 태양은 계속해 끓는지, 나의 팔과 목은 물집이 생겨 허물이 벗겨졌다. 정오에는 길가에 있는 개울에서 미역을 감으며 휴식을 취했다. 이 지역에서는 오후 3시에 출발했는데 내가 세어보니 이 마을 사람 75명 중 63명이 개울가로 나와 우리의 출발을 보러 나왔다... 오후 5시 30분경 우리는 언덕 위 표지판을 보며 원주 땅에 들어선 것을 알았다..., 원주는 성곽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담장조차도 없었다. 그 뒤로는 마치 말편자 모양의 산이 둘러서 있었고 보라색 석양이 원주 상공 1,600피트 위로 들어 올려져 있었다. 그러나 원주 도읍의 모습은 초라하게 보였으며 살아가기에 팍팍하게 보였다. 그곳에 서 있는 구조물이라고는 아무런 쓸모없는 단지 인간을 위해 쫓겨난 적이 있는 불쌍한 개구리와 말라리아가 자랄 수 있는 그런 것 정도였다.

 

우리는 영광스럽게도 목사관아 객사를 배정받았고 우리를 신기하게 생각하며 따라온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 못했다. 관중들은 객사 문을 닫을 때까지 우리의 숙소 안까지 밀치고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가 있는 곳까지 들어와 우리와 얘기를 나눴다. 비록 우리는 지치고 배가 고팠지만 이러한 관중들 앞에서 식사를 한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고 우리는 이들의 환영(?)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고 관중은 더 늘어났다. 원주의 순검들이 질서를 잡으려 했지만,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견딜 수 있는 데까지 서서 있었고, 그리고 뭔가 조치하지 않으면 그날 저녁 식사도 휴식도 취할 수 없음을 알았다. 첫 번째로 우리는 순검들에게 객사를 정리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들은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드디어 기수가 우리를 구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령~ 사령~(使令) 어디들 있느냐?” 하고 부르니 순검들이 “예이,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순간 기수는 순검의 상투를 잡아 관중 속으로 끌고 가서는 2분여 동안 순검의 할 일을 지시했다. 기어이 관중들을 다 내보냈다. 그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호위병이 그들의 위험을 잘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가 일어났음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거기에서 설교를 할 수 있었다면 더 영광스러운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공사관이나 우상숭배가 우리의 선교를 막고 있다.

 

존스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순행했던 당시 원주목 지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5745##share

 

1910년대 강원감영 객사(영빈관)가 있던 마을 모습. 현재는 흔적이 없다. ©원주역사박물관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5745##share

 

강원감영의 대문으로 포정루라고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일본 헌병들이 부대를 진주시키고 대문 현판도 일본식으로 바꿔 단 모습(왼쪽 사진)과 현재 모습(오른쪽 사진). ©원주역사박물관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5745#share

다음날, 1889년 8월 20일 화요일 우리는 원주를 떠나기 전 원주 목사와 강원관찰사를 예방했다. 우리는 목사의 손님이기 때문에 먼저 그를 예방했다. 우리는 그가 한옥의 조그마한 사무실 영접실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나이가 좀 드신 양반으로 그는 매력적이고 쾌활한 얼굴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리고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는 전염성 있는 웃음을 선사했다. 그는 적색과 노랑 실크로 된 관복을 입고 있었고, 허리띠에는 충성스러운 은총을 상징하는 관대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그는 목사의 의자 쪽으로 가더니 그냥 매트 위에 앉아서는 그의 오른쪽에 있는 광채가 나는 적색 말가죽 방석 위에 우리를 앉으라고 권했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 민주적으로 우리 주위에 서서는 우리의 그렇게 고상하지도, 또 교화적이지도 않은 대화를 경청했다. 갑자기 우리는 그가 대접(환영)! 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그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한국 사람들은 음식을 대접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을 보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잘 해냈다. ‘환영주’는 두 개의 대접에 뭔지 모르는 액체에 위에는 푸른 발효된 층을 얹은 것이었다. 그것은 꿀처럼 달콤했으며 밤을 갈아 넣은 물이 있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나의 대접을 가져와 마실 엄두를 내지 못해 쭈삣쭈삣하고 있으니, 목사 나리는 나에게 그것은 해가 되는 것이 아니니 마시라고 계속 권했다. 이러한 강권에 밀려 사양할 수 없어 마셔보니 그 음료는 정말 맛이 있었다. 다 마시지 못한 것은 밖에 있는 순검들에게 내주었다. 대접은 다 비워져서 돌아왔다.

다음으로 예방할 곳은 관찰사가 업무를 보는 감영이었다. 우리는 말머리 고삐를 잡고 감영을 향해 갔고 군중들은 말 뒤꿈치를 따라왔다. 군중들은 감영정문 앞까지 우리를 둘러싸고 왔지만 관찰사 내부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몇 개의 문과 몇 개의 안뜰을 지나 우리는 드디어 많은 순검들이 지키고 있는 커다란 대접견실에 관찰사와 관리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감영접견실은 매우 넓고 높은 건물이었고, 3개의 벽체가 있고 한 면은 커다란 석조 법정을 향해 열려있었다.

이 접견실에서 관찰사는 앉아있었고 그의 참모들은 관찰사를 중심으로 V자 모양으로 서 있었다. 서 있던 관리들 중 몇몇 관리들은 어젯밤 우리를 방문해 구면인 것을 알았다.

관찰사는 우리의 인사에 고개를 약간 끄덕여 답하며 관찰사의 옆에 있는 방석에 앉으라고 했다. 내가 관찰사를 살펴보고 또 그의 법정에 눈을 돌리는 동안 아펜젤러 형제는 관찰사와 대화를 나눴다. 재판정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고 관찰사 역시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관찰사는 아펜젤러와 나에게 그렇게 호감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키도 작았고, 목소리도 작았으며, 얼룩진 얼굴과 침침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반적인 한국 양반들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모자에 있는 작은 금속 수탉이 그의 관직을 나타냈다. 그는 우리에게 국적과 나이, 그리고 첫 번째 대통령에 대해 물었다.

나와 나눈 관찰사의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이름이 무엇인가?”
“조원시라고 합니다.”

-“직업은 무엇인가?”
“선생입니다”

-“나이는 어떻게 되는가?”
“22세입니다”

-“뭐라? 선생을 하려고 일만 마일을 건너왔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제 22살이란 말이지? 결혼은 했는가?”
“아직 미혼입니다.”

관찰사의 눈은 놀라움에 커졌고, 그리고 다음 대답을 할 때까지 잠시 멈췄다.

그것참 이상한 일이군… 이 젊은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22살이라 했고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단 말이야….

관찰사의 솔직한 대답이 나에게 웃음을 머금게 했고 나는 대화 주제를 놓쳤다. 진실을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우리가 늦게 결혼하는 풍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인들에게는 결혼은 진정 남자가 되는 길이고 보통 15세에서 18세에 혼인한다. 그러니까 관찰사의 눈으로 봐서 나는 선생인 척하는 아이일 뿐이었다. 점점 더 구체적으로 관찰사는 다시 질문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신발을 벗어 관찰사에게 보여줌으로써 그의 감탄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접견실에서 또 다른 과일과 견과 대접, 그리고 인삼차를 우리 앞에 두고 반 시간 동안이나 보냈다. 드디어 예방은 끝이 났고 우리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관찰사는 이번에는 우리를 향해 다시 머리를 갸우뚱하니 그의 모자에 붙어있던 금속 수탉이 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낡았고 풍파를 헤쳐나가는 새 같았고, 나에게는 25년간의 참패를 잊고 클리블랜드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급히 떠나는 민주당의 모습을 다시 생각나게 하였다.

예방의식은 끝이 났다. 우리는 조선에서 가장 적고 가장 가난한 도에서 가장 높은 관리를 만난 후 우리의 결론은 관찰사는 그의 지방(강원도)과 불협화음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목사 아전의 객사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객사를 출발해 금일 70리를 나아갔다.

이것이 원주를 방문한 감리교도들의 첫 번째 경험 이야기다. 우리가 방문하는 단계에서 믿음은 어떤 도움이 되는 단계를 주는 단 하나이다. 그것을 통해 그로부터 우리는 10년이 걸렸고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성도들을 우러러보아라!

우리는 원주에서 8월 20일 화요일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이상 참조:이진만 역-기독일보 선교신문/2020-10-13일자)

 

 

존스의 여행기 사진들

(출처-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010)

 

아펜젤러와 죤슨 선교사의 남부순행기(충청도 편)

우리는 1889년 8월 20일, 화요일에 원주를 출발했고,.., 길은 돌이 많고 불편한 오솔길 정도였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국에서의 여행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바로 횃불을 사용한 것이다. 당시에는 작은 마을들이 마을 어르신의 주도하에 있었기 때문에, 어둠이 완전히 깔렸을 때 우리를 안내하는 기수(旗手)는 그 마을 원로를 찾아가 부탁을 드렸다. 여행자들이 어두움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은 여행자들을 다른 마을까지 안내해 주게 되어있었다. 그들은 계곡을 밝혀주는 거대한 횃불로 길을 밝히며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인접한 마을에 도착해 새로운 사람들이 이 역할을 대신 교대할 때까지 이 일은 계속 중계되었다. 이렇게 밤중의 여행자들을 도와야 하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를 비용을 받지 않고 해주었다. 낮 동안 우리는 강원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가르는 산을 넘었고 충청도의 동북쪽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역주: 여기서 말하는 강원도와 충청도를 가르는 고개는 소태재(273m)인데 선교사 일행은 원주 매지리에서 양안치재(380m)와 백운령을 넘어 귀래에 도착했고, 현재 원주시 귀래면과 충주시 소태면을 가르는 소태(蘇台)재를 말한다. 이들은 다음날 충주를 지나기 전 원주에서 70리 거리인 목계나루터가 있던 곳에서 숙박을 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21일, 수요일에 우리는 80리를 나아갔고 오후에 성곽 도시 충주를 지나게 되었다. 충주는 충청도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하나의 도시이다. 각각의 행정구역 '도(道)'는 그 도 안에 소재한 2개의 주요 도시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충청도(忠淸道)는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글자를 따서,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에서,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고 전국 8개의 도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충주는 부유한 나라의 중심에 있는 조용한 지방처럼 보였다. 그곳은 300년 전에 일본에 의해 침략당해 큰 고통을 받았었다, (역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朝鮮)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노하여 선조(宣祖) 25년(1592) 임진(任辰)년에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등에게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다. 여기서 '큰 고통'은 탄금대전투(彈琴臺戰鬪)를 말하는데, 이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을 주장으로 한 조선군과 왜군이 충주에서 벌인 전투에서 패해 충주 주민들이 당한 고초를 말한다). 목요일(22일)에도 우리는 여전히 충청도에 있었고 형편없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나아갔다. 아펜젤러 형제는 대체적으로 북쪽의 길이 훨씬 더 나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진취력이나 지능으로 다른 사람에게 인상을 주진 않았다. 정말로 그들에 대해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그들이 악의 없어 보인다는 정도이다. 여자들의 의복은 우리의 단정함의 기준과는 거리가 멀었고, 모든 남자들은 게으르고 무기력해 보였다. 우리는 그 남자들이 무엇으로 먹고사는지를 여러 번 물었지만 변함없는 대답은 빈둥거림을 의미하는 '놀기'(Nolgi)였다.

 

여자들이 모든 일을 했다. 우리는 여성들이 무릎까지 빠지는 물 댄 논에서 일하거나 콩 종류나 채소 등을 재배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여성의 영역뿐만 아니라 남성의 영역까지 담당하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길을 가거나 식사와 잠을 위해 휴식을 취할 때 본 피상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이 충청도와 강원도의 산골에서 어떠한 절약의 모습을 봤더라면 나는 한국인들을 인정하지 않은 것에 너무 편협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기쁘게 할 그런 발견은 없었다. 여성들은 마치 노예처럼 일했고 아마 실제로 노예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남자들은 비록 전해오는 크로이소스(Croesuses) 왕처럼 부자들은 아니었지만 마냥 빈둥거리고 있었다(역주: 크로이소스 왕은 리디아 최후의 왕(재위 BC 560?∼BC 546), 특히 부호로 알려져 있으며, 부(富)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1권에 기록되어 있다).

내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지저분한 남녀들이었지만,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정말로 그런 것들은 불신앙이 사멸시킴으로부터 오는 남성들의 냉담한 감수성이다. 여인들의 고단함과 비하의 환경이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인생이다. 나는 그들이 깨닫고 있는지, 혹은 더 높은 존재로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은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들의 지저분함이 그들이 아는 유일한 청결함이고, 죽음과 산신령만이 그들의 유일한 종교였다.

목요일에 우리는 경상도에 들어가는 관문인 조령(鳥嶺)을 넘고 있었다.(이상 참조: “죤스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남부순행기(충청도 편)”. 기독일보/2020.)

 

 

“아펜젤러와 존스 선교사 원주에 가다“  전시회 (2022년 8월 18일, 원주감영 선화당)

(출처-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010)

 

 (출처-https://blog.naver.com/press2026/222849961554)

 

강원감영 선화당

(출처-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image&sm=tab_niv&query=%EC%9B%90%EC%A3%BC%EA%B0%90%EC%98%81%20%EC%84%A0%ED%99%94%EB%8B%B9&nso=so%3Ar%2Ca%3Aall%2Cp%3Aall#vType=rollout&imgId=image_sas%3Acafe17490089%7C3%7C2464_232992865)

강원감영 선화당
강원감영 선화당
강원감영 선화당

 

원주, 2022.8.19(금) 오전11시, 아펜젤러와 존스 선교사가 원주 땅을 밟은 133년 전 그 날을 기념해, 그가 강원 관찰사를 만났던 강원감영 선화당에서 '선교화보 사진전'이 개최 되었다. 강원감영 선화당에서 원주시청과 원주시 기독교연합회와의 공동으로 여러 인사들과 목회자들의 참석으로 조촐한 개회식을 펼쳤다. 그때를 아시나요, “아펜젤러와 존스 선교사 원주에 가다“라는 주제 아래 전시회를 개최한 것이다. 감리교회도 못하는 일을 지방자치단체에서 기념행사를 하는 것이다. 정작 전국 감리교회는 알기나 할까? 생각 되어 급히 방문하였고, 알리려고 당당뉴스에 보도 요청할 셈이였다. 그래서 필자는 전날(8.18.목) 원주 강원감영을 이진만 선교사의 안내로 방문하였다. 이진만 선교사는 아펜젤러와 죤스 선교사의 "한국 남부순행 선교여행기"(1889.8.16-8.31.)를 번역하여 기독신문에 발표한 분이시다. 이분의 치밀하고 심도 있는 사료 연구와 현장 탐사로 외곡 된 한국 교회사를 바로잡고 기술하게 되었고, 그의 활동으로 원주시청에서 기념 전시회를 개최게까지 되었다.(2022.8.19. 금. 전시회 개회식) 

 

1889년 8월 19일(월) 아펜젤러와 죤스 선교사는 "원주"를 방문한 첫 외국인이었고, 강원감영에서 관찰사와 면담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호감을 준 분들이었다. 선교사들은 당시 왕실과 외교관에 의해 전도활동을 금한 점을 매우 아쉬워했지만, 몰려 들어 오는 군중들의 구경꾼들에의해 많은 시련을 받았지만 복음 전도의 길을 열어 주길 간절히 기도하며 선교여행을 진행하였다. 감영에서 소개해 주는 객사에서 하루밤 자고, 원주를 떠나기 전 강원감영 원주 목사와 복장을 갖추고 예방하였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원주시청에서는 “아펜젤러와 죤스 선교사 방문을 기념하는 행사”를 기획하고, 박물관에서 기념사진전을 개최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이진만 선교사의 안내로 감염을 방문할 수 있었고, 기념사진전 전날, 최종점검하는 관계자들과 점검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관찰사와 목사가 아펜젤러, 죤스 선교사가 면담한 원주감영의 "선화당(宣化堂)" 대청에서 원주 기독교연합회와 기념식 장소로 모이는 곳을 둘러 보았다. 감영 내를 둘러 아펜젤러와 죤스 선교사의 방문 사진들과 당시 원주 고을의 역사적 사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원주 시청은 우선 맛보기 전시회를 강원감영(2022. 8. 19.-,9. 3.)과 문막교회(2022. 10. 28-11.4._에서 개최하고, 정식으로 본 전시회는 원주역사 박물관 기획 전시실에서 개최(2022. 12. 6-2023. 2. 26.)할 계획이다. 주제는 “아펜젤러와 존스 선교사 원주에 가다”이며, 원주시 역사 박물관 기획 전시 시리즈2로 “그때요 아시나요2”이다. 1889년 8월 20일, 아펜젤러와 죤스 선교사는 원주 고을을 둘러보고, 오후에 원주를 출발하여 충주로 향했다. 백운산 양안치재를 넘어, 귀래를 지나 거칠고 깊은 계곡 골짜기 산길을 따라 횃불을 둘고 걸었고, 어두운 밤에 충주 목계에서 고단한 몸을 쉬었다. 다음날(8.21.) 충청도 방문이 이어졌고 충주 관아 "충청감영"을 방문하였다. 아래는 아펜젤러와 죤스 선교사의 남부순행 선교여행기 중 강원도 원주~충청도 충주 부분을 빌췌하여 게재한다.

 

아펜젤러의 삶 (CBS 동영상) (출처-CBS크리스천노컷뉴스 )

https://youtu.be/yPtvwBC84GQ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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